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0. 2. 06:14

  

 

근황 2

 

미국음식 사귀기

 

 

김형,

 

우리는 몇 년 전 자동차를 몰고 유럽의 20여 개 국을 답사한 적이 있소. 당시에 매일 올리던 홈페이지의 글이나, 나중에 출판한 책[<<, 유럽>>]에서 호기롭게 음식에 관한 한 코스모폴리탄임을 내 스스로 자부하곤 했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음식이었소. 유럽은 그래도 미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섬세하여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인의 미각을 달랠 만한 여건이 풍부하게 마련되어 있습디다. 물론 우리 동포들이 밀집해 사는 뉴욕이나 서부 도시들을 감안하면, ‘음식의 평균적인 친 한국 성향은 이론상으로 미국이 유럽을 앞설 것이오. 물론 그 보다 훨씬 전인 15년 전 1년 남짓 지낸 LA에서는 전혀 음식 문제가 없었소. 차를 몰고 몇 분만 나가면 한국마켓들이 많았고,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한국음식점들 또한 수두룩했기 때문이오. 서울에서도 찾아가 먹어 본 적이 없던 소공동 순두부를 거기서 처음으로 맛보았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요?

 


카우보이 박물관 식당에서

 


무어 시에서 점심 차 들른 베트남 국수집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이번에는 완벽하게 미국식으로 살아보자고 큰 소리를 쳤던 나요. 출국할 때 기본적인 양념이나 밑반찬 등을 다 빼놓고 온 것도 미국식으로 살아보자는 호기와 함께 미국엔 어딜 가나 한국인들이 터를 잡고 마켓이나 식당을 열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소. 무엇보다 이젠 먹는 것으로부터 초탈할 나이도 되지 않았는가라는, 우리 자신에 대한 착각이 대책 없는호기의 근원이었소. 나이 들면서 먹는 양은 줄었지만, 식성은 더 근본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소.

 

미각은 지문보다 더 정확하다는 말은 나이 든 뒤 찾는 음식을 보면 대부분 그의 어릴 적 삶이나 지역까지 정확하게 맞출 수 있기 때문일 것이오. 서해안 촌놈인 나는 어릴 적부터 젓갈이나 뻘게, 소금에 절인 물고기 등을 자주 먹으며 자랐소. 그래서일까요? 나이가 들수록 밥숟가락을 들 때마다 눈길은 짭짤한 젓갈이나 비린내 나는 생선을 향하곤 하는 것이오. 그런 반찬에서 고향의 내음이 풍기기 때문이지요. 젊어서 먼 길 떠났던 나그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고향으로부터 풍겨오는 음식 내음때문 아니겠소?

 

혹시 오나라 출신 장한(張翰)이 낙양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의 진미인 순채국과 농어회를 잊지 못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를 알고 계시오? 물론 당시 제나라 왕의 무도함을 보며 위기를 느낀 그였으므로 그가 벼슬을 버린 것이 순전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만약 그에게 고향의 순채국과 농어회가 없었어도 그리 빨리 벼슬을 버릴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미국의 음식에는 매력이 없소. 며칠 전 만난 미국 여학생도 미국 음식은 모두 ‘unhealthy food’라고 한 마디로 매도합디다. 학교 안에 식당들이 많고, 대부분의 식당들이 학생들로 붐비지만, 나로선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소. 대부분 달고 기름기 많고, 어떤 것은 짜기도 하고, 비벼 놓거나 섞어 먹는 어떤 것들은 흡사 사료같은 모습을 띠기도 하오. 혹자는 그대가 싸구려 음식만 먹으니 그렇지.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된 미국 음식 좀 먹어봐!’라고 타박하기도 하오. 그러나 값이 싸고 비싼 차이, 음식의 가짓수나 코스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구조야 비싸다고 달라질 수가 있겠소? 설탕과 소금, 밀가루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미국 음식=unhealthy food’라는 공식은 아마 바뀔 수 없을 거라고 보오.

                                                                                                                                                 
                                          어느날 학교 식당에서의 점심상


                                               

                                          최근의 아침 메뉴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궁여지책을 고안했소. 마트에 들러 수십 종류의 빵 가운데 밀가루와 약간의 식염 외에 전혀 가미(加味)가 되지 않은 한 종을, 과일 코너에서 아보카도(avocado)란 열대과일과 이 지역의 사과를, 유제품 코너에서 치즈 한 두 종을, 야채 코너에서 양상추를, 음료 코너에서 건더기[이곳 사람들은 이것을 pulp라 합디다]가 들어 있는 (원액) 오렌지 주스를 각각 고르니, 대충 미국식 아침식사로서는 분에 넘치는 조합이었소. 빵을 살짝 구어 버터 대신 아보카도의 과육(果肉)을 바른 다음, 치즈와 양상치를 얹고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면 아침은 해결이지요. 그렇게 먹고 점심은 초원의 굶주린 사자처럼 미국 음식의 정글 속에서 어슬렁거리기 일쑤라오. 그러다가 저녁은 완벽한 캠핑족 스타일의 한식으로 (이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빅디너(big dinner)’를 먹게 되는 것이오 

 


어느 날의 빅디너(?)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한 어떤 레스토랑의 점심

 

지난 달 하순인가요? 일요일에 길크리스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인근 도시 털사(Tulsa)에 갔었소. 박물관 관람이 주목적이었지만, 아내나 나는 내심 그곳에 있다는 한국음식점에 더 무거운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소.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그 식당의 김치찌개를 먹으며, 한 달 여 시달린 솟증을 풀어낸 셈이오. 돌아올 때 식당과 이웃한 한국마트에서 삼겹살 몇 근을 끊어 차에 실으니, 어렵던 시절 설 쇠기 위해 동네 돼지 잡던 현장에서 다리 한 짝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던 가난한 가장의 호기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짐작됩디다.

 


털사에서 만난 한국음식점-한국가든 

 


한국가든에서 먹은 김치찌개백반 

 


한국가든 주인장의 두 따님 및 손자와 함께 

 


한국가든 옆의 한국 마켓

 

그러나, 언제까지 한국음식만 찾아다닐 수 있겠소?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지겹게 그 음식 속에서 일생을 지내야 할 것을! 귀국 후 여기서 보낸 시간을 회상할 때 이곳의 음식경험만큼 오래 갈 추억 거리가 어디 있겠소? 김 형이나 나나 이제 젊은 시절의 아름답던 추억이나 반추하며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가야 할 군번들이 아니겠소? 세계 제일의 국가라 자부하는 미국, 그 미국을 움직이는 국민들, 그들이 먹는 음식. 어쩜 내 주관의 속박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들의 음식이 갖는 의미나 장점이 우리 음식의 그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래서 이젠 적극 그들의 음식과 친해지기로 했소. 좋은 것, 입맛에 맞는 것, 익숙한 것만 찾으려면, 고생스럽게 이역만리 미국 땅엔 무엇 하러 왔겠소? 그냥 내 나라에서 두 다리 쭉 펴고 편하게 소고기나 사 묵으며살 일이지.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내 미각을 길들이기로 했소.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만 하리다. 잘 계시오.

 

2013. 10. 1.

 

스틸워터에서 백규

 


캠퍼스 외곽쪽의 약간 특이한 반 주문식 학생식당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30. 12:17

Moore 시에서 들은 소녀의 울음소리 

 

 

 

금요일 저녁 OSU의 한국인 교수 모임에서 경제학과 김재범 교수는 내게 무어(Moore) 시를 가보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자연의 위력을 현장에서 느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지난 5월 무어 시를 휩쓸고 간 토네이도 소식을 한국에서 접했던 나로서는 자연과 인간의 대응구조에 대한 내 마음 속의 의문을 풀어줄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김 교수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929/일요일], 날이 밝자마자 아내를 채근하여 무어 시로 차를 몰았다. 35번 하이웨이를 타고 쭉 내려가다가 오클라호마 시티를 지나며 여러 번 길을 바꿔 탄 다음 무어 시로 들어갔다. 1시간 반 이상의 비교적 긴 여행이었다. 타겟이란 큰 마켓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산 다음 이곳저곳 둘러보았으나, 김 교수가 말한 폐허 같은 토네이도의 현장은 보이지 않았다.

 

점심 참으로 들른 월남국수집[Phao Lan] 종업원의 덕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말대로 길을 따라 달려가니 과연 토네이도가 할퀴고 간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입에 있는 침례교회[Southgate Baptist Church]로 들어가니 노신사[Mr.James Fugate] 한 분이 주차장에 서 계셨다. 다짜고짜 지난 5월 토네이도 피해의 현장을 보고 싶어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말문을 열시 시작했다. 이번까지 자신들이 그간 겪어온 3차례의 토네이도, 토네이도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날아간 초등학생들, 집이며 자동차 등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소상히 들려주는 그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를 더 이상 처연함의 늪에 빠뜨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성함만 여쭙곤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 현장으로 달렸다

 


 무어 시 초입에 서 있는 조형물 


무어 시 Southgate Baptist Church에서 만난 James Fugate 옹이 토네이도 피해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이럴 수가! 허허벌판이었다. 김 교수가 말하던 가옥의 잔해들은 이미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휑하게 너른 벌판엔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이었다. 토네이도 이전엔 예쁜 집들이 제법 촘촘히 들어 차 있었을 그곳엔, 부러진 나무와 지저분한 쓰레기들만 날리고 있었고, 벌써 잡초가 우거지기 시작했으며, 간혹 시멘트로 조성된 집터들이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로 도로들은 간신히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온통 진흙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이제 몇 집은 새로 짓기 시작한 듯 뼈대만 세워두었거나 뼈대에 벽체까지 두른 집도 보였다. 그 넓은 피해지역의 외곽에 몇 채의 가옥들이 처참하게 뚫린 채 서 있었는데, 모두 지붕도 벽체도 마구 뜯겨 나가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흉물들이었다.

                                                 


토네이도가 모든 것을 쓸어간 현장에 남아 있는 나목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아 엉망이 되었으나,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주택

 

나는 질퍽거리는 폐허 위를 걸었다. 그러다가 어떤 집이 통째 날아간 집터(시멘트로 만들어진)에 오를 때였다. 집 앞 풀밭에 이쁜고양이 인형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주인이었을 소녀의 장난감과 함께 흙투성이가 되어 나동그라져 있었다. , 그 눈은 바로 소녀의 눈이었다. 아마도 그 소녀는 토네이도가 들이치기 직전까지도 저 인형을 안고 있었으리라.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 그녀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나는 그 고양이를 바라보며 한동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혹시 그녀는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그녀의 강아지 토토와 함께 토네이도에 휘말려 뭉크킨에 갔다가 여러 가지 모험을 거친 다음 다시 고향 캔자스로 돌아오듯,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난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사랑하는 고양이를 이렇게 버려두고 떠난 것일까. 나는 그 고양이의 눈을 차마 정시하지 못한 채 원래는 집 안이었을 시멘트 바닥 위로 오르기 위해 몇 발짝 옮기다가 시궁창에 쳐 박혀 있는 넥타이, 양복, 키보드 등을 보았다. , 그 소녀의 아버지 또한 어디론가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 자리엔 소녀가 토네이도에 휘말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며 남겼을 마지막 외침만 남아 맴돌고 있었다. 과연 그 소녀는 동화속의 도로시처럼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어떤 꼬마가 데리고 놀았을 고양이 인형과 장난감 


토네이도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키보드와 넥타이 


다 날아간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변기와 욕조 

 

차를 돌려 스틸워터에 돌아오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원주민이든 이주민이든 미국인의 조상들은 자연과의 대결을 통해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했다. 자연의 위력에 인간의 의지가 꺾인 듯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뒤에 보면 인간 의지의 승리를 입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끝내 어찌 자연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과학의 힘을 발판으로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는 미국에서 이토록 참혹한 인간 패배의 현장이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보라. ‘토네이도는 이 넓은 숲이나 들판을 지나지 않고 왜 하필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만을 골라 지나는지 모르겠다는 아내의 말 속에서 의미 있는 자연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무어 시는 다시 일어서겠지만, 자연이 던져 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는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할지 다시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이다.


토네이도의 습격을 받은 무어 시의 당시 모습[Google.com] 


토네이도 피해지역 외곽에 설치된 희망 기원 조형물[꽃송이로 HOPE라는 단어를 만들었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9. 12:12

근황 1

 

 

미국식 혹은 오클라호마 식 인간관계

 

 

김형!

 

오랜만이오. 이곳에 온지 벌써 정확하게 한 달이 지났소. 외국에 나가면 조심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외국 생활을 두루 경험해 온 형은 잘 아시리라 믿소. 특히 외국에 정착하기까지 참 여러 가지로 신경 쓸 일들이 많은 건 우리처럼 단기간의 체류자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오. 우리가 잠시 엉덩이를 붙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Stillwater)는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도 참으로 특이한 곳이오. ‘조용함깨끗함단조로움으로 요약될 만한 자연 및 생활환경, 바이블 벨트(Bible Belt)로 통칭되는 이 지역의 정서, 그리고 미국인들 특유의 개인주의 등이 어울려 빚어내는 지역 색깔 말이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 하나 보이지 않는 평지에 띄엄띄엄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 한복판에 널찍이 들어선 대학 캠퍼스. 바둑판의 줄처럼 그어진 도로들을 따라 듬성듬성 조성되어 있는 상가들에나 나가야 그나마 다운타운의 맛을 약간 느낄 수 있을까요? 학생들과 대학 종사자들을 포함하여 2만 여명이 생활하는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면 사람 만나기 어려운 곳이 바로 이 지역이오. 복잡한 서울에 살다가 이곳에 온 우리는 일종의 문화충격을 다독여 가며 쉽지 않은 적응의 한 달을 지내온 셈이오. 15년 전에 1년 남짓 살던 LA와는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이곳에서 맛보고 나서야 미국인들의 생활철학과 그들이 신봉하는 합리주의 혹은 실용주의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제 철 들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요?

                                                                                   
                                                    백규 연구실의 달력


                                         연구실의 백규

 

***

 

이곳 도착 사흘 뒤 학과장[여기서는 ‘Head’라고 함] 로간 교수와 학과 비서들을 만났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으나, 인사가 끝난 뒤의 대화는 사무적인 내용으로 일관했소. 학과장은 학과 전반에 대한 소개와 부탁의 말씀을 한 다음 강의에 들어갔고, 비서들은 건물 출입문과 내 연구실 키를 주고 학과 시설에 대한 안내와 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업무들을 보는 것이었소. 차나 한 잔 하자거나 점심이라도 함께 하자는 등의 말 거래는 일체 없었소.

 

며칠 뒤 아무래도 이게 아니다 싶어 한 수 가르쳐 줄 요량으로 로간 교수에게 연락하여 점심약속을 잡았소. 그런데 까페테리아로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그는 먼저 작은 머핀 하나와 음료수를 고르는 것이었소. 그러는 그를 보며 나 또한 더 비싼 것을 고를 수 없어 같은 것으로 골라잡았소. 그런 다음 그는 자기 것을 자기가 계산하려 했소. 내가 화들짝 놀라며 오늘은 내가 함께 계산하겠다고 하자 마지못한 듯 그러라고 하는 것이었소. 내가 궁금하여 머핀 하나로 점심이 되냐고 묻자 집에서 빅디너(big dinner)를 먹기 때문에 괜찮다는 대답이었소. ‘참 인심 고약한 동네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소.

 

그 뒤 한 주쯤이 지나서 대닐로위츠 학장과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소.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 메일이 도착했소. “Dear Kyu-Ick/ I am delighted you have made it safely to our campus, and meeting you would be very nice. I have copied Terri Cushing to this email- she will contact you soon to see when we might be able to get together for 30 minutes or so. If you come to my office, I can provide coffee or soda as we visit./Sincerely, Bret[친애하는 조 선생님/당신이 우리 캠퍼스에 안전하게 오셨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나는 이 이메일을 비서인 테리에게 복사해주었습니다.-그녀가 조만간 당신에게 우리가 30분쯤 함께 만날 수 있을 때를 상의하기 위해 연락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내 사무실로 오신다면 나는 우리들이 방문할 때처럼 커피나 소다를 대접할 수 있습니다.]”

 

문면에서 친밀함이 넘쳐나긴 하지만, ‘30분쯤 만날 수 있다는 것’, ‘커피나 소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등의 말을 형은 이해할 수 있겠소? 워낙 시간 제약을 많이 받는 자리이니 전자야 그렇다 치고, 후자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소? 그들의 표현대로 거한 빅런치빅디너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커피나 소다를 대접한다는 자신들의 관습을 언급하며 생색내듯 한 건 왜일까요?


                                        Gary Young 선생과 점심을 하고                                      

 


                                           Stephen과 학교 바깥에서 점심을 하며

 

지난 주 수요일. 내가 이곳에 온 뒤 첫 패컬티 미팅(faculty meeting)’이 있었소. 우리로 말하면 학과 교수회의인 셈인데, 저에 대한 학과장의 소개에 이어 제 인사말이 끝나자 적지 않은 안건들이 논의됩디다. 무려 1시간 반이 넘는 회의였는데,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고 활발한 토론을 거쳐 결정하는 그들의 공동체 문화가 제 눈에 좀 자잘해 보이기는 해도, ‘별 뒷말들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교수회의를 하면서 차 한 잔도 함께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는 사실 등이었소. 한국에선 회의 중에 반드시 차 아니면 하다못해 물 한 잔씩이라도 앞에 놓아주고, 학과회의가 끝나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저녁자리가 마련되곤 하는데,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놀라고 말았소.

 

그 뒤로 점심시간에 교수들의 동태를 예의 관찰해 보았소. 점심을 싸와서 연구실에서 먹든가 각자 까페테리아 등에서 학생들 틈에 앉아 다소곳이 한 끼를 때우는 것이었소. 서울에서 점심때가 가까워 오면 혹시 누가 없는가 이 연구실 저 연구실로 전화를 넣곤 하던 내 문화와 관습이 여지없이 망가져버리는 순간이었소.

 

점심이나 저녁만 문제겠소? 밥도 함께 안 하는데 술자리야 엄두도 못 내지요. 몹쓸 동네에 왔다는 생각이 무겁게 나를 누르는 것이었소. 한국에서야 밥 먹으러 가면 우선 두꺼비참이슬이 밥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공식 아니오? 그런데 도통 이곳에서는 술을 구경할 수가 없소. 하도 궁금하여 술가게[Liquor Store]를 찾았더니, 그마저 몇 군데 없었소. 그 크고 흔한 월마트에서도 맥주조차 팔지 않는 동네임을 깨닫고, 그 원인을 내 나름대로 요모조모 분석해 보았소. 거리에 나가면 고색창연한 교회들이 곳곳에 멋진 자태를 뽐내며 서 있어요. 주로 침례교회[Baptist Church]가 많은데, 이곳이 그 유명한 바이블 벨트의 한 부분임을 많은 교회들이 입증해주고 있었소. 아직 교회 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도들로 가득 찬다고 합디다. 서구사회에서 주일마다 신도들로 가득 차는 교회를 구경해 보신 적 있소? 그러니 사람들의 일상이 매우 단조로우면서도 정결하고, 조용하면서도 경건하기까지 하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소.


                     First Baptist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First Methodist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First Presbyterian Church in Stillwater의 모습

 

***

 

도착하고 나서 여러 경험들을 했고, 한 주 두 주 그런 경험들이 겹치면서 처음 가졌던 내 느낌과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은 이상한 일이오. 잘 아시지 않소? 서울에서야 때마다 호기롭게 점심을 사는 사람도 많고, 반면에 뜬뜬하게구두쇠 노릇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요. 그러다 보니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아무개는 술 한 잔 사는 법이 없다!’는 투의 원망과 비난이 자주 생기고, 그게 상호간의 반목으로 커지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아니겠소? 끼리끼리 술자리에 어울리다 보면 이해를 달리 하는 타인에 대한 험담[이른바 뒷 담화]이 오가기도 하고 정당하지 못한 거래도 이루어지는 법이니, 그 자체가 투명사회에 역행하는 일이지요. 그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부패 선진국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아닌가요? 모두 술 인심, 밥 인심, 담배 인심이 후한 데서 빚어지는 악폐라 할 수 있지요.

 

서로 간에 밥 한 끼, 술 한 잔 안 사는 미국교수들을 보며 투명한 미국사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어요. 생각해 보시오. 툭하면 갖는 저녁회식에서 술 몇 잔 돌리다 보면 2, 3차로 이어지고, 그 후유증으로 한 두 주 허송한 다음 몸에서 알코올 기가 떨어질 즈음이면 다시 그 일을 반복하니, 강철로 된 몸인들 배겨날 것이며, 책상 위에 그득 쌓인 연구는 언제 할 수 있겠소? 술 마실 땐 즐겁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허탈과 상실, 미움과 반목의 갈등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 아니겠소? 선진국 교수들은 제 밥 저 먹고 조용히 앉아 강의와 연구에 매진할 때,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일부교수들은 술친구 따라 우왕좌왕하며 시간만 죽이며 지낸다면, 참으로 암담한 일 아니겠소?

사실 한 달쯤 이런 문화에서 지내다 보니 언젠가부터 이곳 분위기가 참으로 편하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소. 우선, 술을 사지도 얻어먹지도 않으니, 마음이 태평양만큼이나 여유로워졌소. 술을 사기 위해 지갑 속의 돈을 헤아릴 필요도, 술을 사지 않는 구두쇠를 원망할 필요도 없어졌으니 말이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여기서 한 달 동안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평균 한 달에 한 번 꼴로 마셔댄 알코올 기가 내 혈액에서 모두 빠져나갔다는 점이오. 술에 잠겨 해롱거리는 인간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나도 이젠 술 생각 전혀 나지 않는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났으니, ‘미국의 바이블 벨트에 온 보람이 있지요? 엊저녁 이곳 대학의 한국인 교수 모임에 참석했었지요. 한국인들의 밥상에 술 대신 물이나 탄산음료가 나오는 것을 보며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 듭디다. 이곳 학과 교수회의 때 경험한 일을 옆의 장영배 교수께 여쭈었더니, ‘이곳은 어느 학과나 그래요. 그리고 그게 마음 편하고 좋아요. 그게 한국과 다른 점이에요.’라고 하십디다. 나도 그 말씀에 맞장구를 치며 속으로 재미는 없지만, 길게 보면 이 길로 접어드는 것이 한국 지식인들의 의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소.

 

또 연락하리다. 편안히 계시오.

 

2013. 9. 28.

 

스틸워터에서 백규 드림



Stillwater Public City Library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Melania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7. 13:57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Beaver effigy pipe, Woodland period


<Breaking Through the Line> Charles Schreyvoge 작


<Ceremony, Spirit Ascending>, Woody Crumbo작


<Creek Chiefs>, Acee Blue Eagle 작


<George Washington>, Rembrandt Peale 작


<Indian Council(Sioux)>, 1847 George Catlin 작


Mask, Chumash 족


Moccasins Cheyenne 족, 19th century


<Mourning Her Brave>, 1883년 George De Forest 작


<Overleaf-Ranchos Church with Indians>, Ernest L. Blumenschein 작


<Siouxs족의 Playing Ball>, Charles Deas 작


<Syacust Ukah>, 1762년 Sir Joshua Reynolds 작


<Taos Deer Hunter>, Bert G Phillips 작


<The Wild Turkey>, John James Audubon 작


<Thomas Gilcrease>, Charles Banks Wilson 작


<Warriors on Horses>, Acee Blue Eagle 작


길크리스 뮤지엄 앞에서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Tulsa)의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921일 토요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햇살이 평원을 달구기 시작할 무렵, 언제부턴가 가보고 싶었던 털사로 길을 떠났다. 대략 한 시간 반 거리라곤 하지만 자동차 몇 대 다니지 않는 드넓은 길임을 감안하면 실제 거리는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리라. 과연 맑은 공기와 화사한 햇살,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의 짙은 활엽수들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시내에서는 조심조심하던 미국인들도 가속페달을 눌러 밟는 듯 412번 하이웨이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지역에서도 유명한 박물관이 유독 많은 문화도시 털사.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첫 방문처는 인디언 관련 미술품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이었다. 인디언 미술품에 대한 호기심 뿐 아니라 일생 모은 콜렉션으로 만든 박물관에 깃들었을 한 인물의 정신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호수 같은 아칸사(Arkansas) 강가의 샌드스프링스(Sandsprings)를 지나고 털사 카운티 경계를 들어서서 잠시 달리다가 한적한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서 길크리스 뮤지엄 로드로 접어들었다. 그로부터 눈 깜짝하는 사이 좌측 언덕배기에 숨듯이 앉아 있는 뮤지엄을 만났다. 주소는 ‘1400 North Gilcrease Museum Road’. 털사대학에 속한 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널찍한 규모도 규모려니와 컬렉션의 양과 질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12,000점의 미술품, 300,000점의 민족지적(民族誌的)고고학적 유물들, 100,000점의 희귀 서적과 육필 원고 등을 포함,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소장품들이 빽빽했다. 누가 미국을 문화의 불모국이라 했던가. 유럽의 건축이나 박물관들에서 느끼는 고색창연함은 아니로되, 이곳만의 잘 보존된 예술과 문화재야말로 쉽게 측량하기 어려운 미국의 힘과 깊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이 박물관은 미국의 예술과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국 정신의 산실이었다. ‘미술작품으로 승화된 민족의 서사(敍事, epic)’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정신의 구현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을 세운 토마스 길크리스(Thomas Gilcrease)라는 인물.

 

그는 1890년 루이지애나에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 등으로부터 이어진 그의 부계(父系)와 달리 어머니 엘리자벳은 무스코기(Muscogee)와 크리크(Creek) 등 원주민의 피를 25%쯤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길크리스로서는 자연히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심을 타고 난 셈이었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몇 개월 후 그의 가족은 인디언 구역의 크리크족 거주지로 이사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려받은 13%의 크리크족 피 덕분에 엄청난 땅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털사 남쪽 20마일의 160에이커에 달하는 땅도 있었다. 1908년 인디언인 오세이지(Osage) 족 출신의 벨레(Belle Harlow)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그는 1912년부터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지금의 길크리스 박물관의 중심이 되는 주택을 사들였고, 1922년에는 길크리스 석유회사를 세웠으며, 1941년 곳간과 차고를 예술품 수장고로 리모델링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1947년 뉴욕의 수집가 질레트(Gillette Cole) 박사로부터 엄청난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이고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알렉산더 호그(Alexander Hogue)를 고용하여 뮤지엄을 설계하여 그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게 했으며, 1949년에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58년 길크리스 재단은 뮤지엄의 건물과 땅을 털사시티에 기증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은 본격적인 출발을 보게 된 것이다.

 

***

 

뻐근한 다리를 끌다시피 뮤지엄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그가 1949년에 붙였다는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란 이름이야말로 이 뮤지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일별한 많은 작품들은 대부분 실제 삶을 그려낸 극사실주의 미학의 소산들이었기다. 지난주에 들른 오클라호마시티의 카우보이 박물관에서는 인디언들과 카우보이들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삶의 파편들을 감상했으나, 지금 이곳 털사의 길크리스 뮤지엄에서는 예술가들의 해석을 거친 삶의 모습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 해는 짧고 힘은 달리는데 촘촘하게도 짜여 있는 이 역사와 예술의 숲을 어찌 헤쳐 나갈까? 무정한 길크리스 뮤지엄은 이국의 나그네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기도 하고, 한없이 무정하기도 하구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