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9. 3. 29. 07:42
워낭소리, 본향의 소리


고정관념을 뛰어 넘은 영화 <워낭소리>가 우리사회 중장년층의 누선(淚腺)을 자극하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전통정서에 쉽사리 호응할 것 같지 않은 2, 30대 청년들의 마음까지 움직이고 있다. 중장년층이야 어린 시절 향촌에서 워낭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라서 그럴 수 있다지만, 의외로 청년들이 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다소간 의외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새벽같이 워낭소리에 잠을 깨던 꼬마들이 50대 장년으로 성장한 지금, 어린 시절의 추억이 화면으로 재생되어 나타난 것이다. 시절은 마구 변하여 산업화와 정보화를 지나 고도 지식정보화의 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우리의 정신적 촉수는 아직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에 머물러 있음을 영화는 역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렁소와의 추억을 공통으로 갖고 있는 우리는 왜 영화 속의 장면들을 보며 눈물을 떨구는가. 화면을 점령하고 있는 ‘느림, 늙음, 낙후’가 빚어 만드는 그 시절 삶의 진실이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산업의 패턴이 변화하는 와중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우리가 먼빛으로나마 다시 제 길로 접어들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무익한 ‘원점 회귀’로 평가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의 원점 회귀는 잃어버린 본향의 회복일 뿐 낙후한 상태로의 후퇴는 아니다. 물질적 개념 아닌 정신적 공간이 바로 본향이다.

현실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그네 혹은 이방인으로 보는 것이 특정 종교의 전유물은 아니다. 누렁소와 말없이 교감하며, 소 때문에 농약을 뿌리지 않고 기계영농마저 거부하는 노인이야말로 생명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적 인간상이거나 그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의 원래 모습이다. 사실 본향 속에서만 그런 인간상은 존재할 수 있고, 체현될 수 있다.

매일 바꾸어야 할 만큼 우리들의 삶이 가벼운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주변의 하찮은 물건 하나도 그냥 버릴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명은 바로 존재의 이유다. 비록 한 마리의 소일지라도 생명이 있는 한 인간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은 그것이 존재해야 할 소중한 이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의 디지털 기술로 번쩍이는 오디오, 비디오 기기가 넘쳐나지만 두 노인은 아직도 아날로그 시대의 고물 라디오에 기대고 산다. 비록 낡았으나, 아직도 흘러간 그 시절의 노래들을 잘도 들려주는 그 자체가 그 라디오의 존재 이유다. 라디오처럼 늙은 노부부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은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의 삶이 바뀌지 않음을 보여주는 기호다.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을 추구해 가는 삶의 진실은 주름이라는 기호의 심층구조다.

따라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은 ‘변하지 않음’ 혹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지속 그 자체다. 우리는 살면서 수시로 단절을 경험한다. 어제와 오늘, 작년과 올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등 늘 단절을 통해 변하는 것이 세상인 것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의 이면은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

영화는 변화에 대한 거부나 비판을 바탕에 깐 채 ‘불변, 느림, 지속’의 철학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수시로 경험하는 변화나 발전은 허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 지속되고 있는 농경사회의 정서가 우리의 본향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마음에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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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22. 14:50

1월 30일 오전 8시 마드리드의 젬마 호텔을 나섰다. 날씨는 쌀쌀했으나 하늘은 맑았다. 마드리드 인근 세고비아(Segovia)를 찾아가는 길. 설레는 마음 한 구석으로 서운함이 슬며시 찾아들었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 그간 숨겨 두었던 보물, 세고비아로 향하게 된 것이다.

 호텔로부터 1시간 남짓 달렸을까.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나오고, 그 중심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참하게 앉아 있었다. 한때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해발 1000m 고도(高度)의 고도(古都)였다. 이곳이 양모 산업의 중심이라 하나, 주변에는 밀밭과 보리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맨 처음 찾은 곳은 로마 수도교(水道橋). 유럽 곳곳에 남아있는 수도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는데, 길이 728m, 높이 28m의 거대한 규모였다. 오늘날처럼 시멘트를 사용하는 대신 화강암 블록만을 2단의 아치형으로 쌓아올려 만든 다리인데, 기원 1세기경 트라야누스 황제시대에 만들었다 하니 그 기술수준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멀리 보이는 푸엔프리아 산맥에서 발원되는 아세베타 강물을 이곳 세고비아로 끌어들였으며, 지금도 수로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놀라운 지혜와 기술이여!

 수도교 앞에는 이곳에서 4대째 이어오는 ‘아기 통돼지 찜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 있었다. 이곳 말로 ‘꼬치니조’라 불리는 요리는 하몽, 빠에자, 아세이뚜나(올리브 절임) 등과 함께 스페인에서 맛보아야 할 4대 요리라 한다. 시내의 시외버스 주차장 광장에는 이 집의 창시자가 동상으로 남아 있었다.

 수도교를 구경한 우리는 비좁은 구시가의 골목을 지나 마요르 광장에 도착했다. 마요르 광장 한쪽에는 카테드랄이 우아하면서도 압도적인 자태로 서 있었다. 카테드랄은 1521년 코무네로스의 반란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으나 그로부터 4년 뒤 카를로스 1세가 재건을 시작해 1577년 완공되었다. 후기 고딕양식으로 전면에 걸쳐 우아함이 넘쳐났다. 구시가의 중심가에서는 이 성당 말고도 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미안 성당, 산 에스테반 성당 등이 보였는데, 모두 이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었다. 산 미안 성당은 12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표하며 산 에스테반 성당은 13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인 점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산 에스테반 성당의 경우 높이 53m나 되는 종루가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 것은 알카사르의 아름다움이었다. 디즈니의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성의 모델이라 할 만큼 세고비아의 알카사르는 빼어나 보였다. 에레스마 강과 클라모레스 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우뚝한 바위산에 서 있는 알카사르. 13세기에 축성된 이래 여러 차례의 증․개축이 이루어져 왔다. 원래는 왕실의 중심되는 성으로서 아사벨 여왕의 즉위식과 펠리페 2세의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으며, 후대에 들어와 감옥으로 쓰이기도 하고 무기 제작소로 쓰이기도 했다.

엄청나게 깊은 해자를 건너 알카사르에 들어가니 역대 제왕들의 호화로운 삶이 한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의 강물이 아득하게 실낱처럼 보일 정도로 이 성은 전략적 요충이기도 했다. 돈 후안 탑에 오르자 세고비아의 거리와 오고가는 사람들이 또렷이 보이고, 멀리로는 과달라마 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멀리 보면 동화 같은 성채가 가까이 다가가 보면 온갖 영화와 우여곡절을 함축한 서사적 문맥으로 인식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인간사 모든 것이 ‘보는 거리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 세고비아의 알카사르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리라. 모를 때는 그다지 마음 당기지 않던 곳이었으나, 막상 와 보니 매력적인 곳이 스페인이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역사의 흔적들과 문화의 적층(積層)은 유럽의 어느 국가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았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온난하고 습윤한 바람 때문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만드는 매력이 물씬 풍겨났다. 따지고 보면 스페인에 대한 갈증 만 키운 며칠이었다. 그런 스페인을 오늘로 이별한다. 피카소를 낳았고, 세르반테스를 낳은 나라. 많은 예술가들과 문학가, 탐험가들을 낳아 키운 나라. 역사의 도정에서 잠재된 정열을 간혹 활화산처럼 무섭게 터뜨려온 나라. 무적함대로 대양을 누비며 세계를 제패했던 나라...

나는 여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 스페인에서 찾아낸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며 한동안 고민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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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부터 세고비아 시내 이정표, 세고비아 시가지 원경, 세고비아 로마 수도교, 세고비아 꼬치니조(아기 통돼지 찜)의 원조, 세고비아 대성당, 세고비아 알카사르, 알카사르 앞마당의 John 2세 동상, 알카사르, 알카사르 해자 앞에서, 알카사르, 알카사르 아래 쪽에서, 알카사르 아래쪽에서, 마드리드 시내에서 만난 스페인 남자와 강아지, 프라도 박물관, 프라도 박물관의 고야 동상, 프라도 박물관의 노점상, 마드리드 하몽 전문식당, 마드리드 하몽 전문식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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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3. 17. 10:17

‘죽은 어른의 사회’

 

조규익(국문과 교수)

 

얼마 전 한 노인을 만났다. 사회적 지위도 누릴 만큼 누렸고 돈도 많은 분이었다. 그런데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불평이 많았다. 후배들이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노여워했다. 본인은 나이도 학식도 지위도 누구 못지않은데, 주변의 젊은이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이 자신을 ‘어른’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노인은 나이가 많다는 것이 판단의 정당성까지 담보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 했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다. 대체로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자격 없는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점은 학부 신입생부터 정년을 앞 둔 교수까지 10대에서 60대까지 모여 있는 대학이나 세대 구성이 더 다양한 사회 모두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노인이라 여기는 노인은 없다지만, 젊은이들의 눈에는 ‘에누리 없는 노인들’만 주변에 그득하다. 그 중에는 간혹 공동체 운영의 헤게모니를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도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눈엔 ‘제대로 된 어른’보다 ‘탐욕과 편견에 찌든 노인들’만 보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아가도 모자랄 판에 사회가 자꾸만 뒷걸음질 치는 것은 그런 노인들이 공동체의 선도역을 자임하기 때문이다. 말하기보다 들어주기, 현실적인 일에 초연하기, 후배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지갑 열기 등등 자신을 덜거나 버리는 일에 나서야 비로소 노인 아닌 ‘어른’이 될 수 있다. 어른으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후배들을 원망하며 그들과 엉겨서 이해다툼이나 벌인다면, 언제까지나 ‘어른’ 아닌 ‘노인’으로 남을 뿐이다.

최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신앙인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까닭이 있다. 그 분이 진정으로 무욕(無慾)의 삶을 살아온 ‘어른’이었다는 점이다. 상당수의 노인들은 이 땅에 명예와 부의 지저분한 껍질만 남기고 떠난다. 아니, 명예와 부의 근처에도 못 가본 채 그것들에 집착한 욕망의 검불들만 날리고 떠나버린다. 소년, 청년, 장년으로 살다가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 채 ‘노인’으로 씁쓸히 세상을 하직하는 게 필부필부들의 삶이다. 노인들은 노인들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어른으로 죽을지 노인으로 죽을지 선택해야 할 시점이다. 슬프게도 지금 우리는 ‘죽은 어른의 사회’에 살고 있다.(2009. 3. 16.)

*이 글은 <숭대시보> No. 990, 2009년 3월 16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3. 9. 01:20


 아쉬움 속에 구엘공원을 떠난 우리는 길쭉한 수세미 모양의 수도국(아그바르) 건물이 멀리 바라보이는 도로를 달려 몬주익(Montjuïc)에 도착했다. ‘몬주익’이란 원래 ‘유대인들이 살던 언덕’에서 나온 말로 복잡한 역사적 맥락이 얽힌 곳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명 속에는 역사의 우여곡절이 배어 있기 마련. 이곳에서도 유태인 핍박의 역사가 있었던 모양이나 자세한 건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는 스페인 광장을 출발, 무역 전시장과 분수대, 카딸루냐 미술관을 거쳐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주경기장에 도착했다. 주경기장은 산 조르디 스포츠관(Palau d'Esorts Sant Jordi), 기념공원 등과 함께 있었고, 올림픽 기념관은 주경기장 뒤편에 있었다. 주경기장 도로변엔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의 모습이 석판에 부조되어 있어 감회를 새롭게 했다. 주경기장의 현재 이름은 루이스 콤파니스 올림픽 경기장 (Estadi Olímpic Lluís Companys). 1929년의 엑스포를 대비하여 1927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이 경기장은 1936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보수되었고, 1992년 하계 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989년 재보수되었다. 경기장 수용 인원은 7만명. 체육경기 뿐 아니라 가수들의 콘서트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롤링스톤즈, 티나터너, 마돈나, 본조비 등은 그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주경기장 뒤쪽으로 걸어 올라간 자리에 몬주익 성이 있는데, 그곳에 들어가자 군사박물관이 있었고, 발 아래로 바르셀로나 시가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과연 과거와 현재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는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윤택과 풍요 그 자체였다.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바르셀로나. 그 속에서 예술과 문화, 전통과 현대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시민들의 여유가 나그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

 언덕을 내려온 우리는 람불라스 거리(Las Ramblas)를 걸었다. 콜럼버스 기념탑에서부터 까딸루냐 광장에 이르는 널찍한 보도(步道).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길바닥엔 돌이 깔려 있었다. 길옆으로 ‘움직이는 동상’이라 불리는, 꽤 많은 수의 거리공연자들이 갖가지 행색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었다. 꽃 가게, 신문이나 잡지의 가판대들이 줄지어 있고, 거리 양쪽에는 각종 레스토랑, 숙박시설, 선물가게, 옷 가게 등이 즐비했다. 람블라스를 걷다가 옆의 상가로 들어가니 어물전, 식품점, 적나라한 고깃집, 반찬가게 등이 한 골목 그득했다. 껍질 벗긴 염소머리, 토막 난 생선, 소세지, 각종 야채 등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봄직한 음식의 1차 재료들이 진열대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람블라스 거리를 부랴부랴 빠져나온 우리는 어둑발이 진 치고 있는 거리를 뚫고 가우디의 또 다른 작품 카사 밀라(Casa Mila)를 찾았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 채석장이란 뜻)’라고도 불리는 이 고품격 맨션은 바르셀로나 중심가인 그라시아의 거리를 마주보고 있었다. 각 층 4 가구, 가구 당 400㎡의 공간을 갖고 있는 이 저택은 가우디의 예의 컨셉대로 꾸불텅거리는 외관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 보아도 ‘기괴한 미학’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세기 전엔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이 작업 후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는 말도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

 바르셀로나는 넓고 깊었다. 단순히 물리적인 면적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 아름다움이 어울려 빚어내는 도시의 정신적 깊이와 넓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가우디가 차지하는 면적이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가우디와 바르셀로나가 동일시되는 것은 그의 미학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의 모든 것들을 대충 지나쳤으면서도 가우디의 모든 것을 보기 위해 한사코 애를 쓴 이유도 그 점에 있었다.


 스페인을 정리하기 위해 이제 우리는 마드리드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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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위로 부터 몬주익 경기장, 몬주익 경기장, 몬주익 경기장 밖 대한민국 기념물, 달리는 황영조, 몬주익 경기장 성화대, 몬주익 경기장 뒤 몬주익 성, 몬주익 성 위에서 바라본 바르셀로나 시내, 몬주익 경기장 옆 고고학박물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