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4
모꼬지와 젊음, 그리고 간현의 추억


                                                                           

언제부턴가 간현엘 가고 싶었다. 병풍 같은 돌벼랑으로 둘러싸인 계곡, 구석구석 간질이며 휘돌아 내빼는 섬강. 깔끔한 정밀(靜謐)을 시샘하며 가끔씩 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열차의 굉음이 장난스러운 곳. 고라니와 산토끼가 우두두 뛰쳐나올 듯, 잡목 숲이 음흉스레 펼쳐진 곳. 80여명의 젊음들과 함께 한 간현의 하룻밤이 드디어 잠자던 내 감성을 깨우고야 말았다.

모꼬지! 그래 비로소 우린 엠티(MT) 대신 모꼬지의 추억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끔한 제복과 구호가 각을 세우는 느낌. 그런 엠티보다야 자지러지는 꽹과리의 파열음 속에 막걸리 질펀히 흐르는 느낌의 모꼬지가 제격이지. 어차피 새내기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입사의례(入社儀禮)가 축제 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너와 나, 그들과 우리들의 ‘하나 되는’ 잔치판은 모꼬지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랬는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의 열기에 익어가며 우리의 삶을 몸으로 느낀 그 놀이판은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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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현의 젊음들



젊음이 싱그럽게 요동치는 모꼬지 판.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존재가 젊음이라고, 이 시대의 감성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일찌감치 한계를 설정한다면, 그건 젊음이 아니다. 젊음은 ‘무한의 가능태’일 뿐이다. 그렇게 무모한(?) 젊음들 속에 묻혀 날뛰던 ‘나’는 참으로 낯선 존재였다. 시인 이재관도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일까.

          MT(멤버십 트레이닝)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신드롬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 싶은
         사울 왕 신드롬이
         뒤섞이는 밤을 밝혀
         즐기고 호령한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엠티에서는
         노인도 소년도 아닌
         영원한 청년이어라.

         꾸라쥬(Courage)!!

그랬다. 노인도 소년도 아닌 어정쩡한 중늙은이 하나가 젊음의 열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장면이 60년대 활동사진의 화면마냥 밤의 열기 속에 흔들렸다. 이제 갓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노랑노랑한 병아리들이라고. 폐계(廢鷄)가 다 된 중늙은이는 제법 노파심을 발휘하려 애써 보지만, 거친 부리를 갈아 아무리 세게 쪼아도 이미 폐계에게 세계는 닫힌 대상일 뿐. 그러니 종국엔 여린 부리의 그대들이 열어 갈 것이다, 새 세계를!

발랄과 자유분방이 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새 역사를 꾸려나간다는 진실을 오늘 드디어 깨닫곤 침묵하기로 한다. 마른 잎사귀를 밀어내고 연록의 새 이파리가 눈을 트는 이른 봄의 간현을 느끼며 헛된 말이 필요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똬리를 틀고 앉은 마른 등걸의 탐욕으로 태양을 향해 뻗어 오르는 녹색의 생명을 규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보라, 활활 펼쳐 보이는 그대들의 꿈이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지 않는가. 별이 반짝이고 바람 싱그러운 간현의 밤이다. 이 틈에 나도 한 번 외쳐보자, ‘꾸라쥬’!!!
                                                                          (2007.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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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