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 26. 21:09

 

게리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 폰을 켠 게 불찰이었을까.

이메일 함에 레슬리(Lesley) 교수의 이름과 함께 떠오른

‘Very sad news’란 세 단어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게리(Gary Younger)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각주:1]

그의 어머니와 함께 휴스턴에서 스틸워터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갑자기 캄캄해진 눈앞에서 추억의 필름 한 통이 스륵스륵 돌기 시작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던 오클라호마와 텍사스의 고속도로들.

주변의 경관들이 단조롭고 광활해서 짜증나던 곳.

풀을 뜯던 목장의 소들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새김질에 몰두하던 곳.

사마귀 모양의 원유 채굴기들이 끄덕거리며 열심히 원유를 퍼내던 곳.

그런 한가한 도로에서 웬 교통사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연구원으로 한 학기를 지낸 곳이다.

그곳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그를 만났다.

고등학교 교사를 몇 년 지낸 뒤 진학했기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보였다.

한국 현대사, 그 중에서도 한미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였다.

자주 내 연구실을 찾아와 물었고,

우리는 꽤 긴 시간 한국의 역사와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문제에 관한 논평을 내곤 하는 미국의 전문가들이 있었는데,

알고 보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통이었다.

가끔 내가 너를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

가당찮은 너스레를 떤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귀국 무렵 그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프로그램에 지원하게 했고,

귀국 후 얼마 만에 한국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그는 열심이었다.

한국말도 열심히 배웠다.

연구기관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도 열심히 수집했다.

내 말대로 몇 년 안에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려고 했던 것일까.

정말로 열심이었다.

술자리에선 미국인답지 않게 소주를 잘 마시고 삼겹살도 잘 씹었다.

‘1년 만에 한국사람 다 되었다는 농에 식당 가득 파안대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하늘나라로 갔다는 그의 부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려는 꿈을,

이승 아닌 어디서 펼치겠다는 것일까.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박사 후 과정을 하겠다는 그 계획을 어디 가서 이루겠다는 것일까.

어학능력도, 분석력도, 아시아 역사에 대한 지식도 출중한 그였다.

그래서 앞으로 10. 아니 사실은 10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그였다.

미국의 일본이나 중국 전문가들이 곁다리로 내 뱉는 한국 관련 논평들이 못마땅하여

그가 제대로 된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해온 나였다.

지금 30대 초반이니, 어쩜 40대 초반에는 미국의 실력 있는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여

내 속을 후련하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흔적도 없이, 누구 말대로 나 이제 갑니다라는 말도 못한 채

그는 그렇게 가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죽음보다 삶의 덧없음, ‘수포로 돌아간 삶의 계획,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는 공허함이 두려운 것이다.

그가 가꾸어 온 꿈과 삶의 흔적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간 것인가.

저 숲속의 늠름한 나무들은 못 된다 해도

하다못해 길 가의 못난 띠 풀로라도

하다못해 보이지 않는 메아리로라도

모습을 바꾸어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잠시 고갤 숙여 내려다보면 보일 것이고

잠시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들릴 것 아닌가.

그렇게도 열심히 꿈을 보듬어가며 살아온 인생인데...

 

게리여,

부디 이 땅의 하찮은 꿈 따윈 접어두고

그곳에 맞는 새 꿈을 가꾸며

행복한 삶을 누리시라!

머지않아 찾아갈 그대의 동료들을 위해

그대만의 멋진 영역을 잘 가꾸어 놓으시라!

 

 

2016. 1. 26.

 

게리 영거의 부음을 듣고

 


숭실대 교정에서

 

 


올림픽 공원에서

 

 


백규 연구실에서 게리와 세바스티안

 

 


백규 연구실에서

 

 


숭실대 교정에서

 

 


학교 앞 식당에서

 

 


선무치료학 전문가 이선옥 박사 및 이 박사의 지인들과 함께

 

  1. *레슬리 교수로부터 온 이메일의 번역문과 원문// 조박사님께 얼마 전부터 박사님께 편지를 쓰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 급한 일이 생겨 연락드리네요. 오늘 아침 일찍 게리 영거와 그의 모친이 휴스턴에서 스틸워터로 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끔찍한 뉴스를 접하게 되었어요. 자세한 건 모릅니다만, 저는 우리 학과에서 지금까지 가장 우수한 학생들 중의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에 비통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명랑했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자신의 공부에 관하여 열심히 말했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가 한국 역사의 뛰어난 학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너그러웠으며, 그래서 전 학과가 모두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박사님께서도 그에 관하여 똑같은 느낌을 갖고 계시리라 믿어요. 특히 박사님과 그가 한국에서 얼마동안 함께 계시기도 했잖아요? 그는 박사님이 OSU를 방문해주신 점에 대하여 매우 고맙게 생각했어요. 글쎄요. 유감스럽게도 제가 나쁜 소식을 전한 사람이 되었네요. 저는 박사님께 저의 위로를 보냅니다. 게리의 죽음이 박사님께도 굉장한 상실이겠지요. 레슬리 림멜 드림 Dear Dr. Cho, I've been meaning to write to you for some time, but now there is something else that is rather urgent. Earlier today I learned the horrible news that Gary Younger and his mother were killed in a car accident on their way to Stillwater from Houston. I don't know any details, and I am heartbroken about the loss of one of the best students we have ever had in our department. He was always so cheerful and eager to work and to talk about his work; we were all certain that he was going to be an outstanding historian of Korea. He was also so kind and generous to others, and the whole department is in mourning. I am sure that you felt the same way about him, especially as you and he spent time together in South Korea. He so appreciated your visit to OSU. Well, I am sorry to be the bringer of bad news. I send you my condolences; this must be a great loss to you, too. Sincerely, Lesley Rimmel [본문으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29. 21:28

 


한국을 떠나기 전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

 

 


한여름날의 백규서옥에서 게리(Gary Younger), 백규, 세바스티안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의 지도교수 키이스 하워드(Keith Howard) 교수와 함께

 

 


한 겨울의 숭실 교정에서 세바스티안과 키이스 교수

 

 


 한국의 전통악기들과 탈들이 진열된 키이스 교수 자택 거실 모습

 

 


키이스 교수의 한국음악 관련 디지털 자료들

 

 

 

며칠 전 일본의 교토에서 세바스티안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국내에 있는 줄 알고 전화했다가 해외로밍으로 연결되자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 것. ‘연수기간이 끝나 831일 런던으로 돌아가는데, 한 번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약속으로 간신히 잡아놓은 2712시 정각에 독일 술 한 병을 든 그가 찾아왔다. 그간 머물렀던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돌아가 짐 싸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점심 식사의 여유가 없다는 그를 잡아놓고, 겨우 30여 분 간 석별의 대화를 나누었다.

 

198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의 약관이었다. 함부르크 출생의 독일인. 이른 나이임에도 많은 학교들과 많은 나라들을 거쳐 온 점이 놀라웠다. 1997~2006년까지 미션계 김나지움에서 공부했고, 그 사이의 1(2003~2004) 동안은 교환학생으로 남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을 다녀오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2007~2012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음악학[혹은 과학음악학: systematic musicology]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Excellent grade)’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그 기간 중 터키 이스탄불의 빌기대학교(Bilgi University)에서 1년간(2008~2009), 서울대학교에서 1년간(2010~2011) 교환학생으로 머물기도 했다. 2012~2013년에는 런던대학교의 동양아프리카학 대학(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민족음악학(ethnomusicology) 석사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2013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민족음악학의 권위자 키이스 교수(Dr. Keith Howard)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인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1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 시조에 관한 현장연구를 수행하다가 이번에 체류기간 만료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철이 들면서 파라과이터키한국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수재였다. 그 과정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영어스페인어터키어프랑스어라틴어 등을 유창하거나 능숙하게 구사했고, 한국어 실력 또한 어떤 외국인들보다 월등했다. 기필코 최단기간인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겠노라는 그의 결심이야말로 모험에 가까운 그동안의 해외 편력으로부터 길러진 용기의 소산이리라.

 

그는 우리의 시조에 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쓰려고 하는 박사논문 또한 시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조의 음악적 본질이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관하여 한국의 누구보다도 폭 넓고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 전통가곡이나 시조의 명창들을 만나 창법과 이론을 익히려고 애쓰면서 얻게 된 개인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의 지도교수인 키이스 교수 역시 우리 음악에 관한 몇 안 되는 외국인 전문가였다. 사실 세바스티안이 오래 전부터 나를 알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경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정년을 한 케빈 오록(Kevin O’Rouke) 교수는 탁월한 감성으로 한국문학을 꾸준히 서양에 소개해 왔는데, 키이스 교수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케빈 오록 교수가 13년 전 펴낸 자신의 저서 The Book of Korean Shijo(Harvard-Ewha Series o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의 첫머리에 내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키이스 교수도 나를 알게 되었고, 다시 그가 세바스티안에게 이 책을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함으로써 세바스티안 또한 나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한국 오는 기회에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케빈 오록 교수의 시조 관련 저서

 

 


케빈 오록 교수 저서의 서론 부분

 

 

***

 

최근 나는 일본에서 호주 출신의 토키타 박사(Dr. Alison Tokita)로부터 일본음악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내용도 중요했지만, 일본음악이나 일본문화에 대하여 영어권 전문가로서의 토키타 박사가 갖는 사회적 위치나 의미가 각별함을 깨닫게 되었다. 토키타 박사 같은 자발적 외국 학자들 아니면 누가 세계에 일본음악이나 문화를 선전하고 유포시킬 것인가. 서양인이 영어로 외국의 수요자들을 상대로 한국음악이나 문화를 강의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세바스티안을 보며 무릎을 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한국어도 발전할 것이고, 한국음악이나 문화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질 것이니, 그는 우리에게 일본의 토키타 박사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다.

 

민족문화를 세계에 선양한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을 수억원씩 주며 불러다가 1회성 돈 잔치나 벌이는 우리나라 문화 담당부서는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앞으로 세바스티안 같은 외국의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우리 음악과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한다면큰 돈 들이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민족음악학 전공자들을 불러모아 한국음악과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어로 설명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앞당기도록 하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꽉 막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외국인에게 귀한 교수자리를 안겨주며, 왜 한국어를 놔두고 영어로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느냐고. 그런 류의 답답한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나 예술은 비좁은 이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세계인들이 배우고 익히며 재창조재생산을 해야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암담하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의 전통문화이나 예술을 외면하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라도 우리 전통음악이나 문화의 외국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깜짝 놀랄 만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바스티안 같은 젊은 인재를 한국 전통음악과 문화의 전문가로 키운다면, 우리 전통음악과 문화의 세계화는 그 시점부터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시들게 할 수는 없다. 문호를 개방하고 보편적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때 우리 문화는 세계인들의 공유물이 되고,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보배로운 인재다.

 

 


문현 선생의 노래 발표회가 끝나고. 국립국악원에서

 

 


선무 치료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에서의 파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