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5. 24. 13:59

 

 

제이슨 가족 사진[왼쪽부터 제이슨, 그레이슨, 놀만, 제이콥, 에벌린]
밝은 표정으로 놀고 있는 그레이슨과 에벌린

 

  노마드(nomadism), 노마디즘(nomadism)이란 말이 유행이다. 각각 유목민(遊牧民), 유목(민)주의[遊牧(民)主義 혹은 유목민 정신]로 번역되겠지만, 그 내포는 간단치 않다. 우리 같은 농경 정착민으로서는 쉽지 않은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유목민이다. 풀이 우거진 곳을 찾아 천막을 세우고 소떼나 양떼를 기르는 사람들. 그러다가 동물들이 얼추 풀을 뜯어먹었다 싶으면 냉큼 천막을 말아 수레나 말 등에 싣고 또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한 곳에서 진득하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와 나의 발견에 바탕을 둔 탈주의 철학을 고안했지만, 그 근원적 사고가 노마드 혹은 노마디즘에 있음은 명백하다.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이란 굴레일 수 있으니, 그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노마디즘이다. 대학 재직 40년 동안 많은 적지 않은 구미인(歐美人)들을 만났고, 두 번에 걸친 미국 체류 기간에도 그들을 만나며 그들의 내면에 남아있는 노마디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 정체성의 큰 부분이었다.

 

   2013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미국의 OSU(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여러 명의 패컬티 멤버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뛰어난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Jason Culp)였다. 이미 이 블로그에 그에 관한 글과 사진들을 남긴 바 있는데, 그 글에서 나는 그의 영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외국어 사용자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어가 매우 명료하면서도 정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한국말을 ‘명료하고 정확하게’ 구사하지는 못하듯, 미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어만으로 분류할 경우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충 네 부류로 나뉘었다. 짤막하면서도 느릿느릿한 영어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른들, 진한 사투리 억양으로 상대방을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람들, 입에 오토바이 엔진을 단 듯 숨넘어가게 지껄여대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제이슨처럼 교과서적인 영어로 호감을 주는 소수의 지식인들. 가끔 방송에서 목격하는 오바마 대통령,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현 백악관 대변인과 미 국무성 대변인 등의 대중 스피치를 통해 미국 지도자들이나 상류층의 덕목 가운데 ‘언어의 명료성과 모범성’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이슨에게서 그런 스피치의 전형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이 글을 내 여행기[<<인디언과 바람의 고향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에 다시 실었지만, 그것으로 그[그의 가족]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은 것은 잊을만하면 도란도란 전해지는 그의 말이 귀를 간질이는 초원의 산들바람처럼 나를 기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넓은 초원의 한 귀퉁이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데, 이곳을 찾아와 잠시 양떼에게 풀을 먹이며 쉬다가 안녕!’을 고하고 떠난 그가 몇 년 후 늘어난 가족들과 양떼들을 몰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곳을 지나다가 내게 또 안녕!’을 고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귀국하고 한 해 뒤에 그는 내게 연락을 해왔다. 한국의 대학에서 잠시 일할 만한 자리가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 통탄할 만큼 좁은 나의 교제범위 때문일까. 시원한 대답을 못해주었다. 미안한 마음을 문면에 담아 이메일을 보냈으나,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6개월쯤 후에 독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몇 년간 그곳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게 되었노라는 메시지와 독일에서 낳은 예쁜 딸 에벌린(Everlyn)도 함께 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나는 반색을 하며 반가움의 답신을 보내면서 두어 차례 이메일들이 오가다가 다시 한동안 끊기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치면서 초강대국 미국도 힘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NYU의 교수로 있는 큰 아이[조경현]와 제이슨의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런 내 생각이 전해진 것일까. 엊그제 그의 이메일이 거짓말처럼도착했다. 독일에서 임기를 마치고 작년 8월 미국에 귀환 후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이번 여름에 이스라엘에 일자리를 잡아놓고 비자를 기다린다는 것, 정년 후 살 집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것 등을 적은 다음, 새로 태어난 아들 제이콥(Jacob)이 포함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말로 번역한 그 이메일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조 박사님!

 

나는 당신과 임미숙 씨가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 잘 지내시기를 희망합니다. 2020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나게 될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금년 여름 언제쯤 이스라엘로 이사하기 위해 한 번 더 짐들을 꾸리고 있는 우리는 당신에게 이메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스틸워터를 떠난 후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보내 준 당신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레이슨은 한국에서 출판된 책에 실린 우리 가족사진을 보며 대단히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진 후에도 당신의 건강이 좋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흘러간 시간과 거리가 우리를 떼어 놓았어도, 당신과 임미숙 씨는 여전히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들입니다. 당신을 방문하여 당신의 고향을 보기 위해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아직도 내 꿈입니다. 정년 후 살 집을 완성하셨어요? 낙원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갖고 있는 사진 좀 한 장 보내 주세요.

 

우리 가족사진 두어 장 첨부합니다. 우리는 2019년 8월 이래 오클라호마에 돌아와 있어요. 우리는 아마도 2020년 6월에 이스라엘로 이사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직 정부로부터 여권들을 받지 못했어요. 그들은 지금 국제 여행을 제한하기 위한 여권의 갱신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보류 중"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감사하게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지요.

 

당신의 친구 제이슨 드림

 

 

 

   아, 그는 아직도 노마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양떼에게 뜯길 풀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상이 바로 노마드 아닌가. 우리는 어찌하여 특정한 아니 알량한 이념이나 가치 혹은 삶의 방식에 구애 받으며 이 비좁은 한반도 한 구석에 박아놓은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는가. 끊임없이 낯선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나고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수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을 시멘트 철근 집을 아름다운 에코팜에 뚜드려 지으면서걸림 없는 노마드 친구의 이메일을 곱씹어 보노라니, 노마디즘을 찬양하고 노마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 반대방향으로 치달아가는 내 몰골이 영 마뜩치 않다. 어디선가 맛나고 멋진 풀들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나는 어떻게 천막을 말아 짊어진 채 내 소떼를 몰고 그곳으로 달려갈 것인가. 걱정 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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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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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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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 2. 23. 14:15

 

 

 

                         6개월간 몸을 담고 있던 South Murray 홀

 

 

 



                              OSU Student Union

 

 

 



                                        머레이 홀 1층에 있던 연구실 팻말

 

 

 



                                       연구실 내부

 

 

 

 

스틸워터를 떠나며

 

 

 

 

예정 체류기간 6개월을 모두 써버리고, 오늘 드디어 스틸워터를 떠난다. 그동안의 추억에 쩐 짐들이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그득하건만 마음은 대체로 허하다. 그 옛날 유목민들이 이랬을까. 천막을 대충 걷어 말 등에 올려 메우고 정처 없이 또 다른 풀밭을 따라 길을 떠나던 그들의 기분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농경 정착민의 후예인 내가 노마드라니? 스스로의 몸에서 노마드의 애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시대의 변화 때문이리라. 풀이 자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떠나는 아침이면 그 옛날의 유목민들은 무수히 되뇌었을 것이다. 삶터 앞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을, 천막 주변에서 재잘거리던 작은 새들을, 가끔씩 찾아와 기웃거리던 사슴이나 토끼들을, 환하게 미소 짓던 꽃들을, 귓가에 스쳐가던 바람결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천 년의 세월을 격()한 노마드의 서정이 이 순간 내 마음을 치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24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출발 예정.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 미련이 남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둘러 볼 곳들이 남아있어 스틸워터 출발 날짜를 며칠 당기기로 한 것이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Creek)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동쪽의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

 

스틸워터를 떠나는 이 순간의 기분은 9년 전 중남부 유럽의 20개 나라들을 자동차로 돈 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에 오르던 그 기분과 동일하다. 사실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면서도 타고 난 낙천성과 조심성 하나로 무사히 그 길을 주파(走破)해낸 것처럼, 달력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체류해온 오클라호마 주와 스틸워터 역시 까맣게 모르던 공간들이면서도 그다지 숨차 하지 않고 골인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중남부 미국인들의 보수성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일반적 성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에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그들의 보수성이란 자기표현의 미숙함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나는 그들을 만나는 순간 간파할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선 그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길과의 만남, 이상적인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아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야 할 단 하나의 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 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소떼를 몰고 재입사(再入社)하기로 한다.

 

 

 

 


산책로의 한 부분

 

 

 

 


가끔 산책하던 부머 호수의 오리들

 

 

 

 


부머 호수의 서정

 

 

 

 


아파트 뒤켠 풀밭에서 식사하고 있는 기러기들[Canadian Goose]

 

 

 

 

 
아파트 주차장까지 진출한 기러기들

 

 

 

 


산책로의 전선을 점령한 새들

 

 

 

 


산책로에서

 

 

 

 


산책로에서

 

 

 

 


눈 내린 산책로의 한 부분

 

 

 

 


산책로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

 

 

 

 


산책로에서 만난 다람쥐

 

 

 

 


추운 날 산책길에 만난 이름 모를 새

 

 

 

 


OSU 스포츠의 대명사 풋볼 팀 광고사진

 

 

 

 


'2013년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석한
 각국의 학자들 중 몇몇과 함께

 

 

 

 


스틸워터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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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성원

    여러 가지 고생되는 부분은 좀 있었겠지만
    육십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인간적으로, 학문적으로 또 한단계의 성숙을 이루어낸 것으로 느껴지는구먼.
    한 편으론 부럽기도 하지만 성공적으로 건강하게 연구활동을 종료한 점 진심으로 축하하네.
    서울에서 보세나.

    2014.02.24 08:29 [ ADDR : EDIT/ DEL : REPLY ]
  2. 백규

    성원, 고맙네. 6개월이 '한 여름밤의 꿈'처럼 흘러갔네. 이번에야 미국의 속살을 본 것 같아 기분은 좋네. 보려고 하는 것만큼만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했네. 그들을 넘기가 쉽지 않지만, 넘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깨달았네. 격려해줘서 거듭 고맙네. 서울에서 보세.

    2014.02.24 09:39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4. 1. 11. 09:07

 

 


아파치 네이션 본부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족 문장(紋章)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 문장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추모비

 

 


추모비의 아래쪽에 '미 육군 일병 실라스 W. 보이들, 한국전에서 1950년 10월 31일
적에게 잡혀 죽었다'고 쓰여 있다.

 

 


포트실 치리카화 웜스프링스 아파치족 사무소
(Fort Sill Chiricahua Warm Springs Apache Tribal Office)

 

 


차창으로 내다 본 아파치 시가지

 

 

 


아파치 역사 박물관[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3)

 

 

아파치 정신을 찾아 대평원으로!

 

 

 

 

 

아나다르코의 카이오와로부터 아파치와 코만치를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 위엔 누렇게 마른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검정색 소들만 주인행세를 하는 듯 늘어서서 게으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 탄 아파치의 전사들처럼 바람은 사정없이 달려와 나그네의 뺨을 찌르는데, 지평선은 망망하여 지고 뜨는 해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가에는 물어볼 사람도 집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수십 분을 더 달리니 벌판 위에 포트 실 치리카화 웜 스프링스 아파치 족 사무소[Fort Sill Chricahua Warmsprings Apache Tribal Office]’라는 글자들을 벽에 달고 있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포트실 아파치 족은 연방으로부터 인정받은 오클라호마 내의 미국 원주민 종족이니, 이곳 아파치가 미국 내 전체 아파치 족을 대표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무소에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썰렁했다. 내부는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으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인디언 아가씨는 친절했고 설명 또한 구체적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20마일쯤 달려가니 아파치 시티가 나왔고, 그 입구에 아파치 시티 팍(Apache City Park)이 있었으며, 그 한쪽에 참전용사들의 공원[Veterans Park]’이 있었다. 아파치 족 출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국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죽은 젊은 군인의 이름도 비석에는 올라 있었다. 어딜 가도 한국전 전몰용사들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는 곳이 미국이었다. 적어도 미국에서만큼은 625가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파치 인디언들의 본고장에서 그 점을 확인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활 형편들이 괜찮은지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연도의 주택들에는 남부지역 도시로서는 드물게도 윤기가 흘렀다.

 

이 지역의 아파치 인디언들은 원래 알래스카 지방이나 캐나다, 미국 서부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마 오랜 옛날 아시아와 미주가 연결되었을 때 알라스카와 캐나다로 건너온 아시아계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리라. 그들이 로키 산맥을 따라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내려왔고, 다시 그로부터 동쪽 혹은 남부의 대평원 지역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따라서 아파치는 한 지역에서 결코 오래 정착해본 적이 없고, 원래 정착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노마드(Nomad)’였다. 그처럼 수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수적이었다. 그들이 말을 타거나 활용하는 방법을 익힌 첫 부족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700년경 캔자스 평원으로 이동한 아파치 부족원의 다수는 그곳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자 했으나,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박, , 옥수수 등 농작물들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런 약점 때문에 나중에 코만치 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땅도 빼앗겼으며, 뉴멕시코나 애리조나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텍사스와 멕시코 쪽으로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곳을 지배하던 스페인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다. 1730년대 아파치 인들은 스페인 사람들과 피나는 전쟁을 시작했고, 1743년이나 되어서야 스페인의 지도자가 텍사스 일부 지역을 이들에게 살 수 있도록 양보하면서 땅을 두고 벌어졌던 싸움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749년의 한 의식(儀式)에서 아파치 추장은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도끼를 땅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오늘날도 손도끼를 땅에 묻다는 말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원래 아파치(Apache)’란 말은 문화적으로 관련 있는 미국 남서부 원주민들의 그룹을 지칭하던 집단 명사였다. 원래 아파치 사람들은 동부 애리조나, 멕시코 북부, 뉴멕시코, 텍사스 서부 및 남서부, 콜로라도 남부 등지에 걸쳐 살았고, 그 지역은 고산 지대, 물이 풍부한 계곡지대, 크고 깊숙한 협곡, 사막, 남부의 대평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파치 족의 하부그룹들은 약간의 정치색을 띤 몇 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규모가 큰 일곱 개의 그룹들은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각자의 독특한 문화를 경쟁적으로 발달시켰다. 나바호(Navajo), 서부 아파치(Western Apache), 치리카화(Chiricahua), 메스칼레로(Mescalero), 지카릴라(Jicarilla), 리판(Lipan), 대평원 아파치(Plains Apache) 등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그룹들이다. 현재 이런 아파치 족들 대부분은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에 살고 있고,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보호구역들에도 살고 있다. 이들 외에 일부 아파치 인들은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큰 규모의 도시지역 공동체로는 오클라호마 시티, 캔자스 시티, 피닉스(Phoenix), 덴버(Denver), 샌디에고(San Diego),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이 꼽힌다.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처럼, 아파치 족은 역사적으로 매우 강하고 전략적인 민족으로 인정을 받아왔는데, 몇 세기 동안 스페인과 멕시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명성이었다. 미국 육군 역시 19세기에 들어와 그들과 몇 번 대결해 보고 나서는 아파치가 강한 전사들이자 기술적인 전략가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파치족은 미국과 40여 년 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남북전쟁 때 북부군과 남부군이 서로 싸우는 처지에서도 양자 모두 아파치와의 전쟁을 지속했다니, 그들의 용맹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입증해주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수레를 타고 가는 아파치 가족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파치족

 

 


아파치족의 전통가옥인 티피(Tipi)

 

 

 


아파치족의 바구니들과 약초들

 

 


치리카후아 아파치족의 주술사이자, 아파치 전쟁 중 멕시코와 미국을 상대로 투쟁했던
아파치족의 걸출한 지도자 제로니모. 1909년 2월 17일 포트실 감옥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음.

 

 

 


아파치족의 다양한 모습들

 

 

 


아파치족의 각종 전통그릇들

 

 

 


포스트 가드하우스(Post Guardhouse)의 당시 모습.
현재는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으로 쓰이고 있음.

 

 


포트실 역사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

 

 


포트실 역사박물관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

 

 

 

대부분의 아파치 인들도 다른 부족들처럼 네이션이나 보호구역의 범주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연방정부에 의해 공인된 것만 해도 아홉 개나 된다. ‘오클라호마의 아파치 족[Apache Tribe of Oklahoma]/애리조나 주 포트 맥도웰의 야바파이 네이션[Fort McDowell Yavapai Nation, Arizona]/오클라호마 주 포트 실의 아파치 족[Fort Sill Apache Tribe of Oklahoma]/뉴멕시코 주의 지카릴라 아파치 네이션[Jicarilla Apache Nation, New Mexico]/애리조나 주 산 카를로스 보호구역의 산 카를로스 아파치 족[San Carlos Apache Tribe of the San Carlos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톤토 아파치 족[Tonto Apache Tribe of Arizona]/애리조나 주 포트 아파치 보호구역의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 족[White Mountain Apache Tribe of the Fort Apache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캠프 버디 인디언 보호구역의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Yavapai-Apache Nation of the Camp Verde Indian Reservation, Arizona]’ 등으로 다른 부족들에 비해 수가 많은 편이다.

지금 우리가 찾아다니는 오클라호마의 아파치는 대평원의 아파치로서 아나다르코(Anadarko)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연방정부에 의해 오클라호마 아파치로 인정된 그룹이었다.

 

그런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현지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아파치 시내에서 만난 아파치 히스토리컬 서사이어티 뮤지엄(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은 예상대로 많은 생활문화사 자료들을 갖추고 있었다. 가정생활, 산업, 학교, 운송, 의료기구, 의상, 가구, 서적, 사진, 초창기 은행 시설, 회화, 아파치 시민들의 개인 기념물 등 모든 분야의 콜렉션들을 풍부하게 보유한 점에서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1901~19022층으로 세워진 이 석조 건물에는 애당초 아파치 주립은행 사무실과 다른 업종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76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 40년 가까이 모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을 통해 아파치족이 근대에 이룬 문명화의 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을 떠나 10분 정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포트 실 군사 보호 구역[Fort Sill Military Reservation]’ 안에 있는 포트 실 국립 역사 랜드마크 박물관[Fort Sill National Historic Landmark & Museum]’이었다. 이곳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 육군의 군사기지인 만큼 출입문을 통과할 때부터 현역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드넓은 부지 한 군데에 오래 된 2층 벽돌집이 있고, 그곳이 바로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박물관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지키는 사람도 없이 자동으로 음성 설명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주로 죄를 지은 아파치 인디언들을 구금하고 처형하던 형무소가 원래 이 건물의 용도였고, 박물관으로 변신한 지금 당시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파치 인디언들이 겪어온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금되고 형을 받았겠지만, 백인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저지른 죄와 받은 형벌이 과연 얼마나 공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아파치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다른 어느 부족들의 땅보다 넓고 다양한 지역에서 각 그룹마다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미국 정부에 가장 길고 끈질기게 저항했던 용맹한 전사들이 바로 아파치족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평원의 주인이자 맹장으로서 주변 부족들을 상대로 투쟁과 화해의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해 온 탁월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고 보존해온 생활사의 다양한 자료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타고난 성품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영역의 어느 박물관을 가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도 다른 부족에 비해 자신들의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소개나 설명은 거의 없었다. 그 점은 그들의 폐쇄성에 대한 근거로 들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부심과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서부영화에 용맹한 부족으로 약방의 감초 격으로 등장해 온 아파치족. 이들의 거친 정신은 바야흐로 미국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부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약간은 거칠지만, 개척자로서의 미국정신에 자극을 줌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의 형성에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다음에 계속>

 

 

 


가드하우스의 인디언 경찰 수장인 코만치족 출신의 아르코(Arko).
군인 자켓을 입고 있는 1884년 모습.

 

 


가드하우스 지하 감방의 복도

 

 

 


가드하우스 밖에 있는 나무에 걸고 교수형을 집행하던 목줄

 

 

 


당시 나뭇가지에 목줄을 걸어 교수형을 집행하던 광경

 

 

 


죄수들에게 벌을 주던 징벌방의 모습

 

 

 


아파치족 소녀들

 

 

 


야바파이 아파치족 여성 합창단

 

 

 


1880년경 죄를 지은 Boomer들을 잡은 군인들과 인디언 경찰들

 

 

 


아파치족 데블 댄서(Devil Dancer)들

 

 

 


치리카화 아파치족 주술사[Chiricahua medicine man]

 

 

 


아파치족의 구슬장식 공예품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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