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12. 21. 17:45

 

 

  이제 더 이상 사람이 낫을 들고 벼 수확을 하는 시대가 아니지요. 콤바인을 몰고 다 익은 벼논에 들어가 곡물을 베고, 탈곡하고, 선별하고, 포대에 담는 등 여러 단계의 일들을 일관 작업으로 수행하는 시대이지요. 콤바인 작업이 끝나는 대로 거둔 벼를 트럭에 실어 건조장으로 보내면 일단 주인 손에서 떠납니다. 건조된 벼는 수매장으로 넘겨 정부의 비축미로 팔고, 남는 것 중 일부를 쌀로 찧어 가족들의 한 해 식량으로 삼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콤바인 작업을 하고난 논바닥에는 낟알 털린 볏짚들이 줄줄이 누워 있게 됩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고 그 볏짚들을 모아 유산균을 섞은 다음 단단히 포장한 것이 바로 곤포 사일리지입니다. 그 속에서 맛있게 발효된 볏짚들은 다음 해 목초가 나올 때까지 소들의 먹이로 요긴하게 쓰이지요.

 

  이십여 년 전 미국 체류 중에,  십 수 년 전 유럽 여행 중에,  저는 곤포 사일리지들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전원 혹은 농토 위에 구르는 하얀 색 곤포 사일리지들을, 농촌의 부를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것들은 몇 년 전부터 가을・겨울에 걸쳐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흔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 우리나라 농촌도 제가 그려온 ‘부농(富農)’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곤포 사일리지를 볼 때마다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십 년 전의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하곤 합니다. 제 어린 시절 농촌에서는 농지 다음으로 소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집이나 소 한 마리씩은 데리고 살았지요. 소 없이 논밭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이른 봄부터 소와 함께 논밭에 나가 땅을 가는 것이 농민들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를 먹이는 것은 사람이 먹고 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판에 풀이 그득하니 그것들을 베어다 먹이거나 풀밭에 끌고 나가 매어놓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울부터 봄철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소의 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집집마다 약간씩 달랐지만, 우리 집의 경우를 말씀드리지요. 당시 방앗간에 가서 보리방아와 쌀 방아를 찧으면 겨가 나오지요. 아주 고운 보릿겨는 송두리째 지고 와야 할 만큼 가장 긴요한 물건이었지요. 벼의 경우 1차로 나오는 왕겨는 모두 방앗간에 버리고, 두 번째 나오는 속겨는 한 주먹도 버리지 않고 실어 와야 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소 먹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지요. 그리고 추석 4~5일 전쯤 소가 좋아하는 길고 부드러운 풀들을 중심으로 관리해오던 산판에서 ‘새 꼴’을 베었습니다. 왜 새 꼴이라 불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새 꼴’은 ‘새+꼴’로 만들어진 복합어인 것 같습니다. ‘새’와 ‘꼴’이란 말들을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군요. 먼저 ‘새’.

 

“1. 볏과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띠, 억새 따위가 있다.

  2.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30~120cm이며, 잎은 흔히 뿌리에서 나고 선 모양이다. 여   름에서 가을까지 연한 녹색의 작은 이삭으로 된 꽃이 원추(圓錐) 화서로 피고 목초로 쓰인다. 볕이 잘 드는 초원이나 황무지에서 자라는데,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그리고 ‘꼴’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풀어 놓았군요.

 

“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아, 그 ‘새 꼴’이란 바로 억새 등의 볏과 식물과 기타 잡초 등 소가 잘 먹던 풀들을 통틀어 부르던 명칭이었던 것 같네요. 그러니 당시 우리 고향의 어른들은 매우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고 계셨던 겁니다. 어쨌든 일꾼들 4~5명이 들러붙어 하루 종일 낫으로 천여 평 가까운 풀을 베어 산 바닥에 깔아놓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한 일주 쯤 지날 때쯤 파란 풀들이 기분 좋은 풀 향기를 풍기며 대충 마르게 되고, 그 상태를 살펴서 괜찮다는 판단이 들 경우 걷어서 낟가리 모양으로 누려놓습니다. 그 다음 벼 타작이 끝나고 나오는 볏짚 또한 한 올도 버리지 않고 누려놓습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볏짚과 새 꼴 등 작은 동산 모양의 두 종류 낟가리가 집집마다 마당 한 구석에 올록볼록 솟아올라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날씨가 추워져서 소를 외양간으로 옮겨 맨 다음부터는 볏짚과 새 꼴을 7:3으로 배합하여 작두로 썰어낸 여물이 주식으로 소에게 제공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신 아버지는 부엌의 가마솥에 여물과 겨[쌀겨・보릿겨], 채소 이파리 등을 ‘조리 후에 나오는 영양분 섞인 구정물’로 버무려 ‘소죽’을 끓이셨습니다. 저는 그 구수한 소죽 냄새를 맡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새벽 5시대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저는 6시 대에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가마솥 소댕이 덜컹거리며 푹푹 김이 오르면 소죽이 익었다는 신호이고, 다 익은 소죽이 그득 담긴 양동이를 달랑달랑 들고 4~5차례 왕복하면서 외양간의 구유로 날라 주는 일은 제 담당이었지요. 쬐끄만 녀석이 달랑거리며 소죽 양동이를 들고 오는 모습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침을 흘리던 ‘뿔 찌그러진 암소’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소죽을 다 먹고 나면 볏짚과 새 꼴을 섞어 썰어낸 여물을 구유 가득 채워 주는 것이지요. 소가 소죽을 다 먹지 않는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유를 분석하곤 하셨습니다. 여물에 문제는 없었는지, 겨에 문제는 없었는지, 구정물에 문제는 없었는지 등등. 저는 두 분 사이에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마구 흘러갔습니다. 이제 돌아온 전원에는 볏짚이나 새 꼴 동산 대신 곤포 사일리지가 구르고 있네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어른들을 잡고 물어도 새 꼴이나 소죽의 추억을 갖고 계신 분들은 안 계셔요. 콤바인으로 추수가 끝나면 농부들은 볏짚을 팔아버리지요. 저는 이곳 어른들에게 값을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추수 후 볏짚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었던 내 고향의 추억 때문입니다. 가족 같은 소가 먹을 겨울 동안의 양식인데, ‘판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그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농부들이 곤포 사일리지를 팔아서 주머니는 두둑해졌을지 몰라도, 그 볏짚과 새 꼴을 섞어 작두로 썰어내던 ‘여물’의 추억은 아마 누구의 마음속에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감히 ‘농경시대를 헛 살아오셨네요!’라고 그 분들을 조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 꼴과 볏짚을 섞어 썰어낸 여물의 추억’이 제겐 소중한 ‘빈티지 보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버리고 싶은 시간의 땟자국’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언제쯤 ‘라떼’적 삶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젊은 영혼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요?ㅠㅠ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2. 9. 16:26

사랑하는 2014학번 졸업생 여러분!

 

 

학부 졸업생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학창생활을 마무리한 14학번 여러분에게 따뜻한 축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잘 길러주시고 대학교육까지 책임 져 주신 학부모님들께 감사드리고,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교수님들, 재학생 여러분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어제 밤 저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젊음의 열정으로 빛나던 여러분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여울에 밀려 여러분과 이별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혹시 시간의 무상함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인가요? 여기 계신 교수님들 가운데 제가 가장 먼저 쓸쓸한 계절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요? 여러 교수님들을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석별의 정을 담아 한 말씀 드려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정신없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가치기준이 달라져 있는 오늘을 발견합니다. 내일은 또 어떤 변화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리 모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이 그 변화를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이미 개막되었다고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준비가 충분한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가 충분치 못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상당 기간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건 이공계나 인문계 모두 함께 겪는 고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이 고도지식정보화 단계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 혹은 조정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한 인문학이 조정기를 거친 미래의 대한민국에 긴요하게 쓰일 시기가 조만간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리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수준으로라도 인문학의 수요가 늘어나는, 괜찮은 시대가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일자리를 갖고 교문을 나서는 사람이라고 안심해선 안 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실망해서도 안 되는 것은 변화의 바람이 어느 곳을 향할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아 인문학의 창조적 소양과 역량을 갖춘 여러분이야말로 조만간 찾아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기회들을 많이 포착하게 되리라는 것이 우스갯말로 수렵채취시대에 태어나 농경시대, 산업화시대,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정보화시대를 거쳐 오며 변화의 속성을 체험했다고 자부하는’^^ 제 판단입니다. 일단 사회에 나가 크게 변하는 사회의 조류와 용감하게 부딪쳐 보라고 권고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학교가 온실이었다면, 사회는 밀림입니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여러분 스스로 내면의 혁명적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 분명합니다. 일방적으로 배려를 받아 온 기존의 시간대에서 부모, 형제, 이웃 등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려해야 하는 시간대로 180도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수들이 지난 4년 간 중점을 두어 가르친 것도 바로 그런 주체적 의무감의 함양이었습니다.

 

과거 여러분의 선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 저는 그들에게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먼저 건네곤 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러했지만, 통계적으로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능력을 믿습니다. 함께 약속합시다. 앞으로 10년 후인 2027, 저는 멋진 칠순잔치를 열고 그 자리에 여러분을 주빈(主賓)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그 때 멋진 모습으로 저를 찾아 주기 바랍니다.

 

이제 출항의 돛을 높이 달고 용감하게 망망대해로 나가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늠름한 뒷모습에 언제까지라도 파이팅!’을 외치겠습니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러분의 앞날에 신의 보살피심과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18. 2. 9.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7. 8. 11:28

'박근혜는 바보여~!'

 

 

 

맹자가 양혜왕을 뵙자 왕은 못 가에 서서 홍안[鴻鴈: 큰 고니와 기러기]과 미록[麋鹿; 고라니와 사슴]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진 자도 역시 이런 것을 즐거워할까요?” 맹자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진 자가 된 이후라야 이런 것을 좋아하지요. 어질지 못한 자는 비록 이런 것이 있다 해도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시에 '처음으로 영유[靈囿: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지은 영대 밑의 동산]를 지으실 때에 이를 헤아려 경영하시니 서민이 몰려와 이를 꾸미어 하루가 못 되어 완성하였네. 급히 서둘지 말라 일렀건만 서민들은 아들이 달려오듯 찾아 왔다네. 왕이 영유에 나와 있으면 사슴은 번쩍번쩍 빛나고 백조는 하얗게 빛났다네. 왕이 이번엔 영소[靈沼: 백성들이 문왕을 위해 만든 연못]로 구경 나오자 물고기 가득히 뛰어 놀았네'라 하였습니다. 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영대와 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겼던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백성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능히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문왕이 백성들의 힘을 빌어 영대영소를 지었건만,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겁게 여긴 것은 문왕이 그것을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때문이었다. ‘백성들과 함께 즐겼다는 것이 바로 소통의 본질이다. 문왕은 백성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넘겨짚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하거나 관념상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그들의 생각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왕은 내가 만약 백성이라면 임금에 대하여 어떤 바람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가상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늘 던졌음에 틀림없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 바로 백성과 함께 즐기자!’는 것이었고, 그게 바로 요즘 말로 소통이란 것이다.

 

 

50대인 나는 이 땅의 우리 세대가 갖는 시대적 징표들을 형틀처럼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로 대표되는 계몽가를 주문처럼 되뇌면서 꿈을 키웠다. ‘농경시대-산업화 시대-정보화 시대를 거쳐 지금 고도 정보화 사회의 말석에까지 이르렀으니, 다른 나라들에서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한 발전의 과정을 단 몇십년만에 압축적으로 경험해온 셈이다. 그 과정에서 만난 박정희라는 인물은 가난과 무지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 선각자였고, ‘북괴는 민족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사탄들의 집단이었다. 그런 의식에 바탕을 둔 박근혜의 등장을 보며 질곡의 땅에서 자라난 50대 이상 세대들이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방 이후 정권을 잡아온 남자들을 생각해 본다. 오고가는 술잔 속에 얼렁뚱땅 이루어지는 끼리끼리의 담합, 얕은 수로 당장의 이익을 챙기려는 밀실의 야합등등, ‘구린 남자들의 카르텔이 국가 권력의 이면구조였다. ‘정치(政治)라는 좋은 말이 이 땅에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야망을 합리화 시키는 미명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이 땅의 50대가 그런 남성들 사이에서 혜성같이 등장한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여성인 박근혜는 적어도 그간 권력을 갖고 얼렁뚱땅 장난질을 쳐온 남성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무엇보다 컸다. ‘아버지 박정희가 갖고 있던 꿈에 '화룡점정'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했다단순히 50대에 이르러 남성 호르몬이 현격하게 줄었다는 생리적인 이유 때문에 여성인 박근혜에게 공감을 갖게 된 건 아니란 말이다.

 박근혜가 들고 나온 신뢰와 원칙이란 우리 세대의 소망적 사고를 결집시킨 슬로건이었다. 취임 초기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간 지지율도 나를 포함한 50대 이상 세대의 굳건한 믿음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믿었다. 적어도 박근혜라면, ‘신뢰와 원칙의 정치를 우리 정치에 착근(着根)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지혜였다. 꽉 막힌 고집이 아니라 누구도 승복할만한 방법론을 개발해내는 것이 바로 지혜였다. 내 생각이 비록 100% ‘진리여서 그 실현에 대한 100%의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해도, 갈래갈래 흩어진 민심의 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섬세한 방법론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 내 생각의 옳음에 대한 확신보다 그 확신에 대한 설득과 지지가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어야 했다.

 문왕도 처음에는 내 궁전에 멋진 정원과 연못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제왕의 궁전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왕국의 체면으로 보아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제왕 자신이 원하는 바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왕은 아주 섬세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 일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즉위 당시부터 백성들과 함께 하는 면모를 보여준 그였다. 그 과정을 통해 백성들은 임금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문왕의 정원과 연못을 만들고 기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바로 그게 문왕이 보여 준 치자의 지혜였다.

 

 

소통이 그렇게 힘 드는 일인가. ‘즐거운 마음으로탁자 위에 차 한 잔 마련해놓고 정치의 파트너들을 불러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여당이나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라도 걸어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 그렇게 터부로 여길 만한 일일까. 사방에 우글거리는 기자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거나 자신의 시책을 설명하는 일이 그렇게도 번거로우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일일까. 어찌하여 세상의 평판이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아니한 채  하나같이 문제투성이의 인간들만 찾아서 국가 대사를 맡기려 한단 말인가. ‘동네 반장이나 이장을 맡기에도 버거운 인물인지, 한 나라의 정승을 맡을만한 인물인지몇 마디 이야기만 나누어 봐도 알 일인데, 무슨 이유로 한사코 그런 문제적 인간들만 찾아 내 놓아서 정적들의 비웃음을 자초한단 말인가. 

 

 

물론 항간의 소문이나 사람들의 평판이 매번 맞는 것은 아니고, 줏대 없이 그에 따르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세평(世評)을 무시함으로써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더 크기 마련이니, 양자를 적절히 배합하는 게 바로 지혜다. 그걸 잘 하면 좋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줏대 없는 허수아비대책 없는 독불장군이 되는 것이다. 좋은 정승 감들을 찾아내고도 세상의 편견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버리고 마는 지도자를 누가 따를 것이며, 세상에 좋은 정승 감들이 있음에도 그들이 혹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까봐 발탁조차 하지 못하는 소심함과 속 좁은 욕망의 소유자를 누가 지도자로 섬길 것인가.

 

 

만족의구불안실망절망으로 초심의 급격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이 땅의 50대들은 만사 제쳐두고 투표장에 달려가 한 표를 행사한 집단이다. 그래서 이들 마음의 변화는 현실 정치의 잘 되고 못됨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기준은 경험이다. 이 땅의 50대들은 공허한 이론이나 편견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의 투사들이 아니라, 맵짠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판의 건전한 대안을 모색해온 집단이다. 많은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가까스로 찾아낸 대안이 바로 현 대통령이다. 힘들여 찾아냈다고 자부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 대안에 대하여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였다는 판정을 내리는 순간, 그 대안 또한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 박힐 수 있음을 왜 깨닫지 못한단 말인가. 오늘 만난 동향 친구의 박근혜는 바보여~!’라는 평가를 이 땅의 장삼이사들은 절실하게 공감하고 있는데, 정작 대통령이나 그 주변의 인사들만 모른다면, 이 문제야말로 조만간 민족사의 비극이나 수치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걱정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