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08.24 귀신들과 함께 사는 일본인들 1
  2. 2012.02.13 또 다시 주례를 서며
글 - 칼럼/단상2015. 8. 24. 20:59

 


헤이안 신궁의 웅장한 도리이

 

 


헤이안 신궁의 응천문

 

 


헤이안 신궁의 본전

 

 


헤이안 신궁의 봉물인 각종 술

 

 


헤이안 신궁의 뜰에 세워진 기원 팻말들

 

 


헤이안 신궁의 본전 앞에 세워진 기원 나무들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인들은 귀신들과 함께 산다는 말을 들어 왔고, 일본에 올 때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는 그들의 신을 모신 집(즉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일본 총리 아베의 신사참배가 세계적인 이슈로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한사코 일본 총리가 신사를 참배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참배하려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곳이 바로 우리를 괴롭힌 일본 전범들의 영혼을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책임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일본 정치의 책임자가 오히려 전범들을 참배하다니,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양국에서 하도 성토를 해대니 그도 어쩔 수 없는 듯 가끔 봉납(奉納)’으로 대신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봉납 즉 사찰(寺刹)이나 신사(神社) 등에 금품을 기부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더 지극한 정성의 표시일 수 있다. 큰 신사들의 앞마당엔 술통들을 몇 단으로 쌓아올려 진열하고 특정 주류회사의 봉납물임을 표시해 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술이나 만들어 떼돈을 버는 그런 회사들이 고약하게도 일본에서는 애국의 결사체임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공적(公敵)이 되어 있는 아베도 아마 그런 효과를 노렸으리라. ‘주변의 국가들이 하도 성토해대는 바람에 직접 참배는 못하니, 공물로나마 지극한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여기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자기네 국민을 단합시키겠다는 대외 정치적 노림수가 그 하나요,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재물을 아낌없이 봉납함으로써 자신도 신사의 귀신들에게 보통 국민들 이상의 정성을 표했다는, 대내 정치적 노림수가 다른 하나다. 그러니 그로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논란이 하나도 손해 날 일이 없는 셈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두 나라의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고 보는데, 나만의 느낌일까.

 

일본에 와서 놀라는 일이 있다. 개인들의 집에는 개인의 신사가,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신사가, 국가에는 국가 규모의 신사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결사체가 바로 신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몇 번 되지는 않으나, 일본에 오면 주택가를 돌며 개인 신사들을 구경하거나 마을 단위 혹은 국가 단위의 신사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취미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큰맘 먹고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요시다 신사(吉田神社) 등을 가 보았고, 동네를 걸으며 개인 집의 신사들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심지어 절에도 신사가 있었으니, 키요미즈 데라(淸水寺)에서 확인한 지슈신사(地主神社)가 그런 예였다. 어쩜 교회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다.

 

 


야사카 신사 입구의 도리이

 

 


야사카 신사의 본전

 

 


키요미즈 데라(淸水寺) 안에 세워진 지슈신사

 

 


요시다 신사

 

 


요시다 신사의 본전에서 기원하는 사람들

 

 


요시다 신사에 딸린 산음신사(요리와 음식의 신을 모셨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귀신들을 모시고 사는 것일까. 마을이나 거리를 걷다 보면 작고 큰 도리이(とりい: 鳥居)들이 있고, 그것들을 통과한 안 쪽에 신전이 있었다. ‘鳥居鷄居(にわとりい)’로서 진언종을 설립한 구카이가 신성한 의식공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신도에서 닭을 신의 전령으로 생각하기에 닭이 머무는 자리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썼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다만, 내 보기에 도리이가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로 사용된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의 세계에서 도리이를 통과하면 신의 세계라는 것이다. 개인의 집들에 설치된 개인 신사들에는 도리이를 세울 수 없으니, 어쩌면 그 신사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액()을 막아주는 방책 역할을 해온 듯했다. 집안이 산 사람들의 공간이긴 하나 귀신들과 공존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삿된 기운을 막아 주는 신성한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리이를 통과한, 이른바 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도 속의 세계를 상징하는 돈으로 철저히 계산되고 있었다. 기복(祈福)이나 제액(除厄), 결혼 등 모든 행위에 돈이 따르고, 돈의 액수에 따라 복의 크기가 계량되는 속의 원리가 충실히 재현되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의 자기모순의 이기적인 행태는 속의 원리로 성의 세계를 재단하려는 데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른바 카오스의 재현,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내 관점에서 아직 일본은 본태적 카오스를 벗어나지 못한 공간이었다.

 

사실상 어릴 적부터 신도에 충실한 인간상으로 길러지는 것이 일본인들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큰 신사에서 복전을 내고 줄을 흔들어 방울소리를 내며 복을 기원하는 부모를 보았을 것이고, 성장한 뒤 그들도 그런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그 뿐이랴. 어려서부터 집 앞에 설치한 신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열심히 기원하는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은 일상의 큰 부분으로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장성한 뒤 짝을 만나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이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다만 한사코 전범들을 모아놓은 야스쿠니에서, 그것도 패전일에 참배함으로써 무언가를 노리는, 그 정치적 야욕이 미울 뿐이다. 자신들의 순수한 종교의식을 지키는 일에만 충실하다면야 누가 딴죽을 걸 수 있겠는가. 피해자들의 속마음을 긁어놓으려는 못된 심보가 고약한 것이다.

 

며칠 전 길 가는 도중, 구부정한 할머니를 보았다. 골목 모서리의 빈틈에 세워진 작고 초라한 신사 앞에 꽃바구니를 든 채, 신이 좌정한 곳을 올려다보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말뜻은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구하고 있었다. 굽은 허리와 주름 진 얼굴이 많은 사연을 숨기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기구하는 것은 궂은일의 해결일 수도, ‘좋은 일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경건한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신도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어엿한 종교이든, 개인 차원의 소박한 믿음이든, 순수하기만 하다면야 굳이 탓할 이유가 없다. 그것들이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집단적 야욕 충족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가공할 정도의 부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저 할머니야 야스쿠니에 합사된 전범들의 존재나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인 아베의 욕망을 어찌 알겠는가. 필시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를 신에게 간구한 데 불과했으리라.


 

 


큰 길가 가게집의 신사


 

 


가게집 신사 내부의 모습

 

 

 

 


동네의 신사


 

 


동네집 신사 내부에 모신 신의 모습

 

 

 

 


개인 집 신사

 

 

 


키요미즈 데라 아랫 동네 개인 집의 신사

 

 

 


길가 신사에 꽃을 바치러 와서 기원을 하고 있는 할머니

 

 

 


호텔 옆에 있던 동네의 신사 '주길신사'

 

 

 

 

 

귀신은 일본 도처에 있었다. 야사카 신사에도 본전을 둘러싸고 많은 잡신들이 별도로 모셔져 있었으며, 요시다 신사에도 본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저곳에 작은 신사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 개인들의 신사에는 그들의 조상신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들에게도 조상신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여러 잡신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바로 일본의 신사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신사는 로마의 판테온(Pantheon) 같은 곳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들이 모신 존재들이 악한 신령들이 아닌 이상, 그 신들의 이름으로 악한 짓을 저질러선 안 된다. 온갖 귀신들에 사로잡힌 일본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집과 편견, 이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집과 편견, 이기를 보호해주는 것이 귀신들의 임무가 아니라는 점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어릴 적부터 집 앞의 신사, 동네의 신사, 지방과 국가의 신사를 출입하며 꿈을 키웠을 정치인 아베도 이젠 가슴을 열어야 한다. 나 혼자만 사는 게 세상은 아니라는 점, 일본인들을 귀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이 되도록 하는 게 미래지향적 정치인의 의무라는 점 등을 빨리 깨달아야 미구에 닥칠 또 하나의 비극을 면하게 될 것이다.

 

***

 

이번의 일본 행차에서 나는 신사가 일본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교과서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2. 13. 16:18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커플의 결혼 사진(1970년대?)> 

 

                                                                                                                                                          백규

 

대학교수로 지내며 나이를 먹어가니 어쩔 수 없이 주례를 서야 할 경우가 생긴다. 제법 오랫동안 내 주변을 서성거리던 제자들이 결혼을 하겠다며 여자들을 끌고 와 읍소하는데 거절할 만한 강심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몇 번 주례를 서 주었다. 그런데 우리와 그들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었다. 결혼 전에는 종종 전화도 걸어 주고 찾아 주기도 하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왜 결혼식 이후로는 연락을 끊는 것일까. 혹시 내 주례사에 문제가 있었던가? 그동안 수많은 결혼식을 다녀보며 주례사를 들어보지만, 대개 하나마나 한 말들 뿐이었다. 말 그대로 ‘주례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주례사들’ 뿐이었다. 오죽하면 칭찬만 해대는 서평을 ‘주례사 서평’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런 주례사들을 접하면서 ‘앞으로 주례석에 안서면 안 섰지 저런 주례사는 안 하겠다’는 것이 내 결심이었고, 그간 몇 건의 주례사는 그런 내 생각을 비교적 잘 반영했다고 자부해오던 터였다.

 

그렇다면 하나같이 내가 주례를 서 준 제자나 후배들이 결혼식 뒤에 연락을 끊는 이유는 뭘까. 나름대로 추정을 해보니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 했다. 결혼 후 너무나 환상적인 짝꿍과 행복에 빠진 나머지 미처 주례선생에게까지 연락할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이유였다. 다른 하나는 참 떠올리기 싫은 ‘불편한 가능성’일 수 있는데, 그들 스스로 꿈꾸던 결혼의 환상이 결혼 후에 깨어져 버린 이유로 차마 주례선생을 찾아오거나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늘 강조하는 것처럼 연애는 환상이나 결혼은 현실이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버전이 바뀌는 순간 모든 것은 현실에 맞추어 재조정된다. 그래서 오죽하면 ‘결혼이란 연애와 사랑의 무덤’이란 극단적 표현까지 있겠는가.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결혼을 하기 위해 애를 쓴다. 사실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제대로 알고 밟는다면, 더 큰 행복을 맛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연애가 철없는 시절에만 통용되는 ‘무질서의 서사(敍事)’라면, 결혼은 철 든 이후에만 형성될 수 있는 ‘질서 있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사실 안정감 있는 행복이야말로 ‘질서가 잡힌 서사’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의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결혼을 연애의 연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고 나서도 ‘무질서의 서사’를 지속하려 하고, 그래서 상당수의 커플들은 좌절과 환멸을 경험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두 사람 사이에 투쟁과 갈등이 생겨나 분위기가 삭막해지거나 급기야 헤어지는 사태에 이르곤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래서 내가 주례를 서 준 대부분의 제자들이 결혼 후에 연락을 뚝 끊어버리는 것이나 아니었을까.

  ***

그래서 다시는 주례를 서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한 두 해를 잘 넘겼다. 그런데, 얼마 전에 미국 사는 친구가 공항 출국장에서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들놈 주례 좀 서 달라!’는 부탁이었다. 신부 쪽에서 주례를 세우겠노라고 해서 믿고 맡겼더니 출국 직전에 주례를 세울 수 없게 되었다는 통보가 왔다고 울상이었다. 그에게 어린 시절의 ‘밝히기 힘든’ 빚도 있고 해서, 이른바 ‘땜빵’이었지만, 승낙을 하고 말았다. 엉겁결에 승낙을 했지만, 이내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행 비행기는 이미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을 것이니, 하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커플을 연구실로 불렀고, 점심을 함께 했다. 그들은 눈치를 못 챘겠지만, 면담과 점심을 통해 그들을 테스트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담소를 곁들인 점심을 나누다 보니 둘 다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잘 만 하면 멋지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믿음이 슬그머니 드는 것이었다. 참을성 없어 헤어지기를 밥 먹듯이 하는 요즈음의 커플들과는 많이 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희망 섞인 판단도 생겼다. 그래서 주례사는 달콤한 말 대신 쓴소리를 담았다. 올해로 정확히 30년을 채운 내 결혼생활의 씁쓸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고백성사’와 같았기 때문일까. 결혼식이 끝난 뒤 친구들은 내게 달려 와 ‘어쩌면 그렇게 내 지난 시절의 실수를 점치듯 들려 줄 수 있느냐’고 눈들을 반짝이며 신기해했다. 어쩜 그건 내 얘기만도 네 얘기만도 아닌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혼생활이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는 것이 결혼 30년을 회고하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30년 전의 일이 바로 3개월 전의 일인 듯 생생한데, 그 짧은 시간을 ‘사랑만으로’ 살아오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다는 것이 내 주례사의 골자였다. 사랑이란 부단한 인내를 먹고 사는 생물인데, 우리는 그동안 인내라는 사료(飼料)를 확충하는 데는 힘쓰지 못하고 사랑의 허상만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래서 인내는 바닥 나고 사랑은 아지랑이처럼 허공에 흩어지고 만 것이나 아닐까.

 

‘입에 쓴 약’같은 주례사를 마치고 해맑은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니, 마냥 즐거워하면서도 약간은 긴장되는 듯 얼굴에 그늘이 서려 있었다. 그래, 이번 커플을 믿어 보자. 이들이 내 말의 10%만 알아들었어도 대부분의 커플들이 맛 본다는 결혼 후의 환멸만은 피해 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조만간 자신 있는 목소리로 자신들의 안부를 전해 오리라.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앞으로 주례 부탁을 거부할 이유 또한 없으리라.<2012. 2. 12.>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