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15. 11:15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어렵던 시절, 궁색한 현실에 비해 가당찮게 큰 욕구를 가졌었기 때문일까. 졸업식에 관한 내 추억은 온통 잿빛 일색이다. 1978년도 내 대학 졸업식은 참으로 우중충했고, 1981년도 석사학위 수여식과 1986년도 박사학위 수여식은 번잡하고 무성의하여 도무지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었던, 그야말로 서운한행사들이었다그 후 대학인들의 타성이 고착되면서 졸업식에 관한한 행사를 위한 행사를 반복해왔고, 오늘날에 이르러 대학 졸업식은 지리멸렬그 자체로 전락해 버렸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 최근의 대학 졸업식에 가본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졸업생들은 식이 시작되어도 식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흡사 사진 찍는 일이 졸업식의 전부인양 카메라를 껴안은 채 식장 바깥에서만 어슬렁거린다. 모처럼 자식의 학교를 찾은 학부모들도 식장 안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들어가 봐야 재미 없고 지루하기만 할 것이며, 무엇보다 당사자인 자식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기를 쓰고 들어가 앉아 있을 부모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바깥은 인파로 북적대는데, 그 넓은 식장 안의 좌석들에는 석박사학위 받는 몇 사람과 수상자 몇 명만 듬성듬성 앉아있을 뿐이다.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하면, 졸업식을 주관하는 대학 측의 철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졸업식은 학교당국과 교수들이 그 행사의 핵심인 졸업생을 위해 가족을 초청하여 갖는 학교 최대의 행사인데, 졸업생들이 철저히 소외 되고 있는 것이 한국 대학 졸업식의 현주소다. 

 

근래 어느 대학의 졸업식에 참석해 보았다. 그 넓은 단상에는 내빈들과 동문회 인사 등 외부 초청 인사들이 그득하고, 그 한 가운데 지역구 국회의원이 총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총장의 연설이라는 게 왜 그리 장황하고 요령부득인지 참으로 한심했다. 하기야 우리나라 주요 일간신문들은 스피치 라이터가 써주는 큰 대학 총장들의 축사 전문을 경쟁적으로 싣던 때도 있었으니,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있을 수 없었다. 각 대학 스피치 라이터들의 글 솜씨나 한 번 맛보라는 이야기였을까. 내빈축사는 왜 그리 많으며, 내용 또한 중언부언(重言復言) 지루하단 말인가. 그 많은 졸업장과 상장들은 왜 하필 졸업식장에서 일일이 수여해야 하는가. ‘이하 동문(以下 同文)’을 일일이 외쳐대면서도 서너 시간을 끌어가니, 그나마 상장이라도 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앉아 있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자신의 졸업이 어찌 영광스러울 것이며, 어찌 모교에 대한 사랑인들 생길 것인가.

 

***

 

그간 가까이 지내던 브라이언 군이 이 대학에서 2년을 단축하여 조기 졸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 그 졸업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전기에 속하는 본 졸업식은 이미 5월에 있었고, 이번은 후기에 속하는 이른바 '코스모스 졸업'이었다. 규모가 작아 대충대충 진행되리라는 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대학 졸업식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도 오래 된 터여서 별 감흥은 없었지만, 정리로 보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졸업생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물 밀 듯이 밀려들었으나, 모두 정시에 입장을 끝내고 경사 진 3면의 관객석에 안전하게 좌정했다. 식장인 실내 농구장의 바닥에는 졸업생들이 앉을 의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고, 정면의 단상에도 그리 많지 않은 좌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각에 총장이 단상으로 나오더니 놀랍게도 그 스스로 식을 주재하기 시작했다. 총장의 말에 따라 이 대학 파이프 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한 뒤, 브라스 밴드의 연주에 맞추어 졸업생들이 두 줄로 들어와 마련된 의자에 착석하기 시작했다. 졸업생들의 착석이 끝나자 스코틀랜드 전통복장을 한 파이프 밴드의 연주와 선도로 단상에 앉을 인물들이 질서정연하게 입장했다. 그 다음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미국 국가[The Star Spangled Banner]우렁찬 목소리로 제창했다. 이어 오클라호마 주의 노래인 'Oklahoma'를 부른 다음 본격적인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OSU 농구 경기장에 꾸민 졸업식장

 


졸업식장 전경(좌, 우, 뒷면 등 3면에 가족과 친지들이 앉아 있다)

 


가족과 친지들이 일어선 가운데 졸업생들이 줄지어 입장하고 있다.

 

총장은 우선 특별한 몇몇 손님들을 소개했고, 그 가운데 세 사람[주 교육위원회 의장, 교수협의회 의장, 오클라호마 주 하원의장]이 각각 1~2분 정도의 아주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졸업축하 인사를 했으며, 이어 학위증 수여가 있었다졸업생들은 호명되는 대로 단상에 올라 총장, 학장, 학과장 등과 악수하고 사진 찍기 위한 포즈를 취한 다음 자기 자리로 내려가는데, 좌석 부근엔 해당 학과 교수들이 함께 모여 기다리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졸업생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졸업생들이 호명되어 단상으로 올라갈 때마다 관객석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괴성에 가까울 정도의 함성을 질러대는 장면들이었다. 졸업식의 즐거움을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고, 당사자들 또한 단상으로 나가면서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졸업생 모두를 단상으로 불러 올려 격려함으로써 그들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려는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입장한 졸업생들과 객석의 가족 및 친지들이 일어서서
단상에 앉을 인사들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단상에 앉을 인사들이 입장하고 있다.

 


졸업생들에게 학위증을 수여하고 있다. 졸업생 좌석의 교차로에서
교수들이 축하인사를 건네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졸업장 수여가 끝나자 졸업생들도 단상의 인사들도 관객석의 가족이나 친지들도 함께 모교의 노래[OSU Alma Mater]’를 부르는데, 내 주변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얼마나 큰지 깜짝 놀랄 정도였다. '모교의 노래'가 끝나고 단상의 인사들이 줄 지어 퇴장한 뒤 졸업생들도 들어올 때의 역순으로 퇴장함으로써 졸업식은 끝이 났다.

 

***

 

그 흔한 꽃다발도 없었다. 식장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졸업생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되자 악대의 선도를 받아 질서정연하게 들어왔고, 정확하게 준비된 의자를 모두 채워 앉았다어쩌면 이렇게 개인주의의 천국인 미국에서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식 초반에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와 주가(州歌) 함께 소리 높여 부르며 단합정신[team spirit]을 확인하는 듯 했다어느 순서 하나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는 게 없었다. 모두가 졸업생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영예와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치밀하게 조직된 극본을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모든 참석자들이 기립하여 국가와 주가 등을 제창하고 있다.

 


가족 및 친지들의 모습

 

사실 대학 졸업식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러나 식이 시작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일순 나를 긴장시켰다. 식순이 하나하나 진행되면서 서서히 감동이 일기 시작했다.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아 초점을 살리면서도 모두를 배려하는 세리머니는 예술 자체였다. 스피치에 참여한 모든 인사들도 하나같이 사전에 입을 맞춘 듯짤막한 멘트 속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교훈을 담으려 노력한 것 같았다.  

 

이 대학과 아무런 관련 없는 나도 식이 끝나면서 내심으로 작지 않은 변화를 느꼈다. 그건 또 다른 버전의 감동이었다. 개인주의를 넘어선 단합정신. 여기서 미국의 무서운 힘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미국에도 대학의 서열이 엄존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턱 댄 자기 비하자기 우월에 빠지지 않는다. 그 서열이란 모든 요소들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자기 대학의 장점을 찾아 열심히 노력하는 데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이들의 최대 장점이다. 추운 날 담요를 싸들고 경기장에 나가 모교 응원에 참여하는 이 대학의 졸업생들. 그들이 바로 초강대국 미국을 유지해가는 사람들이다. 허구 한 날 좁쌀들끼리 비교하며 경쟁심만 부추기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 비하에 빠지게 하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행태는 이쯤에서 청산해야 한다. 헛된 자존심을 버리고,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브라이언(왼쪽에서 세번째)과 친구들

 


브라이언 등과 함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14. 13:27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4: 엘 르노 시티(El Reno)커네이디언 카운티 뮤지엄[Canadian County Museum ]’-

 

 

 

 

손 형,

 

엘 르노 시티와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요. 유콘 시티의 베테란스 뮤지엄에 들렀다가 돌아가려는데, 큐레이터 리차드 씨가 근처의 엘 르노 시티를 보고 가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합디다. 그래서 그곳에 들렀는데, 그렇게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당히 퇴락된 느낌이 들었지만, 꽤 유서 깊은 면모를 간직한 도시였어요. 이 도시 또한 66번 도로와 큰 관련을 맺고 있지요. 그 뿐 아니라 열차의 터미널과 수리공장이 있던 곳으로, 말하자면 이 지역의 교통 요지라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방문한 박물관은 그 역사(驛舍)와 부지(敷地)를 통째로 개조한 것이었어요.

 

 


엘 르노, 유콘, 오클라호마시티, 에드몬드, 거쓰리, 스틸워터 등이 표시된 지도

 


1891년 엘 르노 시가지의 모습

 

엘 르노 시티는 캐나디언 카운티 청사의 소재지로서 현재 대략 1,8000에 가까운 인구를 보유한 도시이죠. 1889년 랜드러시(land rush)² 직후 인근의 Fort Reno를 본떠 명명된 이 도시는 오클라호마 시 중심가로부터 겨우 40km 정도 떨어져 있을 만큼, 주의 중심부라 할 수 있지요. 특히 오클라호마 시티 표준 도시 통계구역[Standard Metropolitan Statistical Area]’¹의 한 부분이라는 점은 이 도시가 이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군요. 원래 현재 위치로부터 북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북 캐나다 강[North Canadian river]’의 제방에 있던 이 도시는 Reno City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네바다(Nevada)주의 Reno와 혼동을 일으켜 우편물의 배달 오류 사태가 자주 일어나곤 했다네요. 그래서 시가지가 물에 잠긴 두 번 째의 홍수 이후에 현 위치로 옮겼고, 이름도 El Reno로 바꾸었다는군요.

 

 


엘 르노 시청

 


오클라호마 주와 인디언 구역들

 

이 도시는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하게 다운타운 지역에서 운행되는 전차를 갖고 있다는 점, ‘시카고, 락 아일랜드 및 태평양 철도[Chicago, Rock Island and Pacific Railroad]’ 락 아일랜드(Rock Island)’의 터미널과 수리 시설이 있다는 점 등으로 아직도 오클라호마 주 안에서 중시되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행히도 1975년 이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했고, 철도부지 역시 공터로 남게 되었다지요? 철도회사의 창고와 건물들은 캐나디언 카운티 역사학회가 사들여 박물관 단지의 중요한 부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고, 우리는 바로 그 박물관을 방문하게 된 겁니다. 기차 역사(驛舍)를 사들여 빌딩을 건축함으로써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기려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박물관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들의 여유가 무척 부러워지더군요.

 

 


커네이디언 카운티 뮤지엄

 


락 아일랜드 역사[현재의 카운티 뮤지엄]

 


Bob Kreiger가 기증한, 당시의 달리는 열차 그림.

 

박물관의 중심 컬렉션은 다른 도시의 박물관들처럼 이 지역의 생활사 자료들이 주축이었어요. 그러나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락 아일랜드역 자체에 관한 풍부한 컬렉션이었어요. 기차와 철로에 관련되는 각종 물건들이 세밀하게 수집되어 있었고, 당시 운행되던 열차의 미니어쳐를 전시실 안에서 실제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박물관에 생동감을 주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어요. 박물관의 중심 건물 밖에는 당시 있던 학교, 교회 등 공동체의 건물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었으며, 창고에는 열차 관련 부품들과 각종 운송수단 및 농기계 등도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 뿐 아니라 역의 사무실은 까페로 꾸며져, 사람들이 당시의 분위기를 느끼며 즐길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더군요. 전반적으로 이들이 쓸모없게 된 물건들이나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머리를 많이 썼다는 느낌을 줍디다. 발전의 주기가 짧고 변화 자체가 드라마틱한 우리의 경우도 생활사 자료들을 폐기처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이 도시에서 특히 강하게 깨달았지요. 당장 우리의 안목이 좀 더 문화적인 폭과 깊이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미국의 중소 도시들을 몇 군데만 돌아다니면 얻을 수 있는 교훈이었어요.

 

 


커네이디언 카운티 박물관의 사무실 겸 전시장

 


박물관 컬렉션(인디언과 북)

 


박물관 컬렉션(엘 르노의 학교 관련 물품들)

 


박물관 컬렉션(거실의 물품들)

 


박물관 컬렉션(여성용 화장품)

 


박물관 컬렉션(금전등록기)

 


박물관 컬렉션(사무용 비품들)

 


박물관 컬렉션(사무용 비품들과 사진들)

 


1951년 당시 엘 르노 지역 선수들이 사용하던 풋볼의 헬멧

 


당시 역 구내의 매표소

 


전시품 소개문(개척시대의 의사들/가구 공예/철로와 모형열차 전시)

 


Dr. Ernest Ewing 진료실의 진찰 및 치료용 도구들

 

이 도시 역시 엘크나 클린턴, 유콘 등처럼 66번 도로변의 도시, 메인 스트릿(Main Street)’ 공동체이지요. 아시겠지만, 오클라호마 주는 오래전부터 메인 스트릿 프로그램(Main Street Program)’을 실시해 왔고, 엘 르노 시티는 자신들의 프로그램으로 미국 메인스트릿 대상[the Great American Main Street Award]’2006년에 받기도 했다지요. 말하자면 하이웨이의 신설 등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으로 퇴락하는 다운타운을 되살리는 작업인 셈인데, 이 도시 역시 철도역을 중심으로 번성하던 숙박업소나 레스토랑, 백화점 등 각종 건물들이 현재는 각종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었고 일부는 그 안에서 영업을 하고 있기도 했어요.

 

 


당시의 농기구 전시실에서

 


당시의 전화기

 


어메리칸 익스프레스 캄퍼니의 취급 항목들(우편환/외국환 어음/여행자 수표/신용장/전신환)

 


락 아일랜드 역의 물품들과 당시 열차의 미니어쳐

 


당시 우체통

 


 소포의 무게를 재던 당시의 저울

 


당시 락 아일랜드 역의 수하물 저울들

 


당시의 저울들과 다른 물건들

 


락 아일랜드 역 관련 물품들

 


까페로 개조한 역사

 


당시에 타고 다니던 수레

 


당시 이 지역의 통나무집

 

다운타운은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널찍하게 정비가 잘 되어 있었고, 특히 100년 이상 된 건물들도 이 곳 저 곳에 중후한 모습으로 서 있었어요. 다운타운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도심 한 복판에 전몰용사 기념공원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었어요. 그 가운데는 이 지역 출신으로서 625 때 전사한 젊은이들의 사진과 이름을 새긴 석비도 있었는데, 순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어요. 정작 우리는 우리의 혈육들이 그 전쟁에서 몇 명이나 죽었으며, 전사자 가운데 우리 고장 사람들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게 사실 아니오?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전사자들을 도시 한 복판에 모시고 항상 추모하며 고마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우리를 감동시킵디다. 우리가 이런 점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봐요.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어 왔지만, 국가는 그들의 희생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매 순간 각인시키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부강한 나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겠어요? 개인주의로 철저히 무장한 미국인들이 일단 애국정신의 기치 아래 뭉치면 천하무적의 집단이 된다는 점. 무섭고도 부러운 면이지요. 이 평범하면서도 쉽지 않은 점을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 엘 르노에서 발견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과연 언제쯤이나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나머지는 다음번에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안녕히 계시오.

 

 


1901년에 지어진 상가-엘 르노의 다운타운에서

 


엘 르노 다운타운에서 만난 전몰용사 추모 공원[한국전 관련 비석이 보임]

 


커네이디언 카운티 출신의 전몰용사들

 


전몰용사 추모공원의 담벽

 


박물관 사무실에서 관리인들과 함께

 

 


당시의 초등학교

 


당시의 엘 르노 주류판매점

 


당시의 호텔

 


당시부터 있던 상가 건물들

 


엘 르노 연례행사의 하나인 버거데이 포스터

 

 

¹ ‘표준 도시 통계구역이란 미국에서 대도시 문제를 분석하는 데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만든 개념인데, ‘인구, 도시의 성격, 통합의 정도등을 기준으로 그런 지역은 설정된다.

² 1889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구역 안에 백인 정착이 시작되면서 세계 역사에 보기 드문 도시 건설의 기괴하고 혼란스런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철로가 인디언 구역을 가로지르고, 아칸사와 텍사스를 잇는 통로들을 따라 여기저기에 증기 열차를 운행하기 위한 급수탑과 여타 설비들이 설치되었다. 인디언 구역이 개방되기 몇 달 전부터 도시구역의 회사들을 대표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은 이 위치들을 선점하고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으나, 당시 의회는 시민 정부의 어떤 형태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5만 여명의 정착민들이 200만 에이커의 땅을 둘러싸고 벌인 투쟁은 랜드 러쉬땅 차지하기싸움으로 기록되었며, 인디언들에게는 비극적인 역사의 단초가 되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9. 01:09

 

 

도올 선생과 홍준표 지사를 보며

-신문기사를 읽고-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했다는 책[사진은 중앙일보 2013. 12. 7.]

 

 

10 몇 년 전의 일이다.

평소의 습관대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까이에 모시고 있던 선배 교수 한 분이 평론가 모씨에게 증정한 책이 경매 물건으로 나온 것이었다. “○○○ 교수님께, △△△ 삼가 드림이란 헌사가 대문짝만한 사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었다. 저자가 유명인사에게 증정한 책일 경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이 경매업계의 상식이다. 그 책을 내놓은 사람은 그런 관습을 이용한 것일 테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실망으로 일그러지실 선배 교수의 표정이 떠올라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잽싸게 비교적 높은 가격으로 내가 찜했고, 결국 그 책은 지금도 내 서재 속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다. 인터넷 경매에 참여하는 경우 언제나 혹시 그런 헌사가 붙은 책이 없는가를 먼저 보게 된 것도 그 일을 경험한 뒤부터다.

 

 

어제 인터넷을 열었다가 우연히 중앙일보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읽어본즉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한 책이 고서방에 나왔고, 누군가 그것을 구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책을 구입했으면 조용히 가지고 있을 것이지, 만천하에 공개한 그가 일단은 서운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헌사까지 사진으로 대문짝만하게 공개되었으니, 분명 도올 선생은 발분(發憤)했을 것이고, 홍 지사는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기사 말미에 홍 지사는 국회의원 등 공직들을 그만 둘 때 사무실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해명을 했지만,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인터넷이 하도 발달하여 카메라에 찍히기만 하면 순식간에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세상이다. 지금 내가 미국 오클라호마의 오지에 틀어박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조국에 있는 친구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밝혀진 증거물 앞에서 무슨 둔사(遁辭)’가 필요할까.

 

 

그간 고서에 관심을 갖고 종종 온라인, 오프라인 경매에 참여해왔다. 심심치 않게 확인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생전에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아도 세상을 뜬 뒤 그 책들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레기 취급하여 고물상에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오프라인 경매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떤 학자의 책을 여러 권 입수한 적이 있다. 어째서 이런 책들이 경매시장에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책 주인 죽은 뒤 두 달 만에 그의 소장서적들 모두가 시중에 깔렸다는 대답이었다. 무식한 자식 놈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간 저서들을 몇 권 내놓은 입장으로 고서 경매에 참여하면서 혹시 내 책을 경매장에서 만날까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발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최근 들면서 내 책도 경매 사이트에 뜨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출판사에서 재고도서를 고서점에 돌렸을 수도 있겠으나, 독자들이나 학생들이 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리라. 그 책들이 그저 내가 누구에겐가 정성스럽게 헌사를 써서증정한 것들만 아니길 기원할 뿐, 이제 그런 것들을 거둬들일 방법도 의지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

 

 

얼마 전의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다른 학과의 모 교수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봉투를 열어 꺼내 본 즉 그 몇 년 전 그에게 증정한 내 책이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교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연구실을 정리하려는데 몇 년 전에 받은 당신의 책이 나왔다. 보관할 여력도 없고 차마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어서 다시 되돌려 드린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일단은 야속했지만, 곰곰 생각하니 고맙고 솔직한 말이었다. 만약 자신의 전공과 무관하다하여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그것이 어느 경로로 중고서점에 들어갔다면, 그러다가 어느 기회에 경매장에 나왔다가 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와 대판 싸웠거나 심하면 원수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는 내 분신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내게 돌림으로써, 일어날 수도 있었던 참화(?)를 미연에 막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일시적인 서운함으로 더 큰 비극을 막은 셈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실, 이사하다 보면 가장 큰 문제가 책이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책 짐을 반기지 않는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너무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획일화 되면서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사철만 되면 아파트 쓰레기장이 버려진 책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책을 내도 전공자 이외에는 무턱대고 증정하지 않는다. 책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먼저 그에게 묻는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권 증정해도 되겠냐고. 대부분은 기꺼이 받겠다고 대답하지만, 과연 마음속도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무턱대고 증정했다가 뒷날 고서 경매장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책을 건넨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도올 선생이 보기에 홍 지사가 정치인으로서 괜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사상의 결정체인 동경대전을 해석한 자신의 책을 건넨 것 아닐까. 백성들 편에서 정치를 해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수이었든 자발적인 행동이었든 홍 지사는 그 책을 버렸다. 그가 아마 한 줄이라도 읽어봤다면 그 책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을 이끈다고 자부하는 인물들 가운데 책을 가까이 한다거나 책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선거철에 매문가들을 동원, 자신의 일생을 미끈하게 윤색하여 선거용 책자를 내는 인사들은 여의도에 깔려 있지만, 제대로 책을 접하거나 쓰는 인사들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안다. 사실 그런 인사들에게 힘 들여 쓴 저서를 증정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홍 지사를 정치권에서 그 중 나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 왔고, 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믿음을 쉽게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번 일은 아마도 그의 말대로 측근들의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 도올 선생께서는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라. 그리고 그 가가대소에 난해한 주석을 달지 마시라. 홍 지사께서도 더 이상 둔사를 내 놓지 마시고, 화끈한 전화 한 통화로 도올 선생의 마음을 풀어 주시라. “우리 자갈치에서 만나 산성막걸리로 회포 한 번 풉시데이!”하고 말이다.

 

 

미국 스틸워터(Stillwater)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8. 15:31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3: 클린턴 시티(Clinton City)‘66번 도로 박물관[ Rt. 66 Museum]’-

 

 

 

손 형,

 

엘크시티를 떠나 동북쪽 30분 거리에 있는 클린턴시티로 가는 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득히 넓은 들판의 연속이었소. 가끔 고개 들어 우리를 쳐다보는 소떼들과 끄덕거리며 땅 속의 기름을 길어 올리는 사마귀 모양의 원유 채굴기 만이 시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움직임의 전부였소. 거칠 것 없는 바람은 그 들판 위를 달리는 차를 흔들어 나그네의 마음을 마냥 스산하게 만들었소. 그저 에머럴드 빛 하늘에 번지는 새하얀 구름만이 땅 위에 깔린 초록빛 목초와 어울려 그나마 운전자의 지루한 마음을 달래 줄 뿐이었다오.

 

 


엘크 시티에서 클린턴, 엘 르노, 오클라호마 시티 등이 표시된 66번 도로(I-40) 주변 지도

 


엘크시티에서 클린턴 오는 길에 만난 들판의 관개시설(?)

 

 

***

 

넓은 대지 위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 있는 클린턴시티는 엘크시티보다 더 휑했소. 그러나 이곳에도 역시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소. 우리나라는 역사가 길어 대도시를 제외한 소규모 도시들은 유래를 알기 어렵고, 도시 형성에 관련된 스토리 또한 딱히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 아니오? 그러나 미국은 역사가 짧아서인가 도시 형성의 유래가 분명하고, 영고성쇠(榮枯盛衰)로 요약되는 역사의 굴곡 또한 분명하더이다. 처음에 우리는 이 도시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일가와 관련이 깊을지도 모른다는 가소로운 추정을 해보았소. 빌 클린턴의 기반 지역인 아칸사 주는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해 있는 만큼본관(本貫)을 가진 한국인들처럼 그 옛날 클린턴 가문도 이곳에서 일어난 뒤 그 쪽으로 이주했으리라는, 그럴듯한 상상을 했던 것이오. 그러나 뮤지엄 관계자에게 물어보자마자 일언지하에 ‘No!’랍디다.

 

 


클린턴 시청 

 


클린턴 다운타운 입구의 시원한 모습

 


66번 도로 박물관 앞에 세워진 윌 로저스 기념비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에서 만난 각 도시의 관광안내서들

 

 

1899년 아반트(J.L. Avant)와 블레이크(E.E. Blake)가 와쉬타(Washita) 강 옆의 계곡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정한 데서 클린턴시티는 출발을 보았다고 하오. 이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320 에이커의 땅을 사들여 와쉬타 지역 교차점에 작은 정착지를 조성함으로써 클린턴 지역 공동체는 시작되었소. 1902년 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음으로써 와쉬타 공동체는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커스터 카운티 크로니클 신문사(Custer County Chronicle Newspaper)’1국립은행(The First National Bank)’ 같은 기관들이 지역 사업체로서는 처음으로 등장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체국이 신설되면서 체신부가 와쉬타 교차점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자 세상을 떠난 이 지역 재판관 클린턴 어윈(Clinton Irwin)’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오.

 

어쨌든 클린턴 시티는 66번 도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 덕분에 많은 이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소. 66번 도로 가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클린턴도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업종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지요. 예컨대, 각종 레스토랑, 까페, 모텔, 주유소, 자동차 정비소 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 업소들 가운데 하나만 예를 든다면, ‘팝 힉스 레스토랑(Pop Hicks Restaurant)’ 같은 경우는 66번 도로에서 가장 오랫동안 운영되던 식당이었다지요. 말하자면 길에서 돈이 생기는환상적인 체험을 적어도 66번 도로가 거쳐 가는 도시민들은 절감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이 도로가 쇠락의 길을 걷다가 다시 부활한 것도 이 길과 이해를 함께 한 사람들의 추억 덕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옛날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이란 인간 욕망의 구현이라고나 할까요?

 

 


66번 도로 박물관에 협찬한 기업들과 인물들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접수대 및 매점)

 


66번 도로와 각 지역의 우편 스탬프

 


당시 66번 도로 가에 있던 방울뱀 쇼 포스터

 

 

1970년대만 해도 이 도시를 우회하던 I-40¹[Interstate highway #40]이 오늘날엔 이 도시를 통과하게 되었고, 많은 길들이 이에 연결됨으로써 이 도시는 이 지역에서 매력적인 관광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렀다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가까운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와 오클라호마 시티를 연결하는 66번 도로 가의 큰 도시들 중의 하나이자 여행객들을 위한 중간 쉼터로서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는 거지요. 이 도시 안에 일찍부터 해군비행단과 군용비행장이 있었고, 그에 따라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많은 부침(浮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도시가 66번 도로와 함께 되살아난 점은 길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66번 도로 박물관[Rt. 66 Museum]을 찾았어요. 규모는 엘크시티의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보다 작았으나, 질 높은 컬렉션과 정제된 기획력이 돋보이는 박물관이었어요. 특히 66번 도로의 역사성을 미국 현대사나 문명의 변화와 직결시킴으로써 길과 인간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다른 어떤 박물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었어요.

 

 


66번 도로 박물관

 

 

66번 도로의 개통 및 변화, 길 주변 도시들의 영고성쇠 등과 정치경제사회의 변화가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지요.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의 산물이 바로 66번 도로였고, 2차 세계대전과 산업의 발전이 이 도로를 쇠락하게 만든 주범이었으며, 과거에 대한 집단적 회상과 추억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이 이 도로를 부활시킨 힘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고비마다 위대한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그런 분위기를 견인해 나온 미국 현대사의 물결이 바로 이 도로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너무 과한 해석을 한 걸까요?

 

 


1928년 66번 도로를 만들던 당시 사용하던 시멘트 믹서

 


66번 도로를 닦던 당시 작업 모습과 도구

 


가뭄으로 고통을 겪던 당시, 66번 도로 가에서 목격되던 이른바 'Dust Bowl'의 참상

 


66번 도로 가의 목화 수확 장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

 


베트남전 당시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던 제인 폰다와 신인 정치인 존 케리(현재 미 국무장관)

 


지미 카터의 대통령 당선 소식

 

 

이런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세계 대공황으로 무너진 산업의 기반을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길이란 필연적으로 여행의 욕망을 부추기는 공간이고, 여행은 어쨌든 소비 행위라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2차 세계대전 같은 비상시에 소비행위는 억제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66번 도로의 쇠락은 필연적인 결과였겠지요. 전쟁 이후 산업화 시대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길의 수요에 따라 66번 도로 대신 넓고 빠른 하이웨이들이 건설되어 효율성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그 길은 다시 쇠락의 길을 걸었지요. 그러나 다시 시대가 바뀌어 삶의 질과 내면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버려졌던 66번 도로는 부활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66번 도로의 탄생-성장-쇠락-부활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컨셉으로 짜여 있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었어요.

 

 


당시 길가의 주유소

 


당시 버스 정류장 표지판

 


당시 66번 길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던 도시들

 


버스 대합실의 풍경[고약하게도 당시는 백인 대기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음]

 


당시 66번 도로를 통해 전국으로 달리던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의 트레이드 마크

 


당시 66번 도로를 달리던 화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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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66번 길가에 있던 자동차 정비소

 


당시 66번 도로 휴게소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

 


당시 66번 도로가에 있던 카페

 


당시 코카콜라 서비스와 선전문구

 


당시 66번 도로 가의 카페

 


당시 66번 도로 가에 즐비하던 숙박업소들

 


당시 66번 도로에 설치되어 있던 각종 교통 표지판 및 경고표시들

 


당시 자동차에 사용하던 에어컨

 


당시 장거리 여행할 때 자동차에 갖고 다니던 유아용 젖병 보온기

 


당시 66번 도로 여행자들은 자동차 지붕에까지 짐을 싣고 다녔다.

 


66번 도로 부활 운동의 소식

 


66번 도로가 황폐화 되고 폐쇄된 여러 모습들

 


66번 도로에 관한 소식

 


66번 도로를 사랑한 작사가 바비 트룹

 


66번 도로에 관한 노래들과 가수들

 



66번 도로에 관한 노래들을 담은 음반들

 

 

***

 

우리는 클린턴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인들의 꿈과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뚜렷한 철학과 방향을 갖고 있는 두뇌들이 역사를 견인하고, 그 외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들을 뒤따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1세기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66번 도로는 탄생과 쇠락, 부활의 과정을 거쳤지만, 그거야말로 2세기 남짓한 미국 역사의 축도(縮圖)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제 판단이지요. 책임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뚜렷한 해명을 들은 건 아니지만, 66번 도로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심리 저변에 이런 철학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봐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클린턴 시티의 ‘66번 도로 박물관[Rt. 66 Museum]’이었어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넘기지요. 그 때까지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에 각국어로 쓰여진 인사말 간판

 


박물관을 살펴보고 나서 방명록에 쓴 백규의 소감

 


엘크시를 떠나기 앞서 

 

 

¹ I-40은 미국에서 I-90, I-80에 이어 세 번 째로 긴 -서 주간(州間) 고속도로. 그 서쪽 끝은 캘리포니아 주 바스토우(Barstow)I-15이고, 동쪽 끝은 117번 도로와 북 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의 북 캐롤라이나 하이웨이 132번과 합쳐진다. 오클라호마 시로부터 바스토우까지 I-40 서쪽의 많은 부분은 역사적인 미국 66번 도로와 병행하거나 겹쳐진다. I-4010개의 주요 -남 주간 고속도로들가운데 여덟 개(I-5I-45를 제외한 모든 것)와 교차하고, I-24, I-30, I-44, I-81 등과도 교차하는 만큼, 미국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은 도로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