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1. 23. 12:30

박근혜 대통령을 보며

 

 

 

‘군자는 말은 어눌하게 하나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論語>> <里仁>]는 공자의 말이 있다. 군자라면 ‘말수가 적고 좀 느려도 행동만큼은 민첩하게 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하면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하고 일단 말했으면, 반드시 재빨리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 번지르르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 쏘면서 하나도 실천에 옮기지 않는 달변가들을 꾸짖은 말씀이었을 텐데, 공자 시대의 그런 사정이 오히려 심화 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박 대통령은 누가 보아도 달변가는 아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조마조마한 것이 사실이다. 한 마디 내뱉는 데도 그렇게 힘이 든다면, 도대체 무슨 수로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쩌면 대통령이 소통을 싫어하는 이면에는 말에 대한 콤플렉스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변가인 참모들과 정치인들, 기자들을 대하는 일이 끔찍하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나이 또래의 우리나라 아줌마들을 한번 생각해 보라. '석학 할아비'라 한들 말로 해서야 누가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언변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말 실력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대단하다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바로 그것이 ‘대선 승리의 한 요인’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속담에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말이 있다. 대개 앞에 인용한 공자의 말을 보거나 ‘말과 실천’을 결부시켜 온 동양적 사고를 생각해 보아도 ‘말 잘하는 것’이 늘 장점만은 아니었다. ‘깡촌’의 흙 속에서 꼬물거리던 내 코흘리개 시절, 그 때까지 본 적 없는 ‘말끔한 양복’을 갖춰 입고 우리 마을에 내려와  ‘말끔한 달변의 서울말’로 사기 치던 토지 브로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사기꾼에게 넘어가 몇 십 년을 고생하시던 농사꾼 내 부모의 한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대부분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는 내 친구들의 마음속엔 다른 세대가 쉽게 이해 못하는 그런 공감영역이 있다.

 

자라면서 ‘말만 말끔하게 잘 하는 인간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기꾼들이었음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판들을 여러 번 접해오는 중이다. 참, 말 잘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최근 10년 이내 두 번의 선거판을 말로만 본다면 ‘눌변 : 달변’으로 요약된다. 지금의 50대들이 누구인가? 대부분 어려움 속에서 근근이 살아남아 이제 은퇴기에 도달한 연령대다. 전통 교육 속에서 자라나 ‘농경사회→산업화사회→정보화사회→지식기반 고도정보화사회’의 고비들을 용케도 탈 없이 거쳐 온 사람들이다. 어쩜 비슷하게 고단한 환경과 의식 속에 성장했다는 ‘연대감’으로 뭉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국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달변가도 보았다. 당시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과연 그는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달변이 이른바 ‘종북’이나 ‘극좌’와 합쳐지면 나라로서는 재앙이라는 판단이 들었는데, 나 말고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는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라를 위해서 천행이었다.

***

지금 50대의 민심이 대통령으로부터 이반(離反)되고 있다고 북악산 언저리에 수심이 가득하다. 5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그 50대가 민심이반을 추동(推動)하고 있으니, 당하는 심정으로선 적잖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오늘 아침 인적 쇄신책이라고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격화소양[隔靴搔癢: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의 미봉책일 뿐이다. 참, 답답하다.

 

대통령이 자신의 신조나 철학으로 주변의 개인들을 신뢰하거나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게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갖는 신뢰와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신뢰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대통령은 만인을 상대로 하는 공인이지 개인은 아니다. 두 사람 이상을 상대로 할 때 작동하는 것이 ‘정치 논리’다. 하물며 5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상대로 하면서 정치논리를 도외시하고, 어찌 개인의 소신이나 철학을 판단의 잣대로 들이댄단 말인가?

 

인사를 말끔히 쇄신하라는 국민의 명령이 있다면, 그간 쓰고 있던 개인의 안경을 국민의 안경으로 즉각 바꿔 써야 한다. 박 대통령이 아직도 개인의 안경을 쓰고 있다면, 그건 공자가 말한 군자의 ‘눌변’ 차원이 아니라 김 모 전 대통령이 언급했다던 ‘칠푼이’의 수준에 머무는 일이다. 누가 보아도, 비서실장이나 ‘문고리 3인방’은 깨끗이 물러나야 한다. 누가 쫓아내기 전에 스스로 물러서는 게 맞다. 누구 말대로 ‘인간적 신뢰를 지킨답시고’ 그들을 껴안고 간다면,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강호의 현사들을 등용한다 한들 그게 어찌 ‘쇄신’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특히 50대들은 대통령이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의 입을 쳐다보기에도 지쳐 있는데, 행동마저 이리 굼뜨다면 참으로 절망이다.

 

지금 대한민국 호는 ‘북핵, 경제, 안전’의 불안이란 삼각파도에 휩싸여 있다. 판단력이 흐리고 굼뜬 조타수에게 어찌 대한민국 호의 순항을 맡길 수 있겠는가. 즉각 비서실장과 3인방을 내치시라. 팔팔하고 번뜩이는 감각의 30~50대 초반의 명망가들이 강호에는 넘치고 넘친다. ‘삼고초려’라도 해서 그들을 모신 뒤, 만기친람하려 들지 마시고 그들에게 국정을 맡기시라.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지금 그 시대정신을 거스른다면 대통령 스스로를 파괴할 뿐 아니라 이 민족에게 재앙을 안겨 주게 된다는 사실을 부디 명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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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11. 5. 01:30

2011년 숭실⋅인하⋅중앙 대학원 연합심포지움 토론요지



연구부정에 무감각한 지식사회, 방황하는 학문후속세대



                                                                                                              조규익(숭실대)


몇 달 전 외국 유학 중인 20대 중반의 제자[이른바 ‘학문후속세대’라 할 수 있는]가 메일을 보내왔다. 공학 분야 어느 전공의 세계적인 학회 홈페이지에 ‘대한민국 교수 및 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자행한 논문표절 사실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세계 지식인들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메일에는 그들 가운데 한 교수가 얼마 전 그 표절논문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국토해양부 장관으로부터 우수논문상까지 받았다는 사실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 논문들이 외국 학자들의 논문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를 ‘살짝 도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베낀 경우들이라 했다. 깜짝 놀라서 그 사이트를 방문한 결과 과연 그곳엔 복수의 대학 교수들을 포함한 한국학자들이 ‘여러 건의 논문들을 표절한 파렴치범들’로 낙인 찍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신문기사를 검색하니 과연 그 교수는 장관상까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해당 교수의 대학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 교수는 ‘우수교수’로 대학 홈페이지의 첫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전공의 많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는 해당 학계나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잠잠했다. 그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 국제적인 수모를 견뎌내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무려 석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은 우리나라 언론에 보도되었고[조선일보, 2011. 10. 5.],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언론에서 몇 마디 떠들다가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제 그 대학의 사이트를 다시 방문해보니 그 교수는 아직도 해당학과의 ‘시니어 교수’로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특정분야 극소수의 일’이라고 편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남의 지식을 훔쳐 재미 보는 일’을 아무런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낄 만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면, 우리 지식사회엔 미래가 없다. 과연 우리나라 대학들은 이들을 교수로 인정해도 되는 것인가. 가능성과 실력을 갖춘 학문후속세대들이 존경과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교수집단이나 지식사회는 연구윤리의 정립자 혹은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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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에 발탁되는 교수들이 많아지면서, 청문회 등 검증의 기회가 정립되면서, 비로소 ‘연구부정’은 우리 지식사회의 치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당수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연구부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지식사회에 대하여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 언론이나 네티즌들은 고위 공직의 물망에 오르는 학계인사들의 논저들을 검증하기에 바쁘고, 야당은 그런 정보를 빌미로 후보자 본인은 물론 집권세력을 흠집 내기에만 전념한다. 문제의 후보자들은 으레 ‘당시에는 관행이었다/제자가 모르고 한 일이다/기억에 나지 않는다/확인해 보겠다’ 등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지만,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초창기에는 그런 문제로 공직의 입구에서 낙마한 사고들도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연구부정 문제로 낙마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그만큼 짧은 기간 연구윤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이 무디어진 것이다. 처음 그런 문제들이 불거졌을 때 국회에서라도 연구부정의 문제를 논의해볼 법도 했건만, 그들이 연구나 연구윤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고 관심조차 없었으니 애당초 기대할 필요도 없었던 일이긴 하다. 사안의 심각성이 부각되면서 정부와 학계가 부랴부랴 ‘연구윤리 규정’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연구부정에 적극 대처한다고 해왔지만,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연구부정의 사례들은 그런 노력들이 대체로 문제의 본질에 훨씬 못 미치는 ‘격화소양(隔靴搔癢)’격의 시늉에 불과했음을 입증할 뿐이다. 입만 열면 대학생들의 리포트부터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떠들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리포트를 작성한다고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긁어다가 짜기워 내거나 돈 몇 푼으로 구매하여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전담 교수들까지 채용하여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지만, 어린 새싹들까지 연구부정의 고전적 수법에 능숙해져 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글쓰기란 다만 ‘글의 겉을 꾸미는 기술’에 불과하지나 않은가 불안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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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윤리의 문제, 즉 서구에서 이미 개념 정립이 끝난 날조[fabrication]⋅변조[falsification]⋅표절[plagiarism] 등 연구부정의 행위들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또한 화려하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식사회의 폭이 넓어지고 지식이 재화 창출의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지적 소유권 문제나 연구윤리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이 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들도 많이 보고되었고, 비록 형식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학회들의 논문집 말미에는 ‘연구윤리규정’이라는 것도 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부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빈번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학문적 아이디어를 얻고, 그것을 골격으로 저작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야말로 철저히 ‘양심’에 관련된 문제임에도, 우리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일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부정의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냥 외면하거나, 기껏 ‘기술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실수’ 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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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글 쓰는 일의 윤리성’은 유치원 단계부터 교육하여 ‘심성(心性)으로 고착’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할 수는 없고, 당면한 우리의 관심사는 3개 대학원[중앙⋅인하⋅숭실]의 학생[학문후속세대]들을 어떻게 제대로 교육시킬 것인가에 있다. 토론자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세 대학원만이라도 「정의롭게 사고하기와 연구윤리」(가칭)를 공통과목으로 개설했으면 한다. 인문계[예술계 포함], 경상계[사회계 포함], 이공계 등 대학원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공에 해당하는 이 분야의 한 과목을 반드시 이수케 할 필요가 있다. 세 대학원이 ‘연구윤리 공동위원회’를 만들고, 그 위원회에서 매년 혹은 매 학기 세 대학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강의를 맡기고, 그 교수에게는 일정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좋다. 연구 윤리가 교수 개인의 전공분야는 아닐 것이며, 강의내용을 새롭게 개발하고 조직하는 일이 수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동⋅서양의 연구풍토나 윤리 등을 공부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연구부정의 폐해를 깨닫게 하는 것은 물론, 지식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그들 스스로 연구윤리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 길만이 그나마 우리의 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탁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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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지적 생산 작업에서 갖추어야 할 정직한 자세야말로 국가 간의 경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최종 병기’ 그 자체다. 후속세대에게 아무리 현란한 이론과 학설을 가르친들 이런 병기를 갖추지 못한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어설픈 미봉책이나 시늉만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의 우리 처지가 한가롭지 못하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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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1. 8. 11:17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강의·연구로 학문분야 두축 이끌어… 이젠 국가·사회가 처우개선 나서야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신자유주의가 삶의 원리로 자리 잡을수록 사회의 소외지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능의 열쇠'라도 되는 듯 경쟁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쟁에서 도태되는 다수 구성원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비정함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경쟁의 필수 전제조건이라 할 '공정함'의 결여에 대하여 애써 눈 감고 있는 의식의 원시성은 언필칭 '선진국 진입'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 건'일 수밖에 없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기 시작한 대학 시간강사 문제는 소외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약점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매주 정해진 시간만 강의하고 일정액수의 시간당 강의료를 받는, 전임 교수 아닌 지식인들이 바로 시간강사다.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들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들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새벽의 노동시장에서 선택되지 않으면 그날 하루 일당을 벌 수 없듯이, 강사들은 학기 초에 대학 혹은 학과로부터 선택되지 않으면 그 학기의 수입은 없다. 하루와 한 학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일용직 근로자와 강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삶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듯이 학기 단위로 살림을 꾸려나갈 강사들의 삶 또한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형식 논리로 친다면야 그런 말도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자체가 정책의 오류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적절한 방안만 강구하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라면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대학이나 지식사회 혹은 학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은 국가의 학문정책에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정부가 그런 학문정책을 세우기 위해 선진국 대학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해 왔다면 그런 나라들이 강사들에 대하여 어떤 처우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를 포함한 국가의 인재들을 세밀히 관리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문진작'이란 명분으로 쏟아부은 천문학적 재원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가, 그런 정책들은 과연 그렇게 다급했으며 합목적적이었는지 등을 돌이켜 본다면, 그런 일들이 '강사들의 현안해결'보다 우선적인 것이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학문정책의 중요도나 시급성에서 선후관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처가 곪아 터져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지금에서야 겨우 대책을 내놓는 관련부서의 무심함이 답답할 뿐이다. 현실로 닥친 생활고와 암담한 미래 때문에 목숨을 끊는 강사들이 속출하고, 3년이 넘도록 천막 속에서 농성하는 강사를 보고 나서야 이 땅의 교육 당국은 겨우 움직이는 시늉 정도를 보여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책 또한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니, 더욱 답답하다.

 

강사는 누구인가. 대학, 대학원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마해온 해당 분야의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들이면서, 지금까지 그들은 전문성이나 실력보다는 '시간강사'라는 '품위 없는 용어'로 통칭되기 일쑤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전임교수들이 강사를 거친 사람들이며, 현재의 강사들은 전임교수로 대학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쉽게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선배들이 그래 왔듯이 조금만 고생하면 전임의 대열에 합류할 것 아닌가'라는 속 편한 계산으로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요구를 철저히 뒷전으로 미루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40%에 육박하는 대학 강의를 이들이 맡고 있으며, 모든 학회들에 집행부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여 학회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이들이 맡고 있다. 강의와 연구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두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기약도 없는 '교수사회에 진입할 날'을 무작정 기다리며 참고 있으라는 말만 건넬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늦기 전에 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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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라는 직급으로 강의하고 연구하는 시간강사의 문제는 사실 대학이 전임교원을 제대로 충원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현재 대학은 국공립이건 사립대학이건 마치 이윤에 혈안이 된 기업 자본처럼 대학을 비정규직으로 채우려고 작심을 했습니다. 많은 시간강사들이 나만 열심히 연구해서 전임이 되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시간강사라는 제도를 폐지하고 시간강사를 법적 교원으로 전환시키는 고등교육법 개정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의 블로그에는 이런 투쟁의 과정과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blog.daum.net/kipu

    2010.11.19 02:32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