글 - 칼럼/단상2015. 8. 24. 20:59

 


헤이안 신궁의 웅장한 도리이

 

 


헤이안 신궁의 응천문

 

 


헤이안 신궁의 본전

 

 


헤이안 신궁의 봉물인 각종 술

 

 


헤이안 신궁의 뜰에 세워진 기원 팻말들

 

 


헤이안 신궁의 본전 앞에 세워진 기원 나무들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인들은 귀신들과 함께 산다는 말을 들어 왔고, 일본에 올 때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는 그들의 신을 모신 집(즉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일본 총리 아베의 신사참배가 세계적인 이슈로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한사코 일본 총리가 신사를 참배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참배하려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곳이 바로 우리를 괴롭힌 일본 전범들의 영혼을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책임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일본 정치의 책임자가 오히려 전범들을 참배하다니,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양국에서 하도 성토를 해대니 그도 어쩔 수 없는 듯 가끔 봉납(奉納)’으로 대신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봉납 즉 사찰(寺刹)이나 신사(神社) 등에 금품을 기부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더 지극한 정성의 표시일 수 있다. 큰 신사들의 앞마당엔 술통들을 몇 단으로 쌓아올려 진열하고 특정 주류회사의 봉납물임을 표시해 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술이나 만들어 떼돈을 버는 그런 회사들이 고약하게도 일본에서는 애국의 결사체임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공적(公敵)이 되어 있는 아베도 아마 그런 효과를 노렸으리라. ‘주변의 국가들이 하도 성토해대는 바람에 직접 참배는 못하니, 공물로나마 지극한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여기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자기네 국민을 단합시키겠다는 대외 정치적 노림수가 그 하나요,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재물을 아낌없이 봉납함으로써 자신도 신사의 귀신들에게 보통 국민들 이상의 정성을 표했다는, 대내 정치적 노림수가 다른 하나다. 그러니 그로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논란이 하나도 손해 날 일이 없는 셈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두 나라의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고 보는데, 나만의 느낌일까.

 

일본에 와서 놀라는 일이 있다. 개인들의 집에는 개인의 신사가,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신사가, 국가에는 국가 규모의 신사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결사체가 바로 신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몇 번 되지는 않으나, 일본에 오면 주택가를 돌며 개인 신사들을 구경하거나 마을 단위 혹은 국가 단위의 신사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취미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큰맘 먹고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요시다 신사(吉田神社) 등을 가 보았고, 동네를 걸으며 개인 집의 신사들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심지어 절에도 신사가 있었으니, 키요미즈 데라(淸水寺)에서 확인한 지슈신사(地主神社)가 그런 예였다. 어쩜 교회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다.

 

 


야사카 신사 입구의 도리이

 

 


야사카 신사의 본전

 

 


키요미즈 데라(淸水寺) 안에 세워진 지슈신사

 

 


요시다 신사

 

 


요시다 신사의 본전에서 기원하는 사람들

 

 


요시다 신사에 딸린 산음신사(요리와 음식의 신을 모셨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귀신들을 모시고 사는 것일까. 마을이나 거리를 걷다 보면 작고 큰 도리이(とりい: 鳥居)들이 있고, 그것들을 통과한 안 쪽에 신전이 있었다. ‘鳥居鷄居(にわとりい)’로서 진언종을 설립한 구카이가 신성한 의식공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신도에서 닭을 신의 전령으로 생각하기에 닭이 머무는 자리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썼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다만, 내 보기에 도리이가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로 사용된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의 세계에서 도리이를 통과하면 신의 세계라는 것이다. 개인의 집들에 설치된 개인 신사들에는 도리이를 세울 수 없으니, 어쩌면 그 신사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액()을 막아주는 방책 역할을 해온 듯했다. 집안이 산 사람들의 공간이긴 하나 귀신들과 공존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삿된 기운을 막아 주는 신성한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리이를 통과한, 이른바 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도 속의 세계를 상징하는 돈으로 철저히 계산되고 있었다. 기복(祈福)이나 제액(除厄), 결혼 등 모든 행위에 돈이 따르고, 돈의 액수에 따라 복의 크기가 계량되는 속의 원리가 충실히 재현되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의 자기모순의 이기적인 행태는 속의 원리로 성의 세계를 재단하려는 데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른바 카오스의 재현,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내 관점에서 아직 일본은 본태적 카오스를 벗어나지 못한 공간이었다.

 

사실상 어릴 적부터 신도에 충실한 인간상으로 길러지는 것이 일본인들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큰 신사에서 복전을 내고 줄을 흔들어 방울소리를 내며 복을 기원하는 부모를 보았을 것이고, 성장한 뒤 그들도 그런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그 뿐이랴. 어려서부터 집 앞에 설치한 신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열심히 기원하는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은 일상의 큰 부분으로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장성한 뒤 짝을 만나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이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다만 한사코 전범들을 모아놓은 야스쿠니에서, 그것도 패전일에 참배함으로써 무언가를 노리는, 그 정치적 야욕이 미울 뿐이다. 자신들의 순수한 종교의식을 지키는 일에만 충실하다면야 누가 딴죽을 걸 수 있겠는가. 피해자들의 속마음을 긁어놓으려는 못된 심보가 고약한 것이다.

 

며칠 전 길 가는 도중, 구부정한 할머니를 보았다. 골목 모서리의 빈틈에 세워진 작고 초라한 신사 앞에 꽃바구니를 든 채, 신이 좌정한 곳을 올려다보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말뜻은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구하고 있었다. 굽은 허리와 주름 진 얼굴이 많은 사연을 숨기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기구하는 것은 궂은일의 해결일 수도, ‘좋은 일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경건한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신도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어엿한 종교이든, 개인 차원의 소박한 믿음이든, 순수하기만 하다면야 굳이 탓할 이유가 없다. 그것들이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집단적 야욕 충족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가공할 정도의 부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저 할머니야 야스쿠니에 합사된 전범들의 존재나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인 아베의 욕망을 어찌 알겠는가. 필시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를 신에게 간구한 데 불과했으리라.


 

 


큰 길가 가게집의 신사


 

 


가게집 신사 내부의 모습

 

 

 

 


동네의 신사


 

 


동네집 신사 내부에 모신 신의 모습

 

 

 

 


개인 집 신사

 

 

 


키요미즈 데라 아랫 동네 개인 집의 신사

 

 

 


길가 신사에 꽃을 바치러 와서 기원을 하고 있는 할머니

 

 

 


호텔 옆에 있던 동네의 신사 '주길신사'

 

 

 

 

 

귀신은 일본 도처에 있었다. 야사카 신사에도 본전을 둘러싸고 많은 잡신들이 별도로 모셔져 있었으며, 요시다 신사에도 본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저곳에 작은 신사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 개인들의 신사에는 그들의 조상신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들에게도 조상신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여러 잡신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바로 일본의 신사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신사는 로마의 판테온(Pantheon) 같은 곳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들이 모신 존재들이 악한 신령들이 아닌 이상, 그 신들의 이름으로 악한 짓을 저질러선 안 된다. 온갖 귀신들에 사로잡힌 일본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집과 편견, 이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집과 편견, 이기를 보호해주는 것이 귀신들의 임무가 아니라는 점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어릴 적부터 집 앞의 신사, 동네의 신사, 지방과 국가의 신사를 출입하며 꿈을 키웠을 정치인 아베도 이젠 가슴을 열어야 한다. 나 혼자만 사는 게 세상은 아니라는 점, 일본인들을 귀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이 되도록 하는 게 미래지향적 정치인의 의무라는 점 등을 빨리 깨달아야 미구에 닥칠 또 하나의 비극을 면하게 될 것이다.

 

***

 

이번의 일본 행차에서 나는 신사가 일본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교과서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