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12. 9. 11:50
*알립니다. 저는 올해(2007) 초에 '조규익 임미숙의 유럽 자동차 여행기 <<아, 유럽!>>(푸른사상)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그 원고에 해당하는 기행문을 차례로 싣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여행기간의 역순(逆順)으로 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1신 : 삶은 우리에게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우린 2006년도 첫날을 아드리아 해에서 맞이했다. 바리 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하여 폼페이에 입성했다. 동에서 서로 달리는 길. 중간쯤부터 거센 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니더니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폴리를 지나 살레르노에 이르자 빗발은 굵어졌고, 폼페이에 들어오자 흙탕물이 튀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탈리아 바리 항에서 폼페이로 가는 도중 만난 아름다운 자연


도시는 썰렁했다. 1월 1일 휴일에 비까지 내리니 도심은 공동(空洞) 상태. 길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빗발 속에 간신히 호텔 하나를 잡은 뒤 도시를 대충 살폈다. 티레니아 해로 연결되는 살레르노 만을 접한 폼페이. 중심에 옛 도시의 폐허가 있고, 그 바깥으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매표소 주변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보았으나, 폼페이 폐허와의 만남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그 만남을 좀더 의미 깊도록 만들고픈 우리의 희망 때문이었다. 폼페이의 음울한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줄기차게 비는 내리고, 나그네의 수심을 도와 밤은 더욱 깊어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폼페이 시가지 일부


본의는 아니었으나 우연찮게 근래 우리는 폐허만을 찾아다녔다. 터키의 에페소, 그리이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에인션트 코린트, 그리고 이탈리아의 폼페이까지. 터키, 그리이스, 이탈리아는 바다로 접한 나라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길항(拮抗) 관계였던 이 나라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지대인 터키, 완전 서유럽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유럽도 아닌 그리이스와 이탈리아다. 에게해, 아드리아해, 지중해 등 서로 물길처럼 연결되는 바다를 공통의 무대로 하는 나라들이다.
일찍부터 꽃 피운 인류문명을 세계로 전파시키며 주름잡던 주역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항만들을 기반으로 도시문명을 이룩했으나, 전쟁을 비롯한 인재(人災)와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의 천재(天災)로 멸망을 면치 못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폼페이 폐허의 한 부분


영속하고자 한 그들의 욕망이 허무로 귀결된 현실을 보며, 명백한 신의 섭리를 깨닫기도 했다. 섭리의 현실화이든 단순한 허무이든, 폐허로 남은 ‘옛날의 영화’는 범부(凡夫)들의 마음에 참담함만 안겨 주었다. 역사의 이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폐허의 돌조각에서 느끼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은 나날이다.
물론 시간은 매 순간 절대 동일할 수 없고, 최소한 ‘동질적’일 수도 없다. 그러나 언제든 새로운 코린트, 새로운 에페소, 새로운 폼페이가 생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크게 보아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믿는 우리로선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폼페이 폐허 유물 저장고에 있는 시신의 부조


폼페이의 폐허 속에 쭈그리고 앉은 채 미이라처럼 형상화 된 어느 남자의 입에서, 누운 채 죽어버린 일가족의 입에서 우리는 분명 그런 내용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폐허를 대하면서 우리는 ‘살아있음’에 환희해야 하는가, 아니면 역사의 반복 가능성에 몸서리를 쳐야 하는가.
<계속>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11. 25. 16:07
 

一平선생님 팔순연에



선생님!

올 가을 단풍은 유난히도 붉고 곱습니다. 山野에 불타듯 깔린 단풍을 바라보며 불현듯 10년 전 선생님의 古稀宴을 떠올립니다. 안팎으로 나라가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내뿜던 狂氣가 온 나라를 짓누르던 그 때. 오래도록 隱居하시던 화곡동으로부터 명동 저잣거리의 한복판으로 나오신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지요. 선생님의 열정에 이끌려 하나 둘 모여든 문하생들은 그날 선생님의 파안대소를 뵈며 시절의 험난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도, ‘늘 처음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을 탐구하시며 문하생들을 이끌어 주시는 선생님의 의연하신 모습에 저희들은 크나큰 희망을 갈무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문하생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사회적으론 각자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만, 아직도 선생님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배움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어디에도 선생님의 문하만한 곳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고금을 無不通知하신 선생님께서 늘 연마에 여념 없으신 모습을 뵈며, 스스로들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생님!

그간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문하생들을 가르치시는 틈틈이 고전을 번역하시어 等身大로 이루어 놓으신 업적들. 단순히 ‘浩澣하다’는 말로는 덮을 수 없을 만큼 洋洋한 학문의 바다를 이룩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와중에 眼力은 크게 損傷되셨으며, 컴퓨터와 씨름하시느라 건강도 약간 쇠해지셨음을 저희들은 최근에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한서대학교 부설 동양고전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신 이래 <<주역>>, <<심경>>, <<맹자>>, <<문장달덕록강령>>, <<유예지>>, <<한국고전비평론자료집>>, <<통감절요>>, <<농암집>>, <<마일부학 연구논문집>>, <<삼한시귀감>>, <<임원경제지>>, <<고문진보>>, <<근사록>>, <<동계서화론>>, <<논어>>, <<시경>>, <<개자원 화보>>, <<춘추좌전>>, <<중용>>, <<한사경>>, <<중국음악철학>>, <<악기>>, <<서경>>, <<고문진보>>, <<일본서기>>, <<녹문사서>>, <<악론>>, <<맹자>>, <<음청사>>, <<기재집>>, <<대학>>, <<통감절요>>, <<오언칠언당음>>, <<중국역대화론>>(1~5), <<오언당음>>, <<칠언당음>>,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등 들기에도 숨찰 만큼 많은 고전들의 강독을 통해 후학들을 깨우치셨습니다.

 그 뿐인가요. 최근 12집까지 <<동방학>>을 발간하셨고, <<조용문선생집>>, <<한국고전비평론자료집>>(1~3), <<죽계일기>>, <<역주 악기>>, <<양심당집>>, <<김택영의 조선시대사>>, <<혜환 이용휴시전집>>, <<송구봉 시전집>>, <<중국 역대화론>>(1~5), <<국역 오언당음>>, <<국역 칠언당음>>,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등 많은 역서들을 펴내셨습니다. 요즈음의 자잘한 학인들로서야 몇 생을 산다한들 언감생심 이룰 수 있는 양이겠으며, 제법 한다하는 선비들이라 할지라도 쉬 이룰 수 있는 업적이겠는지요? 참으로 놀랍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생님!

저는 최근 ‘나이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創出하는 가치에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단 몇 년을 살아도 남의 100년에 맞먹는 삶을 사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바로 그런 예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빛을 발하시는 선생님의 학문세계야말로 남들이 백년을 넘겨 닦아도 도달 못할 경지임을 문하생들은 지금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난 10년 선생님을 뫼시고 학문의 近海를 빠져나온 저희 문하생들은 이제 드넓은 遠洋을 향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10년, 그리고 또 10년, 영원히 문하생들에게 이념의 푯대가 되어 주소서.


아, 海屋의 산가지에 萬歲를 더하시고, 다함없는 南山의 壽를 누리소서!


                             2007. 11. 24.


                             문하생들을 대표하여

                      사단법인 온지학회 회장 조규익은 삼가 절하고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1. 6. 00:29

조선일보 원문보기 클릭



석학(碩學)이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나

                                                               조규익(숭실대 교수)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중심인 대학과 교수집단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신정아 사건.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그 본질이 명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야말로 지식인들의 무사안일과 허위의식, 그로 인한 지식사회의 부패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교수 정년보장심사에서 신청자들을 대거 탈락시킨 KAIST의 사례가 이른바 ‘교수 철 밥통 깨기’의 전조(前兆)로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임용되면 정년이 보장되는 기존의 관습을 깨야 한다’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의 사회적 구호가 당위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상식을 갖춘 교수들이라면 무슨 항변인들 보탤 수 있겠는가.

근래 들어 우리 사회에서 ‘석학’의 언급이 부쩍 늘어나는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말하자면 쭉정이들 틈에서 ‘제대로 된 알맹이들’ 몇몇이라도 키워 지식사회의 건전화를 선도해보자는 발상일 것이다. 학계의 저변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적 처방을 잠시 외면한 채 이른바 소수의 ‘스타교수, 스타학자’들을 찾아내어 ‘석학’이란 명함을 부여해보자는 발상은 한정된 재원을 투자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 지식사회의 저급성을 모면해보자는 고육책일 것이다.

그렇다면 석학이란 무엇인가. 과문의 소치이겠으나, 동양권에서는 예로부터 십여 년 이상 저술에 몰두해 온 ‘대학자’를 석유(碩儒)라 했고, 석유는 석학과 동의어로 쓰인 말이다. 근대 이후 학문이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어느 분야에서나 석학들은 나타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석학이란 말 속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과 사회적 책무의 인식이나 실천이라는 복합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탁월한 학문적 깊이와 함께 지도적 인격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석학’의 영예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석학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런 이유에서라도 스스로가 석학이라고 나설 수 없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학문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는 ‘국가석학’이란 명목으로 ‘우수학자’를 ‘모집’하고 있다. 자격을 갖춘 학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나, 그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석학임을 입증해야 한다. 몇몇 전공분야의 경우 수백명이 신청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석학들’이 매우 많은 셈이다. 특정 연구계획으로 2~3년 간 매년 기천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마무리한다고 석학이 된다면 조만간 이 나라는 석학으로 가득 차게 될 것 아닌가.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에게 스스로를 천거하여 일을 성사시킨 전국시대 ‘모수(毛遂)’의 예도 있긴 하지만, 긴 세월이 필요한 학문은 ‘단박의 술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차라리 권위 있는 학회들에 위탁하여 기존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나 장래 ‘석학의 가능성을 지닌’ 학자들을 발굴·추천하는 일을 맡겨서 국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마다 한 두 번씩 수백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석학이라 내세우며 어리석음을 범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할 국가가 범하는 최대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공무원들이 탁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석학이란 단박에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11. 5. 20:36
제43차 전국학술발표대회

시조문학의 변화와 지속
        

                 • 일시 : 2007. 11. 17.(토) - 11. 18.(일)
                     • 장소 : 중부대학교
                             경복관(제4강의동) B-110호
                     • 주최 : 한국시조학회
                     • 후원 : 중부대학교 대학원
                       

          
            한국시조학회    



모시는 글

  가을의 단풍잎이 아름다운 계절에 회원 선생님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한국시조학회에서는 금강 주변에 위치한 중부대학교에서 『시조문학의 변화와 지속』이라는 주제로 제43차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우리 학회에서는 전국에서 저명한 학자들과 신진 학자들의 연구발표를 통하여 시조문학의 학술발전에 기여하고자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학술 주제를 선정하여 매년 2회에 걸쳐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회원 선생님께서는 바쁘시더라도 꼭 참석하시어 전국학술 발표대회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2007년 11월 1일

韓國時調學會長  林  鍾  贊

교통편 : 2007년 11월 17일(목), 오전 11시에 대전역에서 시내버스로 출발하여 대회장소인 중부대학교 경복관 B-110호 강의실로 이동하고자 합니다.
  연락처 : 이찬욱(부회장) : 017-295-2734(휴) 류해춘(총무이사) : 016-343-3292(휴)




시조문학의 변화와 지속
             
11월 17일(토)  
13:00 ~ 13:30   등      록              
13:30 ~ 14:00   개  회  사          임종찬(한국시조학회장)
                 축      사        배내윤(중부대 대학원장)
제1부   주제발표        사회 :  류해춘(성결대)
14:00 ~ 14:30   애정시조의 스토리텔링 방안        류수열(전주대)
                            토론 : 이태희(인천대)        한창훈(전북대)
14:30 ~ 15:00   정훈의 시조의 구조적 특질과 그 미학적 의미        박상영(경북대)
                            토론 : 남동걸(인하대)         신은경(우석대)
15:00 ~ 15:30   강호시조·전원시조의  지속·전환에 대한 지역사적 시각        김창원(경기대)
                            토론 : 강구율(동양대)        김상진(한양대)
15:30 ~ 16:00   황진이 시조의 이별양상과 대응양상        김성문(중앙대)
                            토론 : 신영명(상지대)        김종환(육군3사)
16:00 ~ 16:30   정완영 시조의 유가적 인본주의 연구        민병관(부산대)
                            토론 : 허만욱(남서울대)        박규홍(경일대)
16:30 ~ 17:00   현대시조 기점 논고        이완형(배재대)
                            토론 : 오선근(중부대)        박영준(중앙대)
17:00 ~ 17:30   시조영시고        신웅순(중부대)
                            토론 : 박미영(백석대)        이찬욱(중앙대)

제2부   시조창                    

17:30 ~ 17:50        사회 :  김신중(전남대)
              여창지름(청조야-----)        신웅순(중부대)
              우조시조(나비야-----)        안충자(대전무형문화재 14호)
              우조질음(석인이---- )        김재순(경남대)

11월 18일(일)
제3부   종합토론 (10:00 ~ 12:00)                                              좌장 : 조규익(숭실대)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11. 3. 16:34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가산 이효석 선생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숭실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출세작 대부분을 쓰시어 숭실문학의 맥을 일구신
이효석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아래의 내용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좋은 담론 나누시기 바랍니다.




숭실대학교 개교 110주년 기념
전국 학술발표대회
“탄생 100주년, 가산 이효석의 삶과 문학세계”

때 : 2007년 11월 9일(금), 오전 10시~오후 5시
곳 : 숭실대학교 벤처관 311호
주최 : 한국전통문예연구소


모시는 말씀



무르익은 캠퍼스의 지성과 낭만이
문학의 향내로 피어오르는
이 가을.

한국현대소설과 숭실문학의
큰 봉우리를 이룬
가산 이효석 선생을 생각합니다.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가산의 문학과 서정을 담론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


2007년 10월 일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장 조규익



<진행 순서>

● 제1부
10:00-10:30 사회 : 정영문(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연구팀장)
인사 : 조규익(숭실대 한국전통문예연구소장)
축사 : 이효계(숭실대 총장)

● 제2부
10:30-12:00 사회 : 이정석(숭실대)
10:30-11:00 이효석 문학연구의 현황과 전망----- 이금란(숭실대)
토론 ----------------------------- 김형규(아주대)
11:00-11:30 이효석의 삶과 문학세계의 변천----- 허명숙(숭실대)
토론 ----------------------------- 이용군(숭실대)
11:30-12:00 이효석 소설과 생태학적 상상력 ---- 임은희(한양대)
토론 ----------------------------- 김학균(서울대)
12:00-13:00 점 심

● 제3부 사회 : 방민화(한국전통문예연구소 연구원)
13:00-13:30 이효석 소설에 나타난 엑조티시즘과 향토적 서정의 긴장
--------------------------------------김해옥(연세대)
토론 ------------------------- 김미영(한양대)
13:30-14:00 이효석의 시와 수필 연구 --------- 김미영(숭실대)
토론 ------------------------- 노승욱(인하대)
14:00-14:30 이효석 소설과 신체담론 ---------- 김주리(상명대)
토론 ------------------------- 최익현(중앙대)
14:30-15:00 이효석과 아일랜드 문학 --------- 장원재(숭실대)
토론 ------------------------ 백로라(고려대)
15:00-15:20 휴식

● 제4부 15:20 종합토론 ----- 좌장 곽원석(숭실대)
Posted by kicho
자료 - 사진자료2007. 10. 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