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2. 9. 01:28
 

스페인 기행 5-2 : 깔끔한 백색과 지중해의 만남, 그 청아한 미학 : 말라가, 미하스, 론다의 정열과 신선함


말라가로부터 고지대를 향해 30분쯤 달렸을까. 온통 하얀색의 마을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쩌자고 이 마을 사람들은 이리도 벽마다 순백의 붓질을 해댄 것일까. 거리는 좁좁 했으나 아기자기 예뻤다. 각종 선물가게, 성당, 레스토랑들 사이 골목길로 오가는 사람들도 관광객을 빼곤 대본에 따라 움직이는 배역들처럼 이채로웠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엔 바위를 뚫고 만든 성당 혹은 신전이 있었다. 비르헨 데 라 페냐(Virgen de la Pena)란 이름의 성당으로, 이 마을의 수호 성녀인 긴 머리의 여성상이 모셔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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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스 주택들의 순백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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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스의 비르헨 데 라 페냐>
 
사각형 모양의 앙증스런 투우장도, 미니어처 박물관도 있었고, 말과 나귀들은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하스의 순백과 지중해의 에메랄드 빛은 햇빛과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토로스 광장, 라 꼰스티누씨온 광장, 비르헨 데 라 뻬냐 광장, 라 인마꿀라다 가톨릭 용품점, 아마폴라 기념품점, 에네 기념품점, 초 세라믹 상점, 엘 빠드라스트로 레스토랑, 뽀라스 커피숍, 미하스 호텔, 미하스 박물관, 산 세바스티안 교회, 깔바리오 교회 등등 작은 마을엔 두루 꼽기에도 숨찰 만큼의 멋진 건물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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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스 산 세바스티안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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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스 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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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스 선물가게 바깥 벽>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9. 01:02
 스페인 기행 5-1 : 깔끔한 백색과 지중해의 만남, 그 청아한 미학 - 말라가, 미하스, 론다의 정열과 신선함


1월 26일. 말라가(Malaga)의 엘 삐나르(El Pinar)호텔에서 1박을 하고 난 우리는 아침 일찍 지중해의 물 내음을 맡기 위해 해변으로 달렸다. 말라가는 꼬스타 델 솔(Costa del sol) 즉 태양의 해변으로 가는 관문. 시간에 쫓기는 나그네들이라 태양의 해변에서 지중해의 맛을 음미한다거나 피카소의 고향인 이곳에서 그의 붓놀림을 상상하고 있을 여유 또한 없었지만, 허파 가득 바닷바람이라도 담아가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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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쪽에서 바라본 말라가 주택가>

 지중해가 요동치던 시절부터 푀니키아, 로마, 이슬람의 지배를 받은 말라가. 1487년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의 그라나다 왕국으로부터 지배권을 회복함으로써 이 도시에 굴곡진 역사의 나이테를 더하게 된 것이다. 대성당이나 성터 등 시내 요소요소에 남아있는 역사 유적들은 변화무상하게 진행되어온 이 지역 역사의 살아있는 증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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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쪽에서 바라본 말라가의 원경>
 
무엇보다 이곳이 피카소의 고향으로서 그의 생가가 남아있고, 피카소 미술관도 있다는데, 가이드의 재촉으로 점만 찍은 다음 우리는 새로운 여정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야 했다. 그래도 어찌 지중해의 바닷물과 피카소의 흔적을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인가. 1881년 10월 25일 이곳 말라가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미술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붓을 잡았으며, 천재성 또한 발휘했다. 그는 프랑코 독재체제를 벗어나 프랑스로 망명했고, 대부분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는 미술을 통해 시국의 부조리에 저항했다. 공화국 정부에 대항하던 프랑코를 지원하던 나치 독일이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여 무수한 양민을 죽인 사건에 분노하여 그려낸 <게르니카>는 그 대표적인 예다. 망명한 후 공식적으로 그가 고향을 다니러 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1년에 한 차례씩 몰래몰래 고향을 다녀가곤 했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의 정보력이 어찌 그 점을 몰랐겠는가.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 화가를 건드려서 득 될 것 없다는 현실적 판단과 동족으로서 피카소에 대하여 갖고 있던 자부심 때문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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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가의 텅 빈 백사장>
 
2005년도 파리의 피카소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Women Running on the Beach)’이란 제목의 유화를 본 기억이 생생했다. 분명 지중해 어느 해변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혹 여기서 그런 여인들을 만날 순 없을까. 망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는 가운데 버스는 도로공사 중인 해변 가 로터리에 우리를 풀어 놓았다.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순간 경악했다. 로터리 한 복판에 젖통과 허벅지를 드러낸 두 여인이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힘껏 달려가는 동상이 그곳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아, 그렇군. 파리의 피카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그 유화가 이곳에는 동상으로 바뀐 채 싱싱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시퍼런 지중해의 물속으로 막 뛰어들려는 포즈였다. 파리 피카소 박물관의 그 그림에는 ‘<푸른 기차> 발레 막의 디자인’이란 설명이 붙어 있었다. 한때 무대 미술가로 활약했던 피카소였으므로, <푸른 기차>란 제목의 발레에 맞는 이미지를 여인들의 육감적인 몸매로 표현해내려 했을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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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가 해변에 서 있는 동상-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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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피카소 박물관에 소장된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 유화, 1922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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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가 해변의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과 시가지>

 지중해변 말라가의 해변에서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을 친견한 이상, 이 도시에서 더 무엇을 볼 필요가 있을까. 동상의 앞 뒤 양 옆을 돌면서 십 수 컷의 사진을 박은 다음 버스로 돌아왔다. 여름철 내내 이 해변에 가득했을 풍만한 비키니 여인들을 생각하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5. 15:54
 

스페인 기행 4-3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의 감동


 메스키타로부터 100m쯤 떨어진 남쪽 거리의 유대인 거리를 걸었다. 서유럽의 어딜 가나 마찬가지이지만, 이 거리도 전체가 깔끔하고 단정했다. 비좁긴 하나 ‘꽃의 거리’는 겨울임에도 아름다웠다. 흰 벽의 양쪽 창틀에 놓인 화분들도 다가올 꽃의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똘레도에 있는 두 곳을 포함, 스페인 전역에 세 곳밖에 없다는 시나고그( Synagogue)가 이곳 꼬르도바에도 있었다. 그 시나고그와 ‘유대인 잔혹사 박물관’만 쓰디쓴 그 민족의 과거를 말해줄 뿐, 더 이상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곳으로부터 좀 더 걸어 강가로 나가니 꼬르도바의 수호자 라파엘 성인의 탑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었다. 강물에 반사되는 석양이 겨울의 쌀쌀한 정적을 깨고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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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유대인 꽃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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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의 수호자 라파엘 성인의 탑>

종교 간의 불화는 종족 간의 불화, 정치적 불화를 내포한 역사진행의 노폐물이다. 물론 ‘모씨드럴’이라는 특이한 문화적 산물로 남을 수는 있었지만, 그 부조화는 언젠가 조화의 이상적 경지로 상승되어야 할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Malaga)로 달려간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2. 5. 15:42

 

스페인 기행 4-2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행의 감동


 정갈하고 유서 깊은 유대인 거리를 지나자 메스키타(Mezquita)[메스키타는 모스크를 지칭하는 스페인 말이다] 혹은 Cathedral-Mosque, 즉 ‘모스크 겸 성당’과 거대한 종탑이 나타났다. 술탄의 정원에 들어서니 무성하게 자란 대추야자 나무들이 우릴 반겼다. 대추야자는 그 옛날 모하멧이 살았던 곳에 흔히 자라던 나무였는데, 모스크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그런 대추야자 나무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 사원에서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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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입구>

 원래 무어인들의 모스크였던 건물을 기독교 왕조가 접수함에 따라 안쪽 중앙에 성당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요소요소 이슬람 왕조 시절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었던지, 대부분 모스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원래 이 건물은 780년 서고트 왕국의 교회가 있던 자리에 압둘 라흐만 1세가 세운 것이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 끝에 현재의 규모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메카 방향의 미흐라브(Mihrab)를 향해 좌우 대칭으로 지었어야 하나 공간의 협소함으로 건물은 균형을 잃게 되었다. 대추야자 나무와 우물[모슬렘들이 기도하기 위해 몸을 정결하게 하던 연못의 흔적]이 있는 오렌지 정원과 모스크가 합쳐진 건축물이 바로 메스키타였다. 바로 이 건물의 중앙에 성당이 있었다. 기독교군이 이 건물을 접수한 다음 성직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시의 왕 카를 5세가 지은 것이다. 그러니 이 건물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우리는 잠깐 동안 난감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모씨드럴(Mothedral)’이란 조어(造語)를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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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정원의 대추야자나무와 오렌지 나무들>

 모씨드럴은 찬란했던 꼬르도바의 전성기를 상징한다. 이 성전은 24,000㎡의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메디나(Medina)의 아사하라(Azahara)궁과 함께 이슬람 예술로 알려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바탕 위에 기독교의 모습이 덧씌워져 묘한 조화와 부조화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원래 한 뿌리였던 이슬람과 기독교.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 뿐 아니라 발생의 바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민족적․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면서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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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추야자나무의 모양을 본떠 만든 메스키타 내부의 열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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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메스키타 내부 성당의 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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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키타 내부 성당에 진열된 성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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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스키타 정원의 종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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