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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8.30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2. 2015.01.23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글 - 칼럼/단상2018. 8. 30. 12:01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조규익

 

 

 

 

 

 

학자란 누구인가. 넓은 의미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좁은 의미로 대학교나 연구소 등 연구기관에서 전문적으로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다. 학문을 연구하거나 다룬 결과는 논문이나 책으로 나오기 마련이니, 교수나 학자는 논문 쓰는 사람, 혹은 논문으로 말하는사람이다. 그래서 학자가 제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생각이 기발해도 그것이 논문으로 엮여져 나오지 않으면 그냥 달변가 혹은 재주꾼일 뿐이다.

 

공부도 잘하고 말까지 잘하는 재주꾼을 최고로 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동양 사회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경원(敬遠)해 온 역사는 길다. 특히 학자들의 말이 뻔지르르하면 일단 의심을 하고 보는 것이 전통사회의 통념이었다. 오죽하면 공자는 말에 있어서 더듬거리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고자 하는 것이 군자(欲訥於言而敏於行/󰡔논어(論語)󰡕 「이인(里仁))’라고 했을까.

 

옛날의 군자는 완성된 도덕을 갖춘 인격자로서 남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 그래서 전통사회의 학자를 겸한 인간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말을 더듬어야 했을까. 자신의 내뱉는 말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지, 누가 보아도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을지 아무도 자신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누군들 자신의 말을 100%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군자란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수십 수백 번을 되씹어 보고 숙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막상 말을 내뱉는 순간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내 말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거침없이 나가야 하는 말 줄기를 이 두 가지 물음이 막아서면 더듬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심사숙고하라는 것이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학자의 자세다.

 

그러나 지금은 말() 잘하는 학자들이 너무나 많다. 매스 미디어가 지배하는 이 시대엔 말 잘하는 것이 모든 조건들을 압도한다. 방송에 나와 사자후를 토하는 학자들치고 제대로 된 논문이나 저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들 한다. 언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다져 논문이나 저서로 만들어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내뱉는 말들이라면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쳤을 리 없을 터. 당장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그들의 찬탄을 이끌어내기에 급급할 것이니, 언제 책상머리에 앉아 자신의 가설을 논증하고 강호 현인들의 생각을 참고할 겨를이 있단 말인가. 대중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변가들 가운데 의외로 좋은 학자가 드물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학자 노릇을 하기란 어렵다. 선현들이 남긴 생각을 토대로 자신의 뜻을 세우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저 앞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그런대로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전술(傳述)할 뿐 짓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정말로 그가 술이부작으로만 일관했을까. 사실은 앎에 대한 겸양의 태도를 강조한 말이었을 것이다. 학자는 도덕가를 겸해야 한다는 차원 높은 인식의 노출로 보는 것이 옳다. 공자가 극구 사양한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는 창조자의 타이틀. 외람하다 보았기 때문이리라. 외람하지만 않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공자가 얼마나 창조적인 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술이부작속에는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인간을 다잡는 의미가 들어 있을 뿐, ‘새로운 것을 고안하거나 만들어내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

 

한여름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쓸데없이 서론이 길어졌다.

내 본업은 교수다. 교수는 당연히 학자이고, 학자가 대부분 교수인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그래서 교수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겸하는 존재다. 대학원 시절, 존경하던 은사들은 늘 좋은 논문 많이 쓰라고 말씀하셨고, 당신들께서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 상당 기간 대가들의 곁을 배회하며 논문 쓰는 일의 중요함을 마음에 새겨온 나다. 언제나 되어야 저 분들처럼 멋진 논문들을 맘껏 써서 후학들을 위해 지남(指南)할 것인가. 뜻은 높되 손과 아이디어가 따라주지 않아, 일종의 비원이 마음속에 똬리처럼 들어앉게 된 내 '학자로서의 한평생'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스물일곱 여덟에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못했다. 초년 시절 내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진짜로 쓰지 않고 못 배기는 테마나 문제의식 혹은 가설 하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나날이 꽤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공부가 설어서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깨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처방을 얻지 못한 채 이날까지 삽질을 하며학자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밤늦도록 연구실에서 고민하며 책장을 넘기고, 휴일을 잊은 적도 적지 않았지만, 내 곳간은 늘 적막하다. 지금도 물색 모르는 고향 친구들은 교수는 그저 놀고먹으며 땡하는 직업 아니야?’ 라고들 놀리기 일쑤다. 수시로 전해오는 친구들의 번개 자리에 불참하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적막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끙끙대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눈총을 줄 때마다 빙그레 웃음으로나 화답할 뿐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한가로워진다.

 

여섯 평 연구실에서의 삼십여 성상(星霜)! 엊그제 존경하는 소재영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게 늘 사표(師表)가 되어주신 학자의 표본. 문득 생각해보니 그 분이 지금의 내 나이셨을 때 나는 40을 바라보는 애송이였다. 당시 그 분은 참으로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였다. ‘나도 저 연세,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멍청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나이만큼은 어느덧 그 고개에 올라서고 말았다. 논문 쓰는 일도, 강의도, 세상사도 모두 달관의 경지에서 유유자적 해결하시던 내 나이 때의 선생님이셨는데. 지금의 나는 어찌 그 경지를 상상도 못한단 말인가. 늘 뇌리를 훑고 지나는 아이디어나 가설을 잡아 매어놓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손에 잡히는 결론은 늘 텅 빈 괄호( )’ 뿐이다!

 

누가 있어 무엇이 중헌디?’라고 물으면, 정말로 할 말이 없다.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논문들을 써 보았지만, 결론이 하나같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면, 그간 줄창 헛공부만 해왔다는 말이다. ‘교수니까 논문을 쓴다는 구조화된 아비투스(habitus) 속에서 가치 있게 살아야 했던 삶을 내 스스로 몰각(沒却)해온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교단생활을 쓸쓸하게 마무리하지 않으려는습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논문의 화두(話頭)를 꼭 틀어쥐고 의자를 당겨 앉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인문학이 밥을 해결해주지 않는 시대에 (고맙게도) 우리를 찾아준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펴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가련하고 처량한가.

한 주에 단 하루, 육체의 괴로움을 통해 내 실존을 아프게 자각하는 에코팜의 은혜로운 시간이라도 없었다면, 허물어져가는 내 자존심의 성벽을 무슨 용기로 대면할 수 있을까.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와 함께 귀를 찢는 노() 선승(禪僧)의 할()이 텅 빈 내 마음을 울린 뒤 메아리가 되어 여섯 평 연구실을 휘감다가 사라지곤 한다. 깨달음은 내게 미래의 시간을 부여할 것인가. 갈가리 찢긴 논문들을 주섬주섬 이어 붙이면 천사의 날개옷으로 부활할 것인가. 그 옷 걸치고 구만리장천을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졸우(拙愚)-우공 이일권 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1. 23. 12:30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나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論語>> <里仁>]는 공자의 말이 있다. 군자라면 ‘말수가 적고 좀 느려도 행동만큼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말했으면, 반드시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 쏘면서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달변가들을 꾸짖은 말씀이었을 텐데, 공자 시대의 그런 사정이 오히려 심화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누가 보아도 달변가는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 내뱉는 데도 그렇게 힘이 든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쩌면 대통령이 소통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변가인 참모들과 정치인들, 기자들을 대하는 일이 끔찍하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석학 할아비'라 한들 말로 해서야 누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언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말 실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말이 있다. 대개 앞에 인용한 공자의 말을 보거나 ‘말과 실천’을 결부시켜 온 동양적 사고를 생각해 보아도 ‘말 잘하는 것’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깡촌’의 흙 속에서 꼬물거리던 내 코흘리개 시절, 그 때까지 본 적 없는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우리 마을에 내려와  ‘말끔한 달변의 서울말’로 사기 치던 토지 브로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기꾼에게 넘어가 몇 십 년을 고생하시던 농사꾼 내 부모의 한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속엔 다른 세대가 쉽게 이해 못하는 그런 공감영역이 있다.

 

자라면서 ‘말만 말끔하게 잘 하는 인간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기꾼들이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판들을 여러 번 접해오는 중이다. 참, 말 잘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최근 10년 이내 두 번의 선거판을 말로만 본다면 ‘눌변 : 달변’으로 요약된다. 지금의 50대들이 누구인가?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아 이제 은퇴기에 도달한 연령대다. 전통 교육 속에서 자라나 ‘농경사회→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지식기반 고도정보화사회’의 고비들을 용케도 탈 없이 거쳐 온 사람들이다. 어쩜 비슷하게 고단한 환경과 의식 속에 성장했다는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국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달변가도 보았다. 당시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달변이 이른바 ‘종북’이나 ‘극좌’와 합쳐지면 나라로서는 재앙이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를 위해서 천행이었다.

***

지금 50대의 민심이 대통령으로부터 이반(離反)되고 있다고 북악산 언저리에 수심이 가득하다. 5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그 50대가 민심이반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니, 당하는 심정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늘 아침 인적 쇄신책이라고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격화소양[隔靴搔癢: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의 미봉책일 뿐이다. 참,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신의 신조나 철학으로 주변의 개인들을 신뢰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갖는 신뢰와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공인이지 개인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을 상대로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정치 논리’다. 하물며 5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상대로 하면서 정치논리를 도외시하고, 어찌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댄단 말인가?

 

인사를 말끔히 쇄신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있다면, 그간 쓰고 있던 개인의 안경을 국민의 안경으로 즉각 바꿔 써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개인의 안경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공자가 말한 군자의 ‘눌변’ 차원이 아니라 김 모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던 ‘칠푼이’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다. 누가 보아도, 비서실장이나 ‘문고리 3인방’은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누가 쫓아내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게 맞다. 누구 말대로 ‘인간적 신뢰를 지킨답시고’ 그들을 껴안고 간다면,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강호의 현사들을 등용한다 한들 그게 어찌 ‘쇄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특히 50대들은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의 입을 쳐다보기에도 지쳐 있는데, 행동마저 이리 굼뜨다면 참으로 절망이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북핵, 경제, 안전’의 불안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있다. 판단력이 흐리고 굼뜬 조타수에게 어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즉각 비서실장과 3인방을 내치시라. 팔팔하고 번뜩이는 감각의 30~50대 초반의 명망가들이 강호에는 넘치고 넘친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그들을 모신 뒤, 만기친람하려 들지 마시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시라.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그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면 대통령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이 민족에게 재앙을 안겨 주게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라.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