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03.24 12:27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님께

 

 

 

 

탄핵 소추가 의결되면서부터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국정수행에 대해서도 비판과 비난이 난무하고, 일부 정치세력들의 무리한 딴죽걸기 또한 없지 않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나날이시겠지요. 그러나 비록 한시적인 대행이라 할지라도, 국가원수로서 하셔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제 미국의 매티스 국방장관은 상원 세출위원회 국방소위 청문회에서 중국이 주변 국가를 조공국가 대하듯이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가지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미국의 집권세력이 비로소 동북아의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갖기 시작했다는 점, 상대적으로 역사와 현실의 상관관계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우리의 현주소를 내 스스로 아프게 파악했다는 점 등입니다 

 

우리는 왜 중국의 시대착오적 패권주의의 악행(惡行)’을 두 눈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기만 해야 할까요?패권국가란 쉽게 말하여 깡패국가란 뜻일텐데요. 한낮의 대로 위에서 깡패에게 얻어맞으며 똑 같이 깡패처럼 대응할 필요는 없다 해도, 논리 정연한 꾸지람 한 번 건네지 못하는 현실이 통분하여 일개 민초인 저로서는 편안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세계를 향해서 입을 열 때마다 화평(和平)’을 말하고, 미국의 보호무역을 비판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거짓구호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 반대의 뻘짓들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흡사 범죄자들이 문서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귓속말로 속닥거리듯, 자국의 모든 분야 일꾼들에게 한국을 응징하라는 구두지령을 내린 바 있고, 일당독재의 나라답게 그 명령을 받아 기계처럼 움직이는 중국 사람들입니다 

 

공자와 맹자를 낳은 나라라고 믿어오던 중국과 전쟁 없이 살기 위해굴욕에 가까운 저자세 외교로 중세 이래 근대까지 정체성을 근근히 유지해 온 우리민족입니다. 그로부터 무려 2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런 불평등의 관계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오랜 역사의 관성(慣性) 때문일까요? 아니면 힘의 불균형을 바탕으로 한 현실의 부조리때문일까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패권주의적 행동(깡패 짓’)을 놓고 볼 때, 시진핑이 말한 화평굴기(和平崛起)’란 '근대 이전 중화제국의 재건 혹은 회복을 염원하는 몽상(夢想)이라 할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 부조리한 현실의 본질을 저 같이 하찮은 민초도 잘 알고 있는데, 하물며 국가원수이신 황 대행님께서야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미국의 국방장관이 먼저 이런 문제를 아프게 지적하고 말았습니다. 그 지적을 시대와 역사에 둔감한 중국의 지도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 수는 없지만, 저는 한편으로 사이다처럼통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 말은 먼저 우리 국가원수의 입에서 점잖으면서도 조리있게 표출되었어야 합니다. 혹시 그 언급이 음으로 양으로 매티스 장관과의 교감 하에 생긴 일인가요?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의도치 않게 <<삼국지>>에서 왕윤이 여포를 시켜 동탁을 죽인 것같은, 일종의 차도살인(借刀殺人)’의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더더욱 떳떳치 못한 일입니다

 

, 이쯤 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우리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발뺌해도, 사태는 백일하에 드러났을 뿐 아니라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지금 양국 정부가 출구를 찾기 위한 물밑 교섭을 진행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노와 무력감에 빠져있는 국민들을 위하고 비정상적인 중국 지도층의 사고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국가원수인 대행께서 즉시 나서셔야 합니다. 약간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중국의 지도부와 우리 국민들을 상대로 담화문이라도 발표하셔야 합니다. 매티스 장관이 말한 중국의 '패권국가적 태도'는 대행께서 지적하셔야 할 내용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젠 당신들의 조공국이 아니라는 것, 이제부터는 화평과 선린우호의 태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조속히 정상국가로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것' 등을 조용하지만 엄숙한 어조로 중국에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비이성적 태도로 상처를 입은 우리 국민들에게는 '순리로 그들을 설득하는 동안 국가의 힘을 동원하여 민생을 안정시킬 것이니, 잠시 정부를 믿고 인내해 달라' 당부를 건네는 것이 옳습니다. 대외적인 식견이나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대선 후보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 무엇보다 답답한 요즈음입니다. 그러니 중국이 좋아할 '우물 안 개구리'가 새 대통령으로 등장하기 전에 저들을 향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 두셔야 합니다.      

 

덩치만 크고 속이 좁은이웃을 달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점은 역사나 그동안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당당하게 대응해야 하는 것은 자손만대 저 나라와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숙이고 들어가는 것은 하지하책(下之下策)’도 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그들이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고 있는 점에 대하여 지금 온 국민이 공분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보다 더 중한 국사가 어디에 있을 것이며, 이 문제의 해결보다 더 큰 국가원수의 책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소수의 정파나 인사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뒤에서 응원을 보내고 있으니, 대행께서는 부디 힘과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03.01 13:58

이제 태극기와 촛불을 내려놓을 때다!

 

 

 

 

 

 

오늘, 31절이다.

 

식민제국주의의 대표적인 깡패국가일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난 날 아닌가. 바로 오늘, 국민 전체가 촛불 부대와 태극기 부대로 나뉘어 광장의 결투를 벌인단다.

 

우로 갈려 피 터지게 싸우던 70여 년 전 우리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모양이다. 이른바 대권주자들이 대열의 앞장에서 선동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가관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대신 선동의 칼을 휘둘러 표를 얻어 보려는 저들의 무책임이 가증스럽다. 저런 사람들이 국민과 국가를 대표하겠다니, 이 민족의 불행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존경하는 역사철학자 카(E.H.Carr)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왜 우리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바로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아예 떠올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실들과 대화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70년 전의 일인데, 우리는 우리의 지나간 우행(愚行)’에 대하여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러니, 똑 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제, 이쯤 멈추어야 한다. 촛불은 끄고, 태극기는 고이 접어 잠시 상자에 모셔 두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며, 우리 모두 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하자!

 

시작이야 어떠했건, 지금 이 순간은 촛불과 태극기 모두 독선과 아집의 표상일 뿐이다. 독선과 아집은 시간 앞에 무력하다. 잠시 내면을 관조하고 나면 언제 그랬었냐 싶게 독선과 아집은 해 뜬 후의 이슬처럼 사라질 것이다. 시간 앞에 영속되는 건 없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서로에 대한 증오를 삭여보자.

 

제발, 이제 치고 받는 싸움일랑 그치고 심판의 깃발에 따르기로 하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01.29 14:38

어수선한 새해를 맞으며

 

 

 

 

 

 

정유년이 밝았다.

닭의 해라지만, 첫날 새벽에도 상서로운 닭의 울음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TV를 켜기가 무섭게 보기 싫은 얼굴들이 화면 가득 밀려온다.

이른바 국정농단의 세력이 밉지만, 권력을 좇는 부나비 군상(群像)도 밉상이긴 마찬가지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도 국민들의 눈만 속이면 그만이라는 모양새들이다. 누구를 뽑아도 그놈이 그놈이라지만, 안 뽑을 수도 없으니 고민이다.

 

몇몇 부나비들의 현란한 춤에 민초들은 마음 둘 곳이 없고, 언론 매체들은 칠팔월 각다귀들처럼 날뛴다. 물 건너에서는 전대미문의 듣보잡이 등장하여 조자룡 헌 칼 쓰듯대권을 휘두를 태세이고, 휴전선 이북에서는 막 되먹은 애송이 하나가 위험한 칼춤을 추고 있으며, ‘깡패국가중국과 왜구 나라일본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려 길길이 날뛰고 있다. 이 판에 우리만 좁디좁은 한반도 남쪽에서 굿판 아닌 굿판을 벌이는 중이다. 굿판의 끝이 어떨지 뻔히 보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요란한 작두춤 속에 환호작약 시끄럽다.

 

젊은이들에겐 힘 쓸 만한 일자리가 없고, 일찌감치 일자리를 잃은 젊은 노인들은 한숨 속에 시간만 죽인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은 일신 편한 것만 도모하고, 돈 있는 자들은 긁어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젖도 안 떨어진 피붙이에게 금 수저 물려주기 바쁘고, 부와 권력 허세 속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사람을 키우지 못한 죄, 제대로 사람을 키우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죄, 좋은 싹들을 모조리 경쟁으로만 내 몰아 온 죄, 잘 하는 자와 훌륭한 자를 존경하지 않고 줄줄이 매장시켜 온 죄, 감당도 못할 자리에서 시위소찬(尸位素餐)만 즐겨온 죄, 코드 맞는 자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권력과 이익을 독점해 온 죄, 오늘만 살고 내일은 생각하지 않으려는 이기적 탐욕죄...

 

돌아가는 형세가 어찌 올해라고 나아질 수 있을까.

누군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지만,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면, 그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그 오늘이 좀 더 나은 내일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오늘로 이어진 어제의 그 아수라장을

무슨 수로 견뎌낼 것인가.

 

지금은 난국.

정유년은 어쩌면 그 난국의 시작일 수 있다.

임진왜란의 어리석음을 반복한 통절의 정유재란을 기억하는가.

부나비들에게 깨달음을 기대하는 건, 부질없는 일일까.

유황불이 몸을 태워 역한 냄새를 뿜어내면 모두가 괴롭다.

나라의 내일을 위해, 후손을 위해,

제 몸들을 스스로 파묻어, 모두를 살려야 할 때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7.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08.01 09:29

중국은 무도(無道)한 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

 

                                                                                                                                           백규

 

근자 중국의 마수(魔手)로부터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한 김영환 씨에 의해 중국의 치부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중국을 다녀 왔거나 그들과 공식적인 거래를 해본 사람들은 대충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아직 원시적 야만의 의식수준에서 헤매고 있음은 분명하다. 세계에서 국가 공권력이 공공연하게 고문을 자행하는 나라의 대표적 사례가 북한과 중국이다. 공자와 맹자, 주자와 같은 훌륭한 선조를 모시고 있는 나라의 못난 후손들이 벌이고 있는 야만적인 폭거는 그들의 행태로 미루어 앞으로 몇 세기가 흘러도 청산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미개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는 대한민국.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해야 할까. 툭하면 잡아다 고문을 해도 모르는 척 하면서 '잡혀 들어간' 우리 국민의 '기민하지 못함'만 탓해야 할까. 어떻게든 덩치만 큰 '깡패국가' 중국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겠는데, 당장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없다. '정신 바짝 차리는 것'만이 그나마 그런 깡패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모두 함께 지혜를 짜 내야 한다.

 

2005년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지금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 지사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당시였다. 그가 중국에서 탈북자 문제인가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 현장에서 무도한 중국의 공권력으로부터 테러 비슷한 폭행을 당했다. 한 나라의 독립된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어느 나라에 가서든 최소한 외교관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김 의원을 잡범 다루듯 한 일은 국제법의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김 의원을 탓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무도함을 먼저 탓했어야 할 이 땅의 정치인들 혹은 지식사회가 억울한 김 의원을 비난한 것은 뿌리 깊은 '노예근성'의 발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종북주의자들'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필자는 당시 분노를 금치 못하고 아래와 같은 칼럼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다. 그 글을 통해 위정자들에게 '민족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이라도 마련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고 하는 위정자 그룹의 '대책없음'이 우리를 분통 터지게 만드는 요즈음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대권을 꿈꾸는 이른바 잠룡(潛龍)들은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깡패국가의 볼모로 전락한 국민이나 국가의 대통령이 된들 무슨 영광이겠는가? 얻어 맞으면서도 배만 부르면 그만인 '돼지'로 만족할 것인가?

 

당시의 글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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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존심

 

 

▲ 조규익 교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중국의 공권력에 폭행을 당했다. 국가 간의 이해(利害)가 개입된 문제라고는 해도 ‘때린 놈’이나 ‘맞은 놈’ 모두 우습게 되었다. 더욱 희한한 일은 때린 놈의 역성을 드는 집단이 우리들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점잖다 해도 ‘불량배에게 맞고 들어온 자식’을 꾸중하는 부모는 없다.

 


사실 중국을 지렛대로 북한을 움직이려면, 중국과 우리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란 어렵다. 북한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도와주면서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이득까지 챙기려는 중국인들의 계산법은 천하공지(天下共知)의 사실이다. 분단된 우리 민족을 뒤에서 조종하며 실익을 챙기자는 그들의 ‘꼼수’를 우리는 민족사 최대의 수치로 받아들여야 정상이다.

 

따라서 이번 일을 국제화 시대의 나라들 간에 일어날 만한 외교적 사건으로 단순화 시킬 수는 없다. ‘민족적 자존심’의 원칙적 잣대는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최우선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좀더 복잡하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0년 전의 일을 떠올려 보자. 반정(反正)으로 인조(仁祖)를 옹립한 서인(西人) 정권은 정통성을 인정받아야 했다. 중국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지 못하면 국내에서 반대파를 누르고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르하치의 기세가 바야흐로 명(明)나라의 숨통을 끊어갈 무렵이었다. 이덕형(李德泂)을 정사(正使)로 하는 주청사(奏請使)가 명나라 조정에 파견되었고, 그들은 넉 달 가까이 북경에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정사가 ‘시랑(侍郞)’ 정도의 관리들에게 농락을 당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뜻을 요로에 전하기 위해 뇌물을 밥 먹듯 써야 했다. 북경의 혹심한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길거리에 꿇어 엎드려 출근하는 각로대신(閣老大臣)들에게 손을 비비던 노구(老軀)의 정사는, 바로 역사 속에 그려진 우리 민족의 자화상이다.

 

 

그뿐인가. 천신만고 끝에 각로들을 만난 정사. 그들의 괜한 트집으로 섬돌에 내동댕이쳐져 울부짖던 그 참상을 다시 무슨 말로 표현할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다지만,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무자비하고 철저하게 ‘농락해 온’ 저들의 무례함을 제때 제대로 징치(懲治)했더라면 현대사는 좀더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징치’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는 방법만이라도 강구했었다면 지금 이렇게 온 국민이 참담함을 되씹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망해가는 명나라에게 빌붙어 국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일부 무리들의 ‘꼼수’는 결국 민족의 자존심을 망치고 그후 조선에 잦은 전란을 초래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만 보아도, 통치 집단의 지혜로움은 분명 민족사 전개의 향방을 가르는 지표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상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겉모습은 달라져도 본질은 변할 리 없다. E H 카(Carr)의 말처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임에도,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운 것 없음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말았다. 특히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집단들이 매우 우매(愚昧)하고 게으르다는 점, 국민으로서는 그것이 못내 통분하다.

 

 

역사책의 한 쪽만 넘겨 보아도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진실은 그득하다. 지금 중국은 남북의 분단 상황을 지렛대로 삼아 그 사이에서 철저히 이익을 취하고 있다. 그 와중에 농락당하는 건 남북한 모두의 자존심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조선일보, 2005. 1. 1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