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19. 17:13
 

 빽빽이도 늘어섰구나, 무덤들이여!

            -대만 인상기(印象記)·1-


                                                                            조규익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또 ‘군대 안 갔다 온 아무개가 군대 갔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거나 ‘서울 안 갔다 온 아무개가 서울에서 살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는 등의 가시 박힌 농담들도 지금껏 우리 사회에는 통용되고 있다. 어느 모임에 나가 보아도 크게 영양가 없는 말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 그 지식의 근원을 캐 보면 제대로 된 책 대신 인터넷이나 신문 등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즈음. 여행기들이 범람한다. 제대로 발품을 팔아 얻은 글부터 점만 찍고 돌아오는 패키지 여행에서 얻은 인상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짧은 생각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모조리 무익하지만은 않을 터. 그러니 나도 이 자리에서 그런 어리석음이나 한 번 범해 볼까나?


   ***


 지난 연말 3박4일의 일정으로 대만을 다녀왔다. 지척에 두고도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미루어두고 있던 곳이었다. 대만 행에 며칠간의 여유를 활용하기로 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것은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 득실거리는 관광지만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이 여행객의 신세일 터. 어디 한 곳 차분하게 앉아 생각에 잠길 여유가 있으랴. 그저 ‘절에 간 새댁’ 마냥 능란한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 숨차게 돌아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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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박물원

 여기서 둘째 날 들른 지우펀(九份)을 먼저 언급하려는 것은 그만큼 그곳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가파른 고갯마루를 넘어 도달한 곳이었다. ‘九份’이란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가이드가 말끝마다 ‘구인분, 구인분’ 하는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우펀은 금광지대였다. 그 옛날 금광에서 일하던 그 마을의 광부 9명이 매몰되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로부터 9명 광부의 아내들 즉 살아남은 9명의 과부(寡婦)들은 산 넘어 시장에서 늘 ‘9인분’의 식량을 사가지고 고개를 넘어야 했단다. 그래서 이곳이 ‘九份’으로 명명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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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 동네 모습-앞쪽이 산 자들의 집, 뒤쪽이 무덤들이다

 지우펀의 금광박물관을 거쳐 들른 곳이 바로 도교사원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성명궁이었다. 그곳에선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었다. 황금색 바탕에 온갖 화려한 장식들을 붙여 놓은 전각 안에서 관우신을 옹위하고 있는 많은 신들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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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성명궁-관우(관성제)를 모셨음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래킨 건 성명궁이 아니었다. 성명궁을 나서서 둘러본 사방의 산중턱에 이르기까지 아파트처럼 보이는 주택들이 그득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본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모두 유택(幽宅) 즉 무덤들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무덤들은 흡사 시멘트로 잘 지어놓은 양옥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설만한 양지바른 산록. 그들은 그곳에 ‘죽은 자들을 위한 집들’을 그득하게 지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엔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산 자들의 집과 붙어있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동거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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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조부모, 선조들의 유택 아래쪽에 사는 후손들. 참으로 기이한 구도였다. 일찍이 베트남 메콩강 델타 지역 마을에서 뜰 안에 무덤을 만들고 조석으로 향불을 피우는 그들을 본 적도 있었다. 대개 남방 풍속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으나, 대만의 공동묘지는 좀 색다른 점이 있었다.

 딱딱거리는(?) 가이드에게 사정하여 간신히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무덤 탐색을 생략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 두어 시간을 헤매고 다니며 무덤 속의 주인공들과 만난 셈이었다. 무덤들을 대충 둘러보고 났을 때 뱃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구역질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양지 바른 산자락을 점령한 채 늘어서 있는 무덤들. 어느 무덤에나 ‘욕망의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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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형형색색 단장한, 아무도 없는 텅 빈 시멘트 구조물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냉기와 회한이 내 가슴에 사무쳐 왔다. 무덤들의 실체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지우펀의 언덕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더껑이 진 가난과 오욕의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가는 무덤 속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후손들과 함께 하고픈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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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화려한 무덤


묘원(墓苑)이나 유택으로 표현될 만한 그곳의 무덤들은 자세히 보니 여러 층이었다. 호화로운 것은 치장도 그러려니와 규모 또한 웬만큼 잘 사는 집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길 가 언덕 아래 쪽 구멍에 조막손만한 검은 오지그릇 하나로 남아있는, 초라한 무덤도 많았다. 살아생전 고대광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자나 노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나 죽은 다음에 심심산중 한 덩어리 봉분으로 남는다면, 그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묘제야말로 얼마나 철학적이고 인간적인가. 물론 호화분묘는 제외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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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초라한 무덤


   ***


 온갖 석물(石物)로 치장한 채 산 자들이 머물러야 할 양지바른 곳을 점령한 대만의 무덤들은 그 자체가 폭력이었다. 물론 조상을 잘 모시려는 자손들의 정성을 어찌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 한 몸 죽여서라도 자식들 살리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부모 마음일진대, ‘산 자들’이 차지해야 할 양지바른 곳에 자신들의 거대한 유택을 마련해준 자손들을 어찌 가상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우펀의 무덤 군(群)을 만나면서 대만에 대한 기대의 반 이상을 접기로 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