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답사 혹은 보물찾기
조규익
내 어린 시절 소풍날의 가장 가슴 뛰는 행사는 ‘보물찾기’였다. 파릇파릇 돋아난 나물더미 속이나,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 밑에 감쪽같이 숨겨진 쪽지를 찾아내곤 환호성을 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쪽지 하나 찾아 봐야 연필 두어 자루, 공책 두어 권 주어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시절엔 보물을 찾아낸 아이들이 왜 그리도 부럽고 샘이 나던지. 쪽지 한 장 찾지 못한 채 소풍이 끝날 무렵이면, 늘 아쉽고 허전했다. 그 뒤부터 이날까지 내 삶은 대부분 ‘실패한 보물찾기’의 연속이다.
철이 들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답사에서 얻는 설화나 민요, 귀한 자료들이 보물임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촌로들로부터 약간 이색적인 설화 한 편이라도 얻어 듣는 날엔 가슴이 뛰었다.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천하에 없는 이본(異本)이라도 얻은 듯 흡족함을 느꼈으니, 그게 보물 아니고 무엇이랴. 그 뿐인가. 가끔 ‘고서답사(古書踏査)’를 떠났다가 희귀본 소설 자료나 노래 자료라도 얻을라치면, 가슴이 설레어 여러 날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것들은 분명 보물이었다.
나이를 먹고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현장에서 만나는 보물들은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채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14년 전 ‘기독교 확산과 중세문명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6개월 간 유럽의 20개국 120개 도시들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모여 있으나 동유럽을 제외하곤 국경이 따로 없는 그 지역을 돌며, EU의 현존재가 갖는 역사적 필연성이 기독교로부터 나왔음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전공 공부는 잠시 뒤로 미룬 채, 곰브리치의 <<세계사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유럽 중심의 세계사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 읽으며 ‘보물찾기’의 도구로 갖춘 것은 물론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유럽에서 만난 보물들은 내 협소한 세계인식의 폭을 거의 무한대로 넓혀 주었다.
몇 년 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 6개월 정도 머무를 때였다. 미국에 인디언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클라호마 주에 39개의 인디언 부족과 그들의 보호구역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고, 틈 날 때마다 그들을 찾아 다녔다. ‘인디언 종족・역사・문화 답사’에 나섰던 것이다. 드넓은 대초원과 계곡 속에 숨은 듯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면서 문득 옛날의 ‘보물찾기’가 떠올랐다. 현장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을 통해 미국 역사의 그늘을 발견했고,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답사여행이 대학시절 학술답사체험에서 길러진 내 습벽(習癖)의 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 자체야말로 답사로부터 체득한 결과라 할 수 있으리라.
강의실이나 연구실은 삶의 현장을 최소화시킨 공간이고, 교과서나 참고서는 삶의 현장에 널린 자료들을 모아 가공하거나 조리한 음식 같은 것이다.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잘 만들어진 텍스트를 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부에도 가끔은 야성(野性)이 필요하다. 엄마 젖을 뗀 뒤 얼마동안 이유식을 먹다가 이빨이 솟기 시작하면서 ‘날 것 그대로’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아가들을 보라. 학생들이 강의실 아닌 현장에서 ‘거칠지만 날 것 그대로의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성장의 원리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전통 마을들을 찾아, 그 정신적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은 잦을수록 좋다.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준화된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찾아 현장에 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남들과 달리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큰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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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숨 쉬는 ‘카오스의 시공’ 공주와 부여를 찾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곳에 사는 백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들의 언어와 문학, 역사를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의 어떤 것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그들 스스로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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