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11. 09:07

 

 


아파치 네이션 본부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족 문장(紋章)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 문장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추모비

 

 


추모비의 아래쪽에 '미 육군 일병 실라스 W. 보이들, 한국전에서 1950년 10월 31일
적에게 잡혀 죽었다'고 쓰여 있다.

 

 


포트실 치리카화 웜스프링스 아파치족 사무소
(Fort Sill Chiricahua Warm Springs Apache Tribal Office)

 

 


차창으로 내다 본 아파치 시가지

 

 

 


아파치 역사 박물관[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3)

 

 

아파치 정신을 찾아 대평원으로!

 

 

 

 

 

아나다르코의 카이오와로부터 아파치와 코만치를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 위엔 누렇게 마른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검정색 소들만 주인행세를 하는 듯 늘어서서 게으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 탄 아파치의 전사들처럼 바람은 사정없이 달려와 나그네의 뺨을 찌르는데, 지평선은 망망하여 지고 뜨는 해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가에는 물어볼 사람도 집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수십 분을 더 달리니 벌판 위에 포트 실 치리카화 웜 스프링스 아파치 족 사무소[Fort Sill Chricahua Warmsprings Apache Tribal Office]’라는 글자들을 벽에 달고 있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포트실 아파치 족은 연방으로부터 인정받은 오클라호마 내의 미국 원주민 종족이니, 이곳 아파치가 미국 내 전체 아파치 족을 대표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무소에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썰렁했다. 내부는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으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인디언 아가씨는 친절했고 설명 또한 구체적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20마일쯤 달려가니 아파치 시티가 나왔고, 그 입구에 아파치 시티 팍(Apache City Park)이 있었으며, 그 한쪽에 참전용사들의 공원[Veterans Park]’이 있었다. 아파치 족 출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국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죽은 젊은 군인의 이름도 비석에는 올라 있었다. 어딜 가도 한국전 전몰용사들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는 곳이 미국이었다. 적어도 미국에서만큼은 625가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파치 인디언들의 본고장에서 그 점을 확인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활 형편들이 괜찮은지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연도의 주택들에는 남부지역 도시로서는 드물게도 윤기가 흘렀다.

 

이 지역의 아파치 인디언들은 원래 알래스카 지방이나 캐나다, 미국 서부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마 오랜 옛날 아시아와 미주가 연결되었을 때 알라스카와 캐나다로 건너온 아시아계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리라. 그들이 로키 산맥을 따라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내려왔고, 다시 그로부터 동쪽 혹은 남부의 대평원 지역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따라서 아파치는 한 지역에서 결코 오래 정착해본 적이 없고, 원래 정착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노마드(Nomad)’였다. 그처럼 수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수적이었다. 그들이 말을 타거나 활용하는 방법을 익힌 첫 부족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700년경 캔자스 평원으로 이동한 아파치 부족원의 다수는 그곳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자 했으나,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박, , 옥수수 등 농작물들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런 약점 때문에 나중에 코만치 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땅도 빼앗겼으며, 뉴멕시코나 애리조나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텍사스와 멕시코 쪽으로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곳을 지배하던 스페인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다. 1730년대 아파치 인들은 스페인 사람들과 피나는 전쟁을 시작했고, 1743년이나 되어서야 스페인의 지도자가 텍사스 일부 지역을 이들에게 살 수 있도록 양보하면서 땅을 두고 벌어졌던 싸움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749년의 한 의식(儀式)에서 아파치 추장은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도끼를 땅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오늘날도 손도끼를 땅에 묻다는 말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원래 아파치(Apache)’란 말은 문화적으로 관련 있는 미국 남서부 원주민들의 그룹을 지칭하던 집단 명사였다. 원래 아파치 사람들은 동부 애리조나, 멕시코 북부, 뉴멕시코, 텍사스 서부 및 남서부, 콜로라도 남부 등지에 걸쳐 살았고, 그 지역은 고산 지대, 물이 풍부한 계곡지대, 크고 깊숙한 협곡, 사막, 남부의 대평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파치 족의 하부그룹들은 약간의 정치색을 띤 몇 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규모가 큰 일곱 개의 그룹들은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각자의 독특한 문화를 경쟁적으로 발달시켰다. 나바호(Navajo), 서부 아파치(Western Apache), 치리카화(Chiricahua), 메스칼레로(Mescalero), 지카릴라(Jicarilla), 리판(Lipan), 대평원 아파치(Plains Apache) 등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그룹들이다. 현재 이런 아파치 족들 대부분은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에 살고 있고,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보호구역들에도 살고 있다. 이들 외에 일부 아파치 인들은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큰 규모의 도시지역 공동체로는 오클라호마 시티, 캔자스 시티, 피닉스(Phoenix), 덴버(Denver), 샌디에고(San Diego),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이 꼽힌다.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처럼, 아파치 족은 역사적으로 매우 강하고 전략적인 민족으로 인정을 받아왔는데, 몇 세기 동안 스페인과 멕시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명성이었다. 미국 육군 역시 19세기에 들어와 그들과 몇 번 대결해 보고 나서는 아파치가 강한 전사들이자 기술적인 전략가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파치족은 미국과 40여 년 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남북전쟁 때 북부군과 남부군이 서로 싸우는 처지에서도 양자 모두 아파치와의 전쟁을 지속했다니, 그들의 용맹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입증해주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수레를 타고 가는 아파치 가족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파치족

 

 


아파치족의 전통가옥인 티피(Tipi)

 

 

 


아파치족의 바구니들과 약초들

 

 


치리카후아 아파치족의 주술사이자, 아파치 전쟁 중 멕시코와 미국을 상대로 투쟁했던
아파치족의 걸출한 지도자 제로니모. 1909년 2월 17일 포트실 감옥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음.

 

 

 


아파치족의 다양한 모습들

 

 

 


아파치족의 각종 전통그릇들

 

 

 


포스트 가드하우스(Post Guardhouse)의 당시 모습.
현재는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으로 쓰이고 있음.

 

 


포트실 역사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

 

 


포트실 역사박물관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

 

 

 

대부분의 아파치 인들도 다른 부족들처럼 네이션이나 보호구역의 범주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연방정부에 의해 공인된 것만 해도 아홉 개나 된다. ‘오클라호마의 아파치 족[Apache Tribe of Oklahoma]/애리조나 주 포트 맥도웰의 야바파이 네이션[Fort McDowell Yavapai Nation, Arizona]/오클라호마 주 포트 실의 아파치 족[Fort Sill Apache Tribe of Oklahoma]/뉴멕시코 주의 지카릴라 아파치 네이션[Jicarilla Apache Nation, New Mexico]/애리조나 주 산 카를로스 보호구역의 산 카를로스 아파치 족[San Carlos Apache Tribe of the San Carlos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톤토 아파치 족[Tonto Apache Tribe of Arizona]/애리조나 주 포트 아파치 보호구역의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 족[White Mountain Apache Tribe of the Fort Apache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캠프 버디 인디언 보호구역의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Yavapai-Apache Nation of the Camp Verde Indian Reservation, Arizona]’ 등으로 다른 부족들에 비해 수가 많은 편이다.

지금 우리가 찾아다니는 오클라호마의 아파치는 대평원의 아파치로서 아나다르코(Anadarko)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연방정부에 의해 오클라호마 아파치로 인정된 그룹이었다.

 

그런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현지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아파치 시내에서 만난 아파치 히스토리컬 서사이어티 뮤지엄(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은 예상대로 많은 생활문화사 자료들을 갖추고 있었다. 가정생활, 산업, 학교, 운송, 의료기구, 의상, 가구, 서적, 사진, 초창기 은행 시설, 회화, 아파치 시민들의 개인 기념물 등 모든 분야의 콜렉션들을 풍부하게 보유한 점에서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1901~19022층으로 세워진 이 석조 건물에는 애당초 아파치 주립은행 사무실과 다른 업종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76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 40년 가까이 모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을 통해 아파치족이 근대에 이룬 문명화의 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을 떠나 10분 정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포트 실 군사 보호 구역[Fort Sill Military Reservation]’ 안에 있는 포트 실 국립 역사 랜드마크 박물관[Fort Sill National Historic Landmark & Museum]’이었다. 이곳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 육군의 군사기지인 만큼 출입문을 통과할 때부터 현역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드넓은 부지 한 군데에 오래 된 2층 벽돌집이 있고, 그곳이 바로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박물관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지키는 사람도 없이 자동으로 음성 설명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주로 죄를 지은 아파치 인디언들을 구금하고 처형하던 형무소가 원래 이 건물의 용도였고, 박물관으로 변신한 지금 당시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파치 인디언들이 겪어온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금되고 형을 받았겠지만, 백인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저지른 죄와 받은 형벌이 과연 얼마나 공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아파치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다른 어느 부족들의 땅보다 넓고 다양한 지역에서 각 그룹마다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미국 정부에 가장 길고 끈질기게 저항했던 용맹한 전사들이 바로 아파치족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평원의 주인이자 맹장으로서 주변 부족들을 상대로 투쟁과 화해의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해 온 탁월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고 보존해온 생활사의 다양한 자료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타고난 성품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영역의 어느 박물관을 가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도 다른 부족에 비해 자신들의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소개나 설명은 거의 없었다. 그 점은 그들의 폐쇄성에 대한 근거로 들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부심과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서부영화에 용맹한 부족으로 약방의 감초 격으로 등장해 온 아파치족. 이들의 거친 정신은 바야흐로 미국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부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약간은 거칠지만, 개척자로서의 미국정신에 자극을 줌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의 형성에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다음에 계속>

 

 

 


가드하우스의 인디언 경찰 수장인 코만치족 출신의 아르코(Arko).
군인 자켓을 입고 있는 1884년 모습.

 

 


가드하우스 지하 감방의 복도

 

 

 


가드하우스 밖에 있는 나무에 걸고 교수형을 집행하던 목줄

 

 

 


당시 나뭇가지에 목줄을 걸어 교수형을 집행하던 광경

 

 

 


죄수들에게 벌을 주던 징벌방의 모습

 

 

 


아파치족 소녀들

 

 

 


야바파이 아파치족 여성 합창단

 

 

 


1880년경 죄를 지은 Boomer들을 잡은 군인들과 인디언 경찰들

 

 

 


아파치족 데블 댄서(Devil Dancer)들

 

 

 


치리카화 아파치족 주술사[Chiricahua medicine man]

 

 

 


아파치족의 구슬장식 공예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 09:07

 

 


휠락 아카데미 입구

 


휠락 아카데미의 관리동 건물[Administration Building]

 


휠락 아카데미 박물관(Wheelock Museum]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붕괴의 위험이 높은] 11개의 건물에 포함된 휠락 아카데미

 


휠락 아카데미의 한 부분

 


휠락 아카데미의 기숙사(?)

 


손님들이 묵던 '객사' 터[Eagle Creek Guest Cottages]

 


휠락 아카데미 박물관 앞에 벽돌에 새겨 만든 기증자들 명단

 

 

 

교육으로 일어선 촉토 족의 어제와 내일(완)

 

 

 

레드 리버 뮤지엄 관람을 끝으로 아이다벨을 떠나 다시 70번 하이웨이를 타고 20분 정도 가니 맥커튼(McCurtain) 카운티의 밀러튼(Millerton)이란 작은 도시가 나왔고, 다운타운 직전에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 10분 정도 달리니 산 속 조용한 곳에 제법 큰 규모의 학교 휠락 아카데미(Wheelock Academy)가 나타났다. 촉토 족의 선진성과 교육열을 상징하는 교육기관이다. 들어가니 드넓은 언덕 위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서 있었는데, 대체로 낡아서 어떤 건물은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1832년에 건립되었고, 가장 이른 교육기관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거쳐 온 밀러튼의 북동쪽 1~1.5마일, 아이다벨의 북쪽으로 10~12 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사실 이 학교는 어린 소녀들을 위한 미션 학교로 시작되었다. 무어(Moor)의 인디언 학교 설립자인 엘리저 휠락(Eleazar Wheelock) 목사의 이름을 교명으로 딴 것인데, 무어의 인디언 학교는 나중에 다트머스 칼리지(Dartmouth College)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839년에 기숙사에 입사하려는 학생들이 몰리자 캠퍼스 건물에 두 층의 기숙사가 증축되기도 했다. 1842년 촉토 네이션의 첫 아카데미가 된 이 학교는 다섯 문명화된 인디언 종족들에 의해 학교 시스템의 모범적 사례로 활용되곤 했다. 휠락의 교사들은 교육자이자 선교사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은 교과목[가정경제, 영어, 지리, 역사, 과학]은 물론 바이블을 가르치고 매사에 행동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오전 5시간 동안 이런 교과목들은 가르치고, 오후에는 4시간 동안 물레 돌리기, 베짜기, 뜨개질, 바느질, 재봉질 등 가사(家事)에 도움 되는 과목들을 가르쳤다 한다. 남북전쟁 때 폐쇄되었었고, 1869년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으며, 그 뒤 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은 뒤, 현재 이 학교는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위험에 처한 역사 자산의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이 이른 시기에 풍광 좋은 곳에 기숙학교를 건립하고 2세 교육에 열을 올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미개하다는 우리의 편견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주해온 백인들에게 무참하게 당하고 난 그들이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2세 교육이었다. 지배자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월등하게 머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휠락 아카데미는 바로 그 생생한 증거였다.

 

***

 

휠락 아카데미를 출발한 우리는 래티머(Latimer) 카운티, 투스카호마(Tuskahoma)의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y Museum)으로 달렸다. 계속 이어지는 키아미치 산맥(Kiamichi Mountains)은 평원 일색인 오클라호마 주의 일반적인 모습과 전혀 달랐다. 산들은 높지 않았으나, 주변의 숲이 울창하고 왕래하는 차들도 없는 산길이 호젓했다. 하늘은 흐려오고, 바람도 슬슬 불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온 우리의 초조한 마음과 달리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주변 목장의 소들이 부러웠다. 휠락으로부터 두 시간을 족히 달려 간신히 투스카호마의 뮤지엄에 도착하니, ‘날씨 때문에 일찍 퇴근한다는 안내문이 출입문에 붙은 채 닫혀 있었다. 이 뮤지엄을 본 다음 세미뇰 네이션까지 가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투스카호마에는 잘 곳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20분 거리의 클레이튼(Clayton)으로 이동,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모텔에서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일찍 뮤지엄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막 출근해 있었다. 겉모양처럼 뮤지엄의 내부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촉토 인들의 생활사, 네이션의 지도자들, 군인들 특히 암호 해독병들의 활약상, 휠록 아카데미를 비롯한 교육의 현장, 민속자료, 예술작품 등등. 많은 컬렉션들이 촉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은 강조되어 있었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고향으로부터 쫓겨나 다른 지역에 강제로 정착했던 참담한 기억은 이들에게도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은 듯 했다. 뮤지엄 건물 밖에도 볼 것들이 많았다. 그들이 숭상해오던 붉은 전사(Red Warrior)’, 부족의 지도자들, 전몰용사 추모비[그 가운데 6데25 당시 희생자들의 추모비도 있었다. 미국통신 41 참조] 등이 있었다. 길 건너에는 촉토 족의 전통마을이 조성되어, 주거환경, 공동체 활동 등 그들의 옛날을 보여주고 있었다.

***

 

현장에서 접한 촉토 족의 역사와 문화는 말 그대로 언제든지 뛰쳐나올 것 같은 살아있는 화석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부심이나 자존심은 지금도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었다. 맨 처음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한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2세를 가르치고 깨우쳐 주지 않으면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 관해 갖고 있던 오만과 편견은 그들 앞에 서는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되어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그들의 내부에서 약동하는 혈맥은 오롯이 촉토인의 그것임을, 드넓은 이곳 그들의 네이션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되었다.

 

 


촉토 네이션 입구의 아치

 


촉토 네이션 뮤지엄의 표지 비석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y Museum)의 모습

 


뮤지엄 앞에 세워져 있는 붉은 전사의 상

 


뮤지엄 앞 뜰에 세워져 있는 독수리 푯대

 


촉토 네이션 문장[실(Seal), 紋章]

 


뮤지엄 건너편에 만들어진 촉토 족 전통마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 00:48

 

 

 

 

교육으로 일어선 촉토 족의 어제와 내일(2)

 

 

 

 
                                                   포트 토우손 표지판

 



                                  포트 토우손 관리 및 소 전시실

 



                            포트 토우손 내 뮤지엄.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닫혀 있었음.

 



                         포트 토우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안내원

 



     포트 토우손이 레드 리버에 배를 띄우던 출발점이었음을 나타내는 유물들

 



                     남군이 북군에게 최종적으로 항복한 독스빌의 유물들

 


남부연합군을 이끌던 체로키 인디언 출신의 스탠드 웨이티 준장이 항복한 사실을 기념한 동판 

 



                           Peter Pitchlynn, 당시 촉토 족 대표[Principal Chief]

 



                               당시 남부연합군을 이끌던, 체로키 족 출신의 Stand Watie 장군

 

 

듀랭을 떠난 우리는 70번 하이웨이를 타고 촉토 카운티를 지나 아이다벨(Idabel)로 향했고, 중간에 포트 토우손(Fort Towson)을 들렀다. 아이다벨에서 1박을 한 다음 날 다운타운 바깥의 레드 리버 뮤지엄(Museum of the Red River)과 브로컨 바우(Broken Bow), 휴고(Hugo)의 휠락아카데미(Wheelock Academy)를 거쳐 투스카호마(Tuskahoma)의 촉토 내셔널 뮤지엄(Choctaw National Museum)까지 가야 하는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까지 촉토 장정을 마쳐야 느긋한 마음으로 위워카(Wewoka)에 있는 세미놀 내셔널 뮤지엄(Seminole National Museum)을 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포트 토우손은 휴고로부터 11마일쯤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인구 600여명의 소도시로서 그 외곽에 옛날 진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원래 이 진지는 남쪽에 있던 멕시코와 그 멕시코의 관할 하에 있던 텍사스로부터 인디언 구역의 경계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지역에 인디언이 떠나고 촉토 족이 재정착한 후에는 1마일 서쪽의 독스빌(Doaksville)을 지키기 위해 이 진지는 다시 활성화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독스빌이 남부연합군에 가담한 촉토 족들이 남북전쟁에서 패하고 북군에게 항복한 현장이라는 점이었다. 1865623일 남북전쟁 당시 마지막 남부연합군의 지상 전력이 항복한 현장이 바로 포트 토우손이었고, 당시 체로키 출신 지휘관이었던 스탠드 웨이티(Stand Watie) 준장이 휴전 및 항복 조건들에 합의한 다음 촉토 군 대대를 전장으로부터 빼냈다고 한다. 바로 그 현장에 우리가 간 것이었다. 촉토 족의 땅이었으면서도 남북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촉토 전사들이 크게 수모를 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그래서인지 진지에서 만난 안내원도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말하자면 큰 전투는 없었고, 다만 전투가 마무리된 곳일 뿐이었다.

 

토우손을 거쳐 들어간 아이다벨은 비교적 넓고 큰 도시였으나, 쇠락한 다운타운이 도시 전체의 활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점에서는 앞서 1박을 한 듀랭과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도시 외곽에서 비교적 깨끗한 숙소를 찾았고, 저녁식사로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예상치 못한 미각을 맛보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다음 날 이른 시각에 찾은 곳이 바로 레드 리버 뮤지엄(Museum of the Red River)’. 멋진 외관의 단층 건물이었다. 일찍 도착한 까닭에 한참을 기다린 뒤 10시가 되어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1975년 개관했다는 이 박물관은 특이하게도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분야에 걸친 컬렉션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눈에 띄는 컬렉션들은 이 지역 원주민인 캐도(Caddoan)공동체의 예술품들, 콜럼버스 시대 이전의 물건들, 원주민들의 민족지적(民族誌的) 작품들, 현대 원주민의 예술작품들, 미국 전역의 공예품들, 아프리카동아시아태평양 제도(諸島)의 대표적 예술품들 등등, 다양했다.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대상은 도자기 등 생활예술의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캐도 공동체의 존재였다. 캐도는 전통적으로 지금의 동 텍사스, 북 루이지애나, 남 아칸사와 오클라호마 등지의 원주민 종족 연합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다종족 원주민 연합체가 바로 캐도인 셈이다. 현재 오클라호마 캐도 네이션은 빙거(Binger)에 수도를 갖고 있는, 단일 연합체다. 우리가 얼마 후에 캐도 네이션을 답사할 예정으로 있지만, 아이다벨의 이 박물관에서 그들의 생활예술품들을 접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색상이 밝고 디자인이 아름다웠으며, 실용성을 겸한 점이 우리의 전통예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최근에 만든 작품들이 대부분이어서 그 역사성을 찾아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캐도 예술품들 외에 다른 지역의 것들도 많았으나, 우리의 답사 목적이 주로 이 지역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인 만큼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다른 나라나 지역의 것들은 우리의 관심 밖이었다. (계속)

 

 

 


레드 리버 뮤지엄 표지석

 


레드 리버 뮤지엄 건물

 


티라노소러스 골격 모형(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을 복원, 모조한 것)

 


여성의 스커트[1957년 플로리다 거주 세미놀(Seminole) 족인 메리 카피지(Mary Coppedge)가
만든 작품]

 


숄더 백[1994년 크리크-세미뇰 족 출신 제이 맥거트(Jay McGirt)가 만든 작품]

 


플레인스 인디언 족의 부드러운 요람[1890년 경 수(Sioux) 족이 만들어 쓰던 것]

 


1900~1930년경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족이 만든 동이

 


무늬가 새겨진 세 발 달린 병[800~1200년 사이, 남동부 캐도 족의 생활용품]

 


캐도 족 등 이 지역 인디언들의 도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8. 10:40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엄청난 공동체였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곳곳에 잠재된 역사와 문화의 실체, 그리고 진하게 감지되는 그들의 민족적 의지가 놀라웠다. 그동안 인디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내 편견이나 무지가 부끄러울 정도였다. 오클라호마 주 서북쪽과 동쪽을 여행하면서 체로키와 오세이지 인디언들의 실체를 이미 확인한 바 있지만, 이곳 중남부에서 만나는 치카샤 인디언들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주 전체 153개의 카운티 중 13[그래드(Grad)/맥클레인(McClain)/가빈(Garvin)/폰타탁(Pontotoc)/스티븐스(Stephens)/카터(Carter)/머레이(Murray)/쟌스톤(Johnston)/제퍼슨(Jefferson)/러브(Love)/마샬(Marshall)/브라이언(Bryan)/코울(Coal)]로 구성되어 총인구 318,658명, 면적 2,3456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의 치카샤 네이션이었다.

 

 


치카샤 네이션의 현재 영역[표시 부분은 카운티 이름들]

 


테네시 주에 있던 치카샤 영역

 


오클라호마 주에서 치카샤가 차지하는 부분들과 카운티 이름들

 


치카샤 네이션 영역도

 

177번 하이웨이를 타고 내려가던 중 아이오와 인디언 네이션을 만났고, 그로부터 대략 두 시간 쯤 뒤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폰타탁 카운티의 에이다(Ada) 시티에 도착했다. 원래는 스틸워터에서 직접 설퍼(Sulphur)로 달려가려 했으나, 네이션 본부 건물이 있는 에이다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현재 네이션 본부 건물들만 남아 있고, 그들의 실제 역사나 문화는 컬츄럴 센터가 있는 설퍼와 지난 날 이들의 수도였던 티쇼밍고(Tishomingo)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에이다(Ada) 시티에 있는 치카사 네이션 건물의 일부

 


번성한 에이다 시티의 다운타운[현재 도로공사중]

 


에이다 시티 치카샤 네이션 앞뜰에 있는 전사[Warrior]상

 

에이다로부터 30분쯤 걸려 설퍼에 도착한 우리는 우선 치카샤 문화센터[Chickasaw Cultural Center]를 찾았고, 거기서 치카샤 족의 지식인 여성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를 만났다. 마침 관람객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녀와 독대하여 치카샤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고, 설퍼에서 하룻밤을 묵고 난 다음 날에 들른 티쇼밍고(Tishomingo)치카샤 의회 박물관[Chickasaw Capitol Museum]’에서도 역시 지성적인 풍모의 여성 큐레이터 플로라 핑크(Flora Fink)로부터 다양한 콜렉션들에 얽힌 정치적인류학적 설명을 들었다. 두 여성 모두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문화적으로 생동감 넘치며 활기에 찬 주민들로 이루어진 것이 치카샤 네이션임을 강조하기에 바빴다. 치카샤 문화센터와 의회박물관 모두 치카샤가 이 땅에서 한 때 살다가 사라진 민족이 아니라, 지금도 왕성하게 확장되는 현재와 미래의 민족임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치카샤의 여성 지식인들을 대표한다고 생각되는 두 사람으로부터 들은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설퍼(Sulphur)시티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세련된 모습

 


건축미가 돋보이는 치카샤 컬츄럴 센터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세련된 모습

 


치카샤 컬츄럴 센터의 전시물[독수리 깃털로 만든 추장의 옷]

 


치카샤 컬츄럴 센터에서 만난 큐레이터 Deloris Jefferson

 


치카샤 컬츄럴 센터 전시관의 생활사 자료들[치카샤의 자부심이 드러나 있음]

 


치카샤 컬츄럴 센터 뒷편에 마련된 주거지 모형 위에서 멜라니

 


치카샤 컬츄럴 센터 안뜰에 세운 가족상

 


티쇼밍고 시티의 치카샤 네이션 의사당 건물

 


치카샤 의사당 건물 앞에 세워진 전사 티쇼밍고 상

 

분명치는 않으나 치카샤 족은 원래 촉토(Choctaw) 족과 함께 오늘날의 멕시코에서 시작되어 북미 쪽으로 이주했다 한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 근처에 살고 있었으며, 일부는 남부 캐롤라이나 주의 사바나(Savannah) 타운에도 살고 있었다.

치카샤 족이 미시시피, 앨라배마, 테네시, 켄터키 등지의 사냥터들을 비롯한 큰 땅을 점유하고 있던 때는 다른 부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시절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 에르난도(Hernando de Soto)가 이끄는 탐험대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들은 결국 과도한 요구를 하던 탐험대를 공격하여 패주시킴으로써 치카샤가 남동부 인디언 부족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존재라는 평판을 만들어 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남북전쟁 이후 백인 이주자들이 서부로 이동하면서 치카샤 족의 땅이 서부 팽창을 위한 주요 타깃으로 부상되었고, 루이지애나 매입지에 있던 미시시피 강 서쪽 땅을 미국정부가 차지하면서 치카샤 족과 다른 동부 부족들을 서부로 이주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1832년 이주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치카샤 족은 미국 정부에 굴복했고, 그 조약은 1834년에 다시 협상될 수밖에 없었다새 인디언 구역 안의 미시시피 서쪽에 살만한 땅이 찾아질 때까지 정부의 이주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조약 속의 주요 조항들 가운데 하나 때문이었다. 

 

 


1890년대의 치카샤 영역도

 

적절한 땅을 찾을 수 없었던 현실의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 촉토 족과의 동거였다. 다시 말하여 치카샤 족은 새로운 인디언 구역 내 촉토 땅의 한 부분을 빌려 이주할 것을 강요당한 것이었다. 1937년의 조약이 바로 그것인데, 자신들의 정체성[identity]을 잃고 촉토 족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사실 그들에겐 가장 큰 문제였다. 촉토 족 의회에 대표를 파견하긴 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들이 촉토 네이션의 소수자가 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불평등과 불합리를 해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과 투쟁을 기울인 결과 드디어 1837년 촉토 족으로부터 완전한 자신들의 땅을 매입하기로 조약을 맺는 데 성공했고, 1855년의 새로운 조약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네이션을 다시 한 번 갖게 되었다. 이런 시대가 1907년까지 지속되었으나, 인디언 구역이 오클라호마 구역과 통합되면서 이 지역은 오클라호마 주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렇게 치카샤 네이션이 종말을 고함에 따라 모든 치카샤 인들은 결국 미국인으로 통합될 수밖에 없었다.

 

 


치카샤 의회 박물관 간판




치카샤 의회 박물관 입구

 

1907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치카샤의 혈통이나 연고를 계승한 비공식적 기구들 몇 개만 있었을 뿐, 치카샤 네이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1856년의 치카샤 헌법에서 치카샤 인들은 부족의 추장이나 족장을 갖던 수준으로부터 선출된 거버너(Governor)’를 갖는 수준으로의 문명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정부에 대한 치카샤 인들의 권리나 땅 문제에 대한 협상 등 거버너가 수행해야 할 많은 일들을 미국의 대통령이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으므로, 이 시기가 치카샤 네이션에게는 사실상 죽은 기간(Limbo Period)’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인디언 운동가들이 거국적인 활동을 벌임으로써 인디언들의 권리가 새삼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 덕에 치카샤 족도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1983년 치카샤 네이션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헌법이 채택됨으로써 이 운동은 절정에 올랐으며, 결국 네이션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확대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치카샤 족이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먼저 이주한 촉토 족과 5년 간 힘든 협상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 1836년 땅을 사들이기로 합의한 뒤, 우선 53만 달러에 촉토의 서쪽 땅 대부분을 매입하여 1837년 상당수의 치카샤 인들을 이주시켰다는 점, 미시시피 강을 건너는 눈물의 여정[Trails of Tears]에서 500명 이상이 이질이나 천연두로 죽어나간 고통을 감내하면서 결국 현재의 땅에 안착하여 보금자리를 꾸린 점 등은 치카샤 족을 범상하게 보아 넘길 수 없게 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다전체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갖춘 데다가 티쇼밍고(Tishomingo)나 잔스턴(Douglas H. Johnston)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 덕에 그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미합중국의 일원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사 티쇼밍고(Tishomingo)의 모습 

 


초대 거버너 Douglas H. Johnston과 그의 집무실

모든 인디언 네이션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우리가 찾은 치카샤 네이션은 가족과 민족 공동체, 역사 유산 등이 보존되고 확산되어온, 문화적 발효의 공간이었다. 국가가 부족의 독점적 운영권을 보장한 카지노들이 상당수의 인디언 부족들에서는 부족원들을 나태하고 해이하게 만드는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지만, 이들은 그런 수입을 무의미하게 탕진하는 대신 2세 교육이나 산업에 대한 재투자를 통해 미래의 재원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예컨대 자신들의 2세들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학을 다닐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투자의 좋은 사례임을 티쇼밍고 치카샤 뱅크 뮤지엄의 큐레이터는 적극 강조했다.

 

 


The Bank of the Chickasaw Nation 건물[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뮤지엄 안의 각종 옛 서적 및 장부들

 


뮤지엄 안의 캐쉬어 창구

 


뮤지엄에 소장된 당시 은행의 금고

 


뮤지엄의 큐레이터와 함께

 

티쇼밍고에서 30분 거리의 Chickasaw White House에서 읽어낸 그들의 정신도 그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1895년 오클라호마 밀번(Milburn)에 세워진 이 집은 1898년부터 1971[이 해에 이 건물은 국가 등록 사적지로 지정되었음]까지 치카샤의 거버너 잔스턴(Douglas H. Johnston)과 그 후예들이 살던 저택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자신들의 거버너가 살던 집을 ‘White House’로 불렀을까. 백인 중심으로 꾸려가던 미합중국에 결코 꿇리지 않겠는다는 치카샤 나름의 민족적 자존심이 그런 이름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미국을 이끌고 나가는 백인들이 워싱턴에 ‘White House’를 갖고 있듯이 자신들도 이곳 오클라호마의 밀번에 자신들만의 ‘White House’를 갖고 있노라는 자존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가 만난 치카샤 인들 모두 그런 자존심을 갖고 있었다.

 

 


Chickasaw White House

 


화이트 하우스의 거실

 


화이트 하우스의 식당


화이트 하우스 주인의 서재

 


화이트 하우스 안내원과 함께 한 멜라니

 

***

우리는 밀번으로부터 한 시간 가량 달려 촉토 땅의 듀랭(Durant)이란 도시에 들어갔다. 우리의 관심은 이곳에 있는 삼강 계곡 박물관[Three Valley Museum]’과 와쉬타 포트(Washita Fort)였다. ‘어쩌면 이곳에서 치카샤와 촉토의 겹치는 문화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도심의 작은 호텔에서 잠을 청했다.

 

 

*치카샤 명칭 표기[Chickasaw/Chickasha]' 및 그 발음에 관한 문제

치카샤 컬츄럴 센터 큐레이터 들로리스(Deloris Jefferson)의 설명에 따르면, 치카샤 인들은 자신들의 명칭을 'Chickasha'로 적고 '치카샤'로 발음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공적인 문서들 대부분에는 'Chickasaw'로 적혀 있으며, '치카사' 혹은 '치카소'로 발음한다. 그러나 치카샤 인들은 미국식 보다는 자기들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나는 'Chickasaw'라는 미국의 공식 표기를 존중하되, 치카샤 인들의 생각도 존중하여 실제 발음은 '치카샤'로 하고자 한다. 

 

**치카샤 실[Seal, 문장(紋章)]에 대한 설명 

원 안에 있는 치카샤 전사의 모습은 치카샤 인디언들이 예로부터 위대한 용기를 지닌 사람들임을 상징하고, 그가 들고 있는 두 개의 화살은 치카샤 부족사회의 두 분파를 의미한다. 그 전사는 동쪽에 있는 고향을 버리고 서쪽의 촉토 사람들의 땅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추장 티쇼밍고다. 티쇼밍고는 치카샤 인들이 추앙하는 민족적 영웅이다. 티쇼밍고는 그의 부족원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트레일 도중인 1838년에 죽었다. 치카샤 인들은 그들만의 네이션을 만들기 위해 1856년 촉토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네이션을 만들어 그 수도를 티쇼밍고 시티로 명명했으며, 문장(紋章)으로 그의 용기를 선양했다. 1867816, 새 치카샤 네이션의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이 문장은 치카샤 네이션이 호클라호마 주에 편입, 해산될 때까지 모든 공식 서류들에 빠짐없이 첨부되어 왔다.

 

 


치카샤 네이션 문장[紋章, seal]

 


Chickasaw Council Museum에서 컬렉션들을 일일이 설명해 준 큐레이터 Flora Fink

 

 


다운타운의 치카샤 음식점에서 Flora Fink와 함께 한 점심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