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02.12 19:45

압존법(壓尊法)혼란 시대

 

 

 

                                                                                                 조규익

 

 

 

우리 과의 어느 학생.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예쁜 여학생이다.

그가 내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 전체 졸업식이 끝난 뒤 있게 될 학과 졸업식 관련 연락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참 듣다가 나도 모르게 꾸지람을 내뱉고 말았다. 압존법이 심히 부정확했다. 사실 이 학생만 압존법을 모르는 건 아니고, 또 대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다. 일선 관청을 방문할 때도, 집안의 조카나 며느리들과 대화를 할 때도 늘 그놈의 압존법때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심지어는 TV 토론을 진행하는 앵커의 말에서도 흐트러진 압존법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에서 평생을 지내온 나는 대학생들과 대화하면서 가장 참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압존법의 혼란이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압존법을 모르거나 무시한다. 아무나 무조건 높이는 게 장땡인 줄 안다.

 

발언자 말 속의 주체가 발언자보다는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는 낮을 때, 말 속의 주체를 높이지 않는 어법이 압존법이다. 전화 속의 그와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학생: 학과 졸업식에 참석하실 수 있으세요?

: 학과 졸업식에 누구누구 참석하나?

학생: 졸업생, 학생회 집행부 임원들 합쳐 40여분이 참석하세요.

: 그 밖엔?

학생: 2학년 학생분들 가운데 시간 나시는 분들도 참석하실 거예요. 그런데 아직 방학 중이시라서 몇 분이나 나오실 수 있으실지 알 수 없어요.

: 혹시 1학년생들은 참석 안하나?

학생: , 1학년 분들은 아직 등록을 안 하신 상태이셔서 참석 못하실 거에요.

: , 너 압존법을 배웠니? 못 배웠니? 네가 나한테 얘기하면서 꼬박꼬박 학생들을 높이면 나는 도대체 뭐니? 누구보다도 국문과 학생이라면 정확한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압존법에 맞는다고 생각하니?

학생

 

그 학생이 무슨 죄이랴? 잘 가르치지 못한 내가 잘못이지. 학창시절 나는 압존법이란 말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지금 대학생들을 포함하여 젊은 세대는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웅변학원에 보내어 사자후를 토하는 방법만 가르쳤고, 데모의 현장에서 격한 어조로 선동하는 방법만 배웠을 뿐, 제대로 된 대화법을 가르치거나 배운 적이 없다. 선생님들도 모르는 압존법을 어찌 학생들이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대체 요즘 젊은이들이 어떻게 압존법을 사용하는가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국립국어원홈페이지에 사례로 게재된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질문]

직장 상사를 그보다 높은 윗사람에게 말할 때는 높여 말합니까, 높이지 않습니까?

[답변]

부장에게 과장에 대하여 말할 때 "과장님 외출하셨습니다." 하는 것이 옳은지, "과장님 외출했습니다."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부장을 화나게 할 수도 있고, 또 과장을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사원들이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외출하......" 하고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윗사람에 관해서 말할 때는 듣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를 넣어 말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즉 평사원이 과장을 사장에게 말할 때라도 "사장님, 김 과장님 거래처에 가셨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윗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 '--'를 넣어 말하는 것은 회사 안에서만이 아닙니다. 다른 회사 사람에게 말할 때도 상대방의 직급에 관계없이 '--'를 넣어 말합니다. 즉 평사원이 자기 회사 과장을 다른 회사 부장에게 말할 때도 "김 과장님 은행에 가셔서 안 계십니다."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윗사람에 대한 경어법에 '--'만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존칭조사 '께서'를 사용해야 하는지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장에게 과장을 말할 때 "과장님께서 외출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과장님이 외출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그러나 구어체에서 존칭조사 '께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과장님께서'보다는 '과장님이'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장님, 과장님이 외출하셨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혼란의 근원은 국립국어원에 있었다! 평사원이 과장을 사장에게 말할 때 사장님, 김 과장은 거래처에 갔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옳다. ‘사장님, 김 과장님 거래처에 가셨습니다.’라는 말과 1학년 분들은 아직 등록을 안 하신 상태이셔서 참석 못하실 거에요.’라는 2학년 여학생의 말은 압존법이 엉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압존법을 인정하면서 압존법을 솔선하여 깨고 있는 국립국어원의 판단은 매우 사려 깊지 못하다.

 

영어에는 압존법이 없다. 물론 어조(語調)에서 높이고 낮춤을 분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말은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우리는 말 속에 많은 장치들을 두고 있지만, 의미와 감정의 전달에서 매우 합리적이다. “사장님, 김 과장은 거래처에 갔습니다.”는 말을 생각해보자. 대화의 상대인 사장을 높이는 효과, 군더더기 존칭소를 생략함으로써 전달내용의 명료화를 기하는 효과 등이 어느 외국 말보다 우수하지 않은가. 어려서부터 압존법을 제대로만 가르치면 단순명료하면서도 품위 있는 국어생활을 할 수 있는데, 생활언어의 교육을 소홀히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왔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만원 되시겠습니다' 같은 엉뚱한 말, '다른틀린으로 틀리게 말하기 일쑤인 무감각, 범죄자들에게까지 깍듯한 존칭을 일삼는 TV방송 앵커들의 몰상식이 횡행하는 사례들 모두 생활언어 교육의 부재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이제라도 교육현장에서 제대로 된 생활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자격 없는 앵커들과 교사들을 재교육시켜야 한다.

 

이건 틀딱의 고집스럽고 시대착오적인 투정이 결코 아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02.09 16:26

사랑하는 2014학번 졸업생 여러분!

 

 

학부 졸업생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학창생활을 마무리한 14학번 여러분에게 따뜻한 축하를 보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잘 길러주시고 대학교육까지 책임 져 주신 학부모님들께 감사드리고,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교수님들, 재학생 여러분에게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어제 밤 저는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젊음의 열정으로 빛나던 여러분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덧없이 흐르는 시간의 여울에 밀려 여러분과 이별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혹시 시간의 무상함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인가요? 여기 계신 교수님들 가운데 제가 가장 먼저 쓸쓸한 계절에 접어들었기 때문일까요? 여러 교수님들을 대표하여 여러분에게 석별의 정을 담아 한 말씀 드려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된 것 또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정신없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가치기준이 달라져 있는 오늘을 발견합니다. 내일은 또 어떤 변화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우리 모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물인터넷이나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이 그 변화를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이미 개막되었다고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준비가 충분한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가 충분치 못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상당 기간 실의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이건 이공계나 인문계 모두 함께 겪는 고통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이 고도지식정보화 단계에서 4차 산업혁명으로 넘어가는, 일종의 과도기 혹은 조정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한 인문학이 조정기를 거친 미래의 대한민국에 긴요하게 쓰일 시기가 조만간 도래한다고 보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리하여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수준으로라도 인문학의 수요가 늘어나는, 괜찮은 시대가 조만간 시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일자리를 갖고 교문을 나서는 사람이라고 안심해선 안 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실망해서도 안 되는 것은 변화의 바람이 어느 곳을 향할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아 인문학의 창조적 소양과 역량을 갖춘 여러분이야말로 조만간 찾아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기회들을 많이 포착하게 되리라는 것이 우스갯말로 수렵채취시대에 태어나 농경시대, 산업화시대, 정보화시대, 고도지식정보화시대를 거쳐 오며 변화의 속성을 체험했다고 자부하는’^^ 제 판단입니다. 일단 사회에 나가 크게 변하는 사회의 조류와 용감하게 부딪쳐 보라고 권고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학교가 온실이었다면, 사회는 밀림입니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신분이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여러분 스스로 내면의 혁명적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 분명합니다. 일방적으로 배려를 받아 온 기존의 시간대에서 부모, 형제, 이웃 등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려해야 하는 시간대로 180도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수들이 지난 4년 간 중점을 두어 가르친 것도 바로 그런 주체적 의무감의 함양이었습니다.

 

과거 여러분의 선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 저는 그들에게 ‘10년 후에 만나자는 약속을 먼저 건네곤 했습니다. 저 자신도 그러했지만, 통계적으로 대학 졸업 후 10년이 지나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사회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능력을 믿습니다. 함께 약속합시다. 앞으로 10년 후인 2027, 저는 멋진 칠순잔치를 열고 그 자리에 여러분을 주빈(主賓)으로 초대하겠습니다. 그 때 멋진 모습으로 저를 찾아 주기 바랍니다.

 

이제 출항의 돛을 높이 달고 용감하게 망망대해로 나가십시오. 저는 여러분의 늠름한 뒷모습에 언제까지라도 파이팅!’을 외치겠습니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러분의 앞날에 신의 보살피심과 행운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2018. 2. 9.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02.19 16:10

사랑하는 국문과 졸업생 여러분!

 

 

 

 

대학에 대한 기대와 젊음의 열정으로 반짝거리던 여러분의 새내기 시절이 엊그제인데, 벌써 사회로 나가는 문지방에 서 있음을 보고, 시간이 덧없다는 생각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졸업 축하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도 교수님들 가운데 내가 맨 먼저 시간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계절에 들어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며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때를 생각합니다우중충한 유신 말기의 냉기가 대지를 덮고 있던 때였습니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어떻게 입신할 것인가 고민에 싸여 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수렵 채취 시대-농경 시대-산업화 시대-정보화 시대-고도 지식정보화 시대를 두루 거쳐 왔음을 우스갯소리로 내세우곤 합니다만, 사실 내가 당시 농경시대에서 산업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존재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세계사를 관찰할 때 내 세대 즉 한국의 베이비부머들만큼 다이내믹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서 고도 경제성장과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두루 경험한 세대이지요. 우리 세대 구성원들 사이엔 간혹 금수저도 있었지만,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은 나와 같은 흙수저들 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아 차라리 과감하게 베팅해볼 수 있는나 자신이고 우리였습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책 없는' 계획을 세운 뒤 한눈팔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다시 올 수 없다는 절박감이야말로 '몸뚱이' 하나로 '도박판같은 세상'에 나서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부모 형제가 뒷배를 보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략 20년 전쯤인가요. 차를 몰고 미국 모하비 사막( Mojave Desert)과 그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데쓰밸리(Death Valley)에서 아무도 없는 가운데 황혼을 만났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 때 느낀 막막함이야말로 나를 위해 책임 져 줄 아무도 없다는 실존적 자아인식으로 이어지는 두려움과 절망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는 말이 <<맹자>>에 나옵니다. 공자 역시 어떤 계기를 만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 처한 자아를 인식했고, 그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말이겠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모하비 사막과 데쓰밸리에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꼈고, 그런 두려움과 외로움은 내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인식 위에서 강한 투지가 생겨났고, 그로부터 종이 위에 어설프지만 미래의 시간계획표를 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신입생들을 만날 때마다 시간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권유를 했으리라 믿습니다. ‘하루, 한 달, 한 학기, 일 년, 십 년, 일생단위의 시간계획을 짤 수 있어야 그나마 '모험 투성이'인 인생에서 패착의 가능성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모하비 사막 한 가운데서 깨쳤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암울하고 막막했던 내 젊은 시절, 흐릿하나마 어떤 가능성을 부여잡고 용기를 낸 덕분에 지금 여러분 같이 별처럼 빛나는 젊음들 앞에서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의 경험이나마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점을 고맙게 여길 뿐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총아(寵兒)들인 여러분의 손에도 어떤 정해진 형태의 성공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안정된 직장이나 소시민적 행복이 지금 당장 가시화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나침반을 들고 광야에서 길을 찾는 개척자의 자세로 용감하게 저 문을 나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시간 계획을 하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부터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무궁한 가능성들을 촘촘하게 계획된 시간의 그물로 그들먹하게 건져 올려야 합니다.

 

외로움과 막막함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러분이 자신감만 갖는다면, 최후의 승리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모하비 사막을 돌아 수백 마리의 소떼들을 거느리고 돌아오는 여러분을 10년 혹은 20년 후에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며,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2016. 1. 19.

 

 

 

국어국문학과 조규익 교수

 


졸업식을 마치고

 

 

 

졸업식 후 연구실로 찾아온 양훈식 박사 가족과 함께

 

 

 


졸업식 후 연구실로 찾아 온 임민주, 국미진

 

 

 


졸업식 후 연구실로 찾아온 고조, 국미진, 임민주

 

 

 


졸업식 후 연구실에서 고조와 함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