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 9. 04:50

 

 


남부 대평원의 인디언 부족들

 

 

 


카이오와 네이션의 문장(紋章)


카이오와 네이션의 초지

 

 


카이오와 족 전사이자 치료 주술사[medicine man]였던 시팅 베어(Sitting Bear).
1800년경 캔자스에서 태어나 1871년 살해되었음. 

 

 


카이오와 족 추장 화이트맨(White Man)의 1898년 모습

 

 


 1894년 경 카이오와 족 소녀의 아름다운 미소

 

 


사슴가죽 옷을 입은 카이오와 소녀들

 

 


전통시대 카이오와족 어머니와 아이

 

 


남부 대평원[Southern Plains]의 사슴가죽 의상[Buckskin Dress]

 

 

 


남부 대평원의 구슬장식 의상

 

 

 

 

카이오와(Kiowa), 아파치(Apache), 코만치(Comanche), 그리고 대평원[Great Plains]의 서사시(2)

 

 

 

카이오와(Kiowa)족의 삶과 예술

 

 

 

마음이 급한 나머지 작년 12월 말에 캐도(Caddo) 네이션이 있는 빙거(Binger) 시티를 찾았다가 모든 공공기관의 문들이 닫혀 있는 바람에 허탕을 쳤고, 그로부터 4일 후인 새해 초에 카이오와아파치코만치를 찾아 아나다르코(Anadarko)아파치(Apache)로턴(Lawton) 등을 방문했다. 그러나 동쪽에 있는 치카샤촉토세미놀체로키 등과 달리 이 지역의 경우 닫혀 있는 곳이 적지 않았고, 설사 열려 있다 해도 자기네 콜렉션들에 대한 소개 자료가 미흡하거나 사진을 못 찍게 하는 등 외부인들의 접근을 경계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아나다르코 시티 초입의 국립 아메리칸 인디언 명사 명예의 전당(National Hall of Fame for Famous American Indians)’에서 만난 책임자 칼(Carl Jennings)은 오클라호마 내 39개 인디언 부족들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고 명료하게 해주었다. 특히 촉토 족인 자신과 카이오와 출신의 유명 공예가이자 자신의 부인인 바네사(Vanessa Pau Keigope Jennings)의 결합을 설명하면서 인디언 유명 인사들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지역의 중심 부족인 카이오와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많은 설들이 있지만, 카이오와 인들이 캐나다 국경과 인접한 미국 몬태나 주 글래시어 국립공원[Glacier National Park]’의 동쪽 가장자리 부분을 카이오와 산맥이라 부르는데, 그곳을 통해 이동한 뒤부터 이들을 카이오와로 불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칼 씨는 설명했다. 카이오와 말은 카이오와-타노안 어족의 하나이며, 애당초 그들이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정도로 카이오와 말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원래 그들은 유목과 정착의 중간쯤에 속하는 거주 구조를 갖고 있었으며, 족장 중심의 가부장적 부족 및 가족체제를 갖고 있었다. 주로 수렵과 채취에 의존한 그들의 생업을 생각하면, 곡물을 심기에 충분할 정도로 한 곳에 머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곡물을 심어 먹던 정착 부족들과 무역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들은 미국의 들소인 바이슨(bison)과 함께 이동했는데, 영양(羚羊)사슴야생 딸기 및 과일칠면조를 포함한 다양한 사냥물들과 함께 바이슨은 이들에게 주요 식품 공급원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운영하던 목장들로부터 말을 얻게 되면서 일종의 산업혁명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덕분으로 대평원에 등장했을 때 이들은 이미 말을 탄(기동력을 갖춘) 전사(戰士) 이 되어 있었다. 대평원으로 나오면서 이들은 아파치 족과 공존하게 되었다. 즉 남서 콜로라도의 아칸사 강과 서부 캔자스,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팬 핸들(Panhandle) 지역의 레드 리버 유역 등과 인접한 남서 평원 지역에 카이오와와 아파치의 고향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우리가 방문한 이 도시, 아나다르코가 그들 삶의 중심공간이었다.

카이오와 부족은 북부 대평원에 속하는 대부분의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잘 짜인 정부조직을 갖고 있었다. 매년 선 댄스(Sun Dance)’라는 집단 축제가 열렸고, 전 부족의 상징적 지도자인 최고 족장을 직접 선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전사 집단과 종교집단이 합쳐진 공동체로서의 카이오와 사회는 족장을 선출하여 정부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민주적이었다. 그런데 전투에서의 과감성과 용맹성, 지혜, 관대함, 경험, 소통 기술 및 타인에 대한 친절도 등에 기반을 두고 족장의 자질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합리성을 엿볼 수 있다.

 

카이오와 족은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전사의 정신을 이상적 자질로 꼽는다고 한다. 전체 부족은 바로 이런 자질을 지닌 사람을 중심으로 단합하는데, 그 전사는 젊은이들이 갈망하는 이상적 인간상이기도 했다. 카이오와 족이 남부 대평원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종족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카이오와 족 여성은 어땠을까. 칼 선생에 따르면, 그의 카이오와 족 부인 바네사(Vanessa Paukeigope Jennings)는 미국의 유명 인사였다. ‘카이오와 족 전통예술의 거장이란 공식직함을 갖고 있는 그녀는 의례 의상 제작자[Kiowa-Apache-Gila River Pima regalia maker]이자 의상 디자이너였으며, 크레이들 보드의 제작자이자 비드(bead) 아티스트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녀가 물론 뛰어난 예술성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알고 보면 카이오와 여성들의 전통을 바탕으로 했기에 그녀의 예술도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카이오와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들, 아버지 등의 공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성을 얻거나, 그녀들 스스로의 예술적 성취를 통해 인정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카이오와 여성들은 소가죽을 무두질하거나 꿰매고, 각종 모피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렸으며, 나중에는 구슬공예를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칼 선생의 부인 바네사도 이런 카이오와 여성들의 전통적인 생활예술을 이어받아 현대적인 미학으로 확장시킨 인물이었다. 카이오와 여성들은 남자들이 사냥을 떠나거나 전쟁에 나갔을 때 캠프를 돌보았고, 겨울 동안 먹을 양식을 모으거나 준비했으며, 각종 행사에도 참여했다. 카이오와 남성들은 처갓집 가족들과 살았고, 가족들이 늘어나면 일종의 친척이라 할 수 있는 밴드(band)를 이루었으며, 한 명의 추장이 각각의 밴드를 다스렸다고 한다.

 

***

 

강인하고 용감한 남성들과 자립심 강하고 예술적인 여성들이 모여 형성된 것이 카이오와 족이었다. 남부 평원지역에서 그들이 토대를 구축한 아나다르코 인구의 60%가 카이오와 족이라는 칼 선생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다른 도시들보다 윤택해 보이는 시가지의 분위기를 돌아보니 카이오와 족이 매우 창조적이며 지혜로운 부족으로서 그들 앞에 희망적인 미래가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나다르코 시티 초입의 모습

 

 


국립 아메리칸 인디언 명사 명예의 전당

 

 


관리자 칼 제닝스(Carl Jennings)씨와 대화를 나누며


                                                                         

 

 


칼 제닝스 씨의 부인이자 카이와 족 전통예술의 거장 바네사(Vanessa Paukeigope Jennings) 씨

 

 


바네사의 명함. 사진은 자신이 만든 크레이들을 지고 있는 모습.

 

 

 


아나다르코에서 확인한 오클라호마 주 내 인디언 부족들의 분포상

 

 


카이오와 족 여성들의 전투복. 카이오와 족 전사들의 여성 친척들이 입었음.

 

 


크레이들보드에서 잠들어 있는 카이오와 아기. 바네사의 작품.

 

 


구슬장식 의상을 입고 있는 카이오와의 여성. 바네사의 작품.

 

 


구슬장식을 한 크레이들 보드. 바네사의 작품.

 

 


2차대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카이오와 족 암호해독병

 

 


레이니 마운틴(Rainy Mt.)에 있는 인디언 침례교회[Indian Baptist Church]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8. 17:26

 

 

 

 


영화 <아파치 요새>의 포스터

 

 


영화 <론 레인저>의 포스터

 

 

 
<아파치 요새>에서 좌측이 헨리 폰다(Henry Fonda), 우측이 죤 웨인(John Wayne)

 

 


<아파치 요새>의 한 장면

 

 

 
영화<론 레인저>의 한 장면. 왼쪽이 쟈니 뎁(Johnny Depp), 오른쪽이 아미 해머(Armie Hammer)

 

 


<론 레인저>의 한 장면

 

 

 

 

 

서부지역 인디언들과 대평원[The Great Plains]

 

 

 

 

하이틴 시절부터 이 나이까지 영화를 그리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그 가운데 기억나는 것들은 헐리웃에서 만들어진 서부영화들이다. 이름을 다 기억할 수 없는, 비슷비슷한 내용들이었으나, 관통하는 서사구조는 단 하나 선악의 대결이었고 주제는 미국 판 권선징악이었다. 선을 대표하는 백인들은 늘 당당하고 정의로우며 멋있었던 반면, 악을 대표하던 인디언들은 늘 무지(無知)무명(無明)무뢰(無賴)의 저급한 무리들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세계인의 편견과 무지는 이처럼 대부분 서부영화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어느 날 웬놈들이 밖에서 뛰어 들어와 채찍을 휘두르며 한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땅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천추만대 원한에 사무칠 일인데, 전 세계의 코흘리개들도 다 보는 영화에 가해자인 백인들은 정의의 사도로, 피해자인 자신들은 몹쓸 불한당(不汗黨)으로 그려냈으니, 그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내 기억으로는 20055월에서야 미국의 상원은 인디언 6천만 학살에 대한 사과를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죄가 어찌 사람 죽인 일뿐일까. 당시로서는 몹쓸 땅에 그들을 짐승처럼 몰아넣은 점까지 계산하면, 그 죄가 하늘에 닿고도 남을 백인들이었다. 나찌 독일이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왜인들이 전쟁터로 광산으로 징발하거나 허물을 뒤집어 씌워 죽인 우리 민족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당시 총인구 5천만~1억을 헤아리던 인디언들 가운데 살해된 비율이 80~90%라니, 아무리 컴퓨터가 발달했다 한들 미국 백인들의 끔찍한 죄악을 어떻게 계산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런 사건으로부터 무려 2백년이나 지나서야 이제 사과나 해볼까?’하고 궁시렁 거리며 나섰고,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더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사과하기에 이르렀으니, 만시지탄(晩時之歎)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워싱턴 D.C. 의회 묘지에서, 체로키촉토무스코기포니시스턴와페톤오야테 등 5개 부족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캔자스 출신의 공화당 상원 샘 브라운백 의원이 사과결의문을 낭독함으로써 의회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그 전 해 11월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564개 부족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디언들에 대한 그동안의 횡포와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사과하고 그들로 하여금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정부로부터 무수한 약속을 받았으나 그 약속이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인디언들로서는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미국 정부가 인디언들에게 진작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게 아니고, 사과를 늦게 한 데 대하여 문제 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억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인디언들을 눈곱만큼이라도 배려했다면,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그들의 이미지라도 진실에 가깝게 만들거나 긍정적으로 묘사했어야 하건만, 서부영화 같은 매체들에서 보듯이 그들의 모습은 스테레오 타입이라 할 정도로 왜곡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 점이 제삼자인 내가 보기에도 지나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현재 나바호(Navajo), 체로키, (Sioux) 등 규모가 큰 종족들을 포함, 564개 종족에 3백만 이상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비교적 소수부족으로서 서부영화들에 단골로 등장한 종족이 아파치(Apache)와 코만치(Comanche).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아파치 요새(Fort Apache)>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1948년 죤 포드(John Ford) 감독이 만들었고, 죤 웨인(John Wayne) 및 헨리 폰다(Henry Fonda) 등 명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인데, 인디언에 대하여 비교적 따스한 관점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서부영화들과 구별된다고 한다. 감독은 주인공인 요크 중령[죤 웨인]을 통해 아메리카 인디언 특히 아파치 족에 대한 인간적 관점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종래 사납고 공격적이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아파치를 동정적포용적 관점에서 바라 본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선이 비교적 긍정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으로 떠나오기 직전인 작년 7월 하순 경, 한국에서는 론 레인저(The Lone Ranger)’란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쟈니 뎁(Johnny Depp)이 열연한 주인공 톤토(Tonto)는 바로 코만치 인디언이었고, 영화의 배경은 캘리포니아유타콜로라도 애리조나뉴멕시코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는 그레이트 플레인즈에 포함되는 공간이었다.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지닌 톤토는 죽기 직전의 외로운 레인저존 레이드(John Reid)를 살려냄으로써 결국 그들은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황야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현란한 액션들은 코만치 인디언인 톤토와 백인 레인저 존 사이에 교감되는 우정의 깊이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백인들과 인디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코만치 추장 빅베어(Big Bear)의 말[‘우리 시대는 사라졌네. 백인들은 그걸 발전이라 부르는 모양이네만.’]이 추가되면서 그간 스테레오 타입으로 고착된 백인과 인디언의 이미지 혹은 양자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반성이나 의식 또한 새롭게 제기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리라.

 

***

 

인디언을 찾아다니기 몇 달 만에 대평원의 주인공 아파치와 코만치, 그리고 카이오와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대평원의 주인들이었다. 오클라호마 동북쪽에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이 있다면, 서남쪽에는 '대평원[The Great Plains]'이 있다. 그렇다면 대평원은 어떤 공간인가. 알버타(Alberta), 새스캐치원(Saskatchewan), 매니토바(Manitoba) 등 캐나다 남부를 포함, 몬태나(Montana)노쓰 다코타(North Dakota)사우쓰 다코타(South Dakota)와이오밍(Wyoming)네브라스카(Nebraska)콜로라도(Colorado)캔자스(Kansas)뉴멕시코(New Mexico)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 , 로키산맥(Rocky Mountains)과 미시시피강(Mississippi) 사이의 미국 땅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남북 간 길이는 3,200 km, 동서의 폭은 800 km, 면적은 1,300,000 이니, 남한 면적[99,538 ]13배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대평원은 주 전체 면적의 60%나 차지할 만큼 거대하다. 그 안에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다음에 계속>

 

 


워싱턴 D.C.의 미 의회 묘지 

 


캐나다에서 미국 남부까지 걸치는 대평원(The Great Plains)

 

 


대평원의 한 부분

 

 


대평원 한 가운데를 달리는 하이웨이

 

 


대평원의 바이슨 무리

 

 


대평원의 한 부분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의 집단 거주지를 찾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6. 03:45

 

 


세미놀의 초기 생활상(주방의 모습)

 

 


세미놀 족 주술사 부녀(정면의 사진은 옥수수밭에서 의식을 행하는 장면)

 

 


주술사의 의식(儀式)

 

 


주술의식을 행하고 있는 주술사

 

 


세미놀 여인과 옥수수

 

 


옥수수의 정령

 

 


집 안에 저장한 옥수수

 

 


옥수수의 정령

 

 


플로리다 세미놀 족에 남아있는 Green Corn Dance

 

 


세미놀 족 처녀와 거북이

 

 


추장을 중심으로 앉아있는 세미놀 족 남자들

 

 


세미놀 족 여인들의 삶과 전통복장

 

 


세미놀 족 부엌도구들과 주식인 옥수수

 

 


세미놀 족 메디신 맨(Medicine Man)이 사용하던 주구(呪具)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

 

 

세미놀 족이 전통시대에 풍요를 기원하던 의식들은 사진이나 그림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주술의식을 통해 인간과 신을 매개하던 현존 주술사의 주술의례는 전시되어 있었으나, 기대했던 그린 콘 댄스리본 댄스버팔로 댄스페더 댄스 등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군무(群舞)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어렴풋이나마 자연물들에 정령(spirit)이 있다고 믿어온 그들의 전통신앙이 그림으로, 실제 행위로 구현된 모습을 전시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주술사가 그들의 주식(主食)이었던 옥수수 밭에서 정령의 존재를 불러오는 듯한 그들의 의식이 아주 흥미로웠다. ‘먹는 것속에 자신들의 안위나 세계질서를 좌우할 힘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소중히 대하여 온 그들의 태도는 매우 합리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삶을 유지하는 데 곡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면, 곡식을 관장하는 초월적 존재나 힘이야말로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사의 모든 면을 관장하는 권능을 지녔다고 생각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린 콘 댄스(Green Corn Dance)는 그런 생각이 극적으로 표출된 집단예술이다.

 

전통시대의 북미 인디언 종족들은 자신들이 옥수수와 동질적 존재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파종 축제, 수확 축제와 그린 콘 세리머니 등 옥수수에 관한 축제들이 있는 점이 그 방증이었다. 옥수수가 익어갈 무렵, 혹은 수확 전 몇 주일에 걸쳐 계속되는 것이 그린 콘 세리머니이며 그 축제의 중심이 바로 그린 콘 댄스였다. 그들은 그린 콘 댄스가 열릴 때까지 새로 익은 옥수수를 먹거나 손을 대는 일은 신을 모독하는 죄라고 생각했다. 흡사 우리나라에서 천신(薦新)’의례를 마친 다음 본격 수확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리라. 인디언 사회에서 플로리다의 세미놀 인디언들만이 아직도 5월의 그린 콘 댄스를 연다고 하는데희미하게나마 그 전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주술사도, 평범한 인간들도, 정령을 불러내어 풍요와 자신들의 안위를 호소한 행위들에서 그 시대 나름의 보편적 합목적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미놀의 역사나 의례 등 전통적인 삶을 묘사한 현대 예술가들의 그림들이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 흥미로운 그림 하나가 있고, ‘뱀으로 변한 아우라는 제목이 합당할 법한 설화 한 편이 적혀 있었다.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그 설화의 서사적 골자를 들기로 한다.

 

 

세미놀 형제가 마을을 위해 사냥하러 나갔다/다음날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사냥을 못하다가 오후 늦게 개자 형은 사냥을 포기하고, 가지고 있던 사슴고기로 요리를 시작했다./밖으로 나갔던 동생은 두 마리의 큰 물고기 배스를 잡아왔다./그는 설명하기를, ‘이 물고기들이 근처 호수에서 길바닥으로 튀어 올라와서 잡았다고 했다./형이 그 물고기들을 놓아주고 오라 하자, 동생은 펄쩍 뛰며 요리를 해 먹었다./한밤중 동생은 소리를 지르며 형을 불렀다./동생의 모기장으로 가자 동생은 형에게 내가 뱀이 되고 있어. 형이 먹지 말라고 하는데도 먹었더니, 이것 좀 봐!’라고 놀라며 소리쳤다./형이 불을 켜고 자세히 보자 동생의 다리들은 이미 뱀의 꼬리가 되어 있었다./동생이 형에게 내일 가족들을 데리고 호수 가의 큰 통나무로 와서 태양이 중천에 오르거든 통나무를 네 번 쳐. 그렇게 하면 나를 볼 수 있으니, 그렇게 해줘. 나는 그들을 만나 할 이야기가 있어.’라고 했다/다음 날 형은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호수로 와서 둥근 달 아래 캠프를 하며 다음 날 해 뜨기만을 고대했다./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오르자 가족들을 데리고 통나무로 가서 동생의 말대로 통나무를 네 번 두드렸다./그가 네 번 두드리자 호수 밑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큰 뱀의 머리가 올라왔다./아이들이 무서워하자 어른들은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한 다음, 뱀이 하는 말을 듣고자 했다./뱀이 호수 표면으로 떠올라 그의 가족들이 서 있는 호숫가로 주르르 미끄러져 왔다./뱀은 천천히 그들에게 움직여 가며 가까이 오세요. 이게 나예요. 말씀드릴 게 있어요. 잘 들으세요. 이후로 나는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어요. 내가 물고기들을 닦고 요리하여 먹은 것이 잘못된 일이었어요. 나는 뭐가 더 좋은지 알고 있었지만, 우리 문중 어른들의 금지법을 위반했어요. 나는 지금 그 벌을 받은 거예요. 여러분이 떠난 후에도 나는 우리 가족이 나에 관하여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요. 장래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세요. 나는 결코 돌아갈 수 없어요. 이 호수는 나의 집이 될 거예요. 나는 이 물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갈 거예요. 여러분 모두 돌아가거든, 결코 이 호수에는 돌아오지 마세요. 일단 여러분 모두 떠나면, 내 모든 기억들은 사라져서 여러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나는 사악해져서 여러분을 해칠 거예요. 그것이 내가 살아갈 뱀의 삶이예요. 다만 좋았던 일들만을 기억하고 나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하고 나서 그의 형에게 머리를 돌리고 나는 형이 우리 가족을 도와주시고 그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시기를 바라요. 내 아들들이 형처럼 좋은 사냥꾼이 되도록 가르쳐 주세요. 그 아이들이 제 어미를 돌보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그 사냥꾼의 친구[*brother가 이곳에서는 friend로 바뀌어 있음. 착오로 보임-인용자 주]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그 뱀이 이제 나는 저 위로 올라가니 여러분은 내 몸 전체를 잘 보세요.’라고 말했다./그가 그렇게 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주 크고, 큰 카누보다 더 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갑자기, 뱀은 그가 떠올라 온 물속으로 들어가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기 시작했다./뱀은 그의 꼬리를 물 밖으로 내밀고 그들에게 흔들었다./그런 다음 그 뱀은 깊이깊이 큰 호수의 검은 물속으로 내려갔다./슬픔을 느끼며 그의 가족들은 큰 호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그곳에 오지 않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 설화의 주지(主旨)는 달라지겠지만, 물고기 배스를 잡아먹은 행위가 어른들의 금단법(禁斷法)[Forbidden Law]’을 어긴 것이라는 말로 미루어, 아마도 배스는 그가 속한 문중, 즉 클랜(Clan)의 상징 동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인디언 사회에서 클랜의 상징동물을 신성하게 여기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다. 따라서 상징동물을 해치면 하늘의 벌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2세들에게 교육할 필요가 있었고, 그런 의도에서 이런 설화는 나왔을 것이다.

이 외에도 진기한 컬렉션들이 많았다. 예컨대, ‘Military Corner’에서 만난 한국전 관련 컬렉션들은, 한국전을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과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당시 그들의 관점이 매우 따스하고 긍정적이라는 점에서 감동적이었다.[미국통신 41 참조]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낯선 나라의 전쟁터에 보내면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그들이 만들어 자국 병사들의 교육에 썼을 그 자료들에는 그런 걱정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식에 대한 정이 지극한 우리네 부모들과 그들의 정서가 동질적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

 

애당초 플로리다에 살던 세미놀 족의 일부가 오클라호마까지 오기까지 많은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은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끔찍하게 겪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오클라호마 인디언 구역 내에서도 소수자로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들 나름의 화려한 문화와 내면세계, 혹은 역사에 대한 자부심만은 확실하게 지닌 채 살아 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미국의 체제에 순응하여 그들의 일원으로 정착했고, 그들의 생활양식에 동화되어 오긴 했지만, 아직도 언어와 문화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지켜 가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수 부족이면서도 개명(開明)된 다섯 종족 가운데 하나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의 위치와 현실적인 활동이 바로 이런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물고기 배스를 삶아먹은 죄로 뱀이 되고 있는 동생을 안고 있는 형

 


세미놀 족 여인들의 전통문양 치마

 


세미놀 족의 전통문양

 


세미놀 족의 집안 살림들

 


세미놀 족 전통 가옥의 생활사 자료들

 


세미놀 족 전통 생활예술 자료들

 


함께 방아를 찧고 있는 세미놀 족 여인들

 


매 나무[Wheeping Tree)에 죄인을 매달고 회초리형을 가하고 있는 세미놀 족 관리들

 


세미놀의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인 에마하카 아카데미(Emahaka Academy)와 두 명의 교육 공로자
[왼쪽이 교육자 앨리스 브라운(Alice Brown), 오른쪽이 윌리엄 패커 블레이크(William Packer Blake) 목사] 

 


왼쪽의 사진은 세미놀 네이션의 대표이자 오클라호마 주 의회의 첫 여성 의원이었던
앨리스 로버츤(Alice Robertson)과 그녀의 다섯 딸 및 세 손녀들

 

 


Military Corner에 전시되어 있던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
[한국 및 한국인들에 관한 소개의 그림이나 필수 회화 내용]

 


한국전에 나가는 세미놀 족 병사들의 교육에 쓰인 것으로 짐작되는 한국인들의 캐리커츄어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부심 강한 사람들'이란 설명이 인상적임]

 


세미놀 족 관련 교회 자료들

 


위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위워카 지역 감리교회의 모습

 


위워카의 시가지를 재구해 놓은 모습

 


당시 의원의 진찰실을 송두리째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는 모습

 


1966년의 세미놀 네이션 창립[1866] 백주년 기념식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6. 02:45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 뮤지엄에서 63번과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며 두 시간 이상을 달려 세미놀 족의 본거지인 위워카에 도착했다.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

 

 


오클라호마 주에 강제이주된 39개 인디언 종족의 고향들[세미놀 족의 고향은 플로리다였음]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 문 앞에서 만난 세미놀 족 전사의 두상

 

 

 

 

놀라운 세미놀(Seminole) 인디언들(1)

 

 

 

 

세미놀 족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브라이언 군의 졸업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그의 미국인 친구 한 사람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세미뇰이라 했다. ‘이란 발음에 혹시 스패니쉬 계통인가 하고 물었더니,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으로 그것이 인디언 부족 이름이자 그 부족의 네이션이 있는 도시의 카운티 이름임을 확인하게 되었고, 스펠 ‘Seminole’세미뇰로 들은 것은 내 귀의 착각이었던 듯, 다른 미국인들에게 다시 물으니 모두 세미놀이라고 했다. 세미놀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치카샤와 촉토를 거쳐 드디어 그 실체를 육안으로 보게 되었다. 세미놀이 그동안 돌아 본 체로키치카샤촉토 등과, 앞으로 돌아 볼 크리크(Creek)와 함께 개화된 다섯 종족[Five Civilized Tribes]’을 이룬다고 하니, 적잖은 호기심이 발동된 것도 사실이었다.

 

'촉토 내셔널 히스토리컬 뮤지엄(Choctaw National Historical Museum)'을 나선 우리는 키아미치 산간을 꿰뚫는 63, 270번 하이웨이를 번갈아 타고 점심을 훌쩍 넘긴 무렵에서야 세미놀 카운티의 위워카(Wewoka) 시티에 도착했다. 뭔가 잔뜩 쏟아질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퇴락한 시가지의 모습이 겹치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다운타운엔 빈 상가들이 즐비했고, 페인트가 벗겨져 초라해 보이는 집들도 부지기수였다. 다른 지역의 상당수 중소도시들에서 이미 목격한 것처럼 이 도시도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아마도 원유의 고갈로 지역경기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기가 좋은 대도시로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집들은 사람의 온기를 쏘이지 못한 채 삭아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레스토랑 한 군데를 간신히 찾아내 시장기를 지우고, ‘세미놀 네이션 뮤지엄(Seminole Nation Museum)’에 갔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건물. 세미놀 사람들의 미학이 느껴지는 건축이었다.

 

연방정부에 의해 인정된, 미국 전역의 세미놀 족 집거지는 세 군데로 알려져 있다. 오클라호마 주의 세미놀 네이션, 플로리다의 세미놀 트라이브, 플로리다의 미코수키(Miccosukee) 트라이브가 그것들이다. 물론 세미놀 족의 원 고향은 플로리다이며, 2차 세미놀 전쟁 이후 8백명의 흑인 세미놀 인들을 따라 플로리다에서 인디언 거주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어 온 3천명 세미놀 인들의 후예들이 호클라호마 주에 살고 있다. 따라서 오클라호마의 세미놀 네이션은 세 군데 집거지들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우리가 찾아온 이곳 위워카 시티가 바로 오클라호마 세미놀 네이션의 본부가 있는 곳인데, 현재 등록 인원 18,800명 가운데 대략 13,500여명이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미놀 카운티에는 대략 5,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1936년 인디언 재건법이 공표되면서 세미놀 족은 그들의 정부를 되살려 내기 시작했으며, 부족의 사법 관할지역 또한 그들의 다양한 자산들이 포함되어 있는 세미놀 카운티를 카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로리다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세미놀 인들도 3차 세미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드디어 평화를 찾게 되었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후예들이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는 두 개의 세미놀 트라이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들 조직된 세미놀 인들과 조직되지 않은 부족원들이 함께 1823년 미국 정부가 강제로 뺏어간 24백만 에이커의 땅에 대하여 1976년 기준으로 16백만 달러 가치의 정착지를 받아냄으로써 분쟁은 완결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세미놀 족이 오클라호마 한 군데와 플로리다 두 군데 등 세 지역으로 나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미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놀 인들의 말은 무스코기 어[Muskogean Language]에 속하는데, 전통적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두 말, 즉 미카수키(Mikasuki)와 크리크(Creek)어를 동시에 사용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크가 정치사회적 측면의 지배언어였으므로, 미카수기 어를 쓰는 사람들도 크리크 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조사 결과 2000년대 초까지 부족원의 25% 정도가 크리크와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는 영어만 쓰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현재 오클라호마에 있는 네이션의 대부분 세미놀 인들은 영어를 제1언어로 쓰고 있으나, 부족 차원에서 전통적인 크리크 어를 살려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한다.

 

다른 인디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도 사회구조로서 가장 기본적인 가족 바로 위에 클랜(Clan)이란 단위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동물이나 초자연적 정령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고난을 견뎌 낸 것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혈통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특정 동물의 정령들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치카샤 네이션에서도 촉토 네이션에서도 누구나 특정 클랜에 속해 있고, 너구리악어 등 어떤 동물이 자기 클랜의 상징동물인지 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불문(不文)의 제도 아래, 세미놀의 성인들은 자기네 부모가 속한 클랜들 밖에서 결혼상대를 찾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혼인금지와 같은 차원의 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친혼을 금함으로써 종족을 건강하고 우수하게 유지하려는 지혜의 발로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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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뮤지엄에 들어가니 실제 모습대로 전시된 세미놀 족의 전통 생활양식이 눈을 끌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주방과 거실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설명을 위해 그 옆에 붙여놓은 클레이(Clay MacCauley)의 말이 흥미로웠다.

 

세미놀의 가정에 들어가면 누구나 사람들이 모이는 중심에 모닥불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곳은 요리가 준비되는 장소이고, 가족과 그들의 친구들이 사교를 나누는 장소이며,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되는 장소다.”

 

지금까지 만나본 모든 인디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미놀 족도 가족 간의 유대나 사랑을 중시한다는 점과 모계사회라 할 정도로 여성의 발언권이나 힘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모닥불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와 그 주위에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다 된 음식을 각자에게 덜어주는 주부 등 익히 보는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뮤지엄의 첫 공간에 제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세미놀 인들은 끈끈한 가족공동체의 전통을 외부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그 뿐 아니었다. 전통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사 자료들과 예술품 들이 적절하게 분류, 전시되고 있었다.

 


 

각 부족의 구역이 할당된 시기와 점유지의 성격

 


조정이 끝난 1907년까지 각 부족의 점유지 현황

 

 


세미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초기 네이션 깃발

 

 


오클라호마 주 내 39개 인디언 부족의 분포 지역 리스트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