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2. 16. 17:28

    


원서 표지

 

 

 


번역서 표지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클로디아 드라이퍼스

 

 

         대학은 아직도 지성의 유토피아인가?

-앤드류 해커클로디아 드라이퍼스의 <<비싼 대학>>을 읽고-

 

 

대학은 제한 없는 학문 탐구와 자유로운 지성 발현의 전당이어야 함을 믿는 사람들이 많고, 한동안 그 표본을 수백 년 역사의 유럽 대학들에서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유럽 명문 대학들의 고색창연함보다 시대정신을 창도(唱導)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고, 내 입장도 그렇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미국의 대학들을 돌아보며 그들이 누리는 풍요와 자유, 고품격의 시스템을 선망해오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최근 큰 아이가 컴퓨터학 교수로 자리를 잡은 뉴욕대학의 면면을 훔쳐보면서 그런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바야흐로 붕괴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현실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퇴출대상 1호로 지목되고 있는 후진국 대학의 인문학자. 우리나라의 대학을 되살리기 위해 선진국의 대학들을 열심히 벤치마킹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한 채의 집을 놓고 생각해보자. 근자 리모델링이란 기법이 유행하고 있는데, 리모델링을 잘만 해놓으면 그럴 듯하게 탈바꿈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리모델링이란 것도 원본이 그럴 듯해야 가능한 공법이다. 여기를 손대면 저기가 무너지고 지붕을 고치면 구들이 내려앉는 등의 경우에야 그냥 무자비하게부숴버린 다음 새로 짓는 편이 오히려 낭비를 줄이는 일일 것이다. 뜻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대학들이 어서 빨리 망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라운드 제로위에 새로운 대학들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리라.

 

최근 충격적인 책 하나를 읽었다. 그렇게도 선망해오던 미국 대학들의 속살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매섭게 질타한 저자들의 혜안과 용기가 놀라웠다. 원제는 Higher Education?: How Colleges Are Wasting Our Money and Falling Our Kids-And What We Can Do About It 이었으나, 번역자들(김은하박수련)“<<비싼 대학: 미국 명문대는 등록금을 어떻게 탕진하는가>>/강의는 뒷전인 교수, 돈만 삼키는 연구소, 대출에 허덕이는 학생교육을 우롱하는 대학!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제목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번역서 표지의 굵은 글자들에 이 책의 내용은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었다. 아마도 번역자들은 한국의 대학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을 것이다. 간혹 귀 있는 자라면, 그들의 말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번역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미국 대학들의 문제점일 뿐 우리나라 대학들과 무관하다는 식의 태평함에 젖어 있을 우리나라 대학인들에게 무지막지한 비판을 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옛날식으로 그럭저럭살아가다가 함께 벼랑에 떨어져 죽은들 어떠냐는 식의 무사안일과 기득권 의식에 매몰된 이 시대 한국의 대학인들. 선뜻 나서서 자기 혁신의 짐을 지려는 사람은 없고, 그동안 맛보던 자잘한 열매의 달콤함에만 취해 있는 이 시대 한국의 대학인들. 명목 상 지식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대학인들에게 속된 말로 몽둥이찜이라도 안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과연 일생 밥을 먹여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준 대학을 환자로 삼아 냉혹한 외과적 수술을 가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원론적 질문이 그 하나이고, 세계 대학들의 롤모델이자 무흠한 상아탑으로 생각되어온 미국 대학들이 안고 있는 구조적 결함이나 비도덕적 기득권 주의, 혹은 대책 없는 비현실성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다른 하나이다.

어두운 면이 정확히 오버랩된다는 점에서 미국대학들을 벤치마킹하다가 지쳐 널브러진 한국 대학들의 현재는 암울하고, 그 현재를 바탕으로 만들어가야 할 미래는 이미 잿빛으로 변해버린 채 신기루가 사라진 사막의 생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은 미국 대학들의 잿빛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교수 집단의 그악스런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들은 대학의 많은 불편한 사실들을 이 책의 도처에서 고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결국 학생학부모에 대한 착취와 대학교수집단의 부도덕한 기득권으로 요약된다. 이 책의 특이한 장점은 뒷부분에 추가한 우리의 제안에 있다. 본문 속에 늘어놓은 장황한 고발들을 결국 이러한 제안으로 요약하여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자 했으니, 저자들이야말로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달의 메커니즘을 꿰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들의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학의 존립 이유는 교육이다.

2. 대학의 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출에 의존하는 삶을 그만 두어야 한다.: 대학의 각종 활동, 직원, 교수 때문에 생기는 비용 문제로 치솟는 등록금, 은행 빚을 얻어 등록금을 충당하는 관행은 이제 청산해야 한다.

3. 학생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편적 대학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교수들은 자신이 썼거나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인 논문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4.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학부생 때는 흥미를 돋울만한 지적인 사람들을 많이 접해야 한다. 그래야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절반이 넘는 64%의 학생들이 직업훈련을 전공으로 삼고 있다. 비실용적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대학에서 더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더 유용한 투자가 된다. 철학, 문학, 역사 또는 물리학 대신 대다수 학생들은 말() 관리학, 용접술, 패션 마케팅 같은 분야를 선택하는데. 모두 명문대에 개설된 전공들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학부 시절에 수익을 계산하지 않고 걱정 없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지성을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종신교수제를 폐지해야 한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종신교수제를 폐지하고, 다년 계약제로 대체해야 한다.

6. 유급 안식년 제도를 없애야 한다.: 학자들은 7년마다 정신적으로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쓸모없는 연구를 제한해야 한다.

7. 시간강사들의 노동 착취는 그만 해야 한다.: 안정된 직장에 정착한 교수들과 똑같이 수업하는 사람에게 교수의 6분지 1의 연봉만 주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부적절한 짓이다.

8. 특급 명문대학들의 가치를 제대로 따져 보아야 한다.: 자녀들이 명문대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자식을 걱정해서라기보다 부모 자신의 출세 지향주의를 자식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간판 너머를 보아야 한다.

9. 총장은 공공의 종복(從僕)이다.: 이사회에서 연봉 100만 달러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을 주겠다고 하면 총장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말해야 윤리적이다.

10. 의대와 연구소를 대학에서 분리해야 한다.: 대학은 캠퍼스 내 연구소나 산하기관 뿐 아니라, 의과대학과의 고리도 끊어야 한다.

11. 테크노 티칭, 첨단 기기를 활용한 강의에 주목해야 한다.

12. 기부가 필요한 곳에 기부해야 한다.: 재정 여건이 훌륭한 대학들에만 기부가 편중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부금이 많은 대학의 동문들과 여타 기부자들은 진정으로 기부금이 필요한 다른 대학을 골라 기부하는 것이 좋다.

 

책을 마치면서 이 책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두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글을 쓰는 교수였고, 한 사람은 기자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날 이 나라의 대학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공사판에서 그 어떤 목표나 목적도 없이 제멋대로 바닥을 깔아뭉개며 달리기만 하는 증기 롤러를 보는 듯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침통한 마음을 가누며 이 책을 썼다.() 특히 고집 센 교수 집단이 모인 대학이란 곳에서, 교수들과 직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관행을 지키려고 완강히 버텼다. 이 책의 출간을 열렬히 환영해 준 대학 밖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대학에 몸 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현재 학생들이 학비를 낸 대가로 얻는 것이 별로 없고, 이 문제의 책임은 캠퍼스에서 개인의 실적을 쌓는 데만 여념이 없는 어른들(즉 교수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316쪽)

 

그렇다. 대학을 바꾸기 위해 최대의 기득권 집단인 교수들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은 미국의 대학들이나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다르지 않다. 대학의 개혁! 벌써 서산에 해는 지는데, 할 일은 많고 갈 길도 멀다.

 

 

 


 Holyoke Center에서 바라본 하바드 캠퍼스(Harvard Yard) 

 

 

 


예일대학교 올드 캠퍼스(Yale Old Campus)의 이른 봄 풍경

 

 

 


UCLA의 로이스 홀(Royce Hall)

 

 

 

뉴욕대학교 건물들 한 복판에 있는 Washington Square Park의 아치

 

 

 

교토대학 정문

 

 

 


연세대학교의 언더우드 홀(Underwood Hall)

 

 

 


숭실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의 학교 마크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브루킹스 홀(Brookings Hall Quad)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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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0. 25. 10:57
 

 교수들을 ‘구름 위의 신선’이나 ‘도덕군자’ 쯤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요즘 들어 교수가 관련된 파렴치 범죄들이 노출되면서 교수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주어왔던 기본점수까지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의 가상한 정서다. 전통시대에 형성된 스승관(觀)이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정신적 거래행위’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질적 거래행위’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범주에 올려놓고 전자를 신성시하는 행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렵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요즘의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행위(商行爲)와 일치시킴으로써 교육과 관련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혹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성된 보통사람들의 교수관(觀)이야말로 교수직에 대한 일종의 ‘우스꽝스런 외경심(畏敬心)(?)’이라고나 할까.

 그 뿐 아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일의 지난(至難)함 아니 극난(極難)함이 교수직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고조시키는 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 보라! 넘쳐나는 교수임용 대기자들, 예비 학자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구체제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대학원생들... 교수직을 아예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비정년직으로 대충 땜질하고 있는, 교수시장의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면,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교수직 진입의 어려움’은 ‘교수직에 대한 선망’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교수직에 대한 선망은 다시 교수직에 대한 진입 욕구를 증진시킬 것이다. 이런 현실은 유능한 대기자들의 교수직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일종의 ‘악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직 혹은 교수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더욱 왜곡되어 갈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아니 생활인이다. 뿔을 마주 대고 싸우는 벼랑 위의 산양(山羊)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해관계로 첨예하게 다투고, 한줌의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음해하기도 한다. 정론을 펴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입방아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바깥의 사람들보다 저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상아탑의 교수들을 ‘맹신’한다.  
    
  ***

 최근 고려대 정 아무개 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론보도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왕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따’의 원인을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대표적인 메이저 대학들 가운데 하나가 고려대학이다. 한국 대학들의 저급한 관행으로 미루어 고려대학 교수진이라면 대부분 고려대학 출신 이상들만 모여 있을 것이니, 지방대학인 공주대학 출신의 정교수가 흡사 ‘붕어 떼 틈새의 피라미’ 정도로 여겨졌을까? 피라미 정도가 붕어 급인 자신들 사이에서 노니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을까? 그들은 왜 ‘가련한’ 그를 왕따시킨 걸까?

 사실 한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 구성원들과 다른 행동양태를 갖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평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 양자 모두 사회적 병리현상들로서 ‘치유 불가능한 부정적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입(移入)된 구성원의 능력이나 자질이 자신들의 평균보다 낮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당황스런 다수는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까닭 없이 특정인을 배척하는 행태, 그것이 바로 ‘왕따’다.

 나는 정교수의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 교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카르텔’을 고려해볼 때, 그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고려대학 같은 메이저 대학에 입성했다는 그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그가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런 암초들을 피해 ‘교수임용’이라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었으랴. 아마도 간신히[혹은 너끈히] 접안(接岸)에 성공한 그를 보며, 선배교수들이나 동료들은 ‘어라, 저 놈 봐라!’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장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학부 졸업장을 쥐고 있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노비문서’인 학부 졸업장의 원천적인 핸디캡을 시원스레 극복해낸 그에게 박수를 치는 대신, 도리어 새로운 양태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으리라.
교수들이 뜻만 합친다면 동료교수 하나쯤 ‘왕따’시키는 일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교수가 관여해야 할 온갖 일들이 ‘왕따 작전의 현장’일 것이니, 그 속에서 갓 40의 여린 그가 감내해야 할 부담은 오죽했으랴.

***

한국의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대학이고 교수집단이다. 그러나 ‘실력을 제외한’ 온갖 기준들을 지뢰처럼 묻어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무자비한 집단’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방, 서울과 수도권, 본교와 분교 등은 1차적 차별 기준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라고 모두 ‘서울대학’은 아니다. 그 속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 서울의 1류라고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초일류와 범일류가 있고, 준일류도 있다. 2류와 3류도 같은 방식으로 세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상의 대학 내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기준들이 엄존한다. 이런 차별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은 단 두 갈래다. 가당찮은 우월감과 비참한 열등의식이 그것들이다. 일류대학 구성원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묘한 차별이 자행되고, 그에 따르는 ‘상대적 열등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지식사회의 그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실력에 의한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나라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인 셈이다.

***

몇 년 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세칭 일류대학 출신의 유학생을 한 사람 만난 적이 있다. 학교에 갔다가 자신보다 먼저 유학 온 어떤 사람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어중이떠중이대학 출신들이 모두 유학이란 걸 오는구나!”라고 말하더란다. 자신이 나온 대학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서열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그가 자존심이 상했던 듯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을 거라고 씁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다. ‘글로벌 시대’를 고창(高唱)하며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누가 감히 우리를 넘보랴?’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못난이들이 바로 우리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

그래서 이 순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고려대학의 정교수가 아쉬운 것이다. 까짓것 못난이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굳세게 버티며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잘한 참새들의 입방아를 넌지시 웃어주며 학문의 대로(大路)를 뚜벅뚜벅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0. 10. 22.

      타쉬켄트의 호텔방에서  
      백규,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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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10. 12. 17:46

교수개혁이 대학의 개혁이다

개교 110주년. 개교 이래 한 세기를 넘기고 10년이란 세월이 더 흐른 시점이다. 어느 공동체이든 한 세기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략 ‘조(祖)-부(父)-손(孫)’ 3대의 계보가 완성되는 기간이며, 처음에 표방한 이념을 완성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거기에 ‘강산도 바뀔 만한’ 10년이 더 흘렀다.

제대로라면 새 세기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방향 지표에 구성원들의 총의가 결집되어 벌써 출발선으로부터 훨씬 멀리 떠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숭실의 구성원들은 그런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KAIST와 서울대 등 앞서 가는 몇몇 대학들은 교수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함으로써 대학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학문과 지식사회를 선도하는 이들 몇몇 대학들은 대학의 수월성을 교수집단에 대한 엄격한 관리에서 추구하려고 한 것 같다. 만시지탄의 느낌은 없지 않으나, 맞는 방향이다.

사실 대학은 개혁되어야 하고, 대학개혁의 핵심은 교수개혁이다. 교육의 핵심은 교수에 달려 있고, 교수는 엄격한 평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기백명의 학생들, 적게는 10명 이내에서 많게는 십 수 명의 교수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 대학의 학과들이다. 매년 많은 수의 학생들이 사회로 배출되고, 그들은 각계로 흩어져 대학에서 자신들이 배운 대로 행동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의 핵심적 위치에 서게 되고 그가 이끄는 공동체 역시 그들의 생각대로 굴러가게 된다.

교수들이 잘못 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학생과 학교, 사회와 국가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이 크리라는 점은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다. 그간 온정주의나 연공서열 중시의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지내온’ 일부 교수들이 만에 하나 동료나 후배교수들을 ‘패거리’로 묶어 지배하려고까지 한다면, 학문은 실종되고 술수나 음모가 판치는 ‘조폭사회’로 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바로 교수사회다.

학문적 담론의 질과 양, 강의를 비롯한 학생들에 대한 서비스의 질과 양으로 교수 자질의 적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하고, 그것이 교수들에 대한 우대와 퇴출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수들에 대한 평가가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없어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 번 교수가 되면 ‘어영부영’ 정년보장이나 받는 교수들이 적지 않은 집단이라면, 대학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국문과 조규익 교수)

*이 글은 숭대시보 No.955, 2007년 10월 8일자 사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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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5. 7. 13:08
 

교수들은 담론 생산의 주체로 거듭 나야 한다


                                                                                             조규익

제1회 숭실 인문학 포럼의 성공을 보면서 대학의 본질과 가능성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고자 한다. 진부한 말이지만,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고 그 핵심에 교수들이 있다.


해당 분야의 체계적인 지식과 창조적인 능력을 지녀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 대부분의 교수들은 1차적으로 전공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교수들이 전공의 협소한 분야에 갇혀 좀 더 넓은 세계나 현실을 보지 못할 때, 그 지식이나 창조력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상아탑 속의 존재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전공분야에 대한 탐구와 함께 세상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교수들이 고도의 윤리의식과 해박한 전문가적 식견을 통해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현재의 교수집단은 다원화 된 현실 속에서 왜소한 지식인 군상으로 전락되어 가고 있다. 초라한 지식상(知識商)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눈초리는 차갑다. 그들로부터 아무런 비전도, 철학도, 노력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번 교수집단에 들어가고 나면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나 보여주기 일쑤인 점은 더욱 한심한 노릇이다.


그러나 교수집단도 기회와 동기만 주어진다면, 사회의 정론(正論)을 생산하고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포럼은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최근 기독교에 대한 김용옥씨의 비판적 주장에 많은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반론이나 비판이 없었던 것은 우리 지식사회에 대한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기라성 같은 기독교 대학들이 포진하고 있음에도 어느 대학 하나 나서서 그의 문제적 논리에 반박을 가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며 우리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공포’를 경험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숭실 인문학 포럼을 통해 김용옥 논리의 시시비비를 가려 줌으로써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올바른 판단의 자료를 제공해 준 것은 당사자 김회권 교수를 포함 숭실의 인문학자들이 향후 적극적인 담론 생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제부터라도 대학교수들은 전공책의 행간에 현미경이나 들이대는 ‘골방의 샌님’ 신세를 청산하고 사회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가치 있는 담론을 생산해야 한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전공을 살리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며 대학을 살리는 길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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