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강의와 지식사회의 철학
최근 몇몇 대학들의 영어강좌 비율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어이없게도 그것은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강의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영어강의를 해야 하는지, 목표하는 바가 모호하다. 영어강의의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은 주로 ‘유학 준비’나 ‘영어 실력 향상’에 목표를 둔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선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만 목표를 둘 수 없다.
우리말로 하는 경우에도 교수-학생 간의 소통이 어려운 전공분야. 영어로 할 경우라면 그런 문제 뿐 아니라 놓치는 것들 또한 비일비재할 것이다. 다양한 전공분야의 교수들이 영어구사나 교수법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런 영어가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전공 내용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위험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들마다 영어강의를 확대시키려고 애쓴다. ‘대학 마케팅’에 효과적인 상품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강의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좌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수입학문들’이다. 우리와 세계인들의 상호소통을 통해 공감영역을 넓히는 일이 ‘세계화’라고 본다면, 영어강의의 무조건적 확대는 지금껏 우리가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서양학문에의 예속’을 새로운 세대에게 강요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무슨 과목이든 대학의 영어강의는 필요하고 권장되어야 하지만,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 장기적으로 영어강의가 보다 ‘잘 준비되어야 하고 절실한 분야’는 바로 외국에 보급해야 할 우리의 자생 혹은 자립학문들이다. 우선적으로 영어강의는 우리의 자립학문을 국제학문의 규격에 맞게 ‘표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해외의 인재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을 찾는다. 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세계화된 학문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학문들이다.
우리의 어문학, 사학, 철학 등을 영어로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이다. 앞으로 폭증하게 될 수요에 대비하여 이들 분야에 관한 영어강의 잠재력을 배양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의 학생들이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학문의 자립국이나 수출국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말을 익혀오라고 그들에게 배짱을 내밀 단계도 아니다. 합당한 분야의 영어강의를 점차 늘여감으로써 수출 가능한 우리의 자립학문을 세계시장에 상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자립학문을 영어 등 세계어로 체계화 시키고 강의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거나 교수로 영입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지(福澤諭吉)가 대표하던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사회는 서양학문의 도입을 통해 일본사회와 일본학문 근대화를 실천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우리와 방법이 달랐고, 무엇보다 ‘수입상’의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벗어났으므로 자립의 단계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 식민시대를 포함하여 해방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 우리의 지식사회는 학문의 초라한 수입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입학문의 영어강의만을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학문의 주체적 생산자가 될 수 없다. 영어강좌는 우리 학문의 수출에 긴요한 도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영어강의에 대한 지식사회의 철학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07.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