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15. 07:15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부족 분포도

 

 

 


타오 시내 역사구역 도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장로교회

 

 

 

 


타오 신 시가지 안의 침례교회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 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반델리어 유적지가 자리 잡은 프리욜레 계곡을 벗어난 시각이 오후 4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기로 한 애당초 계획을 버리고 별 수 없이 로스 알라모스의 한 부분인 화이트 락(White Rock)에서 1박을 하며 반델리어의 감동을 정리하기로 했다. 창밖으로 산타페 산맥의 연봉들이 아스라이 보이는, 아름다운 호텔이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챙겨주는 아침을 먹은 다음 프런트의 아가씨에게 일기예보와 타오(Taos) 에 관해 물었다. 눈 올 확률은 20%. 그러나 타오는 반드시 들러 가야 할 곳이라고 강추했다. 에라, 모르겠다. 눈이 쌓이면 며칠 묵어가지. 앞으로 언제 이곳에 또 올 것이냐. 그래서 산타페 쪽으로 다시 돌아가 I-40을 타는 대신, 그 반대편에 있는 타오(Taos)로 기수를 돌리기로 했다. 푸에블로 인들이 대대로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는 타오의 집단 거주지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화이트 락에서 타오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어떤 구간보다 아름다웠다. 겉으로 낙후되어 보이긴 했으나 연도의 촌락들도 모두 평화로웠고, 황량한 산하는 그 나름의 정제된 미학을 갖추고 있었다. 군데군데 퇴락한 도회들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들이 갖고 있는 역사성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멋지게 뻗은 502번 도로로 화이트 락의 호텔을 출발하여 잠시 가다가 30번으로 갈아탔고, 에스파뇰라(Espaňola) 턴파이크에서 68번으로 갈아탄 다음 두 시간 넘게 걸려 타오에 도착했다.

 

달리는 중간 중간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의 경관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발걸음을 주춤거리기도 했다. 예컨대, 아리바 카운티(Arriba County)를 지날 때 길 가에서 녹슨 간판을 보고 찾아 들어간 작은 도시 벨라르데(Velarde)에서 과달루페 성모가 모셔진 작은 성당 과달루페 성모 교회[Iglesia de la Virgen de Guadalupe Mission Church]를 만난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한적한 시골 동네 한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 성당은 참으로 정결하고 가난해 보였다. 작은 나라에서 대형 교회들만 보아오던 내 눈에 큰 나라의 작은 교회가 주는 감동은 작지 않았다. 그런 감동을 안고 다시 먼 길을 달려 해발 2,124m의 높은 지역에 위치해 있는 면적 13.9 의 소도시 타오에 진입하게 되었다.

 

멀리 타오 마운틴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시가지가 비교적 널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은 좁았으나, 도시를 채우고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들은 따스해 보였다. 무엇보다 성당과 교회 및 공공건물들 대부분이 어도비 양식인 점이 좋았다. 번쩍이는 빌딩 식 교회들보다는 어도비의 그 따스함 속에 구원의 손길이 깃들 것만 같았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타오 푸에블로(Taos Pueblo)’까지는 타오 신도시[Modern City of Taos]에서 북쪽으로 1마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도시에 들어가자마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St. Francisco de Asísi Church]’이 매혹적인 자태로 서 있는 것 아닌가. 안 들를 수 없는 일. 앞쪽으로 가보니 말문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건축미가 돋보였다. 이 지역의 교회들을 들르면서 느끼는 것은 종교적인 경건함보다는 건축미가 먼저 마음을 흔든다는 점이다. 교회 문을 살짝 밀고 들어서니 누가 죽었는지 장례미사가 집전되고 있었다. 경건하고 슬픈 분위기를 해칠까 저어되어 살그머니 되돌아 나왔으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은 자꾸만 우리의 발걸음을 지척이게 하였다. 거기서 몇 블록을 전진하자 이번에는 어도비 양식의 장로교회와 침례교회 등이 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비록 문은 잠겨 있었으나, 외양을 감싼 고즈넉한 분위기가 세상의 번잡함을 정화시키고 있는 듯 했다. 역시 그곳의 자연환경과 일치되는 분위기의 교회가 사람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쉽게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전체에서 풍겨나는 따스한 느낌 때문인가 이 지역의 교회를 볼 때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폭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생소한 모습으로 번쩍이는 교회로부터 구원의 희망을 찾기란 어려운 일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주변에 널린 갖가지 유혹들을 물리치고 가까스로 도착한 곳이 타오 푸에블로. 타오 마운틴을 뒤로 하고 먼지 풀풀 이는 벌판에 그득하니 서 있는, 어도비 양식의 집단 거주지였다. 밝고 따스한 주택의 색깔이 주변의 붉은 흙빛, 뒤에 버티고 선 타오 산의 푸른빛, 마을을 뚫고 흐르는 리오 그란데 강의 옥색 물빛 등과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다.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가니 단층도 있고, 복층의 경우 5층까지 올린 집들도 있었다. 하나로 되어 있는 외벽 안쪽에 각자의 집들이 조합된 건축방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기본구조였다. 이 공동체에는 1,900명 이상의 푸에블로 인들이 속해 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근처에 현대식 집을 짓고 살다가 시원해지면 푸에블로의 자기 집에 머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내내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대략 150명 정도 된다고 한다.

 

타오 푸에블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 문화 유적으로서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 있다. 집들의 외양,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사다리들과 집 앞의 빵 화덕들은 스카이시티나 마찬가지였다. 사철 물이 흘러내리는 냇물을 보니, 그들이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거지는 냇물을 경계로 나뉘어 있었으며, 왼쪽 주거지의 중심부에 멋지게 지어진 가톨릭 교회도 있었다. 앞에서 누차 언급했지만,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을 거의 포기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인 점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스페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은 결과라고 보지만, 신교 보다 가톨릭 쪽이 자신들의 전통신앙이나 가치관을 더 용인해준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여러 면에서 폐쇄적이었다. 가옥의 내부는 전혀 공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함께 사진 찍는 일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 앞 화덕에서 구운 빵을 판다고 하여 들어가 보았으나, 페치카에 장작 한 올 겨우 넣고 간신히 추위를 참고 있던 할머니는 아예 카메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신들만의 세계라도 있는 듯, 이들의 구역에 들어가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경계의 눈빛을 쏘아대는 그들이었다.

 

 

 


타오 푸에블로 입구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어도비 주거지. 앞 쪽의 반타원형 구조물은 빵을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공동묘지를 갖춘 가톨릭 교회터

 

 

 

 

타오 푸에블로 경내의 가톨릭 교회

 

 

 

타오 푸에블로 왼쪽 주거지와 리오 그란데강 지류

 

 

 


타오 푸에블로에서 만난 푸에블로 소년과 검은 개

 

 

 

 


타오 푸에블로의 빵 굽는 화덕

 

 

 


타오 푸에블로 주거지

 

 

 


차양 밑에서 보호받고 있는 화덕

 

 

 


리오 그란데 강물과 나무 다리

 

 

 


빵을 굽고 있는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타오 푸에블로

 

 

 

 

이들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쭉 살아갈 것 같은 그들만의 주거지를 간신히 돌아본 다음, 우리는 타오 외곽으로 리오 그란데의 강줄기를 찾아 차를 돌렸다. 30분 정도 황야를 달렸을까. 엄청난 규모와 높이의 다리 리오 그란데 죠지 대교[Rio Grande George Bridge]’를 만났다. 저려오는 오금을 달래며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비행기 창문으로 땅바닥을 내려다보듯 갑자기 고소공포증이 밀려들었다. 멀리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고 나서야 이 다리가 없던 시절엔 타오가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지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런 고립지에 주거지를 건설하고 살았을까. 아마도 외부와 단절된 곳에 주거지를 건설하는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지역들이 사통팔달로 이어지는 오늘날 그들이 외부인들과의 접촉을 꺼려하는 것도 그런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나온 본능적 반응일 것이다.

 

대략 1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타오 푸에블로는 뉴멕시코 북쪽의 여덟 개 푸에블로들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사적인 영역을 많이 갖고 있는 부족이었다. 서기 1,000년부터 1,450년 사이에 세워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 공동체인 타오 푸에블로. 그곳에서 우리는 화석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만났다. 외부세계와 단절되고 싶긴 하지만, 적빈(赤貧)을 해결하기 위해 외부인들의 접근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과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아직도 지킬 만한 것이 있다고 믿는 그들이었지만, 외부인들로서는 그 점을 용납할 수 없는 현실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속물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은 자신들의 원래 모습을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훌륭한가?

 

타오 푸에블로 인들의 고집스런 표정을 대충 마음에 담아둔 채 우리는 뉴멕시코를 재빨리 벗어날 지름길 엔젤 마운틴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리오 그란데 강줄기와 계곡을 가로질러 만들어진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Rio Grande Jeorge Bridge]'

 

 

 


광야를 가르며 죠지 다리 밑을 지나는 리오 그란데 강

 

 

 


리오 그란데 죠지 다리 부근에서 바라 본 광야

 

 

 


산타페 광장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보여주는 타오 중앙광장

 

 

 


타오 광장 주변의 상가들

 

 

 


타오 외곽에서 만난 갤러리 'Happy Trails'

 

 

 


자료사진-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집단무용 '콘 댄스(Corn Dance)'

 


 


타오 카운티를 비롯한 뉴멕시코의 영역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9. 23:5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산타페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대성당 내부

 

 

 

 

 


대성당 안에서 만난 예수 수난상

 

 

 

 

 


대성당 앞뜰에서 만난 '물 위에서 춤 추는 프란체스코 성인'[Monika B. Kaden의 작품]

 

 

 

 

 


대성당 앞뜰에 서 있는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상'
미국 최초의 인디언 여성 성인으로 추존되었음. 

 

 

 

 

 

산타페의 가톨리시즘은 세속화된 미국을 정화시키는가? [산타페-2]

 

 

 

산타페의 구시가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이었다. 사실 뉴멕시코의 어느 도시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인을 모신 성당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산타페 로만 가톨릭 대 주교구[The Roman Catholic Archdiocese of Santa Fe]’의 모태 교회가 바로 이 성당인데, 이 성당의 뜰엔 눈길을 끄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성 성인으로 추존된 인디언 출신의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순결의 덕목과 육신의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짧은 생애에 많은 기적을 이룬 그녀였다. 결국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2012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에 의해 시성(諡聖)된 스물넷의 아름다운 그녀가 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대성당을 나온 후 지금은 홈리스들에 의해 점령된 산타페 광장으로부터 대성당 앞을 지나 잠시 걷자 스프링 모양의 계단으로 유명한 로레토 채플(Loretto Chapel)이 나왔다. 채플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린즐리(Richard M. Lindsley)씨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어 안내문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북한의 참상에 대해서 진심으로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 날짜 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실상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던지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도 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1852년 가을 로레토 수녀회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켄터키로부터 산타페에 도착하여 이 성당의 전신인 로레토 학원을 건립한 역사가 한글판 소개문에는 실려 있었다. 특히 강조된 내용은 원형계단의 건축학적 특징이었다. 수녀들이 도착한 몇 년 뒤 로레토 학원이 완성되었고, 그 후 몇 년 뒤에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의 마루와 성가대석을 연결하는 통로를 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일이 성사되기를 염원하며 수녀들은 9일간의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의 마지막 날 한 백발노인이 당나귀에 연장을 싣고 도착했다. 수녀원장을 만나 그 일을 해결해주겠노라고 말한 그는 톱 하나와 T, 망치하나만을 갖고 즉시 작업에 착수하여 단시일에 이 원형 계단을 완성했다. 중심 지주도 없이 33개의 디딤판만으로 360도 원형의 계단을 완성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성 요셉에게 기도를 드린 수녀들은 이 불가사의한 일이 그 기도의 응답임을 믿었으며, 상당수는 그 늙은 목수를 성 요셉으로 믿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수녀들이 보여준 지극한 신앙의 증거물이었다. 내 느낌에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발타키노와 같은 컨셉으로 보이는 이 원형계단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로레토 성당[Loretto Chapel, Built in 1873]

 

 

 


로레토 성당 입구의 안내 표지와 전설에 등장하는 늙은 목수

 

 

 


채플 안에 있는 '기적의 계단'

 

 

 


로레타 채플 내부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바로 최초의 어도비 건축 양식의 성당인 산 미구엘 미션[San Miguel Mission]’이었다. 스페인 식민시대 멕시코의 성당이었던 산 미구엘 미션1610~16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로 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 1680년의 푸에블로 반란때 손상을 입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재점령한 1710년에 재건축되어 스페인 병사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그 후 수없이 보수가 이루어지고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많이 가려지긴 했겠으나, 원래의 어도비 양식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또한 아름다웠는데, 특히 제단 뒤쪽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 벽[reredos]의 아름다움은 탁월했다. 더구나 그 장식들 속에 자리 한 미카엘 성인 상의 제작연대는 적어도 1709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합중국의 국가 역사 유적으로 지정된 이 성당은 산타페를 영적으로 충만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산 미구엘 성당[San Miguel Mission]

 

 

 


미구엘 성당 내부

 

 

 


미구엘 성당 제대 뒤의 장식벽[Reredos]. 아래쪽 중앙이 미카엘 성인 상

 

 

 


산 미구엘 성당의 종

 

 

 

 

그 다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지역 종교적 성향의 핵심인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로서,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곳이었다. 주 제단 뒤쪽의 벽장식은 모두 멕시코시티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내부 장식 모두는 멕시코 바로크 풍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531년 멕시코 아즈텍 종족 출신의 후안 데 디에고(Juan de Diego)에게 현신하여 성당을 지을 것을 명령한, 갈색 피부를 가진 원주민 형상의 성모가 바로 과달루페 성모.

 

이 사건을 계기로 테페야크 언덕을 비롯한 각지에 성당들이 건립되면서 멕시코는 급격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했다. 성모 현신의 이야기는 토착신앙에 물들어 가톨릭의 전파가 어렵던 당시 가톨릭 교단의 노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설화로 보이는데, 그 덕에 지금은 미국의 땅이 된 산타페에서 그 성모와 성당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75~1795년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과달루페 성소3피트 정도의 두꺼운 벽을 가진 어도비 건축물이었고, 그 중심에 1783년 멕시코 거장 호세 데 알지바[Jose de Alzibar]의 과달루페 성모상이 있었다. 멕시코 전통 양식으로 조각채색된 예술품의 정수로서 리어다스(reredos)’라 불리는 제단 뒤쪽의 장식 벽, 19세기 진품 성구(聖具) 보관소, 각종 미술사적 자료들, 대주교 쟝 뱁티스트 레이미(Jean Baptiste Lamy)에게 봉헌된 도서 및 자료관, 성지에서 가지고 온 식물들을 심어놓은 정원 등, 이 성당을 이루는 핵심 부분들은 여전히 화려하면서도 경건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 성모 상 

 

 

 

과달루페 성소의 내부 

 

 

 


과달루페 성소의 스테인드 글라스 

 

 

 

과달루페 성소 그림[Tom Mallon 작, Oil on Canvas 42"×22"]

 

 

 

산타페의 정신적 바탕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 프란체스코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이지만, ‘이곳의 문화와 전통에 융합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그것과 구별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원주민 출신의 성인 가데리 데각위타나 과달루페 성모를 만난 후안 데 디에고 등 이 지역에 가톨릭을 정착시킨 결정적 존재들이 있었고, 로레토 성당산 미구엘 성당과달루페 성당 등 핵심적 성소들이 어도비 건축양식을 채용함으로써 지역 전통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자 한 점은 무엇보다 산타페만의 독보적인 모습이었다. 요소요소에 숨어서 빛을 발하는 가톨릭 교회들의 존재는 미국의 강한 세속성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산타페만의 매력일 수 있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