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2. 1. 10:25
호남성통신 6

  중국의 마트에서 만난 개구리의 슬픈 눈동자


                                                                                                                    조규익


호남성 사람들의 말로는 50년 만의 혹한이라 했다. 과연 추웠다. 그것은 우리나라 한겨울의 ‘살을 에는 듯하지만 상큼한’ 추위가 아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불쾌한 추위였다. 우리의 경우 밖이 추워도 문만 열고 들어서면 따스한 온돌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곳엔 그런 게 없다고 한다. 온통 습하고 음침하다. 습기 때문인지 약간만 추워도 땅바닥은 유리를 깐 듯 미끄러웠다. 그 위에 눈까지 내리니 공항은 물론 팔방으로 통하는 고속도로들도 완벽하게 막혀버렸다. 중국에서 최고급에 속한다는 5성급 호텔도 정전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열차가 석탄을 실어 와야 발전소를 돌릴 텐데, 중간에 열차가 멈췄으니 제대로 발전이 될 리가 없다 한다. 과연 대단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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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공항 대합실

 

***

공항이 폐쇄되어 귀국길이 막힌 지 2~3일 만에 생필품 구입을 위해 일행들은 호텔 근처의 마트에 갔다. 그곳까지 차로 20분 거리. 웬만하면 걸어서 갈 수도 있는 거리이나, 가이드는 늘 차로 함께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중국말도 통하지 않을 뿐더러, 거리가 위험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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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바야호텔 인근의 **마트


처음 가보는 중국의 마트. 한국으로 치면 하나로마트, 이마트, 코스코 등과 같은 규모와 형태일까. 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렸다. 평소 약간의 식탐(食貪) 끼가 있는 나인지라 그들의 식재료 코너를 당연히 보고 싶었다. 기름에 절이고 말려 갖가지 모양으로 매달아 놓은 새들, 돼지고기 덩어리들, 속을 넣어 줄줄이 사탕처럼 묶어 매달은 갖가지 창자들(소세지?)... 아, 그곳은 지옥의 형상이었다! 우리 인간도 최후의 심판대를 거쳐 지옥에 떨어질 경우 악귀들 세상의 마트에 저런 형상으로 내걸리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건 약과였다. 발길을 돌린 순간, 더 처참한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 서 있는 곳을 비집고 들어서니 큰 유리 상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큼지막한 개구리들과 자라, 거북이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거북이나 자라의 경우 머리를 집어넣거나 눈꺼풀을 내려 버리면 그만이니 그 녀석들의 속내를 들여다볼 방도가 없었다. 문제는 개구리들이었다. 큰 놈은 아이들 머리통만 했고, 아무리 작아도 내 주먹은 훌쩍 넘을 듯 했다. 그런데 그 눈들! 아, 개구리들이 그렇게 영롱한 슬픔의 눈을 하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 눈망울들은 왜들 그렇게 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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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까지 살아남아 있던 개구리, 아마 지금쯤 그도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개구리들을 우선 육안으로 감별했다. 어느 놈이 가장 실하고 싱싱한지 가늠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 다음엔 손으로 꼬집어보기도 하고 뒤쪽에서 ‘아귀’를 움킨 채 들어 올려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무력한 개구리는 버둥거리며 슬픈 눈동자만 굴리는 것이었다. 상자 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사람들이 혹시 자신을 선택하지나 않을까 공포에 질린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이나 눈동자를 살피는 중국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관찰하니, 사람들은 대개 두서너 마리를 비닐봉지에 골라 넣는 것이었다. 가족 당 한 마리씩 먹기 위해 고른 것이리라. 개구리와 자라 상자들이 4각으로 늘어선 안쪽에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큼지막한 도마 앞에서 ‘무시무시한’ 칼로 연신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치마는 이미 붉게 착색되어 있었고, 붉은 고무장갑 또한 더욱 또렷한 진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 앞에는 비닐봉지를 든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쉼 없이 단칼을 내려치고 있었다.
고객으로부터 받은 비닐봉지를 열고 큼지막한 개구리를 끄집어내어 널찍한 도마 위에 엎어 놓는다. 한 번쯤 버둥거릴 만도 한데, 목욕탕 때밀이에게 몸을 맡기듯 그 ‘망나니’의 손에 잡힌 개구리는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도마 위에 쭉 뻗고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망나니의 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 부분에 내려 꽂혔다. 순간 물갈퀴도 선명하게 뒷다리를 쭉 뻗으며 개구리들은 최후를 고하곤 했다.
그야말로 칼날에 막걸리 한 입 뿜어 바르지도 않고, 아니 최후 진술의 기회조차 주지도 않은 채 망나니들은 속전속결로 개구리들의 머리를 끊어내고 있었다. 끊긴 머리들은 도마 아래쪽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썩은 밤톨처럼 내동댕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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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향한 개구리의 항의(?) 그 역시 누군가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참으로 허망한 개구리들의 운명이었다. 상자 안에 엉겨 있는 그들 가운데는 가족들도 있었으리라. 형장에 끌려온 줄도 모르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괜찮을 테니 걱정 말아라!’고 입에 발린 위안을 주어야 하는 개구리네 아버지의 찢어지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빙 둘러선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품을 파고드는 아이들을 보듬어 주는 모정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고 몸으로는 한기가 느껴졌다. 뒷다리를 쭉 뻗는 개구리들을 보며 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중국인들이 갑자기 저승차사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승차사들이 빙 둘러선 그곳은 생지옥의 현장이었다. 개구리들이 엉겨붙어있는 유리 상자는 이승이었고, 그들을 골라 온 ‘차사’들이 빙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사형을 집행하는 곳은 저승이었다.  그래, 이승과 저승의 경계란 종이 한 장의 두께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아니, 그 두 공간은 아예 공존하고 있는 것을! 지금까지 어리석은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호텔로 돌아온 나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자연의 물상들을 지배하며 그들을 먹고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신으로부터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꼭 그토록 적나라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살아 있다’는 현실과 ‘앞으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 사이의 괴리와 모순이 이처럼 처절하게 나의 내면을 흔든 적이 없었다. 이성과 감성이 우리의 행동과 삶의 방식을 컨트롤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비로소 심각한 자문을 하기 시작했다. 천재지변으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중국 땅에서 개구리를 만났고, 과연 나는 그들의 눈망울을 통해 크나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천재지변’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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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2. 1. 10:02
호남성통신 4

      얼어붙은 장가계(張家界), 사라진 무릉도원(武陵桃源)
          -천문산(天門山)의 서리꽃 눈꽃과 끊어진 다리의 씁쓸한 추억-


혹시 이번 참에 무릉도원을 밟아보는 것이나 아닐까. 지도에서 무릉원(武陵源)을 목격하고는 그곳을 주책없이 대뜸 천하의 절경이라 일컫는 장가계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로 했다. 복숭아꽃 만발한 무릉도원.
언제인가 외부인과 연락이 단절된 그곳에 어부 한 사람이 어쩌다가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곳에 천하의 절대 선경(仙境)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을 잡고 물으니, 자신들은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생사를 초월한 절대 낙원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 자신들의 존재와 공간을 누설치 말 것을 약속하고 빠져나온 어부가 그곳에 다시 갔으나,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바로 그 무릉도원엘 가고 있다는 설렘으로 잠시나마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같이 선경에 들렀다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어부의 심정으로. 우리는 험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상덕국제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 우리는 장가계를 향해 허위허위 너덧 시간을 달렸다. 상덕의 시계(市界)를 벗어나 무릉원으로 진입할수록 고도는 높아갔고, 주변의 봉우리들은 날이 서기 시작했다. 길 주변 산기슭에 띄엄띄엄 널려있는 민가들은 온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 결 같이 시멘트로 지은 단층 혹은 2층들이었는데, 짓다가 중단한 집들이 태반이었다. 어둠이 깔려도 따스한 불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고, 텅 빈 공간을 채운 것은 적막과 추위뿐이었다.
다들 어디에 갔을까. 호남성 일대의 가옥들에는 난방장치가 아예 없다는 설명을 들었고, 지금까지 호텔들을 거치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썰렁한 날씨 속에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거지가 남 잠자리 걱정해주듯, 나는 노랑노랑한 아이들과 구부정한 이 땅의 할매 할아배들이 눈에 밟혔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기온은 낮아지고, 버스의 창문에 눌어붙는 입김과 성에로 창밖은 가려지고 있었다. 더구나 닥쳐오는 산간의 이른 어둑발은 우리를 하염없는 졸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한참 꿈속을 헤매는데 모두 내려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들려 와 퍼뜩 잠이 깼다. 몇 년 전의 물난리로 없어진 황가 계곡의 다리가 아직 공사 중이라서 차가 갈 수 없으니 우리는 모두 내려 걸어서 계곡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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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원 황가계곡의 끊어진 다리, 중단된 공사현장


깜깜한 밤, 차에서 내리자 토가족 원주민들이 몰려왔다. 계곡 건너편으로 짐을 지고 갈 일꾼들과 사람들이 빙판 진 계곡 길을 미끄러짐 없이 건너 갈 수 있도록 발에 감을 짚신 등을 팔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다리 공사에서 품을 팔아봤자 하루 종일 20원 벌이가 고작이었으나, 트렁크 두어 개만 계곡 건너편으로 옮겨주면 40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이 다리의 완공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헛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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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원을 떠나던 날 우리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곡을 건너는 토가족 남성들


어릴 적 눈 온 날 등굣길, 고무신발에 새끼를 동여 본 이후 처음으로 엉성한 짚신을 신고 계곡을 건넜다. 깊이가 30m 이상, 길이가 500여m가 넘는 끔찍한 계곡이었다. 빙판에 미끄럽기도 하고 질퍽거리기도 했다. 달빛도 없는 우중충하고 깜깜한 밤중. 인적 없는 타국의 계곡을 건너는 50여인의 나그네들은 참으로 고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어서 길 공사가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자 토가족 원주민들의 억지가 이어졌다. 계곡을 건너오는 도중 손을 잡아주었으니 20원을 더 내라고도 하고, 비용으로 가방 당 20원을 더 내라고도 하면서 짐을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험악한 순간이었다. 원래 산적(山賊) 출신이니 어쩔 수 없다고 혀를 차면서 이들의 억지 대부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무릉원에 입성했고, 천자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다음날 천문산을 케이블카로 올랐다. 공중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릉원 시가지의 집들 모두 추위에 떨고 있었다. 모두 얼어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간혹 뿜어대는 열차의 경적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늘 진 주택들의 지붕 밑 빨랫줄에는 그들의 남루(襤樓)가 물에 젖은 채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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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이는 구절양장의 도로

 그러나 케이블카에 달랑달랑 매달려 내려다보는 산과 계곡은 참으로 의연했다. 추위 속에 증발되는 겨울 안개가 중턱 이후로 자욱했고, 발 밑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꼬불탕 차도가 구절양장으로 장난감처럼 꼬부라져 있었다. 순간순간 아아(峨峨)한 산봉우리들이 케이블카의 창문을 통해 내 몸에 부닥칠 듯 다가왔다 물러가곤 했다. 중턱을 지나자 서리꽃 눈꽃 핀 나뭇가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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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서리에 얼어붙은 천문산의 나무들

 
장가계의 산들 중 역사 기록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천문산. 운몽산이나 고량산 등의 이칭을 지닌 이 산은 해발 1518m나 된다. 해발 1300m 지점에 환하게 뚫린 구멍 즉 천문(天門)이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천연 종유굴인 천문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 가려면 케이블카에서 내려 다시 99개의 고개를 버스로 올라야 하고, 다시 가파른 999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도중 안개에 가려 어렴풋하긴 했으나, 천문동을 볼 수 있었다. 높이 131m에 너비 57m, 깊이 60m나 되는 큰 동굴이었다. 시내에서 시작되는 케이블카는 종착점까지 7.45km, 편도 35분의 엄청난 길이였다. 오금이 저려오는 1시간여의 체험. 그러나 손에 잡힐 듯한 설화목(雪花木)들 덕택에 그 공포는 찬탄과 쾌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

드디어 종착점. 모든 것이 얼어 있었고, 나무들은 무거운 눈을 이고 있었는데, 나무들을 감싸고 있는 눈은 부스러지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얼어붙어 있었다. 나무들 모두 마치 두꺼운 솜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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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서리에 얼어붙은 천문산의 나무들

 사람들은 넋을 잃어버린 채 눈의 무게에 체념하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날뛰듯 돌아다녔다.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세사에서 떠나려는 모습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들떴다. 그래, 가장 순수한 곳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온 우리가 가끔씩 순수했던 지점으로 회귀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아니, 어쩌면 그런 기회를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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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와 눈으로 얼어붙은 나무들 사이에서

 
오늘 무릉도원을 찾아 왔다가 추위에 얼고 삶에 찌든 사람들을 만나 우리의 마음마저 썰렁했지만, 이제 산정의 순수한 설화목들 속에서 그간 잃어버리고 있던 순수를 되찾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다리 끊어진 계곡을 천신만고 건너온 고생은 보상을 받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곳을 내려가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으랴! 그러고 보면 우연히 만난 무릉도원을 다시 찾지 못한 그 어부의 경우처럼, 이 천문산 케이블카의 종점이야말로 우리에겐 그 어부의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 아니랴? 그러니 무릉도원 밖에서 무릉도원을 찾을 일이 아니오, 세상 밖에서 세상을 찾을 일이 아님을 오늘 이 천문산은 내게 포효하듯 말해주었다. 그래, 이곳에 다시는 못 올지라도 이제 세상으로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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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산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며


2008. 1. 24.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 09:43
호남성통신 3

상덕(常德)과 원강(沅江), 그리고 모택동


                     

김형!

지금 우리는 장사(長沙)를 떠나 상덕(常德)으로 향하고 있소. 이곳 사람들의 과장 섞인 말로는 20년 만에 처음 당하는 한파로 곳곳이 얼어붙은 상장(常長) 고속공로를 통해서 말이오. 가는 길에 점심을 해결할 겸 고속도로가 뚫리기를 기다리기 위해 상덕시의 원강공원으로 접어들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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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의 풍경

 
 그런데, 강안(江岸)의 널찍한 공원에 주차한 우리는 뜻하지 않은 진경(珍景)을 만나게 되었소. 외지 관광객들 대부분은 한가로이 흘러가는 강물과 그 물 위에 떠가는 배만 있는 줄 알고는 5분 만에 혀를 차며 떠난다는 곳이오. 차에 내려 이리저리 거닐다 보니 강안을 접하여 무한히 뻗어있는 벽(壁)을 발견할 수 있었소. 아, 그곳엔 무수히 많은 시들이 새겨져 있는, 이른바 시비(詩碑) 아닌 시벽(詩壁)이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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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공원 시벽의 표지석


  아주 가끔씩 그저 괜찮은 시인의 시작품 하나 만을 겨우 돌에 새겨 비를 세우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무수히 뻗어 있는 시벽을 대한 채 말을 잊었소. 중국인들의 규모와 배포를 엿볼 수 있는 일이었소.
과연 ‘세계 최장의 시벽’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실을 표지판으로 만들어 이곳의 초입에 세울 만큼, 그건 장관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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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올른 세계 최장의 시벽

 
이 시벽의 공식명칭은 ‘중국상덕시장(中國常德詩墻)'.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946명에 달하는 중국 유명 시인들의 시사(詩詞)들이 정(正), 초(草), 예(隸), 전(篆) 등 여러가지 서체로 각자(刻字)되어 있었소.
그와 함께 명화(名畵) 43폭도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상덕의 역사와 풍운을 반영한 <<백대창상(百代滄桑)>>도, 고금의 명현(名賢)들이 상덕을 읊은 <<명현제영(名賢題咏)>>도 들어 있었소. 총 길이 3000m, 총 1267수의 작품들! 놀랍지 않소?
  더구나 이 거사가 그 흔한 시인협회 등 문인들의 단체에서 주관하여 이루어진 게 아니고, 상덕시위원회와 시정부가 앞장서서 한 일이라니, 이들의 문화의식이 그저 부럽기만 했소.
우리나라 문인단체 같으면 이 정도의 일을 기획하기도 어렵겠거니와, 현재와 같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혹은 공무원들의 그리 높지 않은 의식수준으로 보아 수용될 수 있는 일 또한 아니겠지요. 그것이 바로 문화적인 면에서 우리가 중국을 따라갈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하오.
‘전봇대 하나 뽑는데 10년이 걸렸다’는, 요즈음 인구에 회자되는 사건 하나만 보아도, 청계천의 양쪽 벽에 유명 시인들의 시판(詩板)을 붙이자고 할 경우 우리네 공무원들이 과연 수긍하겠소?

***

시간에 쫓겨 시벽을 대충 훑어본 다음,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공원 밖의 식당엘 들렀소.  ‘동정모기반점(洞庭毛記飯店)’이란 난해한(?) 이름의 식당이었소. 번역하면 ‘동정호반의 모택동을 기념하는 식당’ 쯤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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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강공원 밖의 동정모기반점(洞庭毛記飯店)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아보았소. 모택동이 원래 호남성 출신이지요? 이곳에서 가까운 소산(韶山)이란 곳에 그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오. 이곳 호남성에서 모택동은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로 숭배되고 있었소. 전통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재의 중국을 있게 한 그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들은 바에 의하면, 대장정에 나섰던 모택동이 고향 땅을 찾았다고 합디다. 어떤 촌가에 들렀을 때 가난하여 대접할 게 없던 그 집 주인은 시장에서 사온 물고기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조리하여 내놓았다고 하오.
물고기 머리에 뭐 그리 먹을 게 있었겠소? 머리뼈에 붙은 양념을 맛있게 빨아먹은 모택동. 그 후로부터 물고기 머리 요리와 삶은 돼지고기 요리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나요?
그 고기 이름이 무엇인지는 기억할 수 없으나, 대충 원강 가이고 보면 잉어가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돼지고기는 동정호 일대에서 근원된 것으로 보이는 ‘동파육’이 아니었을 지요? 그러나 자세한 건 나도 모르오.
어쨌든 그 식당으로 들어가자 과연 식당 모든 곳에 모택동의 대형 사진들이 걸려 있고, 반상에는 여러 요리들 가운데 물고기 요리가 올라왔소. 모양은 물론 그 맛 또한 발군이었소. 뼈까지 빨아 먹고 나자 샤오제가 국수를 말아주는데, 국수 맛도 일품이었소.
그 요리의 내력과 레서피를 그녀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으나, 우선은 소통이 불가능했고 또 바쁘게 이동하는 일행의 일정에 방해될 것 같아 자제할 수밖에 없었소.    
모택동에 대한 중국인들 특히 호남인들의 지극한 애정은 어딜 가나 한결 같았소. 그의 독특한 서체 또한 명승지 어딜 가도 볼 수 있었소. 거 왜 있지 않소? ‘북경대학(北京大學)’ 현판 글씨체 말이오. '호남대학(湖南大學)‘도 그의 글씨체였소. ’왕희지 체‘ 아닌 ’모택동 체‘라고나  할까요?

***

원강공원에서 시향(詩香)과 어향(魚香)으로 배를 불린 우리는, 무릉원과 천문산 그리고 천자산을 품고 있는 장가계로 한 발 다가서기 위해 상덕시로 향하려 하오. 그곳에서 다시 봅시다.  

백규 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23. 15:04
  호남성통신 2
-아, 악록의 정신이여!-


                                                                                                                    조규익

호남성은 궂은 겨울비에 젖어 있었다. 남방에 있다하여 내가 방심했던 것일까. 가이드의 표현대로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가 매섭다. 차라리 ‘에이는 듯한’ 우리나라의 겨울날씨가 낫다. 이곳은 매우 습한 곳이라 우리보다 기온은 높되 더 춥게 느껴지는 듯하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어느 곳을 가도 난방이 되지 않거나 시원치 않다는 사실이다. 4성급 호텔임에도 천정 밑에서 겨우 온풍기 하나가 돌아갈 뿐이었다.
우리나라야 밖에서 좀 추워도 집안으로 들어오면 등을 지질 수 있는 온돌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온돌을 고안해 사용하기 시작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야말로 세계에서 으뜸이랄 수 있다. 이곳에서 움츠리고 길가를 걷다보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람 휑하니 통하는 가게를 지키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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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은 중국 22개 성 가운데 면적으로 10위(21.18㎢), 인구로 7위(6천600만), 인구밀도로 13위(313/㎢)란다. 북쪽의 호북(湖北)성과 동쪽의 장시성, 남쪽의 광둥성, 남서쪽의 장족 자치구, 서쪽의 귀주성, 북서쪽의 중경과 접한 곳. 우리가 첫발을 내디딘 장사는 호남성의 성도(省都)다. 모택동, 유소기, 호요방, 주룽지, 화룡장군 등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온 곳도 이곳 호남성이며, 김구선생이 잠시 피신했던 곳도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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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록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모택동 상


이곳에도 소수민족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토가족, 묘족, 백족, 뚱족 등 네 종족의 수가 많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옛날 이 지역에서 '산적' 노릇을 하던 토가족은 단연 으뜸. 왜 토가족(土家族 )일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인이 섬기던 토지신은 키가 작다고 한다. 그런데 토가족은 대체로 키가 작은 종족이다. 그래서 ‘토가족’이라 하며, 야채를 위주로 하는 이곳의 식사를 ‘토채(土菜)’라 한다는 것. 물론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인 데서 명칭을 얻은 호남성의 약칭은 ‘상강(湘江)’에서 온 ‘상(湘)’이오, 이 지역의 음식은 ‘상채(湘菜)’다. 남북으로 흐르는 상강은 장사 시가지를 동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잠을 잔 시대제경호텔도, 호남사범대학도, 악록서원도 모두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사시에 있는 동안 주로 서쪽에서만 움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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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상

22일 아침. 호남사범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고, 호남대학 구내에 있는 악록서원(岳麓書院)을 들렀다. 악록산 청풍협의 아래쪽에 있으며, 중국 4대 서원 가운데 하나인 악록서원. 이 서원이 지어진 것은 북송 때(976년)였다. 악록산의 고상한 산세와 눈발 흩날리는 궂은 날씨 때문인가. 서원의 분위기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원문(院門)에 들어선 다음 발길을 옮기자 혁희대(赫曦臺), 대문(大門), 이문(二門), 강당(講堂), 어서루(御書樓)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통로 양측으로 교학재(敎學齋), 반학재, 상수교경당, 백천헌, 선산사, 숭도사, 육군자당, 염계사, 사잠정 등 즐비한 건물과 공간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각종 부속 박물관과 연구소도 적지 않은 걸 보면, 동양학 아니 인문학의 근원이 이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우리 역사를 파행으로 몰아간 중국.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들이 품고 있는 도학의 큰 맥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원의 경내를 거닐며 산같이 위대한 지성들이 산 속에 파묻혀 진리를 궁구하고 토론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서원에선 그 옛날 주희(朱熹)와 장식(張栻)이 토론을 벌였다. 지금보다 삶의 여건이 결코 좋을 리 없었을 터. 백발이 성성한 대학자들이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이곳에 틀어박혀 학문을 토론했을 것이니, 참으로 존경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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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범대학 문학원


학문을 한답시고 애꿎은 종이와 전기만 낭비하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염량세태에 휘둘리며 일희일비하는 백규, 학문의 폭과 깊이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려 하지도 못하고, 가르침을 줄만한 세상의 현인들을 찾아 나서지도 못하는 백규, 공부에 모든 것을 걸지도 못하는 겁한(怯漢) 백규...
호남성의 악록서원에서 위대한 선현들의 마음자리를 깨닫곤 헤어날 수 없는 부끄러움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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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록서원 어서루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23. 14:57

호남성통신 1

마왕퇴의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여인이여!
         

                                                                                                                     조규익

2008년 1월 21일. 내리는 눈발 속에 인천공항 활주로는 허둥대는 비행기들로 북적거렸다. 눈발에 얼어붙은 비행기의 날개를 녹이기 위해선가, 금쪽 같은 두 시간을 공항 대합실에서 하릴없이 기다렸다. 혹시 호남성 박물관 관람의 일정이 날아가는 건 아닌가 하여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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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진눈깨비 속의 호남성 박물관



중국 호남성 장사시 호남사범대학에서 열린다는 고소설학회의 국제학술회. 그 행렬에 뒤늦게 합류한 까닭이 내겐 있었다. 사실 이곳엔 보고 싶은 게 많았다. 심히 억울했던 굴원이 몸을 던진 멱라수, 두보가 올라가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지었다는 악양의 악양루, 천하의 시인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동정호(洞庭湖)와 무릉도원으로 일컬어지는 상덕,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곳엘 가보지 않는다면 100세가 되어도 늙었다고 할 수 없다’는 장가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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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 박물관 유물 진열실 입구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호남성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왕퇴의 유물들이었다. 그 유물들과 함께 발굴되었다는 여인 한 사람도 내 호기심을 심히 자극했다.
2100년 이상의 세월에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녀, 대후부인 신추(辛追)는 1호 묘의 내관(內棺)에서 발굴되었다. 어쩌면 그 주변에서 발굴된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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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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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술동이. 주석 도금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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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구름무늬의 채색칠 둥근병



이곳 시각으로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장사 공항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엔 차가운 겨울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한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는 이곳이지만, 올해는 벌써 여러 날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단다. 진짜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였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때운 채 우리는 고픈 배를 안고 호남성 박물관으로 달렸다. 다급하게 관람시간 연장을 요청해놓은 터였다. 간신히 찾아들어간 우리는 드디어 마왕퇴의 유물들과 만났다.
마왕퇴는 지역명, 그곳의 한묘는 서한시대 대후 가족의 묘지다. 마왕퇴의 한묘는 장사시 중심에서 4km 떨어진 곳으로 현재 호남성 박물관 관내다. 1972년에서 74년 사이에 류양하 옆의 마왕퇴에서 1호분, 2호분, 3호분 등 3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장방형의 전형적 서한시대 분묘형식이다. 마왕퇴의 여인은 바로 그 1호분에서 나왔다.




2천 여 년 전의 생활이 어쩌면 그토록 생생하게 내 눈 앞에 다가선단 말인가.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 놓여 있었을 아름다운 술동이도, 진수성찬을 담아냈을 반상들도, 적의 가슴에 날려 보냈을 증오의 화살들도, 밤 새워 고뇌하며 써내려갔을 죽간과 목간들도, 여인네의 가발도, 배를 비롯한 각종 과일들도 모두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 한 가운데 그 여인이 있었고, 그녀의 관을 보관했던 거대한 목곽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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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대후부인 신추의 생생한 모습. 죽은 지 2100년이 넘었음

아직도 피부는 탄력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털 또한 숯처럼 새까맣고 건강했다. 1m 54cm의 신장, 34.3kg의 체중. 위장 속에서 다수의 머스크 멜론 씨앗들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멜론 하나를 먹은 잠시 후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인(死因)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한다. 

상상들 해보시라. 올해가 2008년이니 그녀는 기원전 100년 전의 인물 아닌가. 누군가의 아름답고 젊은 부인이었거나 ‘이쁜’ 딸이었을 그녀. 가족들은 억울한 그녀의 죽음 앞에서 부활에의 소망을 가졌으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2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는 아직 부활하지 못한 채 유리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마왕퇴와 만난 날은 허겁지겁 저물고, 잠시 숨을 고른 후 해가 뜨면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삶의 현장을 다시 만나러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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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된 대후부인 신추의 생전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19. 17:13
 

 빽빽이도 늘어섰구나, 무덤들이여!

            -대만 인상기(印象記)·1-


                                                                            조규익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또 ‘군대 안 갔다 온 아무개가 군대 갔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거나 ‘서울 안 갔다 온 아무개가 서울에서 살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는 등의 가시 박힌 농담들도 지금껏 우리 사회에는 통용되고 있다. 어느 모임에 나가 보아도 크게 영양가 없는 말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 그 지식의 근원을 캐 보면 제대로 된 책 대신 인터넷이나 신문 등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즈음. 여행기들이 범람한다. 제대로 발품을 팔아 얻은 글부터 점만 찍고 돌아오는 패키지 여행에서 얻은 인상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짧은 생각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모조리 무익하지만은 않을 터. 그러니 나도 이 자리에서 그런 어리석음이나 한 번 범해 볼까나?


   ***


 지난 연말 3박4일의 일정으로 대만을 다녀왔다. 지척에 두고도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미루어두고 있던 곳이었다. 대만 행에 며칠간의 여유를 활용하기로 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것은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 득실거리는 관광지만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이 여행객의 신세일 터. 어디 한 곳 차분하게 앉아 생각에 잠길 여유가 있으랴. 그저 ‘절에 간 새댁’ 마냥 능란한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 숨차게 돌아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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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박물원

 여기서 둘째 날 들른 지우펀(九份)을 먼저 언급하려는 것은 그만큼 그곳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가파른 고갯마루를 넘어 도달한 곳이었다. ‘九份’이란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가이드가 말끝마다 ‘구인분, 구인분’ 하는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우펀은 금광지대였다. 그 옛날 금광에서 일하던 그 마을의 광부 9명이 매몰되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로부터 9명 광부의 아내들 즉 살아남은 9명의 과부(寡婦)들은 산 넘어 시장에서 늘 ‘9인분’의 식량을 사가지고 고개를 넘어야 했단다. 그래서 이곳이 ‘九份’으로 명명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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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 동네 모습-앞쪽이 산 자들의 집, 뒤쪽이 무덤들이다

 지우펀의 금광박물관을 거쳐 들른 곳이 바로 도교사원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성명궁이었다. 그곳에선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었다. 황금색 바탕에 온갖 화려한 장식들을 붙여 놓은 전각 안에서 관우신을 옹위하고 있는 많은 신들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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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성명궁-관우(관성제)를 모셨음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래킨 건 성명궁이 아니었다. 성명궁을 나서서 둘러본 사방의 산중턱에 이르기까지 아파트처럼 보이는 주택들이 그득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본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모두 유택(幽宅) 즉 무덤들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무덤들은 흡사 시멘트로 잘 지어놓은 양옥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설만한 양지바른 산록. 그들은 그곳에 ‘죽은 자들을 위한 집들’을 그득하게 지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엔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산 자들의 집과 붙어있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동거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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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조부모, 선조들의 유택 아래쪽에 사는 후손들. 참으로 기이한 구도였다. 일찍이 베트남 메콩강 델타 지역 마을에서 뜰 안에 무덤을 만들고 조석으로 향불을 피우는 그들을 본 적도 있었다. 대개 남방 풍속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으나, 대만의 공동묘지는 좀 색다른 점이 있었다.

 딱딱거리는(?) 가이드에게 사정하여 간신히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무덤 탐색을 생략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 두어 시간을 헤매고 다니며 무덤 속의 주인공들과 만난 셈이었다. 무덤들을 대충 둘러보고 났을 때 뱃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구역질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양지 바른 산자락을 점령한 채 늘어서 있는 무덤들. 어느 무덤에나 ‘욕망의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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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형형색색 단장한, 아무도 없는 텅 빈 시멘트 구조물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냉기와 회한이 내 가슴에 사무쳐 왔다. 무덤들의 실체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지우펀의 언덕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더껑이 진 가난과 오욕의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가는 무덤 속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후손들과 함께 하고픈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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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화려한 무덤


묘원(墓苑)이나 유택으로 표현될 만한 그곳의 무덤들은 자세히 보니 여러 층이었다. 호화로운 것은 치장도 그러려니와 규모 또한 웬만큼 잘 사는 집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길 가 언덕 아래 쪽 구멍에 조막손만한 검은 오지그릇 하나로 남아있는, 초라한 무덤도 많았다. 살아생전 고대광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자나 노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나 죽은 다음에 심심산중 한 덩어리 봉분으로 남는다면, 그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묘제야말로 얼마나 철학적이고 인간적인가. 물론 호화분묘는 제외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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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초라한 무덤


   ***


 온갖 석물(石物)로 치장한 채 산 자들이 머물러야 할 양지바른 곳을 점령한 대만의 무덤들은 그 자체가 폭력이었다. 물론 조상을 잘 모시려는 자손들의 정성을 어찌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 한 몸 죽여서라도 자식들 살리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부모 마음일진대, ‘산 자들’이 차지해야 할 양지바른 곳에 자신들의 거대한 유택을 마련해준 자손들을 어찌 가상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우펀의 무덤 군(群)을 만나면서 대만에 대한 기대의 반 이상을 접기로 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