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0. 17. 05:34

 오늘의 점심과 불고기 오아시스

 

 

점심시간 전에 나를 만나러 온 학생 룩(Lucas Mccamon)은 이 대학 최대 행사인 홈커밍의 최고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홈커밍 행사의 하나인 카니발’ 때문에 어제 밤 한잠 못 잤다는 그가 딱해 점심을 사주려 했으나, 강의가 있다면서 그냥 내빼는 바람에 혼자서 연구실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가봐야 별 수 있을까만, 그래도 한 술 떠야지!’ 시큰둥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연구실을 나섰다.

 


OSU Homecoming 준비위원장인 역사학과 3학년 Lucas Mccamon군 

 

교정을 가로질러 가다가 쎄타(Theta) 연못[*나는 이 연못을 에덴(Eden) 연못으로 부르고 있다]가에서 점심 먹으러 나온 기러기들과 오리들, 청설모 부부를 만났다. 그런데 눈에 번쩍 뜨이는 광경은 어미 오리와 새끼[병아리]들이 나란히 혹은 충무공이 왜군들을 무찌를 때 사용했다던 학익진(鶴翼陣) 형태로 대형을 바꾸어 가며 열심히 배들을 채우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관찰하니 어미가 저 혼자 먹는 일에 몰두하는 게 아니라 가끔씩 이쪽저쪽 참견하며 아이들에게 모이 줍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듯 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우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는 사람이나 동물이나 매일반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그들이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에덴의 연못[Eden's Pond]으로 고쳐 부르고 있는 'Theta Pond'


대견한 듯 바라보는 어미오리의 표정이 느껴지시나요?


어미오리의 걱정스런 눈빛이 보이시나요?


마누라가 어디 간 줄도 모르고 열심히 뭔가를 주워먹고 있는 청설모 

 

누가 뭐라 해도 에덴 연못에 둥지를 틀고 사는 이 친구들이야말로 천적 걱정 없이 풀밭에 널린 게 먹이일 것이니 행복한 존재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양이 넉넉지 않은지 늘 풀 속에 부리를 박고 먹을 것을 찾고 있는 모습들이 약간 안쓰러운 건 사실이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연못에서 살고 있는 기러기와 오리들은 기가 막히게 나와 생체리듬이 일치하는 녀석들이라는 점이다. 내가 시장기를 느껴 창밖을 내다보면 으레 이들은 물 밖으로 몰려나와 오찬을 즐기고, 한참 있다가 다시 배가 고파 집에 가려고 연구실 문을 나서면 이들 역시 다시 내 눈길 안으로 들어와 만찬을 즐기곤 한다. 그 나머지 시간들은 물 위에서 몰려다니며 저희들끼리 장난질을 치거나 사색에 잠긴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식사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오리들


식사를 끝내고 깨끗한 물을 마시러 모여든 기러기들 

 

이 친구들로부터 간신히 벗어나 식당의 한 코너로 들어가니 코에 익은 육향(肉香)이 풍겨 나온다. 좀 더 다가가니 벽에 선명한 태극기와 함께 이 주일의 특선 음식: 한국이란 팻말이 걸려 있고, 곁에 만두와 쇠고기 불고기[Beef Bulgogi] 사진이 붙어 있는 것 아닌가. 사라졌던 식욕이 서서히 살아났고, 망설임 없이 배식대로 가서 스팀드 라이스김치소불고기를 얹도록 했다. 대부분 인도계 미국인들인 쿡들에게 한국음식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으니 바로 옆의 미국인을 가리켰다. 옆에서 이 한국음식을 누가 만들었냐?’는 내 말을 들었는지 그가 갑자기 주눅 든 표정을 짓는다. 짐작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내가 혹시 추궁하려고 자기를 찾는 줄 알았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음식을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으니 우물쭈물 얼버무리고 만다. 내가 다시 한국음식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하니 그제야 표정이 환해지면서 자기도 고맙다면서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준다. 먹어보니 간도 맞고 달콤하며 은근한 것이 제법 흉내를 잘 낸 불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마른 나그네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모처럼 밥알 하나 안 남긴 채 점심을 먹었다.


 


식당의 한 코너


이 식당 벽에 내 걸린 전광판 광고

 
한국요리를 만들었다는 요리사 브라이언(Brian Kreigh)씨


간단하지만 맛있었던 불고기와 김치, 그리고 밥 

 

돌아오는 길에 일부는 망울지고 일부는 피어나기 시작한 국화꽃들을 만났다. 국화꽃들의 자태를 한 눈 가득 머금고 문득 고개를 드니 화단 사이로 건물들 사이로 가을이 일렁일렁 차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만 욕하며 쫓기듯 오고 가는 사이에 시간들은 이렇게 흘러가 버린 것이었다. 꽃밭을 지나 에덴 연못으로 오니 그 사이에 벌써 기러기들과 오리들은 점심 식사를 끝냈는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사색에 잠긴 모습들이다. 내가 그들을 따라 하는지, 그들이 나를 따라 하는지 알 수 없는 형국이다. 호접몽(胡蝶夢)을 꾸던 장자(莊子)마냥 내가 오리인지, 오리가 나인지구분할 수 없는 경지를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식당가가 들어 있는 Student Union 건물


Student Union 앞에서 만난 국화꽃들 

 

큰 행복을 깨닫지 못하고 투덜거리다가 우연히 보니, 내 곁엔 사막 같은 정체불명의 음식들 가운데 오아시스 같은 불고기도 있었고, 나보다 훨씬 정확하고 사색적인 기러기와 오리들도 있었으며, 시간의 덧없음을 깨쳐 주는 국화꽃도 있었다.

 

개 같은 날의 오후가 아니라 무언가 행복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싱싱한 오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12. 12:10

 

 

 

폰카시티를 찾아

 

오클라호마 시로부터 정 북쪽에 위치한 케이(Kay) 카운티의 핵심 도시인 폰카 시티(Ponca City). 핵심적 인디언 거주지들 중의 하나인 그곳의 한 복판에 말란드(E.W.Marland)의 대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말란드는 석유 재벌로서 상원의원과 오클라호마 주지사를 역임하고 이곳에 기념비적인 저택을 남겨 놓은 인물. 그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탈리아 피렌체 지역 저택들의 건축양식에 특히 매료되었고, 그것들을 본 떠 지은 까닭에 이 저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되었다고 한다.


폰카시티에 있는 말란드의 저택 

 

이곳 답사에는 최근 헬싱키에서 건너와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교 기계학습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큰 아이[경현]도 잠시 휴가를 틈타 합류하게 되었다. 우리는 스틸워터에서 자동차로 1시간쯤 달려 말로만 듣던 폰카 시티에 도착했다. 풍광이 수려하고 맑은 곳이었다. 다운타운에서 그랜드 가[, Avenue] 1000번지로 찾아가니 과연 그의 저택은 절경 속에 숨듯이 앉아 있었다. 78피트의 폭에 184피트의 길이로 대략 43,561 평방피트 규모의 4층 건물이었다. 10개의 침실, 7개의 벽난로, 13개의 목욕실, 3개의 부엌을 포함한 총 55개의 방들 모두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폰카시티 말란드 저택의 정원과 정자 


폰카시티 말란드 저택의 뒷면 

 

출입문으로 들어서자 말란드가 가장 좋아했다던 당대 제일의 조각가 데이비드슨(Jo Davidson)의 손에서 탄생한 그들 부부의 대리석 조각상이 깔끔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공식 연회가 베풀어졌을 식당이 가까웠는데, 이곳에 사용된 참나무는 영국 왕실의 산림에서 벌채해온 것이라 하며, 그것들을 모두 수작업으로 끊어내고 이어 붙여 만든 벽면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말란드 저택 입구에서 만난 말란드 부부 입상
 


말란드 저택의 식당


말란드 저택 식당의 차 주전자 세트

 

좀 더 걸어가자 좀 작은 규모의 아침 식사 전용식당과 음식을 내오는 부엌 등이 연결되어 있고, 햇볕이 들어오게 설계된 북쪽의 살롱과 홀웨이(Hall Way), 많은 미술품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는 연회장 겸 갤러리, 거실인 남쪽의 살롱, 주인 내외의 침실, 손님들의 침실, 각종 화장실과 의상실, 테라스, 비밀 도박장[Poker Room]과 주류 보관실 등이 각 층에 분산되어 있었다. 도박장에서 이어지는 비밀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가니 너른 풀밭과 함께 당시 수영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말란드 저택의 아침식탁


말란드 저택의 연회장


말란드 저택 거실에 걸린 말란드의 초상


말란드 저택 갤러리에 걸린 Herman Atkins MacNeil의 작품 "Challenging" 


말란드 저택 갤러리에 있는 F. Jenkins의 작품 "Adventurous"


말란드 저택의 거실


말란드 저택의 침실


말란드 저택의 샹들리에와 천장 장식

 

큰 골프장 넓이는 될 법한 정원을 따라 원형으로 에인절 홀[Angel Hall, 현재는 사립 초등학교], 아티스트 스튜디오(Artist Studio), 박물관, 말란드 부인이 만년에 살던 집,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다섯 개의 호수들, 풀밭 한 가운데 서 있는 정자[gazebo], 호숫가의 보트 보관소, 북쪽 테라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념비적 건축물과 기념물들이 남아 말란드 생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말란드 석유회사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직원들의 작업복


말란드 석유회사 로고


말란드 석유회사를 합병한 코노코 석유회사 주유소의 주유기 


말란드 저택 정원 한 켠에 있는 에인절 홀(Angel Hall). 현재는 사립초등학교


말란드 저택 정원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신학교['Ponca City Christian Academy']

 

말란드는 석유 사업으로 거대한 부를 이루었고,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지내는 등 화려한 지위를 얻었으나, 만년에 그의 회사가 코노코(Conoco) 회사에 합병되면서 그의 부와 권력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

 

사실, 말란드가 이 집을 지음으로써 폰카시티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묘를 얻은 것이니, 이 저택이야말로 돈을 쓸 줄 아는 자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불멸의 예술품이라 할 것이다. 이 저택을 두고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유럽에 대한 미국인의 의식을 알 수 있다는 것. 말란드는 유럽을 돌아보고 난 뒤 이 집을 지을 결심을 했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까지 미국인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유럽 콤플렉스의 한 단면이 당시에도 얼마나 컸었는지 이 집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은가. 또 하나. 돈 있는 사람들이 이왕 집을 지을 경우, 크게 민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호화롭고 값나가게 지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유럽을 돌아보며, 유럽의 역사적예술적 무게야말로 지어질 당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을 각종 건축물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간혹 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왕 제 돈 가지고제대로 지으려고 마음먹는 바엔, ‘문화유산급으로 지어야 한다. 그래야 후손들이 조상과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고, 우리 같은 외국인들로부터 관광수입까지 챙길 수 있을 것 아닌가.
 


말란드 저택 정원에서 Melania와 Kyung


말란드 저택 정원에서 백규


말란드 저택 바깥에서 백규와 Kyung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9. 12:47

 

오클라호마의 숨어 있던 별 ‘Guthrie City’

 

 

 

오클라호마 시티로부터 35번 하이웨이를 타고 20~30분을 달리자 길가에 ‘Oklahoma Territorial Museum[오클라호마 지역 박물관]’이란 입간판이 서 있었다. ‘territorial’이란 이름에 관심이 갔다. 특수한 분야를 표방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박물관이란 시간과 지역을 초월하는 공간인지라, ‘territorial’을 강조한 그 이름이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Oklahoma Territorial Museum 전경


오클라호마 주 인디언 분포도

 

105일 토요일. 맘먹고 기억 속에 각인된 그곳엘 갔다. 거쓰리(Guthrie) 인터체인지로 진입하니 겉보기에 한적한 시골이었다. 다운타운이라 할 만 한 거리의 주차 공간들은 텅텅 비어 있었으나 도시 곳곳에 서려 있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이곳이 바로 오클라호마의 첫 주도[州都, Capital]였다. 인근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주도의 지위를 넘겨 준 뒤 와신상담(臥薪嘗膽)해 온 듯하지만, 한 번 지나간 역사의 물결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함을 그들인들 모를 리 없을 터. 힘들여 보존하고 있는 영화의 옛 자취들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주 간선도로를 따라 100년 넘는 건물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승객들을 가득 실은 당시 모양의 버스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옛날 모습의 트롤리 버스
 

잠시 걷다 보니 하얀 천막들이 우리의 길을 막았다. ‘Guthrie Escape’란 명칭의 가을 축제였다. ‘거쓰리로의 탈출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큰 도로 위에 설치된 각각의 천막들에는 각종 미술품, 음식, 와인, 의상, 도자기, 공예품 등이 그득그득 전시되어 있고, 천막 거리를 벗어난 곳의 가설무대에서는 그룹 싱어들과 악사들이 각국의 민속음악들을 공연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100년이 훨씬 넘는 건물들이 우뚝우뚝 서서 축제의 현장을 굽어보고 있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냇물처럼 흐르고 있는 시간의 여울에서 물고기가 되어 유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시간이 각인된 그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축제의 힘임을 비로소 느껴본 우리였다.


축제 공연장 앞에서 만난 가수들


거리의 오래된 악기점


축제장 도자기 부스에서 만난 아마추어 도예가


축제장 장식물 부스에서


거쓰리 축제 포스터


축제장 공연무대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부터 두 개의 네거리를 지나자 박물관이 서 있었다. 건물은 그럴 듯 했으나, 관람객은 우리 둘 뿐이었고, 들어가 보니 빈약한 컬렉션 또한 우리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주로 개척시대 이 지역의 생활사 자료들이거나 복원된 것들이 대부분으로, 1, 2층에 나누어 진열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미 오클라호마 시티의 카우보이 박물관과 털사 시의 길크리스 박물관을 본 우리의 안목을 만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박물관과 함께 하고 있는 카네기 도서관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것으로 당시 소장하고 있던 책들과 열람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이 도시의 역사적 연원과 문화적 깊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박물관 소장품(집안 모습)


페인카운티의 창설자 페인 기념 페넌트


박물관 소장 가구들


박물관에 전시된 옛날 버스


인디언 체이옌족 추장 울프


카네기 도서관의 모습

박물관에서 나와 중앙의 대로를 타고 끝까지 가자 큰 건물의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사원(Scottish Rite of Freemasonry)'이 서 있었다. 기독교와 계통을 달리 하는 광신도들의 비밀 결사로서 이미 200~300 년 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사회를 중심으로 퍼져 나간 민간조직이 바로 이것이다. 루스벨트, 처칠 등 세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십자군 전쟁 때의 성당 기사단에서 연원되었을 만큼 역사가 길다.


십자군 전쟁 뒤 스코틀랜드로 도피하여 석공으로 변신한 기사들은 비밀 결사를 만들어 유지하며 수백 년을 지탱했고, 그로부터 약 400년이 지난 1717, 흩어져 있던 지부들이 규합하여 프리메이슨의 공식명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프리메이슨의 사원을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잠겨 있는 사원의 주위를 뱅뱅 돌면서 비밀스런 내부를 보고자 했으나 문은 굳게 잠겨 나그네의 출입을 완강히 막는 것이었다.

프리메이슨을 떠나 클리블랜드가에 위치한 레스토랑 ‘EAT’를 찾았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집의 돼지 갈비 바비큐와 맥주 한 잔은 나그네의 출출한 배를 채우기에 충분했고, 모여드는 사람들의 친절한 표정과 응대가 이 지역의 분위기를 말해주고도 남았다.


늦은 점심을 때운 옛날 레스토랑 EAT


레스토랑 EAT 캐시어의 상큼한 미소


레스토랑 벽에 붙어 있는 옛날 상표

 

식사 후 커피 마실 만한 집을 찾다가 들른 곳이 바로 빅토리안 티룸(Victorian Tea Room). 레스토랑이 주업인 그 집에서 차 한 잔만 마시기가 미안해 쭈뼛거리는 우리를 호화롭게 세팅된 자리에 앉힌 다음 여주인 셰릴(Cheryl)은 맛있는 티와 커피를 내왔다. 차를 마시면서 여주인과 우리는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시를 세운 인물 거쓰리의 이야기, 거쓰리 시의 역사와 문화, 조상들과 자신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 등을 자분자분 얘기해준 그녀는 우리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 대학 밖에서 만난 첫 지성인이었다.


빅토리아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빅토리아 다방의 주인 Cheryl씨와 함께

 

그 뿐 아니었다. 한참 만에 일어나 나가면서 찻값을 지불하려 하자 그녀는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미국이 어딘가? 음식 값을 내고도 팁까지 얹어 줘야 하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난 그녀가 찻값을 받지 않겠다니! 오클라호마의 경건함과 친절함에 이미 감동받은 바 있는 우리는 거쓰리에 와서도 대접받는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천국 미국에서 공짜 커피를 마시고, 미국 친구까지 만들게 되었으니, 이만 하면 몇 배 남는 장사를 한 셈이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거쓰리의 추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5. 08:22

 

빛나는 한국학생 Hyunjun Brian Choi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창 자식들을 키울 때엔 그 녀석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모자랐는데, 이제 웬만큼 홀로서기들을 했다고 생각되면서 내 눈에 다른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온다. 요즘 들어 부쩍 남학생들은 아들로, 여학생들은 딸이나 며느리로 바꾸어 생각해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운 좋게도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을 만나면서 거의 저런 학생을 아들이나 딸로 둔 부모는 참 좋겠구나!’, ‘저런 아이는 며느리 감으로 딱인데!’, ‘참 잘 키웠구나!’ 등의 생각만을 갖게 되었으니, 참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도 이처럼 내 주변에는 반듯하면서도 이쁘고 착한학생들뿐이다.

 

잠시라도 해외에 나가 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인 동시에 잘 몰라서 불안한 일일 수도 있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결정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서류작업들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이곳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의 학장, 학과장, 외국인 학자 관리처, 주택 관리처, 풀브라이트[미국 본부 및 한미교육위원단], 대사관 등 우리가 접촉한 기관이나 부서들 모두 공적인 업무 상대들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 등 좀 더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사이트를 뒤지다가 이곳 대학의 한인학생회를 발견했고, 궁여지책으로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서 부득이 부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득달같이 생동감 넘치는 문체의 영문 답신메일이 날아왔다. 그가 바로 ‘Hyunjun Brian Choi’였다. 어려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한글을 쓰는 것보다 영문을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여 영문으로 이메일을 쓰게 되었노라는 해명까지 덧붙여가며 이곳 생활의 이면들을 자세하게 적어 보내온 것이었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 의젓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그의 이메일을 받아보곤 호기심이 생겼다. ‘한인 학생회의 부회장이라니, 대학원생 쯤 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몇 번 오고 간 그와의 메일 연락 덕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Cafe 88에서 


레스토랑 Bad Bread에서 


OSU의 풋볼 경기장 Boone Pickens Stadium에서               
                                                                                                       

와 보니 정착이 쉽지 않았다. 시차 적응이 쉽지 않아 눈꺼풀은 스르르 내려앉는데 시장은 가야하고, 시장을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를 사는 절차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또 자세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의 이메일을 통해 연결된 분이 바로 기계공학과의 장영배 교수였다. 장 교수의 호의로 우리는 나머지 정착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브라이언을 집으로 불렀다. 아직 차를 구입하기 전이었다. 시장을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하자 강의가 끝나는 즉시 친구의 차를 빌려 몰고 부랴부랴 와 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앳된 학부 3학년생이었다. 첫 인상이 착하고 성실했다. 말을 시켜보니 의젓하고 생각 또한 깊었다. LA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대학 기간을 단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이 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였다. 벌써 1년 반이란 기간을 단축했단다. 학부를 졸업한 뒤에는 로스쿨에 진학하여 국제변호사[아마 경제 전문 변호사가 목표인 듯하다.]로 활약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한국의 유수한 로펌에서 인턴의 경력도 쌓아놓았다고 했다. 매학기 학점을 초과 이수하면서도 아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그였다. 예컨대, 상위 10% 이내의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National Society of Collegiate Scholars’, ‘Phi Eta Sigma’, ‘Golden Key International Honor Society’ 등의 멤버로 활약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출중한 능력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2012년에는 ‘Baugh, Russell, and Florence’ 장학금을 받았고, 2012년 봄 학기, 2013년 봄여름 학기에는 우등생으로 학장의 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총장으로부터 우등상장을 받기도 했다.


Boone Pickens Stadium 건물 1층에서 

         

브라이언이 속한 College of Honors 건물 

 

나는 해외에서 빛나는 우리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게 된다. 물론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도 중요하고 어렵다. 그러나 낯설고 물 선 해외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앞서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다. 어머니의 젖과 함께 물려받은 모어[mother tongue] 사용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아이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인즉, 그 나이 또래에 누구나 맞이하는 질풍과 노도’, 내부의 욕망과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유혹들을 억누르거나 물리치고 시시각각 침투하는 외로움과 맞서가며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브라이언이 풍겨내는 담담한 내면을 통해 나는 범상치 않을 그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의 빛나는 미래를 점치게 되었다. 브라이트(bright) 브라이언 만세!!!

 


백규 연구실에서 브라이언과 함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