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9. 17. 08:59

 


장영배 교수 자택 앞에서


장영배 교수 댁 거실


장영배 교수의 빛나는 따님 혜나 양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미국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2

 

Dr. Chang, Young-Bae

 

 

 

미국에 도착한 지 3주가 다 되어가는 오늘. 한국에서부터 읽기 시작한 박계영(Kye-Young Park)의 책 <<The Korean American Dream>>을 다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그가 만들어 사용한 어구 하나가 !’ 하고 떠올라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바로 ‘anjŏng ideology’란 말.

 

그는 그 말의 동의어로 ‘Establishment, Security, Stability’ 등을 제시했는데, ‘(생활기반의) 구축, 안전, (지속적) 안정성쯤으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안정 이데올로기란 바로 먹고 사는 방도의 모색, 각종 위해(危害)나 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 외부의 충격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는 기득권의 지속성등이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찌 이민들에게서 비로소 시작된 정신이랴.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거친 황야와 강줄기들을 넘어가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동해 왔고, 드디어 한반도에 정착함으로써 정착민으로서의 안정 이데올로기를 추구해온 것 아닌가. 그러니 어딜 가나 한 곳에 뿌리박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 습관은 조상 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남의 땅에서 아예 뿌리박기로 작정하고 떠나 온 이민들 뿐 아니라 우리처럼 단 몇 개월 혹은 1년 동안 머물려고 이 땅에 온 사람들에게도 안정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철학이다. 더구나 단 시간 내 안정 이데올로기를 구현해야 하는 단기 체류자들로서는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을 못 해 휘청거리면서도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15년 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안정적인 주거, 이동 및 통신수단의 확보 등은 미국 생활에서 가장 긴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많아서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이 있는 LA와 달리 드넓은 평원 스틸워터에서 도움을 줄 한국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시차로 비몽사몽 하루 이틀 지내면서 우리는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 온 비상식량도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40도에 육박하는 햇살 아래 걸어 다니면서 무언가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전에 OSU의 학부생으로부터 한두 번 받은 이메일을 뒤지다가 몇몇 한인 교수의 이름을 발견했고,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 가운데 한 분인 장영배 교수[OSU 기계공학과])’를 찍어 전화를 드렸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나자 그 분이 대뜸 내가 연락을 해야 하는데, 먼저 연락 주셔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재미한인들의 상위 1%안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는 성공적인 직종이 전문직, 그 가운데서도 성공적인 직종이 미국 대학의 한인 교수들이다. 미국에 온 한국인들로부터 연락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대개 미국 대학의 한인 교수들이라는 어떤 선배의 귀띔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내 스스로 그 분들에게 연락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좀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통화를 시작으로 장 교수님은 기꺼이 나서서 우리의 정착을 돕기 시작했다. 장 교수님은 사모님과 함께 우리를 멋진 호숫가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셨을 뿐 아니라 수시로 차를 몰고 와서 우리의 시장보기를 도와주셨고, 소개해 주신 한국인 학생의 도움으로 전화를 개통했으며, 결국 몸소 우리를 차에 태우고 에드몬드 시에 가서 자동차를 사게 하심으로써 정착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 분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 많을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 같으면 대충 후보차종을 고른 다음 이 차 사는 게 어때요?’라고 권할 법 한데, 그 분은 그러지 않으셨다. 우선 우리로 하여금 사이트를 통해 후보 차종을 몇 개 고르고 조건들을 모두 확인하도록 하신 다음, 다시 각종 사이트들을 알려 주시면서 여러 가지 지표들을 통해 그것들을 세밀히 비교하게 하셨다. 그런 다음 각 차종의 문제점들이 보고되어 있는 다른 사이트를 통해 해당 차종들을 또 한 번 스크린하게 하셨다.

 

그 과정에서 섣불리 결정하지 마세요라는 충고를 빈번히 건네시는 것이었다. 차를 사게 하신 것은 물론 보험사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신 장 교수님. 그 과정에서 성미 급한 나로서는 약간 답답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귀한 가르침이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 가르침이 단순히 차 사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인생사 자체의 소중한 지표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실력 있고 열정적인 교수로서의 학교생활, 다정다감한 가장으로서의 가정생활, 실천적 목자이자 신도로서의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나가시는 장 교수님 덕에 생면부지의 땅 스틸워터에서 이제 막 시작된 가을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남을 돕는다는 것. 특히 해외에서 조건 없이 동포를 돕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평소 닦아 온 신앙의 힘과 사랑의 정신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13. 11:38

 


공항에 픽업 나온 Du 교수 내외와 함께 스틸워터(Stillwater)의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나누며


연구실에서-Du 교수

 

미국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 1

         Dr. Yongtao Du

 

 

나그네가 되어 보면 안다. 사람은 많으나 반겨 주는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그래서 객지살이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객지살이의 어려움을 알고, 객지에 나온 사람 도울 줄을 안다. 물론 객지살이를 경험했다고 모두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돌고 도는 게 세상의 이치임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마음과 지혜를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배고픈 경험을 한 사람만이 배고픈 설움을 안다. 그렇다고 배고팠다가 부자가 된 사람 모두가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바꿔 볼 줄 아는 따스함과 여유, 즉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어짊[]을 지닌 사람만이 이런 선행을 실천할 수 있다. 아무나 나그네를 반겨하고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다.

 

***

 

초행길의 오클라호마 공항에 내렸다. 학과 비서 수잔이 보낸 이메일에 Dr. Du가 픽업 나온다고는 했으되, 1시간이 넘는 거리의 공항으로 픽업을 내 보낼 정도면 그저 갓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강사쯤이겠지지레 생각하고 애당초 OSU의 사이트에 들어가 그가 누구인지 검색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서로들 약속 시간보다 30분쯤이나 공항 안에서 헤맨 뒤에 만난 그는 젊은 중국인이었다. 다행히 중국사, 동양사, 혹은 아세아 문화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기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1시간 남짓 동안 우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추정한 것처럼 갓 박사학위를 받은 강사가 아니었다. 일리노이-어바나(Illinois-Urbana)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 대학에서 동양문명 연구’, ‘동아시아’, ‘역사학 주제론’, ‘세계사 읽기 세미나등을 강의하고 있는 어엿한 부교수였다.

물론 학과장은 내가 한국인임을 감안하여 중국인인 그에게 픽업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 부탁을 받은 그는 귀찮은 티 한 점 안 내비치고 직접 차를 몰아 그 먼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한동안 말을 나누다 보니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사실 우리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 호의를 갖고 있지 않았고, 특히 동북공정 등으로 양국의 역사학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미국이라는 바다에서 만난 그 순간 우리는 중국식 표현으로 이미 라오 펑여우(老朋友)’였다.

스틸워터에 도착한 뒤 그는 부인까지 불러내 우리를 중국음식점으로 데려갔다. 같은 중국인인 그 부인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참한가. 시차에 시달리고 16시간이 넘는 먼 비행길에 지쳐 입맛이 썼지만, 미국식으로 달고 짜게 변한 중국음식을 그리도 맛있게 먹으며 우리에게 권하는 두 교수 부부의 은근한 정을 반찬 삼아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 우리를 숙소로 찾아와 부족한 게 없는지 살펴주는 그 부부의 정성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나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중국 땅에서 학부를 마치고 석사와 박사 과정으로 유학 나온 그가 아닌가. 낯도 설고 말도 선 이국땅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단했을 것인가. 어쩌면 그런 경험이 바로 우리를 바라보며 역지사지의 동정심으로 발휘된 게 아니었을까.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아무리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 해도 원래 따뜻한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우리는 이곳 오클라호마의 한촌(寒村/閑村) 스틸워터에 와서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얻기 시작했다. 나그네 생활을 몇 차례 해보았지만, 이 이상 더 큰 횡재(橫財)가 어디에 있을까. 부디 나도 그들에게 횡재라고 생각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10. 12:44

 


로간 교수 연구실 앞에서

 

 

 

 

미국통신 5[로간 교수와의 만남]

 

 

 

현재 OSU 역사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로간[Dr. Michael F. Logan] 교수는 외견상 전형적인 카우보이 스타일의 노신사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고 나서야 황야를 주름잡던 카우보이의 활력보다는 아주 온화면서도 부드럽고 생각이 깊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서구 신사의 기풍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맘에 든 것은 그가 구사하는 영어가 매우 느리면서도 정확하다는 것. 그래서 누구보다 대화하기 편하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교수 크리스 선생이 말하기를 오클라호마는 미국 중남부의 시골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릿한 그곳 방언을 쓸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주로 대학에 근무하는 직원들이나 학생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말들을 뱉어내는지 그들의 말을 따라가기가 벅찬 나날이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다가 로간 교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거나 편안하게 하는 데 말하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나는 크리스 선생에게 자주 제발 말 좀 천천히 하라고 다그치곤 했는데, 그는 그런 지적을 받을 때만 좀 천천히 하는 척 하다가 잠시 후에 보면 아스팔트길의 오토바이 달리듯 저 혼자 내빼곤 했다. 그런 성향은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여학생들이 모여 수다 떠는 현장을 보고 듣노라면 우리말도 영어 못지않게 요란스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말이든 영어든 자꾸만 빨라지게 된 것은 아마도 매사 빠름만을 숭상하는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어쨌든 말하는 방식으로만 따져도 로간 교수는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작년 겨울 초청장을 보내온 것을 기점으로 로간 교수와의 접촉은 시작되었다. 내가 보내는 이메일마다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곤 하던 그의 도타운 자세와 마음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특히 초청장에 담긴 호의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연구계획서만으로 생면부지의 다른 나라 학자에게 그런 호의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사 전공인 로간 교수는 특히 근대 미국의 서부, 도회(都會)지역, 환경 분야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관심이 학문적으로 승화되어 <<사막 속의 도시들: 피닉스와 투싼의 환경사>>, <<줄어드는 물길: 산타크루즈강의 환경사>>, <<스프롤 현상 (도시 개발이 근접 미개발 지역으로 확산되는 현상)에 대한 투쟁과 시청: 남서부 지역 도시의 성장에 대한 저항>> 등의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도시 비평으로서의 탐정소설: 변화하는 장르의 인지(認知)>을 비롯한 많은 논문들이 일관되게 도시개발, 환경파괴 등 현대의 문제적 현상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다룬 노작들이다. 말하자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도시화와 환경보존이란 이율배반적 어젠더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늘 좌우 이념적 대립를 유일한 화두로 안고 끙끙대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표본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큰 공감영역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OSU 역사학과와 영문학과 교수들을 자주 만남으로써 그들로부터 다양한 비전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그는 내가 그동안 추구해온 문학 연구 상의 역사적 관점을 알고자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이곳 패컬티 멤버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시대와 지역, 분야를 초월하는 보편지(普遍知)’의 탐구에 매진해 볼 것이다. 내가 굳이 영문과 아닌 역사학과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 로간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바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9. 08:32

 

 

 

 

자동차를 구입하고

 

 

15년 전 미국에서 자동차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생이 재미 동포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한 요인으로 내 마음에 고착되어 있음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미국 도착 3일 만에 어떤 동포로부터 겁 없이 자동차를 구입했고, 그 자동차를 처분할 때까지 찜찜하게 1년을 보내야 했다. 시동이 안 걸린다거나 가다가 서는 등 심각한 문제는 결코 없었으되, 100% 말끔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내 성격 탓에 당시 그 자동차는 모든 불쾌함과 스트레스의 근원이었다. 제반 조건들을 찬찬히 살피고 치밀하게 고려한 뒤 판단을 내려야 후회 없이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자동차의 천국 미국에서 그 때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대도시 몇을 빼곤 대중교통이 거의 갖추어져 있지 않은 미국 땅에서 자동차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옛날 우리네 부모님들이 하루를 꼬박 걸려 면 소재지 장터를 걸어서 다니셨듯 섭씨 40도를 육박하는 날씨에 걸어서 월마트니 베스트바이니 스테이플스니 세탁소니 학교 연구실 등을 돌아다닐 순 없는 일 아닌가. 특히 다른 도시나 지방을 가게 되는 경우엔 마땅한 방법이 없다. 이처럼 모든 것들에 앞서 해결해야 할 것이 자동차 구입인데, 워낙 돈 단위가 크고 신경 쓸 부분이 많아서인지 대부분 미국 정착 과정의 맨 나중에 자동차 문제를 해결하기 마련이다.

  

6개월 동안 탈 것이므로 새 차를 살 필요는 없고, 여러 조건들을 꼼꼼히 살핀 뒤에 같은 값이면 최상의 중고차를 구입하라면서 틈틈이 각종 사이트의 정보를 알려주시는 OSU 기계공학과 장영배 교수님의 조언을 토대로 자동차의 탐색에 나섰다.[사실 이 분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성미 급한 우리는 약간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며칠 만에 덜컥 사버렸을 것이다!] 자동차의 대국답게 자동차를 거래하는 공적, 사적 사이트들이 엄청나게 발달되어 있는 미국이다. ‘연식, 제조사, 마일리지, 가격, 지역, 판매자 연락처등을 달고 있는 신차 및 중고차들이 각 사이트마다 무수히 나열되어 있다. 간단히 연식과 제조사, 마일리지 및 자동차의 내외관 등을 입력하면 상하로 구분된 적정 구입가격까지 산정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그런 정보들을 입력하면 사고자 하는 자동차종에 어떤 문제들이 보고되었으며, 혹시 그 차종이 사지 말아야 할 자동차리스트에 속해 있는지 여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뿐 아니다. 약간의 돈을 내고 VIN[한국에서의 차대 번호?]을 조회하면 사고내용이나 수리 이력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니 적당히 눈속임으로 자동차를 팔아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상식을 갖춘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가혹한 환경에서 근래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들이 선전(善戰)하는 이면에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고 자동차 한 대를 사기 위해 이곳 저곳 다니면서 우리는 미국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한 부분이 투명성에 있다는 점 또한 깨닫게 되었다.

 

미국 도착 거의 한 주 만에 드디어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하게 되었다. 작은 도시 스틸워터에 있는 딜러샵들을 대충 다 둘러보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팔기 위해 사이트에 내 놓은 차들을 여러 대 보고 나서도 만족스런 차를 발견하지 못한 우리였다. 이제 자동차 없이는 더 지탱할 수 없다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을 즈음. 인근 에드몬드 시의 한인 교회 이종태 목자님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사연을 올리자마자 좋은 차가 나타났다는 그 분의 답 글이 있었고, 우리는 장 교수님의 차로 한 시간 거리의 그곳에 가서 드디어 그 차를 사게 되었다. 장 교수님과 이 목자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딜러를 설득하여 조건이 좋은 중고차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넓은 미국 땅에서 드디어 날개를 달게 된 우리는 단 하루 만에 스틸워터의 도로망을 대충 섭렵하게 되었고, 땀 흘리지 않고 연구실에 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차 없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날아가면서 덩달아 시차에서 오는 피로 또한 눈 녹듯 사라지는 어제 오늘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