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3.12.21 미국통신 40: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2. 2007.12.12 이탈리아 여행 제2신
  3. 2007.12.09 이탈리아 여행 제1신-1
글 - 칼럼/단상2013. 12. 21. 11:54

 

 

 

 

길 이야기

 

 

 

 

 

그대는 우울한 시절 햇살과 같아

그 시절 지나고 나와 지금도 나의 곁에서

자그만 아이처럼 행복을 주었어

 

~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든 가야만해

 

혼자서 걸어간다면 너무나 힘들 것 같아

가끔이라도 내 곁에서 얘기해 줄래

그 많은 시간 흐르도록 내 맘속에 살았던 것처럼

 

사랑도 사람도 나를 외면했다고 하지만

첫 새벽 공기처럼 희망을 주었어

 

오랫동안 소리 없이 내게 살아왔던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모처럼 접해 본 윤도현의 노래 <>이다. 행복한 사람도 상처를 입은 사람도 살아있는 이상 걸어가야 하는 것이 길이다. 길을 말하다가 너에 대한 사랑으로 끝맺는 윤도현의 노래가 좀 낯선가. 작사자는 누군가 먼 길을 가다가 문득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길동무로서의 를 발견했을 것이다. 혹은 를 통해 함께 걸어가야 할길을 예감했거나 함께 해야 할운명을 깨달은 건 아닐까. 그래서 윤도현의 와 함께 함으로써 운명적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가. 아니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이 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없다.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그건 길이 아니다. 언젠가 시작되었겠지만, 그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 길이고,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는 것이 길이다. 잘 찾아간 것으로 여겼지만, 곰곰 생각하면 잘 찾아간 길이 아닌 경우가 전부다. 그래서 다시 출발점을 찾지만, 그 찾으려는 출발점도 마치 끝인 양 잘 찾아지지 않는 것이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이 길다의 형용사와 관계가 깊은 명사라 한다. 옛 사람들은 마장으로 그 길이를 가늠해왔고 현대인들은 kmmile로 그 길이를 재고 있지만, 그건 그냥 인간의 짧은 인식이 만들어놓은 편리한 단위일 뿐이다. 끝인 것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길인데, 그 길을 누가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길을 찾다 보면 시작과 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지 않는가.

 

누군가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 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한시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웃으며 쉬면서도 갈 길을 걱정해야 하고, 다 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다시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갈 길과 돌아오는 길은 한 치도 끊어지지 않는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걸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사이에 부지런히 올레길을 찾고 둘레길을 찾으며 골목길을 헤맨다.

 

길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이 가면 길이 되고 길을 내면 사람이 다닌다. 그래서 인간세상에 길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옳은 길그른 길을 구분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길이 옳았는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시간의 기준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길을 찾아왔으나 제대로 찾은 사람은 많지 않고, ‘올바른 길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지만, 올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길을 찾으러 길을 나서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발로 밟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길이나 찾아다니며 맛볼 따름이다.

 

***

 

미국에 체류하면서 휴일이나 휴가에는 반드시 길을 나선다. 남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오클라호마 주는 미국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갖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음지에 속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식민주의'가 백인들의 원죄라면, 그 원죄의 역사적 표본을 이곳에 만들어 놓은 그들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새로운 삶터를 건설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백인들.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쫓겨나 눈물의 장정[Trails of Tears]’이란 쓰라림을 맛보며 대부분 오클라호마의 한 구석에 강제로 정착당한 인디언들. 그들 두 부류의 인간들은 오늘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클라호마주 전역 교통도

 


이번에 여행을 하고 있는 치카샤 및 촉토 인디언 지역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른바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 그늘을 확인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물론 각종 휴가나 방학 등을 활용하지만, 길이 너무 멀어서 쉽지 않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길의 매력에 있다. 내가 지금 사는 곳과 가려는 곳이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그 연결고리로서의 길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의 길들은 넓고 곧다. 특히 가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오클라호마의 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솜씨 좋은 장인이 대지에 그은 미학적 직선처럼 보인다. 그저 자를 대고 종이 위에 쭉 긋는 선이 미학이나 철학을 갖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대지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직격(直擊)하는 선은 생명이나 미학, 혹은 철학과 직결된다. 그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직선의 미학이 이곳 길들에는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동안 내가 천착해온 ‘66번 도로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직선으로 쭉 뻗은 오클라호마 주의 길들에는 들어 있다는 것이다.

 

 


Route 66 표지판

 


클린턴에서 스틸워터 오는 도중

 

땅이 넓으니 그런 것 아닌가라고 항변할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다만 나는 이미 나 있는 길들의 해석적 의미, 혹은 내 나름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길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장 큰 요소는 인공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길을 따라 형성된 도시나 주택 등 인공의 구조물들은 철저히 자연의 질서와 호흡을 함께 하는데, 그 점이 그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요인이다. 땅 넓이에 비해 사람 숫자가 턱 없이 적으니, 굳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아니라 어떤 나라라도 이런 도로들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엘크에서 클린턴 가는 도중

 

6개월 가까운 기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길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다. 자동차를 몰아 스위스의 산하를 건너고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잊을 수 없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다 밑으로 잠기는 듯한 충격을 스위스에서 운전하는 동안 느꼈기 때문이다. 동쪽의 바리항에서 서쪽의 나폴리까지 이태리를 횡단할 때 느낀 평화로움과, 프랑스 남부로 가기 위해 몽블랑 산맥의 터널을 넘을 때 느꼈던 혼돈과 재생의 희열을 그 후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프랑스 중남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하이웨이와 독일 로만틱 가도를 달릴 때의 편안함과 드라이버로서의 자긍심을 그 후 다시 느껴본 적이 없다. 동유럽 루마니아를 종단하면서 열악한 도로사정과 그들의 험한 운전 관습 때문에 흘린 땀과 긴장감을 그 후 어디에서도 다시 체험하지 못했다.

 

 


엘크 시 초입


치카샤에서 촉토로 넘어가는 길 어디쯤

 


OSU 중심을 가로지르는 먼로 길[Monroe Street]

 

***

 

15년 전 LA에 머물 때 간헐적으로 미국 안에서의 장거리 운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때 달리던 캘리포니아 서쪽의 1번이나 101번 해안도로를 잊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를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을 종단할 때의 그 천상에 오른 듯하던기분도 잊지 못한다. 미국 서부지역 사막지대의 가물가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난데없는 폭우를 만나 흔들거리던 차 안에서의 말 못할 두려움 또한 잊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시도 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길과 운전자들이다. 땅은 좁은데, 사람도, 차도 많아 참으로 운전하기 어렵다. 시간은 없는데 도로가 막히면 짜증이 난다. 교통신호나 법규를 지키려다간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규정 속도를 지키려다간 뒤차 운전자에게 모진 욕설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집단 스트레스에 걸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평소에 점잖고 존경받는 사람도 일단 핸들만 잡으면 매우 거칠어지는 것이 우리나라라고들 말한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누구나 세계 어딜 가도 최고의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끼어들기 천재, 앞지르기 천재, 신호위반 천재, 차선 안 지키기 천재, 경적 심하게 울리고 라이트 번쩍거리기 천재, 창유리 내리고 욕설 퍼붓기 천재 등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숨을 건 곡예운전의 달인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운전을 그만 두어야 그나마 제 명대로 살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

 

미국에서는 길, 특히 오클라호마 주와 같은 전원지역의 길들 덕분에 행복해진다. 야산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 사이를 달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진다. 길 좌우에는 목장이 이어지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검정 소들이 가끔 고개를 들어 달려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목초지에서 베어낸 풀들을 말아놓은 건초뭉치들도 흡사 십대 남자 아이 얼굴의 여드름처럼 아름답게 돋아 있다.

 

 


킹피셔 인근 지역도로

 


킹피셔 인근지역에서 포착한 지평선 위의 소들

 


치카샤에서 촉토로 가는 도중, 산중의 한 목장을 지나면서 만난 소들. 이들을 가까이 보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더니 글쎄 이 녀석들이 웅얼거리며 걸어와 우리를 유심히
쳐다 보더군요. 우리가 그들을 구경한 게 아니고,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형국이었지요.
      사람 보기 어려운 산 속의 목장에서,동양인을 보기란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신기한 눈초리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의 모양을 보며
내심 얼마나 멋쩍던지요.

 


촉토 인디언 지역[이곳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한 산악지역임]에서 만난 길

 


치카샤 지역의 길을 달리다가 만난, 어떤 목장 입구

 


토우손(Towson) 포트(Fort) 근처 길가에서 만난 농장입구[아마 주인 부부의 이름이겠지요?]

 

그 뿐 아니다. 땅 속에서 원유를 퍼내는 검은 색 채굴기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것들은 흡사 사마귀처럼 끄덕거리며 원유를 길어 올린다. 흡사 까치집처럼 생긴 겨우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은 교목들이 길 좌우에 즐비하고, 다운타운을 벗어난 도시 외곽의 나무숲에는 멋지게 지은 집들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을마다 하얀색의 교회들이 하늘 높이 첨탑을 높이 올린 채 서서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쳐져 흥미로운 서사구조들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그래서 길은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고, 각종 사건을 재료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발효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사랑하고 길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마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글로벌 시대에 누군들 역마살을 피해갈 수 있으랴. 그리고 어쩌면 역마살이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의 매력에 심취한사람들일 것이다. 역마살이 끼었대도 좋으니, 의미를 찾아 방황할만한 좋은 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스틸워터로 돌아오는 길에 잡은 한 컷[주택 옆에 목장이 있고,
그 곁에서 원유채굴기가 작업을 하고 있음].


아무 보는 사람 없어도 끄덕거리며 혼자서 열심히 원유를 길어 올리는 장한 채굴기

 


177번 도로를 달리다가 발견한 소규모 인디언[Iowa Tribe] 집단 거주지의 표지판

 


오클라호마주 길 위에는 늘 태양이 빛난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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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12. 12. 17:23
이탈리아 제2신
    
                          깊고 화려한 역사,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
                              -나폴리의 환상과 현실


1월 3일 월요일.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폼페이를 떠났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베수비우스산은 여전히 말이 없고, 음산했던 폼페이는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스르르 묻혀져 갔다. 폼페이 시내에 있는 베수비우스 박물관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건져낸 삶의 편린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나폴리. 도시를 따라 펼쳐진 해변의 한 부분으로 들어온 듯, 차창으로 바닷 내음이 울컥 밀려들었다. 궂은비는 사정없이 내려 가난한 나그네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신경질적인 경적소리와 위협하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난무했다. 도로 주변에 그득그득 쌓인 쓰레기는 비에 젖은 채 널브러져 있고, 가득 메운 차량들은 움푹움푹 파인 도로의 흙탕물을 사정없이 튀기며 질주했다.
주변에 호텔은 즐비했다. 그러나 어딜 가도 턱없이 비싸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이탈리아식 흥정’을 벌여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차장. 주차장을 갖고 있는 호텔이 거의 없었다. 늘 차량의 안위(安危)를 먼저 고려해온 우리였다.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차가 없었다면 그 먼 길을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보단 없어질 경우 그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시종일관 호텔 선택의 첫 조건이 ‘차의 안전을 보장할만한’ 주차장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후 세 시 가까운 시각에서야 그 유명하다는 ‘나폴리 핏자’로 점심을 때웠다. 계속되는 호텔 탐색전. 어둑어둑해지는 4시쯤 구시가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과 차의 엄청난 물결이 휩쓸고 다녔다. 일방통행 구간이 많아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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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핏자와 파스타


3, 4차선 도로에도 보행자 신호등이 없었다. 차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잽싸게 앞질러 달리는 차량들. 길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속력을 늦추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짜증스런 경적 소리. 도로 좌우로 꽉 들어찬 우중충한 건물들. 너무 좁아 있으나마나한 인도. 그나마 도처에 펼쳐진 공사판. 차와 사람들이 엉겨 붙은 차도. 그 틈을 비집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숨쉬기조차 어려운 매연. 비에 젖어 달라붙은 휴지조각들... 더러움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그 도로들을 오르락내리락 하길 여러 차례. 오후 6시가 넘어 깜깜해진 시각에야 항만에 인접한 호텔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나폴리를 그냥 포기하고 떠나버릴까’ 망설이던 끝이었다. 호텔은 허름했으나, 창문을 여니 전망이 기가 막혔다. 바로 앞에 부두가 있고, 그 너머로 지중해의 파란 물이 그득했다. 부두엔 환하게 불을 밝힌 페리선 여러 척이 정박해 있고, 선착장 곳곳에 서 있는 지구 모양의 조명등은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다. 주차장과 배들 사이로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 비로소 이곳이 항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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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누가 나폴리를 미항(美港)이라 했을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배들이 정박한 항구를 내려다보며 서운했던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발만 시내로 들여놓으면 나폴리는 ‘지저분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나폴리를 미항이라고 예찬한 누군가의 ‘턱없는 과장’, 우리는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할 의무(?)까지 지게 된 셈이었다.
 1월 4일 아침, 창 밖으로부터 맑은 햇살이 비쳐왔다.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는 에머럴드 빛깔의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페리들의 하얀색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내로부턴 여전히 차량들의 소음이 퍼붓듯 몰려오고, 도로엔 날 선 병 조각들과 날리는 휴지조각들이 여전했다. 어젯밤의 그 모습에 햇살만 사알짝 내려앉았을 뿐.
햇살은 비에 젖은 쓰레기를 말리고, 마른 쓰레기는 다시 먼지를 피워 올릴 태세였다. 차량들과 사람들은 어제처럼 한데 엉겨 도로를 가득 메울 것이고, 그 위에 또 휴지를 버리고 담배꽁초들을 뱉어낼 것이다. 그렇게 ‘미항’이란 ‘미명(美名)’이 붙여진 나폴리를 우리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깜빠냐Campania주의 주도 나폴리. 그러나 나폴리는 기원전 6세기부터 외세를 포함한 지배세력의 잦은 교체를 겪어왔다. 그리이스(기원전 6-5세기)를 시작으로 노르만족(12세기), 앙주Anjou·아라곤Aragon 가문(13세기), 스페인(16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가(18세기) 등 다양한 세력들이 나폴리를 지배했다.
도시의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 그래서 단순히 항만도시라는 이름으로 나폴리의 역사적 의미를 덮어버릴 수는 없다. 복잡다단한 거리만큼이나 의미 있는 역사유물 혹은 유적들이 다양했다. 나폴리의 역사 유적 혹은 관광 포인트는 구역에 따라 대충 10 개 정도로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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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서점가 골목


플레비스치토Plebiscito 광장과 왕궁, 성 프란체스코 교회, 성 페르디난도 교회, 제발로스Zevallos 궁전, 성 브리지다Brigida 교회, 누오보 성Castel Nuovo, 성 지아코모 데글리 스파뇰리San Giacomo Degli Spagnoli 교회, 성 마리아Santa Maria di Portosalvo 교회, 성 피에트로 순교자San Pietro Martire 교회, 피에트라르사Pietrarsa 철도박물관 등을 첫 구역으로, 단테Dante 광장, 삼위일체 교회, 성령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 그라비나Gravina 궁전, 기우소Giusso 궁전, 파파코다Pappacoda 성당 등을 둘째 구역으로, 성 테레사 교회, 성 뽀티또Potito 교회, 벨리니Bellini 극장, 성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레 모나체 교회, 국립 고고학박물관, 성 겐나로 카타콤, 카포디몬테 박물관, 천문대 등을 셋째 구역으로, 프라마리노 궁전, 대주교 궁전, 아포스톨리 교회, 성 죠반니 교회, 포르타 카푸아나 광장 등을 넷째 구역으로, 벨리니 광장, 성 피에트로 아 마이엘라 교회, 폰타노 성당, 로마 수도관, 성 로렌쪼 마기오레 교회, 카푸아노 성 등을 다섯째 구역으로, 성 세베르토 성당, 파로라미타 궁전, 몬테 디 피에타, 성 죠르지오 마기오레 교회, 코모 궁전 등을 여섯째 구역으로, 몬텔레오네의 피그나텔리 광장, 성 치아라 단지, 성 도메니코 마기오레 교회, 코리글라노 광장 등을 일곱째 구역으로, 벨베데레 저택, 루치아 저택, 성 카를로 교회, 타르시아 궁전 등을 여덟째 구역으로, 예술과 산업 박물관, 성 크로체 교회, 델로보 성, 세싸 궁전, 시나고그, 루터란 교회, 비르길의 무덤, 앵글리컨 교회 등을 아홉째 구역으로, 델라 보르사 궁전, 성 펠리체 저택, 페이르체 저택, 보비노 궁전, 갈리 궁전, 스페라 저택 등을 열째 구역으로 각각 나눌 수 있으리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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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 누오보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계속>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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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12. 9. 18:02
이탈리아 제1신 :            삶은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폼페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소설과 영화로 이미 우리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준 도시. 그러나 현장에서 보는 폼페이는 허구화된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정겹고도 슬픈 현실의 공간이었다.
정겨움과 슬픔. 일견 모순적인 두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모습들과 큰 차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전자이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속에 생명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후자이리라. 그 날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던 베수비우스 산정엔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용하게, 흡사 경고라도 하려는 듯 침묵 속에 무언가를 피워 올리는 그 자태가 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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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폼페이 극장


지금으로부터 1926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 이른 오후. 한창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시각. 대부분의 폼페이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 일상에 분주하던 바로 그 때, 엄청난 포효와 함께 베수비우스산은 폭발했다. 검은 화산재는 용암과 함께 분화구를 솟구쳐 나와 도시를 덮쳤고. 단숨에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린 죽음과 파괴의 견고한 울타리로 변했다. 영광과 긍지의 폼페이는 일순 지표에서 6-7m 아래로 매장되고 말았다.
기원전 8세기 경, 티레니안 해변을 따라가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단의 오스칸(Oscan) 사람들. 과거 언젠가 베수비우스산의 융기로 만들어진 높은 지역에 마을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것이 폼페이의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였다. 그 때문에 속속 이 지역의 주역들은 바뀌게 된다. 에트루스족(Etruscans), 그리이스족(Greeks), 샘족(Samnites) 등. 결국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기원전 80년엔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콜로니아 베네리아 코르넬리아 폼페이(Colonia Veneria Cornelia Pompeii)'란 이름도 갖게 되었고.
화산재에 덮인 지 1천 7백년 후 사르노(Sarno) 계곡에서 터널을 건설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명문(銘文) 석판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파묻힌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1748년 실질적인 첫 탐사가 챨스 부르봉(Charles Bourbon)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1세기 가량 뒤인 1860년 쥬제뻬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에 의해 ‘신화 속의 폼페이’는 기적적으로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80% 정도만 빛을 보았고, 나머지 20%는 아직도 암흑 속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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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죽은 일가족의 모습


3km의 긴 성벽에 여덟 개의 문을 가진 폼페이. 서쪽에는 신전들과 공공건물들이 있는 포럼(Forum)이, 앞쪽에는 대극장과 일반 주택들이, 성문 밖에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가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바다로부터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폼페이. 그러나 화산 폭발 후 항만이 메워져 그 거리는 2km로 늘어났다. 물론 항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도 알 수 없지만. 폼페이에서 가장 오랜 건물들은 기원전 6세기의 것들. 그 후 도시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 2세기 후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폼페이, 스타비아(Stabia),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등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장군 실라(Silla)가 이들을 재 정벌했다. 원주민들은 새 이주자들에게 공간을 내주고 떠나야 했다. 폼페이 유적들의 건설 시기가 대부분 기원전 80년경인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에 의해 정비된 폼페이에 적용된 것은 합리적인 도시 시스템. 특히 둥글고 넓은 돌로 포장된 도로와 물 공급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도로포장엔 베수비우스 산의 암반으로부터 가져온 둥글 넙적한 돌들을 사용했고, 사르노 강과 샘에서 물을 받아 도시 전역에 파이프로 공급해주었다. 주 송수관은 포장도로 밑에 묻혀 있었으며, 그 송수관들을 통해 부유한 주민들의 집과 공중목욕탕, 가난한 서민들이 사용하던 공공 파운틴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폼페이의 인구는 8000에서 1만명. 약 6할이 자유민, 4할이 노예들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동방 출신들로서 교육수준도 높았다. 그 가운데는 주인보다 훨씬 교육수준이 높은 노예들도 있었다. 잘 사는 집은 2, 3명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고, 그보다 나은 집에서는 더 많은 수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노예들 가운데는 박사도 교사도 있었다는 사실. 어떤 노예가 원한다면 주인의 은전(恩典)을 입거나 많은 금액의 돈을 지불함으로써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미로와 같은 폐허를 누비고 다녔다. 사통팔달된 도로를 경계로 나누어진 구획들에는 주택들과 공공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각각의 주택들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 때문인 듯 규모나 구조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호화로운 흔적들이 역력했다. 특히 화덕이 설치된 부뚜막은 그림 같은 무늬가 화려한 대리석을 매끄럽게 갈아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뿐 아니라 몇몇 집이나 건물들엔 아직도 생생한 그림들이 벽화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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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판 '비너스의 탄생'


원형 경기장, 극장, 공공건물, 신전, 일반 주택 등을 비교적 자세히 돌아본 우리들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서쪽 메인 포럼의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 공중목욕탕, 그리고 그림들.
메인포럼은 폼페이의 아크로폴리스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이곳엔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이 있었다. 그곳 정면에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활을 쏘는 아폴로. 근육질의 몸매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얼굴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들도 태양과 달을 숭배하여 가장 높은 곳에  둘의 신전을 세워 놓았던 것인가.
다음은 공중목욕탕. 기원전 수세기의 도시인들이 공중목욕탕을 사용한 흔적을 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가끔씩 사우나엘 가보지만, 그 때마다 형편없는 시설과 서비스에 불만을 느껴오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3, 4백 년 전의 이들이 멋진 목욕탕에서 향유하던 삶의 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건물 벽이나 바닥, 혹은 천장에 남아있는 상당수의 그림들도 만났다. 화려한 채색이, 멋진 선이 아직도 살아 생생했다. 그 뜨거웠을 화산재도 그들의 예술을 망가뜨리진 못했으니, 놀랍도다.
그림들의 오브제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화조(花鳥)나 사자 등 동물들도 있었다. 두루미와 원앙이 연꽃을 희롱하는 그림은 흡사 동양화를 보는 듯 했고, 모자이크 화의 섬세함은 참으로 놀라웠다. 뛰어난 형상력과 색채감, 지금의 그림들 못지않거나 오히려 능가한다고 보면 좀 지나친가.
그런데 어찌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그곳 담당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출토된 것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라고. 그러자 그는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폼페이 그림의 진수는 모두 그곳에 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내일 나폴리에 가면 우선적으로 고고학박물관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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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탄생' 근처에서 발견한 그림('옥타비안의 최후'로 기억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놀랍고 슬프게 한 것은 출토품들을 임시로 저장해놓은, 이른바 ‘뮤지엄’이었다. 그곳엔 대량의 그릇들(주로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담기 위해)이 있었고, 간간이 미이라처럼 굳어진 시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 그대로의 미이라가 아니었다. 화산재에 묻힌 시신들은 썩어 없어졌고, 굳어진 화산암 속에는 시신들이 사라진 공간이(사람들이 죽을 때의 모습으로) 생겨난 것이다. 훗날 발굴할 때 그 틈에 석고를 부어넣어 응고시켜 만들어낸 것들이 바로 그 시신들이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모으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엎드려 몸부림치는 모습,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꼬부린 모습 등.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순간만은 모호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들은 죽음의 재가 덮이는 순간 과연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가슴에 밀려드는 슬픔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한낮이었으면 낮잠을 즐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일터에서 땀을 흘리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길 하나 건너 이웃집에 마실 나간 아낙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 파운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등물을 하던 떠꺼머리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그들은 화산재에 묻혔다. 일가족이 얼어붙은 듯 죽어있는 모습. 어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 젖먹이는 어째서 이런 천재(天災)의 희생이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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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수비우스 산(이 산이 그토록 무서운 불을 뿜었답니다)


서유럽에서 우리는 매끈한 현재진행의 역사만 보았다. 과거가 고스란히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 잘 나가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우리는 정지된 시간과 공간을 보았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로 남아 있었다. 대리석 기둥은 연필심처럼 부러져 나뒹굴고, 단단한 초석도 조각조각 난 채 쳐 박혀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건 처참한 패배이자 소멸이고, 좌절이었다. 소생의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투철한 안목을 지니지 못한 우리에겐 일단 ‘허무’였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욕망이었다. 인간 욕망의 보편적인 귀결은 허무임을 그들은 깨어진 돌조각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잠시 혼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지금 죽은 듯이 보이는 그 역사가 과연 완전 소멸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지금도 9·11테러, 이라크 전쟁 등 인간 문명에 관한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사건들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들은 물질의 폐허가 아닌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쯔나미’처럼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초토화시키는 자연재해 또한 빈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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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구시가지와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시가지의 대비되는 모습


폼페이에서 인류문명이 봉착할 수도 있는 위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우리.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인근의 나폴리로 향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폼페이 유물들을 통해 폼페이의 문명사적 의미를 좀더 살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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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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