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01.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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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01.11 09:07

 

 


아파치 네이션 본부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족 문장(紋章)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 문장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아파치 시내 입구 아파치 파크 안에 마련된 '아파치 참전용사 공원' 추모비

 

 


추모비의 아래쪽에 '미 육군 일병 실라스 W. 보이들, 한국전에서 1950년 10월 31일
적에게 잡혀 죽었다'고 쓰여 있다.

 

 


포트실 치리카화 웜스프링스 아파치족 사무소
(Fort Sill Chiricahua Warm Springs Apache Tribal Office)

 

 


차창으로 내다 본 아파치 시가지

 

 

 


아파치 역사 박물관[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3)

 

 

아파치 정신을 찾아 대평원으로!

 

 

 

 

 

아나다르코의 카이오와로부터 아파치와 코만치를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벌판 위엔 누렇게 마른 풀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검정색 소들만 주인행세를 하는 듯 늘어서서 게으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 탄 아파치의 전사들처럼 바람은 사정없이 달려와 나그네의 뺨을 찌르는데, 지평선은 망망하여 지고 뜨는 해의 방향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가에는 물어볼 사람도 집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수십 분을 더 달리니 벌판 위에 포트 실 치리카화 웜 스프링스 아파치 족 사무소[Fort Sill Chricahua Warmsprings Apache Tribal Office]’라는 글자들을 벽에 달고 있는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포트실 아파치 족은 연방으로부터 인정받은 오클라호마 내의 미국 원주민 종족이니, 이곳 아파치가 미국 내 전체 아파치 족을 대표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무소에 들어가니 전체적으로 썰렁했다. 내부는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했으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인디언 아가씨는 친절했고 설명 또한 구체적이었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20마일쯤 달려가니 아파치 시티가 나왔고, 그 입구에 아파치 시티 팍(Apache City Park)이 있었으며, 그 한쪽에 참전용사들의 공원[Veterans Park]’이 있었다. 아파치 족 출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한국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죽은 젊은 군인의 이름도 비석에는 올라 있었다. 어딜 가도 한국전 전몰용사들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는 곳이 미국이었다. 적어도 미국에서만큼은 625가 잊혀진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고, 아파치 인디언들의 본고장에서 그 점을 확인했다는 것이 감동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생활 형편들이 괜찮은지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연도의 주택들에는 남부지역 도시로서는 드물게도 윤기가 흘렀다.

 

이 지역의 아파치 인디언들은 원래 알래스카 지방이나 캐나다, 미국 서부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마 오랜 옛날 아시아와 미주가 연결되었을 때 알라스카와 캐나다로 건너온 아시아계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리라. 그들이 로키 산맥을 따라 캘리포니아 등 미국의 서부 지역으로 내려왔고, 다시 그로부터 동쪽 혹은 남부의 대평원 지역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따라서 아파치는 한 지역에서 결코 오래 정착해본 적이 없고, 원래 정착할 수도 없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노마드(Nomad)’였다. 그처럼 수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수적이었다. 그들이 말을 타거나 활용하는 방법을 익힌 첫 부족들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700년경 캔자스 평원으로 이동한 아파치 부족원의 다수는 그곳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자 했으나, 농사일에 익숙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박, , 옥수수 등 농작물들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런 약점 때문에 나중에 코만치 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땅도 빼앗겼으며, 뉴멕시코나 애리조나 등지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텍사스와 멕시코 쪽으로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곳을 지배하던 스페인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다. 1730년대 아파치 인들은 스페인 사람들과 피나는 전쟁을 시작했고, 1743년이나 되어서야 스페인의 지도자가 텍사스 일부 지역을 이들에게 살 수 있도록 양보하면서 땅을 두고 벌어졌던 싸움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1749년의 한 의식(儀式)에서 아파치 추장은 싸움이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손도끼를 땅에 묻었는데, 그 이후로 오늘날도 손도끼를 땅에 묻다는 말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하게 되었다고 하니, 재미있는 일이다.

 

원래 아파치(Apache)’란 말은 문화적으로 관련 있는 미국 남서부 원주민들의 그룹을 지칭하던 집단 명사였다. 원래 아파치 사람들은 동부 애리조나, 멕시코 북부, 뉴멕시코, 텍사스 서부 및 남서부, 콜로라도 남부 등지에 걸쳐 살았고, 그 지역은 고산 지대, 물이 풍부한 계곡지대, 크고 깊숙한 협곡, 사막, 남부의 대평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파치 족의 하부그룹들은 약간의 정치색을 띤 몇 개의 부류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규모가 큰 일곱 개의 그룹들은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각자의 독특한 문화를 경쟁적으로 발달시켰다. 나바호(Navajo), 서부 아파치(Western Apache), 치리카화(Chiricahua), 메스칼레로(Mescalero), 지카릴라(Jicarilla), 리판(Lipan), 대평원 아파치(Plains Apache) 등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그룹들이다. 현재 이런 아파치 족들 대부분은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에 살고 있고, 애리조나와 뉴멕시코의 보호구역들에도 살고 있다. 이들 외에 일부 아파치 인들은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큰 규모의 도시지역 공동체로는 오클라호마 시티, 캔자스 시티, 피닉스(Phoenix), 덴버(Denver), 샌디에고(San Diego),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등이 꼽힌다.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처럼, 아파치 족은 역사적으로 매우 강하고 전략적인 민족으로 인정을 받아왔는데, 몇 세기 동안 스페인과 멕시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명성이었다. 미국 육군 역시 19세기에 들어와 그들과 몇 번 대결해 보고 나서는 아파치가 강한 전사들이자 기술적인 전략가들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파치족은 미국과 40여 년 간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으며, 심지어 남북전쟁 때 북부군과 남부군이 서로 싸우는 처지에서도 양자 모두 아파치와의 전쟁을 지속했다니, 그들의 용맹성을 이보다 더 분명히 입증해주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수레를 타고 가는 아파치 가족

 

 


떠돌이 생활을 하는 아파치족

 

 


아파치족의 전통가옥인 티피(Tipi)

 

 

 


아파치족의 바구니들과 약초들

 

 


치리카후아 아파치족의 주술사이자, 아파치 전쟁 중 멕시코와 미국을 상대로 투쟁했던
아파치족의 걸출한 지도자 제로니모. 1909년 2월 17일 포트실 감옥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음.

 

 

 


아파치족의 다양한 모습들

 

 

 


아파치족의 각종 전통그릇들

 

 

 


포스트 가드하우스(Post Guardhouse)의 당시 모습.
현재는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으로 쓰이고 있음.

 

 


포트실 역사 박물관(Fort Sill Historic Landmark & Museum)

 

 


포트실 역사박물관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

 

 

 

대부분의 아파치 인들도 다른 부족들처럼 네이션이나 보호구역의 범주 안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연방정부에 의해 공인된 것만 해도 아홉 개나 된다. ‘오클라호마의 아파치 족[Apache Tribe of Oklahoma]/애리조나 주 포트 맥도웰의 야바파이 네이션[Fort McDowell Yavapai Nation, Arizona]/오클라호마 주 포트 실의 아파치 족[Fort Sill Apache Tribe of Oklahoma]/뉴멕시코 주의 지카릴라 아파치 네이션[Jicarilla Apache Nation, New Mexico]/애리조나 주 산 카를로스 보호구역의 산 카를로스 아파치 족[San Carlos Apache Tribe of the San Carlos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톤토 아파치 족[Tonto Apache Tribe of Arizona]/애리조나 주 포트 아파치 보호구역의 화이트 마운틴 아파치 족[White Mountain Apache Tribe of the Fort Apache Reservation, Arizona]/애리조나 주 캠프 버디 인디언 보호구역의 야바파이 아파치 네이션[Yavapai-Apache Nation of the Camp Verde Indian Reservation, Arizona]’ 등으로 다른 부족들에 비해 수가 많은 편이다.

지금 우리가 찾아다니는 오클라호마의 아파치는 대평원의 아파치로서 아나다르코(Anadarko) 근처에 본거지를 두고 있으며, 위에 제시한 바와 같이 연방정부에 의해 오클라호마 아파치로 인정된 그룹이었다.

 

그런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현지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아파치 시내에서 만난 아파치 히스토리컬 서사이어티 뮤지엄(Apache Historical Society Museum)’은 예상대로 많은 생활문화사 자료들을 갖추고 있었다. 가정생활, 산업, 학교, 운송, 의료기구, 의상, 가구, 서적, 사진, 초창기 은행 시설, 회화, 아파치 시민들의 개인 기념물 등 모든 분야의 콜렉션들을 풍부하게 보유한 점에서 아파치족의 역사와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1901~19022층으로 세워진 이 석조 건물에는 애당초 아파치 주립은행 사무실과 다른 업종들이 입주해 있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76년부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후 40년 가까이 모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을 통해 아파치족이 근대에 이룬 문명화의 자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을 떠나 10분 정도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포트 실 군사 보호 구역[Fort Sill Military Reservation]’ 안에 있는 포트 실 국립 역사 랜드마크 박물관[Fort Sill National Historic Landmark & Museum]’이었다. 이곳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 육군의 군사기지인 만큼 출입문을 통과할 때부터 현역 군인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드넓은 부지 한 군데에 오래 된 2층 벽돌집이 있고, 그곳이 바로 이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박물관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지키는 사람도 없이 자동으로 음성 설명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 주로 죄를 지은 아파치 인디언들을 구금하고 처형하던 형무소가 원래 이 건물의 용도였고, 박물관으로 변신한 지금 당시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아파치 인디언들이 겪어온 고난과 질곡의 세월을 보여주고 있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구금되고 형을 받았겠지만, 백인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저지른 죄와 받은 형벌이 과연 얼마나 공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아파치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다른 어느 부족들의 땅보다 넓고 다양한 지역에서 각 그룹마다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미국 정부에 가장 길고 끈질기게 저항했던 용맹한 전사들이 바로 아파치족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평원의 주인이자 맹장으로서 주변 부족들을 상대로 투쟁과 화해의 전술을 다양하게 구사해 온 탁월한 전략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고 보존해온 생활사의 다양한 자료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타고난 성품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영역의 어느 박물관을 가도 촬영을 허락하지 않았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도 다른 부족에 비해 자신들의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소개나 설명은 거의 없었다. 그 점은 그들의 폐쇄성에 대한 근거로 들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부심과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었다. 서부영화에 용맹한 부족으로 약방의 감초 격으로 등장해 온 아파치족. 이들의 거친 정신은 바야흐로 미국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는 서부문화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약간은 거칠지만, 개척자로서의 미국정신에 자극을 줌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의 형성에 한 몫 거들었다고 한다면, 과언일까.<다음에 계속>

 

 

 


가드하우스의 인디언 경찰 수장인 코만치족 출신의 아르코(Arko).
군인 자켓을 입고 있는 1884년 모습.

 

 


가드하우스 지하 감방의 복도

 

 

 


가드하우스 밖에 있는 나무에 걸고 교수형을 집행하던 목줄

 

 

 


당시 나뭇가지에 목줄을 걸어 교수형을 집행하던 광경

 

 

 


죄수들에게 벌을 주던 징벌방의 모습

 

 

 


아파치족 소녀들

 

 

 


야바파이 아파치족 여성 합창단

 

 

 


1880년경 죄를 지은 Boomer들을 잡은 군인들과 인디언 경찰들

 

 

 


아파치족 데블 댄서(Devil Dancer)들

 

 

 


치리카화 아파치족 주술사[Chiricahua medicine man]

 

 

 


아파치족의 구슬장식 공예품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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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01.08 17:26

 

 

 

 


영화 <아파치 요새>의 포스터

 

 


영화 <론 레인저>의 포스터

 

 

 
<아파치 요새>에서 좌측이 헨리 폰다(Henry Fonda), 우측이 죤 웨인(John Wayne)

 

 


<아파치 요새>의 한 장면

 

 

 
영화<론 레인저>의 한 장면. 왼쪽이 쟈니 뎁(Johnny Depp), 오른쪽이 아미 해머(Armie Hammer)

 

 


<론 레인저>의 한 장면

 

 

 

 

 

서부지역 인디언들과 대평원[The Great Plains]

 

 

 

 

하이틴 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영화를 그리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들은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서부영화들이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으나, 관통하는 서사구조는 단 하나 선악의 대결이었고 주제는 미국 판 권선징악이었다. 선을 대표하는 백인들은 늘 당당하고 정의로우며 멋있었던 반면, 악을 대표하던 인디언들은 늘 무지(無知)무명(無明)무뢰(無賴)의 저급한 무리들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세계인의 편견과 무지는 이처럼 대부분 서부영화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어느 날 웬놈들이 밖에서 뛰어 들어와 채찍을 휘두르며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천추만대 원한에 사무칠 일인데, 전 세계의 코흘리개들도 다 보는 영화에 가해자인 백인들은 정의의 사도로, 피해자인 자신들은 몹쓸 불한당(不汗黨)으로 그려냈으니, 그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 기억으로는 20055월에서야 미국의 상원은 인디언 6천만 학살에 대한 사과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죄가 어찌 사람 죽인 일뿐일까. 당시로서는 몹쓸 땅에 그들을 짐승처럼 몰아넣은 점까지 계산하면, 그 죄가 하늘에 닿고도 남을 백인들이었다. 나찌 독일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왜인들이 전쟁터로 광산으로 징발하거나 허물을 뒤집어 씌워 죽인 우리 민족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당시 총인구 5천만~1억을 헤아리던 인디언들 가운데 살해된 비율이 80~90%라니,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했다 한들 미국 백인들의 끔찍한 죄악을 어떻게 계산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런 사건으로부터 무려 2백년이나 지나서야 이제 사과나 해볼까?’하고 궁시렁 거리며 나섰고,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더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싱턴 D.C. 의회 묘지에서, 체로키촉토무스코기포니시스턴와페톤오야테 등 5개 부족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캔자스 출신의 공화당 상원 샘 브라운백 의원이 사과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의회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 전 해 11월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564개 부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디언들에 대한 그동안의 횡포와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사과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정부로부터 무수한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디언들로서는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진작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고, 사과를 늦게 한 데 대하여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억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인디언들을 눈곱만큼이라도 배려했다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미지라도 진실에 가깝게 만들거나 긍정적으로 묘사했어야 하건만, 서부영화 같은 매체들에서 보듯이 그들의 모습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할 정도로 왜곡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 점이 제삼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나바호(Navajo), 체로키, (Sioux) 등 규모가 큰 종족들을 포함, 564개 종족에 3백만 이상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소수부족으로서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한 종족이 아파치(Apache)와 코만치(Comanche).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아파치 요새(Fort Apach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죤 포드(John Ford) 감독이 만들었고, 죤 웨인(John Wayne) 및 헨리 폰다(Henry Fonda) 등 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인데, 인디언에 대하여 비교적 따스한 관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부영화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감독은 주인공인 요크 중령[죤 웨인]을 통해 아메리카 인디언 특히 아파치 족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래 사납고 공격적이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아파치를 동정적포용적 관점에서 바라 본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교적 긍정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으로 떠나오기 직전인 작년 7월 하순 경, 한국에서는 론 레인저(The Lone Ranger)’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쟈니 뎁(Johnny Depp)이 열연한 주인공 톤토(Tonto)는 바로 코만치 인디언이었고, 영화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유타콜로라도 애리조나뉴멕시코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는 그레이트 플레인즈에 포함되는 공간이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지닌 톤토는 죽기 직전의 외로운 레인저존 레이드(John Reid)를 살려냄으로써 결국 그들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황야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액션들은 코만치 인디언인 톤토와 백인 레인저 존 사이에 교감되는 우정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백인들과 인디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만치 추장 빅베어(Big Bear)의 말[‘우리 시대는 사라졌네. 백인들은 그걸 발전이라 부르는 모양이네만.’]이 추가되면서 그간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된 백인과 인디언의 이미지 혹은 양자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반성이나 의식 또한 새롭게 제기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리라.

 

***

 

인디언을 찾아다니기 몇 달 만에 대평원의 주인공 아파치와 코만치, 그리고 카이오와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대평원의 주인들이었다. 오클라호마 동북쪽에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이 있다면, 서남쪽에는 '대평원[The Great Plains]'이 있다. 그렇다면 대평원은 어떤 공간인가. 알버타(Alberta), 새스캐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등 캐나다 남부를 포함, 몬태나(Montana)노쓰 다코타(North Dakota)사우쓰 다코타(South Dakota)와이오밍(Wyoming)네브라스카(Nebraska)콜로라도(Colorado)캔자스(Kansas)뉴멕시코(New Mexico)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 , 로키산맥(Rocky Mountain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사이의 미국 땅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남북 간 길이는 3,200 km, 동서의 폭은 800 km, 면적은 1,300,000 이니, 남한 면적[99,538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대평원은 주 전체 면적의 60%나 차지할 만큼 거대하다. 그 안에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다음에 계속>

 

 


워싱턴 D.C.의 미 의회 묘지 

 


캐나다에서 미국 남부까지 걸치는 대평원(The Great Plains)

 

 


대평원의 한 부분

 

 


대평원 한 가운데를 달리는 하이웨이

 

 


대평원의 바이슨 무리

 

 


대평원의 한 부분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의 집단 거주지를 찾아.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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