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1. 26. 17:20
 

스페인 기행 2-1 : 똘레도의 감동, 그리고 질기게 따라붙는 동키호테



1월 24일.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똘레도로 출발했다. 인구 6만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한때 마드리드를 위성도시로 거느리던 스페인의 수도였다. 이슬람 시절에 쌓아올린 가파른 성벽을 금대(襟帶)처럼 타호강이 에둘러 흐르고, 복잡한 시가지 안에는 고급 문화유산으로 그득했다. 스페인이 보유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은 대충 헤아려도 39점이나 된다. 그 중 35점이 문화유산, 2점은 자연유산, 그리고 나머지가 복합유산이다. 이곳 똘레도는 시가지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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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똘레도 대성당의 대시계문, 아래는 정면>

마드리드에서 버스에 오르니 1시간 10분 만에 똘레도의 웅장한 성채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좁은 언덕길에 올라 버스에서 내리니 붉은 색 벽돌집들이 골목에 빽빽했다. 타호강은 허리띠 혹은 오그린 두 손바닥처럼 사람들의 삶과 온갖 문화유산들을 감싼 채 흐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굵직한 것들만 꼽아도 대성당, 엘그레코 산또 토메 교회, 산후안교회, 의사당, 산타크루즈 미술관, 알카사르 요새 등등 숨이 차오를 정도. 우리가 찾은 곳은 대성당과 엘그레코 산또 토메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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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 그레코 산토 또메 교회>

 예상대로 대성당은 똘레도의 중심에 있었다. 대성당을 중심으로 광장이 이루어져 있고 그 주변에 상가와 주택가가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확인한 대로였다. 똘레도가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27년 페르디난도 3세가 착공하여 1493년 알폰소 8세가 완성한 전형적인 고딕식 건축물이 대성당이다. 길이 120m, 폭 60m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90여m의 두 탑이 세워져 있고, 그 안에 18톤에 달하는 종이 매달려 있다 한다.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 없는 이 탑은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엘 그레코의 아들 조르쥬 마누엘(Gorge Manuel)이 세웠고, 내부의 프레스코화나 스테인드 글라스 등은 엘 그레코와 고야 등 거장들의 작품이라고. 

 수리 공사 중인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고, 뒤쪽의 대시계문(Puerta del Reloj)으로 입장한 우리는 장엄한 내부에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내진(Capilla Mayor), 성가대석(Coro), 참사회 회의실(Sala Captular), 보물 보관실(Tesoro), 성구실(Sacristia), 예배당(Capilla), 회랑(Claustro)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는 고전적이면서도 화려했다. 스페인 천주교의 중심인 수석 대교구 성당이 바로 이곳이었다.

 성구실에는 엘 그레코의 <성의의 박탈>, 고야의 <그리스도의 체포>, 모랄레스의 <슬픔의 성모> 등 대작들이 전시되어있어 질적으로 큰 미술관에 못지않았다. 그 옆의 의상실에는 중세 성직자들이 입었던 수직(手織)의 화려한 미사복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역사와 시간을 뛰어넘은 그 모습이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소예배당의 보물 보관실에 전시된 성체 현시대는 또 하나의 놀라운 물건이었다. 금은보배로 장식된 구조물이 대성당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성현일에 이 성체 현시대를 둘러메고 거리를 순례하는 행사는 지금도 반복된다니, 놀라운 일이다.

 대성당을 나온 우리는 꼬불꼬불한 골목길들을 돌아 산또 토메 성당으로 갔다. 엘 그레코의 명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당을 재건한 오르가스 백작. 그의 장례식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스테파노 성인이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안장하는 모습, 그 뒤에 배열한 참배객들의 슬픈 표정들,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 그림의 뒤쪽에 천국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백작의 영혼을 맞이하는 모습 등 매우 인상적이며 감동적이었다. 한 사람의 죽음을 둘러싸고 천국으로부터 두 성인이 강림하고, 하늘나라에서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자의 영혼을 영접하는 모습 등은 오르가스 백작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종의 기적을 염원하는 독실한 신심의 발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오르가스 백작이 재건한 산토 또메 성당은 이 그림이 있어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똘레도는 중세정신이 살아있는 보물 창고였다. 성채를 빠져나와 바라보니, 타호강 너머에 앉아있는 똘레도 자체가 하나의 요새요 금성철벽이었다. 사실 똘레도의 존재를 전투와 관련시키려면 알카사르 요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1538년 카를로스 1세에 의해 개축이 시작하여 1551년 요새의 원형이 이루어졌고, 1936년 스페인 내란 당시 프랑코 파의 주둔지가 되었던 곳. 프랑코파가 인민 전선군에 강하게 저항하던 곳이 바로 알카사르 요새였던 만큼 똘레도는 종교와 함께 정치, 군사적으로 의미가 큰 지역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스페인 역사의 영욕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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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하몽(돼지 넓적다리를 염장한 식품)을 먹은 식당 라 쿠바나는 타호 강을 경계로 똘레도 요새의 맞은편에 있었다. 딱딱하고 맛깔스러운 스페인 빵과 짭짤하고 고소한 하몽 한 점으로 스페인 역사의 질곡을 맛보게 되었다면, 과장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26. 06:05
 

스페인과의 첫 상봉, 돈키호테를 만나다


아침 8시 40분 인천공항을 출발, 암스테르담 국제공항에 도달한 것이 유럽시각으로 오후 12시 34분. 12시간의 먼 거리였다. 2시에 암스테르담을 떠나 4시 30분에 드디어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서울로부터 무려 15시간이나 걸린 장도였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지만 바람은 매섭지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 눈이 쌓이고 한파가 맵게 몰아쳤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항 주변의 마을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유럽을 돌면서 나를 주눅들게 했던 아름다운 건축들의 추억이 아프게 되살아났다. 드디어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나라에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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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두워지기 시작한 마드리드 시가지>
 
600만의 대도시 마드리드. 재작년 대비 35%나 감소할 만큼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지만, 그래도 마드리드는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었다. 아토차 역을 지나 프라도 미술관, 솔광장 등을 지나 사바티니 정원, 바일렌 거리를 지나 스페인 광장에 도달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산호세 교회 앞까지는 대략 1.3km에 달하는 그란비아(Gran Via), 말 그대로 ‘대로(大路)’가 펼쳐져 있었고, 이곳이 마드리드 구시가의 중심이었다.

 왕궁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원형지붕을 지닌 엄청난 자태의 산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성당이 좌정하고 있었다. 바일렌 거리와 만나는 마요르 거리(Calle Mayor)를 따라가니 마드리드 시청사, 시장 관사 등으로 빽빽이 둘러싸인 광장이 나왔다. ‘마요르’란 시장(市長)을 뜻하는 ‘메이요(mayor)'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톨레도 거리와 마요르 거리가 만나는 곳의 남동쪽에는 마요르 광장이 있었다. 마요르 광장에서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솔광장이 다시 나왔다. 솔광장으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가니 왕립 산 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가 등장했다. 국회의사당과 이코 미술관 등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 페르난도 미술아카데미로부터 알카라 거리를 거쳐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니 다시 그란비아와 합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시벨레스 광장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그리 넓지 않은 곳을 한 바퀴 돈 셈이었다.

 그러나 어둑발이 들 무렵, 그란비아가 시작되는 곳의 스페인 광장은 처음 만나는 마드리드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공간이었다. 형형한 눈빛의 돈키호테가 장창을 꼬나든 채로 날아오를 듯 기세가 등등했다. 옆엔 나귀를 탄 산초 판사가 그 반대쪽엔 연인 둘시네아가 돈키호테를 옹위한 채로 서 있었고, 돈키호테의 뒤로 세르반테스가 금방이라도 일어설 듯 앉아 있었다.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는 이 기념비는 스페인 빌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왼쪽에는 마드리드 타워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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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테스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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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광장 앞의 플라타너스 길과 노인들>

어릴 적 만난 돈키호테는 촌놈인 내게 스페인에 대한 무한한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 적이 있었다. 소에게 풀을 뜯기러 찾아간 바닷가 백사장의 햇살 따가운 모래밭에 누워서 누군가가 번역한 <<동키호테>>를 읽었다. 책장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읽어도 읽어도 다함없는 재미가 샘솟았다. 오늘 그 스페인에 온 것이다. 3년 반 전 자동차로 유럽을 돌다가 그만 ‘초읽기’에 몰려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던 스페인이다. ‘말꼬리에 붙어 천리 간다는 파리’처럼 나도 수준 높은 일행의 꽁무니에 슬그머니 붙어 만리 장도 스페인을 밟았으니, 열 두어 살 시절 촌놈의 꿈을 지금서야 이루는 셈이다.

 오늘 밤엔 꿈이나 거창하게 꾸어볼 일이다. 스페인이여, 부디 내 품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1. 12. 10:02

‘미네르바’가 가르쳐 준 것

 

‘미네르바’란 필명으로 사이버 세계에서 필봉을 휘두르던 인사가 사직당국에 잡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격의 ‘허무개그’ 혹은 기껏해야 ‘허위정보 유출 범죄’ 쯤으로 치부하고 있는 듯하나,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그가 전문대 출신의 무직자라거나 해외 체류의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 등은 사태의 핵심이 아니다.

그의 근거 부족한 말들이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총명을 흐리게 했으며, 나라 전체를 들었다 놓았을 만큼 큰 힘을 발휘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내뱉는 말의 무게나 의미와 관련하여 심상치 않은 점을 시사한다.

이 사건에서 현재의 시국을 불안하게 여기며 살얼음 밟듯 살아가는 사람들의 허한 마음과, 그 무엇에라도 기대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역으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과 언어 속에서 사물은 사물이 될 뿐 아니라 그 사물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고 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미네르바는 자신의 언어로 ‘숨겨져 있던 세계’를 드러냈거나 만들어낸 셈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이기 이전에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자아를 대변하는 존재로 한동안 군림해왔고, 튀어나온 그의 말들은 다시 집단 심리에 자극을 주어 사람들의 불안을 증폭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사람은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말할 수 있지만, 그 어법들의 근원은 단 하나,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 자체다.

대중의 불안 심리를 단계적으로 고조시켜 온 점에 미네르바 어법의 교묘함이 숨어 있다. 그는 어쩌면 전문가들조차 자신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 역시 불안한 대중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중심성성 중구삭금(衆心成城 衆口鑠金)’이나 ‘삼인성호(三人成虎)’란 옛말들이 있다. 뭇사람들의 마음은 다른 생각이 침투할 수 없게 하는 성채가 되고 뭇 사람들의 말은 쇠도 녹인다는 것이 전자요, 한 두 사람이 하는 거짓말에는 속아 넘어가지 않지만, 세 사람이 짜면 거리에 범이 나왔다는 거짓말도 꾸밀 수 있다는 것이 후자다. 근거가 미약한 미네르바 개인의 말은 단순한 개인의 말로 그치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의 암귀(暗鬼)에 휩싸여 지내던 대중들에게 그의 현란한 수사는 제대로 먹혀들었고, 대중은 자신의 불안을 그의 수사에 맞추어 재해석하는데 길들여지게 된 것이다. 한때나마 미네르바의 말은 집단의 말로 전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 휩쓸렸거나 경도(傾倒)되었으며, 그에 따라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정책 당국자의 공신력 있는 말보다 얼굴을 숨긴 채 휘둘러댄 사설(私說)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그것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전형적인 사례로 읽힐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터넷의 울타리에 갇힌 현대 언어병리 현상의 단적인 예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경제문제로 우왕좌왕하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의 문제만도 아니다. 말 때문에 좌불안석을 경험한 적이 많은 우리다.

최고위층부터 장관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변설(辯舌)들을 쏟아내 국민들이 맘 편히 지내보지 못한 것이 바로 지난 정권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점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좋은 말 한 마디는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지만, 의도가 불순한 말은 ‘재앙의 문이고 몸을 찍는 도끼’일 수 있다는 속언들이 언제나 진리임을 몸으로 보여준 점에 미네르바 사태의 교훈은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9. 1. 2. 16:06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6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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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6 발간!

오정혜 박사의 『중국조선족 시문학 연구』(인터북스, 2008. 12. 20.)가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6으로 발간되었다. 중국에는 현재 200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4세까지 출생하여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고 있다. 중국의 조선족이 다른 지역의 한인들과 구별되는 것은 다음의 이유들 때문이다.
첫째,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견고하게 남아있다. 이민 2세나 3세들이 대부분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고, 문인들의 작품 활동도 대부분 한국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 조선족 문학은 중국 내에서 소수민족 문학으로서의 위상이 당당하며 그 입지가 굳다.
셋째, 조선족 문학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독특한 이민문학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집중적인 연구가 없었다.
넷째, 그나마 있는 기존 조선족 문학 연구는 주로 중국문학사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문학과 관련한 양상은 두드러지나 한국문학과의 관련은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없었다.

이상과 같은 현실적 여건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3부로 꾸며졌는데, 1부(“중국 조선족 시 연구”)에서는 시간적 공간적 차원의 시 의식을 분석했고, 2부(“서사시 『고향사람들』속에 나타난 리욱의 시의식”)에서는 시인 리욱의 시를 중심으로 “이중 층위의 인물 구성에 따른 역할”, “‘고향사람들’ 속에 나타난 리욱의 시의식” 등을 분석함으로써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를 해명했다. 3부(“『잊을 수 없는 녀인들』에 담긴 욕망의 양상”)에서는 욕망의 구조와 의식의 양상을 중심으로 주선우의 작품들을 분석했다.
책의 말미에는 『고향사람들』과 『잊을 수 없는 녀인들』을 자료로 들어 놓았다.
상당수의 중국 조선족들이 국내로 들어와 각종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요즈음, 이 책은 민족적 동질성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인터북스 간, 값 18000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