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 전공자료2017. 4. 19. 19:21

네이버 번역이 구글 못따라가는 이유

데이터·신경망 구조 조밀한 구글 `번역품질`이 타사 압도
사회·문화적 맥락 집중 학습…인공지능, 곧 인간번역 추월

  • 신현규 기자
  • 입력 : 2017.04.04 17:03:59   수정 : 2017.04.05 10:08:21

 

'신경망번역' 탄생시킨 조경현 뉴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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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종대에서 벌어진 인간 대 인공지능 번역 대결은 피조물의 패배로 끝났다. 판정 시비 논란이 있긴 했지만 번역은 아직 인간의 영역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이벤트였다. 글에 담긴 사회적 의미와 문화적 차이 등을 인공지능이 인간만큼 번역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기사가 아니라 문학작품 번역에서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지난해 바둑에서 인공지능에 완패 당한 기억 탓인지 '인간의 승리'는 더 값져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점점 더 강해진다.

인공신경망 번역 분야에서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 조경현 미국 뉴욕대 교수(33·사진)는 "지금은 문장 단위 번역이지만, 앞으로는 이를 보완하는 사회·문화적 맥락 단위 번역이 이뤄질 것"이라며 "현재 딥러닝 연구자들이 그런 방향의 리서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 번역가처럼 사회·문화적 맥락과 작가 스타일을 살려 번역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신경망 번역(Neural Machine Translation)'이라는 학술용어를 처음으로 탄생시킨 인물이다. 공저자로 참여해 2014년 머신러닝 관련 콘퍼런스(ICLR)에서 발표한 논문 '배치작업과 번역작업을 동시에 학습시키는 신경망 번역'은 현재 대부분 번역엔진에 채택돼 있다. 조 교수가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와 함께 쓴 논문이다. 벤지오 교수는 앤드루 응 전 바이두 인공지능연구소장, 얀 르쿤 뉴욕대 교수, 제프리 힌턴 토론토대 교수 등과 함께 현존 최고 딥러닝 학자 4인방으로 불리는 인공지능 대가다.

조 교수는 "예를 들어 이미지를 문장과 함께 인공지능 신경망에 포함해 번역시키면 결과물 품질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며 "이미지뿐만 아니라 다양한 보조 정보를 인공지능 신경망에 포함시켜 번역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웃는 이모티콘을 사용하면서 '죽을래?'라고 쓴 문장을 번역하면 'Wanna die?' 대신 'Are you messing with me?'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웃고 있는 이모티콘을 통해 살의를 갖고 협박하는 말이 아니라 장난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저자의 국적, 성별, 스타일까지 반영한 인공신경망 번역이 나올 수도 있다.

인공신경망 번역은 문장 하나를 그 의미와 구조에 따라 가상공간 점에 위치시킨 후 해당 점을 번역해 문장으로 풀어내는 기술이다. 변수들로 구성된 벡터 공간에 문장을 배치하기 때문에 그 공간에 이미지, 이모티콘, 저자 특성 등을 변수로 추가하면 이 같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가미한 번역이 가능해진다. 이전 통계기반 번역에서는 어구 하나하나를 대입시켜 번역했기 때문에 변수를 추가하기 힘든 구조였다.

 
조 교수는 "기존 통계기반 번역기술에서는 이런 게 불가능했지만, 인공지능 신경망 번역이 나오면서 가능성이 새롭게 열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구글, 바이두, 네이버,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내놓은 신경망 번역 엔진들 품질이 다른 걸까. 조 교수는 "사실 모든 회사의 기반기술 자체는 같다"며 "다만 개별 회사가 갖고 있는 데이터 양과 질, 신경망 모델의 크기, 학습 시간, 어떤 특성화된 알고리즘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그는 "동물 중에서 고등동물 뇌에 훨씬 많은 신경세포가 연결돼 있고, 그 연결이 많을수록 지능이 높다"며 "인공신경망 번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훨씬 범위가 넓고 조밀한 신경망을 구성하는 설계 구조가 번역 품질의 차이점이라는 것이다.

[신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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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전공자료2008. 9. 9. 19:53

“오직 공도(公道)만을 지켜 신명(神命)을 믿노라”

-민족적 수치와 교훈의 서사미학 : 이덕형의『죽천조천록』-

 

 

노구의 정사, 끔찍한 해로사행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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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초상>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대신하여 새 왕에 추대된 능양군 이종(李倧). 그가 바로 서인들에 의해 옹립된 인조다. 광해군과 대북정권은 현실적인 외교로 전쟁을 피하고 실리를 추구해왔으나, 서인세력은 그들의 지론인 ‘친명사대(親明事大)’를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중원에서 승승장구하는 후금을 적대시하고 바야흐로 꺼져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서인들에게 나라의 형편이나 전쟁으로 죽어나갈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명나라의 승인을 통해 자신들이 거머쥐어야 할 정치권력만이 그들의 관심대상이었다. 망해가던 명나라로부터 인조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자신들의 안위에 절대적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59세의 죽천 이덕형(李德泂,1566~1645)을 주청사의 정사로 명나라 조정에 파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이덕형은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었고,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으며, 반정 후에도 광해군을 죽이지 말라고 주장할 정도로 강골이었다.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온 뒤 조정 대신들의 모함으로 고초를 겪은 것도 서인정권과의 거리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말년까지 비교적 순탄한 환로(宦路)를 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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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선사포에서 배를 타고 떠날 차비를 하는 사신들과 전별을 나온 사람들>

인조 즉위 2년(1624) 6월 20일 한양을 떠나 10월 13일 북경 회동관에 숙소를 정했고, 이듬해 2월 25일 북경을 출발하여 4월 25일 복명했으니, 장장 10개월에 걸친 장도였다. 요동은 이미 누르하치가 점령하여 육로통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평안도 선사포에서 산동반도의 등주에 이르는 해로가 유일한 통로였다. 이미 우참찬 유간, 이조참판 박이서, 정언 정응두 등 광해 조 때 진위사 일행이 풍랑으로 몰사한 그 길이었다. 장산도와 광록도 사이에서 만난 풍랑은 그들이 겪은 난관들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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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산도와 석성도 사이에서 만난 풍랑>

잠깐 사이에 음산한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 하늘색은 새까맣게 변하고 모진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큰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비록 옮겨 정박하고자 하나 손을 쓸 수 없어 배는 거대한 물결에 내맡겨진 바가 되었다. 백 척의 거품 끝에 곧바로 올랐다가 만 길의 심연으로 돌아 떨어지니 배 안에서 사람들은 낯빛을 잃고 서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부사의 배가 잘못 정박하여 머문 곳에서 순식간에 널빤지가 부러져 물이 배 안에 가득 차게 되었으나 다행히 바람이 자서 전복을 면할 수 있었다.

 

깐깐한 유학자들이 천비낭랑, 용왕신, 소성신 등에게 제를 올려 뱃길의 안위를 기원할 정도로 발해만의 파도는 높고도 험했다. 어쩌면 그것은 중국에 들어가 수행할 사명의 어려움을 예고하는 전조였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바닷길을 건너고 육로를 걸어 북경에 도착했다.

 

명나라 말기 관료들의 부패상에 진저리를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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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에서 외교활동을 하는 사신들의 모습>

수행원 누군가에 의해 메모가 작성되었고, 귀국한 이후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완성된 『죽천조천록』. 사행길의 견문들을 세세히 기록하지 않고, 황제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내는 일에 초점을 맞춘 사실이 여타 사행록들과 다르다. 말하자면 다른 사행록들이 서술적이거나 묘사적이라면 『죽천조천록』만은 서사적(敍事的)이라는 것이다. 핵심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이 기록을 관통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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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경 자금성의 모습>

북경에 도착하여 4개월여 동안 부패한 명나라 관료들의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낸 죽천은 서사체『죽천조천록』의 프로타고니스트요, 명나라의 관료들은 안타고니스트였다. 이처럼 선악의 갈등과 대립으로 압축되는 것이 그 서사체의 구도이다. 선의 입장에 서 있던 죽천은 어떻게든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 조선의 반정에 명분을 부여하고 현실정치를 안정시켜야 했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충(忠)’의 구체적 실천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재물을 탐하여 그런 충의 실천을 가로막는 명나라 관료들은 부패와 악의 전형이었다. 단계마다 뇌물이 필요했고, 뇌물의 공여를 전후하여 갈등은 조성되었다. 기록자는 뇌물이 횡행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옥하관에 돌아와 예부 복계를 주야로 기다리되 금일 명일 하여 동짓달이 반이 지나도 국가 대사를 이룰 기약이 없어 민망으로 지내니 각 마을 서리 이르되 “너희 나라 이 대사를 이루려 하면 인삼과 금은을 상서와 시랑에게 많이 봉송하여야 일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옥하관에 십년을 있어도 일을 이룰 기약이 없으리라” 하니 대저 천조(天朝) 인심이 말세 되어 탐풍(貪風)이 대작하니 대소 관원이 회뢰(賄賂)를 들이지 않는 이가 없어 대소 정사를 재리(財利)로 이루어내고 염치를 알지 못하여 봉책으로 기화를 삼아 날마다 하배로 하여금 관에 와 토물을 구하니 인삼과 은이 아니면 달피(獺皮)와 표피(豹皮)와 종이와 모시와 베와 무명이라. 아침에 수응하면 저녁에 또 달라 하여 말하기를 만일 일을 수이 이루어 주면 고기 낚을 데가 없다 하여 천연세월하여 달라기를 마지아니하고...

 

바리바리 마소에 등짐을 지우거나 꼬박꼬박 봇짐으로 지고 간 토산품들이 명나라 관리들에게 회뢰의 자료로 탕진되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일이 이루어지는 단계마다 이런 뇌물이 오고갔으며, 뇌물의 유무나 많고 적음에 따라 적지 않은 갈등도 생겨났다. 상대하던 명나라의 관리들이 때로는 방해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조력자가 되기도 하는 등 갖은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 죽천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사명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이 요동에 출병하여 누르하치를 쳐주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를 인정하겠다는 것이 명나라의 공식적인 제의였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새 왕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급선무였다. 명나라의 관리들은 그런 약점을 지렛대 삼아 더욱 많은 물자를 뇌물로 요구한 것이었다.

 

무수한 수모 끝에 사명을 이루다

 

『죽천조천록』의 프로타고니스트 죽천 이덕형. 그가 당시 부패의 천국 명나라 관리들에게 비교적 좋은 인상을 준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인상을 줌으로써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인간적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수모를 무수히 겪은 것도 사실이다. 수시로 바뀌는 상서와 시랑 등을 상대하며 뇌물로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일이 북경에서의 일상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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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 자금성의 또 다른 모습>

추운 겨울날 이른 아침 각로들이 출근할 때 길거리에 서서 읍하는 자세로 그들과 접촉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고, 도찰원으로 오라는 말만 듣고 찾아갔다가 “드러 내치라”는 육각로의 대갈(大喝)에 “대조(大朝)의 노야(老爺) 대인들은 적선(積善)하시라”고 사정하며 섬돌을 붙든 채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뇌물 공여와 함께 이런 일들이 거듭되면서 명나라 관리들의 마음은 움직였고, 결국 황제로부터 고명과 면복을 받아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면복 아닌 엉뚱한 옷을 내줌으로써 한 번 더 죽천을 희롱하기도 했다. 즉 그들이 내준 웃옷에 호문(虎紋)과 봉문(鳳紋)이 있을 뿐 용문(龍紋)과 일월(日月)이 없음을 보고 죽천이 문제를 제기하자, 한참동안 죽천을 희롱하다가 그들 가운데 허각로란 자가 “이는 희롱함이라”하고 용포를 내어준 사건이었다. 학식과 경륜을 갖춘 59세의 정사 죽천을 상대로 그들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희롱한 것이었다.

***

사명을 수행하고 난 뒤 사람들이 용하다는 관상쟁이 장전천(張前川)을 데리고 오자 “인간만사를 처음 태어난 날 부여받았나니/영화와 욕을 그대와 더불어 의논할 마음이 없노라/벼슬이 재상에 이르고 이제 머리가 희어졌으니/오직 공도만을 지켜 신명을 믿노라”고 시를 지어 대꾸한 죽천. 과연 그는 그 순간에도 조선 선비로서의 꼿꼿한 기개를 잃지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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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전공자료2008. 4. 30. 12:57
 

러시아 기행 2


             스러진 고려인들의 꿈이여, 열사들의 넋이여!



2008년 4월 4일, 4월 참변 당일이다. 추모식은 오후 4시에 열린다. 아침 일찍 우리는 최재형 선생들이 처형되어 묻힌 곳을 찾아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감방이 있던 곳. 지금도 교도소로 사용되고 있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 맥그라소바 거리에서 북쪽으로 10분 쯤 30m 정도 올라간 야산 둔덕 ‘왕바산 재’. 그 언저리가 바로 네 분(최재형崔在亨,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경섭黃景燮)의 고려인들이 참살되어 묻혀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이들의 시신을 묻고 흔적을 없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전날 마련한 간소한 제수를 땅바닥에 진설하고 제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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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사들의 영전에 헌작하는 반병률교수와 곽원석 박사>
 
최재형 선생의 영정과 다른 세 분의 이름을 모신 다음 순서에 맞게 추모의 정을 표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낭독했다.


2008년 4월 4일.

1920년 4월 참변을 당한 지 88년째인 오늘, 참변을 당하신 최재형․김이직․엄주필․황경섭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려인 선열들의 영령 앞에 삼가 머리 숙여 고하나이다.


일제의 침탈과 만행으로 인해 나라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이국땅에 떠돌이로 들어와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다시 그들의 총칼 아래 무참히 스러져 간 민족 지도자들의 기구하신 운명을 생각하오며, 새삼 추모의 정을 금할 수 없나이다.


님들의 희생 덕택에 고국에서 혹은 이 땅에서 편안히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님들이 뿌리신 피의 뜻을 잊지 않고 다시금 우뚝 일어서고자 노력하고 있나이다.


아, 오늘 만리 먼 고국에서 님들의 영전을 찾아 온 저희들 반병률․김보희․곽원석․조규익․엄경희 등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발렌찐·발레리아 등은 보잘 것 없는 음식이나마 정성껏 님들 앞에 올리옵나니,

영령들이시여, 부디 이곳에 강림하시어 흠향하오소서!


          2008년 4월 4일


조규익·반병률·곽원석·김보희·엄경희 절하고 올림



우리의 제사는 간결·소박하나 엄숙했다. 땅바닥은 차갑고, 겨울 외투를 채 벗지 못한 북국의 공기는 싸늘했다. 그러나 혼령들이 감응하는 듯 왕바산 언덕의 두터운 땅거죽은 홀연 훈훈해져 왔다. 언덕 아래쪽 교도소에선 짙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오후 4시 정각에 추모비로 나갔다. 러시아 군인들과 경찰들이 두런거리며 식장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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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말미에 헌화하는 러시아 어린이들>
 
예쁜 초등학생들도 질서정연하게 어른들을 돕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부시장을 비롯한 러시아 관리들, 블라디보스톡 한국영사관의 김무영 총영사와 이우용 교육원장, 김니꼴라이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장, 한국에서 온 반병률 교수와 내가 중앙에 도열하자 러시아 군악대의 주악을 신호로 식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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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도열한 러시아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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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서 조총을 쏘아 올리는 러시아 군인들>

사회는 당당하게 생긴 우수리스크 시정부의 여성 관리였고, 통역은 고려신문 편집장 엘레나였다. 추도사와 헌화가 진행되는 긴 시간, 잡담 한 마디 들려오지 않았다. 러시아인이나 고려인, 한국인들은 ‘숙연함’의 연대라도 이루어진 것일까. 숙연함은 러시아 무용단의 추모 무용에 이어 조총(弔銃)의 발사로 클라이막스에 올랐고, 사회자가 종료선언을 하자 사람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강렬한 햇살이 차가운 바람을 덥히는 오후였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각인되어온 러시아인들은 ‘음습하고 냉랭한 이념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추모비 앞에 모여든 그들은 선량한 이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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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참여한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

 어쩌면 내가 던진 추모사가 그들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4월 참변에 희생되신 러시아와 고려인 유가족 여러분!


1920년 4월 참변 8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 순간 저는 혁명과 반혁명, 침략과 굴욕의 역사적 격랑이 소용돌이치던 당시 이 땅에서 자행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자비한 살육을 떠올립니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본군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 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방화·가택수색·검거·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하늘과 땅이 노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령(生靈)들이 전율(戰慄)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미 역사에 밝혀져 있듯이, 이 땅에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고,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함께 이곳으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과 러시아 국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 열강의 군대들이 철수하게 되자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군은 4월 참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이만(달리네레첸스크), 포시에트 등지의 주요 도시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 고려인 지도자들은 대거 검거되거나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은 그들이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선생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분들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땅에서 러시아 국민들과 고려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으로부터 혹독하게 시련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시련을 우리가 미래로 힘차게 뛰어나갈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불쾌하고 불행한 과거의 일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당한 두 민족의 지도자들을 추모하는 지금 우리는 과거 항일투쟁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을 지속해온 역사적 교훈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미래 지향적 파트너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정치·경제·외교·문화계 인사들 간의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친선과 우의를 한층 단단히 다질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1920년 4월 참변에 희생되신 양국 지도자들의 명복을 빌어드리며, 유가족과 후손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더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상 추모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 4. 4.


              대한민국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은 절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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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이 끝난 다음 추모비 앞에 선 한국인들>

***

5시 반. 추모식을 마친 우리는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을 만찬장에서 만났다. 주석단에 자리 잡은 우리를 흘끔거리며 호기심을 보인 고려인들은 마이크를 잡으면 하나같이 유창한 러시아 말로 장강대하의 언설들을 쏟아냈다. 이미 그들은 고려 말을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였다. 우리들의 귀에는 생소했으나 그들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노래들을 쉼 없이 불러대는 것이었다. 러시아 군대에서 공을 많이 세운 듯 가슴에 훈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 노인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 몇몇 고려인 아줌마들은 우리를 의식한 듯 서툰 발음으로나마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주었고, 북한의 대중가요 <반갑습네다>를 이어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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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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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네다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모습은 우리네 이웃집의 자상한 아줌마들이고 아저씨들인데, 말소리를 들으면 천리만리 떨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러시아 땅에 발을 붙이고 긴 세월 살아온 우리 동족들의 변한 모습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흘러내린 모진 세월이 안쓰럽기도 하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감정의 가교(架橋)’가 새롭게 놓여야 하는데, 지금은 시퍼런 강물만이 그득하게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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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후 만찬장의 모습>

우리가 그 골을 메울 수 있을까?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정감의 다리’를 다시 놓을 수 있을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려인들은 러시아인의 탈을 쓴 채 그들의 집으로 흩어져 가고, 우리는 이방인의 탈을 쓴 채 사회주의의 불친절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8. 4. 2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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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예술』창간호 발간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에서 학술저널『한국문학과 예술 The Korean Literature and Arts』창간호를 펴냈다. 앞으로 매 3월 말과 9월 말 등 연 2회 발행, 시판된다. ‘궁중정재 특집호’로 나온 이번 호는 조선조 궁중정재에 관한 5편의 논문들과 궁중정재 사진자료, 7편의 서평이 실려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논문>

 1. 조규익, 궁중정재의 선계 이미지, 그 지속과 변이의 양상

 2. 박은영, 조선 후기 궁중·교방정재 및 민속무용의 상호교섭과 변모양상

 3. 임미선, 조선 후기 정재의 음악

 4. 이종숙, 조선시대 예악 정재의 현대 용어 재고

 5. 손선숙, 조선조 후기 정재의 무적 구조변화와 수용-오양선의 상대·상배를 중심으로

<자료>

 궁중정재 사진 및 설명-손선숙

<서평>

 1. 김현미, 숭실대학교 연행록연구총서(전 10권) 간행 2년에 부쳐

 2. 백로라, ‘쟁점’을 통해 바라본 한국 현대 연극사-김성희, 『한국 현대극의 형성과 쟁

           점』

 3. 이흥구, 조선시대 궁중 공연예술인 정재의 교육방법을 개발한 학술 연구서-손선숙,

          『궁중정재 교육방법론』

 4. 한창훈, 삶과 노래의 관련 양상을 찾아서-이성훈, 『해녀의 삶과 그 노래』

 5. 권혁래, 한국무협소설의 역사와 정체성을 밝히기 위한 탐색-이진원, 『한국무협소설

           사』

 6. 구지현, 홍대용의 중국을 읽고 중국을 읽게 하기까지-정훈식,『홍대용의 글쓰기 방식과

           중국인식』

 7. 허명숙, 1990년대 별자리 그리기-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휘보>

  <논문투고 규정>

  <원고집필 요령>

  <한국문예연구소 조직>


                                                          학고방 간행, 20000원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7. 4. 21. 08:01
 

戟巖            극암              창바위

北嶺巉巉石  북령참참석    북쪽 산마루 우뚝솟은 저 바위를

邦人號戟巖  방인호극암    사람들은 모두 창바위라 부른다네.

逈樁乘鶴晋  형장승학진     까마득 멀어 선학타고 오르려하나

高刺上天咸  고자상천함    가파으게 높아 하늘 찌를듯 하구나.

揉柄電爲火  유병전위화    자루꽂아 휘두르며 번갯불 번뜩이고

洗鎽霜是鹽  세봉상시염     창끝 씻으면 서릿발 같이 예리하다오.

何當作兵器  하당작병기    어느때 이를 병기로 만들어서

敗楚亦亡凡  패초역망범    교활한 오랑캐를 남김없이 섬멸할까   해석: 숭실대교수 조규익


상기의 해석과 다소 차이가 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세재 문학비

 

 북쪽 산마루 높이 깎아지른 암석을

 옆사람이 창바위라 부르는데

 아득히 말뚝같이 뻗질러 학을 타고 가야겠고

 높이 솟아 하늘을 찌를 듯하 네

 자루를 휘면 번개로 불을 붙이고

 칼끝의 서리 씻으면 소금이겠는데

 어찌 반드 시 병기가 되게 하여

 초나라를 패멸하 고 또 범을 망치는가.


출처  http://www.andongkwon.or.kr/

       

3행의 晋:학을 탄 왕자 진-주나라 영왕의 태자로, 피리를 잘 불렀으며 신선이되어 학을타고 하늘로 올랐다 한다.

4행의 咸:중국 황제시대의 무당인 계함-季咸을 말함

8행의 凡:옛 주공-周公의 아들을 봉했던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나라.



상기 극암을 읽고 송나라 사람이 탄복을 하여

"지금 이사람이 살아 있는가? 지금 무슨 관직에 이러렀는가?

송나라에 이와같은 시를 짓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관직을 준다.

이 詩는 여한-餘閑에 지은 제영-題詠이 아니고 거의 남이 어려운 운자-韻字를 주어 -즉석에서- 짓게 강작한것일 것이다."

실지로 이시는 고의로 어려운 운자를 하여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출처:대동운부군옥 8 - 한국학술진흥재단학술명저번역총서 동양편 18.



오 세재-吳 世才 (인종 11년.1133) ~ (명종 17년.1187).

            고려 중기 명종 때의 학자·문인.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덕전(德全).



한림-翰林 학린-學麟의 손자이며, 세공-世功, 세문-世文의 아우로 문장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무신란이후 집안이 몰락하여 궁색하게 되었다. 의종(1151)에 진사에 오르고,

명종12년(1182)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성격이 소루-疎漏, 준철-俊哲하여 검속-檢束함이 적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친우 이인로-李仁老가 세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고,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만년에는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동경-東京:지금의 慶州-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祝史가 되어

역마를 타고 가 이내 그곳에 살면서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가난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주역>을 암송하고 다른 육경 서적을 박통할 정도로 유학 경전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작품도 당시에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니, 이규보는 그의 시를 '준매경준-遵邁勁俊'이라 하였고,

최자(崔滋)는 ‘풍섬혼후(豊贍渾厚)’라고 평한 바 있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났으니,

경기체가 <한림별곡 翰林別曲> 제3장에서 말한 바,

"오생,유생 양선생 위 주필경 하여-吳生劉生 兩先生 偉 走筆景 何如-"에서 오생은 바로 오세재를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그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통하여 현실에 타협 내지는 조화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하므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정한 벗이었으며,

이규보 역시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삶을 애석히 여겨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여기에서 이규보는 그를 복양선생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사사로이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시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東文選>에 오언율시 2편, 칠언율시 1편이 있다.

파한집-파한집, 보한집-보한집, 고려사, 동경지-東京誌등에

극암-戟巖, 병목-病目, 혜정시-惠政詩, 풍의종미행시-諷毅宗微行詩, 자서-自敍,

차운김무적견증-次韻金無迹見贈등 일부가 전해진다.

시호는 현정-玄靜, 호는 복양-濮陽.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 高麗史. <朴魯春〉 출처:엠파스

2001.10

한국문학비건립동호회 세우고 숭실대교수 문학박사 조규익 짓고 한성대  외래교수 농산 정충락 쓰다.

경북 경주시 황성동 황성공원에 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

노래중에 2절 죽림칠현(임춘. 오세재. 이인로. 조통. 황보황. 이담지. 함순)에 나온다.


출처-블로그  항구가 사는 이야기(http://blog.empas.com/pyo7803/12045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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