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07. 12. 12. 18:15
 

 안민(安民)의 불국토 건설, 그 이상과 현실

  -<안민가(安民歌)>의 내용미학-


                                                                            조규익


 Ⅰ. 정치, 백성,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


국민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제1원칙이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국가의 질서가 잡혀야 한다. 무질서 속에 팽개쳐진 국민들이 부유할 수도, 편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다. 바르게 하는 것 즉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왕의 책임이다. 왕이 솔선하여 바르다면 아무도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노나라의 대부 계강자(季康子)에게 건네준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서양에서 정치(politics)란 용어는 원래 도시국가의 뜻을 지닌 폴리스(polis)의 파생어 폴리티쿠스(politikus)에서 나왔다. 폴리스의 전역에 걸쳐 살아가던 시민들은 민회, 평의회, 행정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국가의 정치에 관여했다. 그런 시공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정치행위는 공동체의 삶을 바르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중점이 놓여 있었다.

 <<관정경(灌頂經)>>에서는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라 했으니, 정치에 대한 불교의 관점도 유교나 서양과 다를 바 없다. 이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이 <<출요경(出曜經)>>‘척요품’의 관점이다. 즉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교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는 것이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정치란 바른 생각에 입각한 ‘바른 사유(思惟)’라는 것이다. 만약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삿된 소견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삿된 소견을 갖지 않게 된다. 삿된 소견을 갖지 않아야 임금은 임금의 노릇을 신하는 신하의 노릇을 백성은 백성을 노릇을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는 모든 질서가 바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정치적 안정과 혼란의 원인은 정파들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거나 정치 행위 당사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직분을 망각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외세의 침탈을 불러오거나 모순의 극대화로 인해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지배자는 통치기반의 강화를 위해 애쓰고자 하나, 대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나 부침이 극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시대가 신라 경덕왕의 치세(742~765)였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에 향가가 많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 ‘정치적 담론’으로 해석할만한 <안민가(安民歌)>가 제진(製進)되었다는 사실이다.

 경덕왕대의 향가로 기록된 <도솔가(兜率歌)>,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안민가> 등은 하나같이 시대 배경이나 내용의 면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들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파의 다툼과 그 해결을 상징적·제의적으로 드러낸 <도솔가>, 신라시대 관음신앙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도천수관음가>, 영웅적 인간상에 대한 찬양으로서 개인 서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찬기파랑가>, 정치의 요체와 국가적 지향점을 노래한 <안민가> 등이 그것들인데, 관점에 따라 노래들의 정신이나 주제는 달리 파악될 수 있겠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안민가>가 드러내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 혹은 착종(錯綜)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안민가>에서 노래된 치도(治道)의 요체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하)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와 노래가 실려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의 신 등이 가끔 현신하여 대궐 뜰에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에 앉아 좌우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도중에서 영복승 한 사람을 얻어 오겠는가?” 마침 위의가 선명하고 조촐한 한 대덕이 바람을 쏘이며 거닐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왔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한 영승이 아니로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또 한 중이 가사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으로부터 왔다. 왕이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이하여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중은 대답했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그럼, 어디로부터 돌아오시는가.” 충담은 여쭈었다. “승려들은 늘 중삼·중구일을 중시하여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옵니다.” 왕은 말했다. “과인에게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인연이 있을 수 있겠소?”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그 차의 기미(氣味)가 이상하고 다구 속에 이상한 향기가 강했다. 왕은 또 물었다.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오?” 충담은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럼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곧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따스한 어미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겁니다

 꾸물꾸물 살아가는 중생들

 이들을 먹여 살리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

 나라 보전할 길 아시리다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시면

 나라가 태평하리이다


 이 노래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은~알 겁니다’, ‘꾸물꾸물~아시리다’, ‘아으~태평하리이다’ 등이 그것들이다. 1단은 대전제, 2단은 방법론, 3단은 1단을 좀 더 구체화시켜 도출해낸 주제단락이다. ‘백성을 사랑함’, ‘백성을 먹여살림/나라 보전함’, ‘나라가 태평함’ 등은 각 단의 내용적 핵심이다.

 임금과 신하, 혹은 부자(父子)의 직분을 엄수하는 것이 이상 정치의 요체임은 <<논어>>에서도 설명된 바 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공은 “맞습니다.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식량이 넉넉하다 한들 내 어찌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으리오?”라고 공자의 현답(賢答)에 맞장구를 쳤다.

 이런 <<논어>>의 말 가운데 부자(父子)를 백성으로 대치한 것이 <안민가>의 담론이니, 선학들이 <안민가>의 배경사상을 유가(儒家)로 본 것도 응당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금이 임금노릇을, 신하가 신하노릇을, 백성이 백성노릇을 제대로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는 말이 어찌 유가만의 논리일 것이며, 사상(思想)의 차원으로까지 격을 높여 따질 내용이겠는가. ‘누구나 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세상일은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는 평범한 시정(市井)의 담론에 불과한 것을 세상의 학인들은 지나치게 고답적으로 따져왔을 뿐이다.

 문제는 정치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현책(賢策)을 노래에 담아달라는 왕의 요청에 이와 같이 평범한 시정의 논리로 대꾸한 충담의 의도에 있을 것이다. 신라 중대에 속하는 경덕왕  대는 체제의 모순이 서서히 현실화 하던 시기였다. 지배세력 내부의 대립과 모순이 표면화 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위기를 느낀 경덕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지만, 그러한 개혁정책들이 쉽게 정착되지는 못했다. 왕 혼자의 힘으로 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하고 귀족세력이 이미 권력의 축으로 대두된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특히 왕 자신이 후사(後嗣)와 관련된 무리수를 범함으로써 추락된 왕권은 치명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식으로 후사를 삼으려는 욕망’을 왕권강화책과 동일시한 것이 경덕왕이 범한 무리수였는데, 그 당연한 결과로서 후사인 혜공왕이 피살되고, 차후 신라의 정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경덕왕은 충담을 만났다. 그렇다고 왕이 충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유행하던 <찬기파랑가>를 통해 그 작자인 충담을 왕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충담과의 대화에서 왕은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요?”라고 물었다. 그에 대해 충담사는 “그러하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건넸다. 그렇다면 일말의 망설임이나 겸양의 의도도 없었던 충담사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왕이 작자인 충담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은 ‘심히 높다’는 노래의 뜻인데, 그 경우 뜻이란 작자의 의도나 그로부터 구현된 주제의식일 것이다.

 그것은 ‘기파랑’이란 실존인물의 덕망이 왕을 비롯한 당대 권력층의 일반적인 성향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충담은 기파랑과 함께 권력에 발을 담그지 않으면서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일종의 ‘재야 덕망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권력을 잡지는 않았으나, 대중으로부터 권력 못지않은 사랑과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왕이 충담에게 ‘이안민(理安民)’의 현책을 <찬기파랑가>와 같은 노래의 형태로 요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감동한 왕이 노래를 받은 다음 충담에게 왕사(王師)의 자리를 주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점도 충담의 정신이나 현실적인 위치를 암시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왕사의 자리를 사양했던 것일까. 애당초 자신이 정치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 현실이 힘없는 재야 명망가가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은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런 생각의 실천을 뒷받침할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실현시키지 못할 아이디어라면 꿈에 그칠 뿐이고, 그런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은 단순한 ‘이상가(理想家)’ 이상은 될 수 없음을 충담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야 명망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임금에게 실천자적 역할의 짐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 속의 핵심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에 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제대로 ‘안하는’, 당대의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말하자면 당대에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있는 점을 충담은 적절하게 지적했고, 왕은 노래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셈이었다.

 경덕왕이 왕권 강화에 나서서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들을 시행한 것도 <안민가>의 제진(製進)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문박사와 누각박사(漏刻博士) 등을 두어 기후의 변화를 살피고 백성들의 삶을 배려하려 한 것은 위민정치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경덕왕의 개혁정치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충담이 눈을 주었던 대상은 백성이었다. 그의 눈에 밟힌 것은 고통 받는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면 나라는 태평해지는 것이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대본(大本)이라고 본 것이다. 백성들이 잘 먹고 살아야 ‘이상적인 불국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 충담의 철학이었다. 백성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지배계층은 권력 싸움들을 그만 하고 제 할 일들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충담의 정치철학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래에 담긴 뜻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 ‘모두 제 할 일들을 다 하는 일’ 등인데, 임금으로선 그 속뜻을 좀 더 다르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라는 두 조항에서 전자를 ‘임금다운 권력의 회복’으로, 후자를 ‘권신(權臣)들을 다잡아 신하다운 종속의 위치로 내리는 일’로 각각 해석했을 것이다.

 민심을 읽고 있던 충담으로서는 임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심을 얻는 지름길이며 궁극적으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려 했을 것이고, <안민가>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덕왕이 귀정문 누상에서 기다린 ‘영복승’이란 ‘민심의 향배를 읽을 줄 아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승려’였을 것이고, 그에게 요청한 ‘이안민의 노래’는 난국에 처한 임금이 당장 취해야 할 정치적 조치를 담은 담론이었던 것이다.


 Ⅲ. <안민가>의 정신, 그 지속과 변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로 묶여 국가가 지속되는 한, <안민가>의 정신은 정치의 대전제로 살아남기 마련이다. 다만 노래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제의식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정치의식을 담은 노래는 조선조의 악장이나 관각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변계량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변질된 <안민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서로 찾고 서로 응할 제

밝은 시절 용호(龍虎)가 만나 스스로 기약함이 있도다

신하의 절개 솔과 대라 추워도 변하지 않고

성은(聖恩)은 천지와 같아 가이 없도다

크시도다, 건원(乾元) 4덕의 온전하심이여!

황상(黃裳)의 곤도(坤道)는 하늘을 믿고 받드나이다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태평시절 이루셨도다

부모와 신명(神明)처럼

사람하고 공경함을 혹시라도 바꾸지 말아야 하니

임금과 신하는 오직 한 몸일 뿐이로소이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지어올린 <<자전지곡(紫殿之曲)>> 가운데 <군신지의(君臣之義)>다.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에 대한 담론인데, 내용의 핵심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에 있다. 전제 왕조시절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은 절대 불변의 명제였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 노래에서는 임금과 신하를 계약관계의 두 당사자로 규정한 셈이다. 그런 계약관계가 성립되어야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족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써 왕권과 신권인 호족세력의 상호 협조체제를 확립했던 고려 태조 왕건이나 혁명을 주도하여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공신세력과 왕권의 제휴관계를 맺게 된 조선왕조의 초기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안민가>에서 언술된 군신관계와는 다른 모습이 이 노래에는 그려져 있다.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전제 군주체제의 기본성격인데, 왕과 신하들 간의 상호 거래를 문면에 명시한 것은 <안민가> 정신의 크나큰 변질이라 할 만하다. 만약 이 노래의 주지를 산문으로 풀어 표현할 경우 ‘군신 간의 힘겨루기’라는 서사적 주제의식이 생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만큼, 이 노래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엄청나다. 이 노래의 주체가 변계량으로 대표되는 공신(功臣) 그룹이었다는 점은 이 노래를 <안민가>의 정신으로부터 이토록 현격하게 변질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공신은 새로운 체제를 탄생·지속시키는 두 축이므로, <안민가>에 언급된 ‘군-신’과는 달리 이해(利害) 당사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안민가>와 <군신지의>에 언급된 ‘군-신’의 논리가 그 성격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담론을 달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노래 모두 전제왕조라는 동일한 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질된 모습을 보이긴 하나 <안민가>의 모티프가 이 노래에도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안민가>는 현대시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수용되고 있을까. 이향아의 <신곡조 향가- 안민가>를 들어보자.


하루 세끼,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묵상하고 싶다

밥사발에 옹싯거리는 낱알의 변용

이것은 봄부터 가을

이것은 일년의 심판

일년의 울음과 고통

의심과 기다림에 내리는 응답

내가 감사하는 것은 세월이다

아랑곳없이 깊어지는 무심이다

끼니 때면 가끔 조상들을 생각한다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끼니마다 나는 목숨을 의심한다

이름도 벼슬도 허울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평화여, 이 안분이여

결국은 감사한다

감사한다

때때로의 분망과

때때로의 무료와

때때로의 모멸과

때때로의 노여움을

지나간 시절을 거슬러 씹으며 삭힌다


내 사지와 동체 핏줄과 뼈가

일년에 일년씩 앙금으로 보태어져

아, 그 누구에게도 죄가 되는

평안을 회복한다

미안해라, 미안해라

평안 속에 갇힌다



이향아의 <안민가>를 관통하는 모티프도 ‘먹는 문제’의 해결을 통한 평안의 확보에 있다. 충담의 <안민가>에서도 중심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절박한 문제였다. 다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조롱 속의 새’가 백성이 아닌가. 그래서 충담은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절규했다. 그렇게 갇혀 사는 백성들이 평안함을 느끼며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길’이라 했다.

 이향아의 <안민가>도 세 개의 연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담의 <안민가>와 같다. 첫 연의 핵심은 ‘밥에 대한 의심과 기다림’이고,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이며, 셋째 연의 핵심은 ‘평안’이다. ‘끼니마다 묵상하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은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양순한 백성들’에겐 ‘봄부터 가을까지’ 기다려서 얻게 되는 한 해의 수확이 ‘일 년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초조하게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듯 한 해 열심히 노력한 백성들은 ‘배고프지 않길’ 바라면서 수확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싸잡아 ‘끼니 때면 가끔 생각하는’ 조상들이라 했다. 백성들의 배부름을 기원한 임금이나, 자신들의 배부름을 임금의 덕으로 생각한 백성들 모두 지금 끼니 때 굶지 않는 화자가 기꺼이 떠올리고 싶은 조상들인 것이다.

 ‘배불리 먹는’ 행복 앞에서 ‘이름이나 벼슬’은 허울일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인은 먹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다. ‘밥을 먹는 평화’, 아니 ‘밥을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와 그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부분이다. 밥을 먹고 평화를 얻어 감사하는 마음에 ‘분망, 무료, 모멸, 노여움’ 등은 모두 삭아 없어지는 감정의 찌꺼기들일 뿐이다.

 누구나 충담의 <안민가>에서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인식해낸다. 정치의 잘 되고 못 됨을 따지는데 다른 이론들이 있을 수 없다. 소박하고 양순한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만큼 ‘잘 되는 정치’가 어디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밥 한 술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정치집단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니 그 옛날 경덕왕 시절의 ‘재야 명망가’ 충담으로서야 못 먹는 백성들을 둘러보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이 ‘이안민(理安民)’의 첫 조건임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왕이 물어왔을 때 임금이나 신하들이 제대로 자기들의 역할을 하라고 일갈했다. 그렇게 되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나라가 태평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충담의 그런 본심을 꿰뚫어 보았기에 오늘날의 시인 이향아는 자신만의 <안민가>를 읊어낼 수 있었다.


                      ***


 고래로 정치의 요체는 백성을 먹이고 편안케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옛 노래들 가운데 충담의 <안민가>만큼 그 평범한 진리를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읊어낸 노래가 없다. 오늘날에도 그의 노래가 빛을 발하는 건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만큼 절박한 과제이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6. 6. 14:06

* 이 글은 <<불교문예>> 37호(2007년 여름호, 2007/ 6/1)에 실려 있습니다.


위대한 모정의 승리
  --<도천수관음가> 새로 읽기--


                                                                         조규익

하나. 부성보다 강한 모성, 그 전통

입시를 서너 달이나 앞 둔 무렵의 사찰. 손 모아 부처님께 절 올리며 자녀의 고득점과 미래의 행복을 비는 어머니들로 북적인다. 한 사람의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조건 없는 사랑이 꽃 피어나는 현장이다.
병원 입원실. 선천적인 불구로 태어난 어린 아들 곁에서 밤을 지새우는 모정이 TV 화면 가득 쏟아진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힘에 겨워 보이는 젊은 엄마의 처량하지만 강한 모습만 의연하다. 기약 없는 세월을 좁디좁은 입원실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임에도 여윈 얼굴에는 담담한 여유마저 흐른다. 아버지라고 어찌 자식 사랑이 없을까. 다만 그 절절함에서 모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부성이다. 우리는 고려의 속악 <사모곡(思母曲)>을 통해 그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마는
     위 덩더둥셩
     어머님같이 사랑해주실 이 없어라
     아, 님이시여! 어머님같이 사랑해주실 이 없어라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 이 노래 화자의 의도는 아니리라. 다만 양자 간의 차이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훨씬 두드러지는 것은 그 간절함 때문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자식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사랑을 화자는 노래한다. 어쩌면 이 노래는 지은이의 특이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거나 듣는 누구라도 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 속의 그런 체험이 노래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미와 낫에 비유한 품새가 범상치 않은 것도 그런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래서 짧지만 절창이고, 당시 인정의 기미(機微)를 잘 드러낸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되는 모티프를 지닌 노래가 <목주(木州)>다. <<고려사 악지>>의 삼국 속악에 실려 있으므로 원래 민간에서 만들어져 불리던 노래일 것이다. 배경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목주에 살고 있던 효녀가 아버지와 후모(後母)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아버지는 후모가 그녀를 헐뜯는 말만 듣고 그녀를 쫓아냈다. 쫓겨나 떠돌다가 한 노파에게 구제되었고, 그녀는  노파의 아들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심히 가난한 친정 부모를 모셔다가 극진히 봉양했으나, 부모는 그래도 기뻐하지 않자 그녀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후모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處事)가 서정화 될 경우 <사모곡> 같은 노래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주>가 <사모곡>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본능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그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일 만큼 절절하다. <목주>나 <사모곡>이 나왔을 삼국시대에 우리는 절절한 모성애가 흘러넘치는 또 하나의 노래를 만난다.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가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芬皇寺) 천수대비(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에 실려 전해지는 노래다.

둘. 지혜와 광명을 희구하는 모정

신라 경덕왕 대(재위 742~765)에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希明)의 아들이 생후 다섯 살 되었을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가 아들을 안고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걸려 있는 천수대비의 화상 앞에 가서 아들에게 명하여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다시 시력이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사뢰는 말씀을 두노라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에서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어
  두 눈 감은 나라
  ‘하나를 주소서!’ 하고 매달리나이다.
  아아, 나를 알아주실진대
  어디에 쓰실 자비인고

기록에는 ‘아들에게 명하여 노래를 지어 기도하게 했다’고 했으나, 다섯 살 된 아이가 이 노래를 지었을 리는 없다. 실제로는 희명 자신이 지은 노래를 그로 하여금 따라 부르게 했을 것이다.
서사 부분인 1~4행은 자비로운 천수관음을 향한 기구(祈求)의 언사이고, 5~8행은 본사로서 그 기구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결사인 9~10행은 마무리 부분으로서 눈 먼 아들의 눈을 뜨도록 만든 천수관음의 자비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천수관음 즉 관세음보살은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여 중생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소망과 아픔을 보살펴 준다는 믿음을 받고 있는 존재다. 그만큼 중생들과 가장 친근하여 염불에는 반드시 부처와 함께 칭명되기도 한다.
천수관음은 성관음(聖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준제관음(準提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과 함께 대표적인 7가지 관음이며, 1천개의 팔에 달린 각각의 손바닥에 눈을 가졌다고 여겨져 온다.
여기서 ‘천’을 단순한 숫자 개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주만방 즉 넓고 커서 한계가 없는 공간을 나타내며, 관음보살의 보살핌이 끝없이 펼쳐나감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도처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일을 관음보살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중생 희명이 이런 관음보살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기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희구한 것은 아니다. 두 눈을 잃은 자신의 아들에게 눈을 하나만 달라는 소청이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정이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존재가 관음보살이었다. 더구나 관음보살은 눈을 천 개나 갖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노래인가. ‘당신이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 그 가운데 하나만 덜어서 우리 아이에게 주면, 우리 아이는 광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진술이야말로 무엇보다 진솔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이의 순진성과 노래의 소박함이 만나 이루는 진실함은 결국 관음보살을 움직일 수 있었다.
천수다라니계청(千手陀羅尼啓請)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대원만(廣大圓滿) 무애대비심(無碍大悲心)     대다라니(大陀羅尼) 계청(啓請)
2.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3. 천안광명변관조(天眼光明遍觀照)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자재보살님과 같이 중생 보살핌이 넓고 크고 원만하여 막히는 데가 없이 자비심을 크게 하는 대다라니 열기를 청한다는 것이 1이다. 2는 관세음보살님이 천 개의 팔로 자비로운 원력을 널리 보급·보호·수지하게 하듯, 천 개의 팔로 중생들의 가정과 사회를 장엄하게 해달라는 뜻이며, 3은 관세음보살의 천 개 눈으로 세상을 두루 비추어 보듯이, 어두운 중생들도 마음을 항상 두루 비추어 보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눈은 무엇일까. 외계의 빛을 내면으로 투과시키는, 마음의 창(窓)이다. 동시에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눈을 감는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눈을 되찾는 것은 광명을 찾음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사회적 권력이나 사랑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소설 <심청전>을 보자. 심봉사의 딸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의 감은 눈을 뜨게 한다. 자신의 몸을 팔아 공양미 삼백 석을 구했고, 자신의 몸을 희생시킴으로써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을 되찾아 드렸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에서 심청이는 눈을 ‘일월(日月)’이라 했다. 말하자면 광명이라는 것이다. 효성으로 아버지에게 광명을 드린 <심청전>은 지극한 사랑으로 자식의 눈을 뜨게 한 <도천수관음가>의 경우와 대조되지만, 그 정신이나 눈이 갖는 의미는 정확히 일치한다.
시력을 잃은 아들. 그를 바라보는 모정의 안타까움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들이 비록 눈이 없다 해도 그를 먹여 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늙어 죽고 나면 그 아들은 험한 세상을 살아갈 방도가 없을 터. 그래서 모정은 크게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불완전한 사람이 홀로 살아가긴 어렵다. 그 가운데 눈은 가장 중요하다.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길이 바로 지혜요 광명이다. 어머니인 희명의 이름이 심상치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희명(希明)’이란 광명을 희구한다는 뜻이다. 이때의 광명은 진리를 비추어 주는 지혜의 빛이다.
지혜란 깨달음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러니 ‘희명’은 자연인이기보다 모든 불도들의 소망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관념적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희명이란 존재를 부조(浮彫)할 때 당대인들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어머니의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그 표본 역할을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천수관음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 천수관음은 그 아들에게 시력을 주었고, 그 덕에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일연의 찬(讚)은 다음과 같다.

竹馬葱笙戱陌塵     대말과 파피리로, 티끌 거리 노니더니.
一朝雙碧失瞳人     하루아침 파란 두 눈, 동자를 잃었도다.
不因大士迴慈眼     대사의 자비 입어, 눈을 찾지 못했다면.
虛度楊花幾社春     버들 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으리.
                                           (이가원 역)

희명의 아들을 여염의 평범한 ‘장난꾸러기 아이’로 본 것이 일연의 관점이다. 일연은 죽마를 타고 파피리 불며 제 또래 아이들과 장난치다가 눈을 다친 꼬마와 눈높이를 함께 하고자 한 것이다.
대사 즉 관음보살의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버들 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자신의 아찔한 심정을 토로했다. ‘버들 꽃 피는 봄’이란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기 혹은 황금기다.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기 보다는 인생의 행복을 구가하는 청춘기에 눈은 더 긴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생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는 공간이야말로 범인(凡人)들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일연은 그런 범인들의 시각으로 희명과 그 아들에게 일어난 이적(異蹟)을 보고자 했다. ‘광명혜안(光明慧眼)을 구비(具備)코자 하는 불도(佛徒)들의 심적(心的) 자세(姿勢)를 집약표현(集約表現)한 어사(語辭)’라는 일부 선학들의 주장도 일견 타당하겠지만, 세속에서 만나는 지극한 모정이 이루어낸 기적으로 보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런 점에서 <도천수관음가>는 지극한 모정의 노래일 수 있는 것이다.        

셋. 시인의 눈으로 본 <도천수관음가>


도천수관음가

                  박윤기
우리가 한 송이 꽃이었을 때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것은
바람이었네.

아직 꽃피우지 못한 마을의 아이들은 눈이 먼 채
不感의 하늘 속으로
잃어버린 點字를 찾고 있었지.

덫에 치인 꿈은
가위 눌린 채로 시위잠을 자고
젖줄 끊긴 살 속으로
뜨거운 嗚咽의 소리는 파고 들었네.

어느 빈 뜨락에도
아침을 몰고오는
소망의 작은 새떼는 날아오지 않고
우리들의 良識은
쉬임없이 강물에 자맥질하는
悔恨이었네.

층층이 내려서는
의식의 깊은 壁에
채찍의 겨울은 또 다른 장막을 둘러치고
바람은 무거운 囹圄마다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窓을
흔들며 있네.

은성했던 꿈의 부스러기가
부서져 내리는 길은 길마다
낮게 낮게 埋沒되고
우울의 계단을 빠져 나올 때
다시 어둠으로 차는 굴레.
모든 思念은 기실
풀었다가 다시 짜는 페넬로페의 織造였네.

돌아다 보면
그곳엔 오랜 묵시의 江이 흐르고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
기폭처럼 바람에 찢겨 나가고 있었지.

三界에 가득히
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앉고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청댓잎 푸른 가지를 비집고
피어오르는 아침은.
海潮音에 실려오는
비취 빛 청아한 아침 노래는.
오랜 冬眠의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외출을 서두르고
회색의 겨울은
부활의 눈을 뜬다.

8연의 매우 긴 이 시에서 시인은 향가 <도천수관음가>를 구체화하고 내면화 시켰다. 향가 <도천수관음가> 및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산문은 ‘암흑→광명’, ‘무명(無明)→지혜’로 전환되는 의미구조를 지니고 있다. 박윤기의 <도천수관음가>도 그런 의미구조를 충실히 따랐다고 볼 수 있다.
1연은 전체의 서사(序詞)로서, ‘꽃’과 ‘바람’으로 환유되는 ‘나(우리)’와 ‘세계’ 즉 우주적 보편상을 노래했다. 2연부터 6연까지는 실명과 암흑, 미망(迷妄)과 불행이 나열된다. ‘덫에 치인 꿈’, ‘젖줄 끊긴 살’, ‘뜨거운 오열’, ‘날아오지 않는 소망의 작은 새떼’, ‘회한’, ‘의식의 깊은 벽’, ‘채찍의 겨울’, ‘무거운 영어(囹圄)’,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창’, ‘꿈의 부스러기’, ‘우울의 계단’ 등 어둡고 칙칙한 운명적 상황을 구체화 시키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비로소 신의 힘이 ‘묵시’되는 부분이 바로 7연의 ‘묵시의 강’이다. 물론 아직도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기폭처럼 바람에 찢겨나가는’ 모습을 아프게 보여주는 곳이 그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7연은 단절이 깊어진 성(聖)과 속(俗)의 두 영역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한 기적이 역사적 사건으로 구체화 되려는 단초를 마련해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8연에서 시적 의미는 행복으로 전환된다. ‘삼계에 가득히/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 앉’게 되고. ‘비취빛 청아한 아침 노래’도 해조음에 실려 오게 되는 것이다.
‘오랜 동면의 잠에서 깨어난’ 일은 이미 암흑에서 광명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회색의 겨울’이 ‘부활의 눈’을 뜬 것은 희명의 아들이 시력을 회복하듯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과 등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시인 박윤기는 <도천수관음가>에서 ‘개안(開眼)’의 멋진 서사(敍事)를 길어 올려 서정의 틀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시 내용 가운데 향가 <도천수관음가>에서 필자가 읽어낸 ‘모정’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모정 역시 시의 내면이나 바탕에 잠재할 수 있는 정서의 큰 갈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넷. 갈수록 그리워지는 모정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이 바깥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그 많은 천수관음의 손과 눈 밑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보살의 힘이나 부처의 힘으로 찬양되던 불교왕국 신라. ‘한기리의 희명 모자’는 그 시절의 ‘힘없는’ 중생을 대표하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오고 가던 정, 특히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은 무엇보다 강했다. 귀족계급도 아닌 시골 사람 희명이 모정이라는 단순 소박한 무기로 관음보살을 움직인 것이다. 그건 감동의 힘이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 가운데는 ‘향가’를 숭상하는 자가 많았고, 천지귀신을 감동시킬 만한 노래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말했을 것이다. 희명의 염원을 실은 <도천수관음가>가 천수관음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천수관음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염원에 힘입어 눈을 뜬 어린 아들은 과연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 속에는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
신달자의 <사모곡>과 가수 태진아의 <사모곡>을 통해 <도천수관음가>에 담긴 모정의 실체를 찾아보기로 하자.


사모곡

          신달자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 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사모곡

                            태진아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 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 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이슬 맞으시며
한평생 모진 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두 노래 모두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말하고 있다. 문제가 생길 경우 신에게 매달리듯 전자의 화자에게 어머니는 매달리는 존재다. ‘자다가 겪는 신열’은 ‘길에서 겪는 미열’보다 고통의 면에서 심각하다. 그럴 때 화자는 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부른다고 했다.
‘엄마 손은 약손’임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아프고 괴로울 때 떠올리게 되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자식의 아픔에 눈물을 닦고 탄식하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안타깝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아프다고 해라/아프다고 해라’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벤다고 슬퍼한다. 자식의 아픔과 어려움을 자신이 떠안으려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결련에서 밝힌 것이다.
전자의 경우 1→2→3→4연으로 갈수록 모정에 대한 느낌의 강도는 고조된다. ‘불러요→닦으시나요→뚫어요→베어요’ 등 각 연의 결미(結尾) 동사들은 정서적 고양의 극적인 단서들이다. 아픈 자식을 근심스레 바라보며 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뒤늦은 깨달음을 절절하게 노래한 경우다. 신달자의 <사모곡>에 그려진 모성애야말로 <도천수관음가>의 모성애 바로 그것이다.
태진아의 <사모곡>에는 ‘흙에 살던, 가난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진 가난을 참아내며 땅 속에서 힘겹게 살다가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다. 그토록 어렵게 살면서도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던’ 분이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던 모정을 ‘눈물로’ 그리워하는 노래다. 따라서 태진아가 부른 <사모곡>의 모정 역시 <도천수관음가>의 모정 그 자체다. 
<도천수관음가>는 천수관음의 영험함을 드러내어 신라사회에 관음사상의 뿌리를 굳히려는 목적으로 만든 노래로만 볼 수는 없다. ‘한기리의 여자 희명’이나 ‘다섯 살에 눈 먼 그의 아들’이 실존했던 인물들일 수 있고, 분황사에 가서 갑작스런 눈병을 고친 사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실존인물들과 사실을 통해 부처나 관음의 영험함을 선양하려는 의도 역시 분명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시와 배경산문에서 모정을 읽어내려는 것은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모정은 샛별처럼 빛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천수관음가> 이래 시대마다 모정은 위대한 힘을 발휘했고, 여성이 사회적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모정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삶과 생각을 휘어잡고 있다.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은 천수대비를 감동시킴으로써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정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식이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주려고 한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으로부터 변화(혹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