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11. 22. 21:16

흥미로운 문자들과 고서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

 

 

 

                                                                                    조규익(숭실대 교수)

 

  한・중 수교 직후 중국의 한 소도시에 갔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말하거나 알아듣지 못하던 나였고, 곳곳에서 만나는 중국인들 또한 성조(聲調)에 맞지 않는 ‘얼치기 중국어’에 대해서 못 들은 척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말과 달리 글자를 활용한 필담(筆談)은 가능했다. 간체자(簡體字)만 쓰는 중국인들이었지만, 학교 물을 먹은 사람들일 경우 번체자(繁體字)도 대충 통했다. 그렇게 간신히 며칠을 버틸 수 있었다.

 

  담헌 홍대용(洪大容)을 비롯한 연행사들도 연경의 많은 문사들과 필담으로 창화(唱和)했고, 조선의 통신사들도 일본의 문사들과 그렇게 소통했다. 이처럼 예로부터 ‘기호로서의 문자’는 나라와 말이 달라도 누구든 익혀 사용할 수 있었고, 문자에 담겨 있는 다른 나라의 문화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제국주의 언어’로 군림해온 중국어와 영어는 한자와 알파벳을 통해 이른바 지구촌의 보편문화나 보편정신을 주도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만 7천여 년 전인 BC 15,000 년 경,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에서 벽화들이 발견되었다. 말・사슴・들소 등 대략 100점 내외의 동물상들에 성공적인 수렵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가 들어 있다.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후기의 들소・사슴・멧돼지 등 야생동물 벽화들에도 사냥의 성공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도가 들어 있음은 마찬가지다. 신을 비롯한 초자연적 존재에 자신들의 소망을 기원하는 것이 주술의 주요 목적임을 생각하면, 그 그림들도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여 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문자들임은 분명하다.

  그로부터 상형문자와 설형(楔形)문자의 단계들을 거쳐 기원전 14세기 경 한자가 성립되었다고 본다. 한자의 발전으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이 형성되었고, 이 지역의 중세정신을 견인했으며, 역으로 각 민족단위의 독자적 문자생활을 촉발시킨 점 또한 사실이다.

  일찍이 일본 한문학의 석학 시라카와 시즈카(白川 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모두(冒頭)의 문장을 “(말씀에)이어서 문자가 계시니라. 이 문자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문자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패러디하여 문자의 중요성을 설파한 바 있다.

 

말과 문자가 함께 가는 것은 아주 행복한 경우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적을 수 있는 문자가 문자로서는 최고라는 뜻이다. 우리는 15세기에 이르러서야 독자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갖게 되었고, 그것마저 민중이 보편적으로 사용하기까지는 몇 세기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훈민정음이 나오기까지 향찰(鄕札)같은 차자(借字) 방식의 대체표기, 구결(口訣)・이두(吏讀) 등의 보조표기 문자들이 사용되었으나, 모두 독자적인 문자 체계 출현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했다. 말 나오는 대로 적는 문자가 어디 쉬운 일이랴.

 

  예컨대, 작자 미상의 1700년대 <<한글 시조집>>을 보자. 한글 시조 160수가 실려 있는 이 책은 17세기의 어떤 가객이나 애호가가 만들어 지녔던 문헌일 것이다. 시조의 본질은 노래이고, 노래는 노랫말과 악곡이 결합된 구조다. 물론 악곡이나 창조(唱調)는 대중의 기억에 각인되어 그럭저럭 얼마간 전승될 수는 있었으리라. 그러나 가창의 현장에서 무릎을 탁 칠만큼 정곡을 찌르는 노랫말의 경우 허무한 1회성 발화(發話)일 뿐이니, 짧은 기억으로 어찌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말로 된 가사를 적을 만한 문자가 없거나 음을 기록할만한 악곡체계가 없는 경우,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시면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로 적으면 서로 맞지 아니하니,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한다. 내 이를 불쌍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매일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은 한자 전성시대인 중세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문자 체계’가 절실함을 깨달았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독자적인 문자체계로부터 큰 혜택을 받은 결과가 바로 ‘우리말 노래’인 시조와 가사의 기록이요, ‘우리 이야기 문학’인 고대소설의 창작인 것이다.

 

  문자의 역사가 인류 지혜의 역사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본 전시의 주제[‘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에 내재된 총괄기획자의 의도이다. 문자란 단순히 생각의 전달수단만은 아니다. 생각이 문자에 담겨 오랜 세월 전승되는 것은 의미의 발효와 숙성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인간의 생각은 그 과정을 거쳐야 오래도록 의미의 창조를 거듭한다.

  발효와 숙성을 통하지 않은 인간의 생각은 후손들에게 그저 ‘그렇고 그런 골동품’으로나 인식될 뿐이다. 발효와 숙성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갖출 때 그 생각은 후손들에게 수용되어 그들의 현재와 미래의 지혜로 탈바꿈한다.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듯이, 고금의 다양한 국가나 민족들의 이상과 꿈이 문자를 통해 전 인류가 공유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이 문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문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기원전의 암각문자와 상형문자, 그리이스 로마의 라피스 문자, 메소포타미아 대형 점토판의 설형문자,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의 콥트 문자, 각종 매체에 기록된 라틴어 문자・카탈루냐 문자・알파벳 문자・독일어 문자・프랑스어 문자 등 수많은 종류의 문자들, 중국과 조선의 학자와 문인들이 한문으로 작성한 각종 서책들, 서양의 선교사들이 한글로 적어놓은 조선말 교재나 한글로 번역한 성서들, 가객들이나 문인들이 한글로 적어놓은 시조와 가사 등...

 

  밤하늘에 뿌려진 별들처럼 다양한 언어권의 무수한 문자들과 그 문자들을 아로새긴 전적(典籍)들이 인류의 지혜를 담은 채 바로 지금 꺼지지 않는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가. 또한 그 빛이 새로운 불꽃으로 타올라 인류의 먼 앞길까지 환히 비추고 있지 않은가.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8. 3. 7. 20:03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 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
    -연행록의 교과서, 그 치밀한 해석적 시각 ;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54세의 ‘타각’, 연행 길에 오르다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정적들과 머리 터지도록 싸우거나, 전야에 숨어 학문에 매진하거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둘 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음에도 포기한 채 후자를 택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쟁쟁한 노론 가문의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이었던 노가재 김창업이 벼슬길을 버리고 세상일을 멀리한 것은 아버지 김수항이 당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학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이 벼슬길로부터의 유혹을 막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가 숙원이던 연행 길에 나선 것도, 방대하면서도 치밀한『연행일기』를 남긴 것도 그런 점을 입증한다. 그는 원래부터 중국의 산천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1712년 그의 형인 창집이 ‘사은 겸 삼절연공’ 사행의 정사로 떠나게 되었고, 결국 노가재는 ‘타각’의 자격으로 연행 길에 나설 수 있었다.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타각이란 사신 일행의 모든 물건을 감수(監守)하는 직책이었다. 그 자리가 하찮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명망 있는 노론 사대부가의 노가재가 맡을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조롱과 비난이 일시에 일어났고 친구들은 흔히 만류했다’는 노가재의 술회도 아마 그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가재에게 연행 길은 ‘새로운 것’을 찾는 길이었고, 자기 가문이 오래도록 빠져 지내던 이념의 허와 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에 갈 수만 있으면 되었지 직책이 무슨 상관이랴!’는 것이 노가재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146일 간 북경을 다녀오면서 방대한『연행일기』와 137수의 기행 시 모음인 『연행훈지록』을 남긴 것도 중국 기행에 대한 절절한 욕구의 소산이었으리라. 19세기 중엽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다녀와 『연원직지』를 남긴 김경선도 연행록을 남긴 선배들 가운데 노가재와 함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등을 꼽았다. 노가재의 연행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후대 연행사들에게 교과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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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재의 증조부는 서인 청서파의 영수이자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 김상헌이고, 부친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였다. 가계로만 본다면 노가재는 청에 대한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던 화이관이나 소중화 의식이 한으로 맺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냉철하리만큼 객관적인 태도로 중원의 문물을 대하고 관찰한 그였다.

화이의 차별적 세계관을 바꾸어가다

노가재는 십삼산의 찰원에서 장기모(張奇謨)라는 호인(胡人)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희들은 달자(㺚子)와 친교를 맺느냐?”
“이적의 사람이 어찌 우리들 중국과 어울려 친교를 맺겠습니까?”
“우리 고려 역시 동이(東夷)인데, 네가 우리들을 볼 때 역시 달자와 한 가지로 보느냐?”
“귀국은 상등인이요 달자는 하류인인데, 어찌 해서 한가지이겠습니까?”
“달자들도 머리를 깎으며 너희들도 머리를 깎는데, 무엇으로써 중국과 이적을 가리느냐?”
“우리들은 머리를 깎지만 예가 있고, 달자는 머리도 깎고 예도 없습니다.”
나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네 나이 아직 어린데도 능히 이적과 중국의 구분을 하니, 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고려는 비록 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의관문물이 모두 중국을 모방하기 때문에 ‘소중화’라는 칭호가 있다. 지금의 이 문답이 누설되면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야 된다.”고 했다.

노가재는 내심 청국 사람들을 지목하여 ‘달자’라고 한 것인데, 아이는 그것을 몽고로 오인하여 답변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음에 노가재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월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연행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청국을 이적으로 보던 관점은 약간씩 변해 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런 변화는 생겨날 수 있었다. 연경에서 중국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객관화 시키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몸집이 장대하며 모양이 우뚝한 자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둘러보니 본래 스스로 작은데다 또 먼 길의 풍진에 시달린 뒤라 세 사신을 빼고는 모두가 다 꾀죄죄하고 착용한 의관도 또한 흔히 여기에 와서 돈을 주고서 빈 것이기 때문에, 도포는 길이가 맞지 않고 사모가 눈까지 내려와 보기에 사람 같지 않으니, 더욱 한탄할 일이다.

이 말은 당시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겠으나, 사실 노가재의 의식 변화를 전제해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점은 황궁 묘사에서도 확인된다. 태화전 앞 12향로에 침향을 태우던 관례를 없앤 데 대하여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거나 황궁에 대하여 “장려하고 정제함이 정말 황제의 거처다웠다” 는 등의 언급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유함으로써 노가재의 의식변화는 빨라졌다. 예컨대 젊은 학자 이원영(李元英)과의 교제는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런 관계를 통해 양국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문화의식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물화의 풍부함이나 찬란함, 건축·의복·음식·기명 등과 각종 제도의 훌륭함, 도서편찬 같은 문화 사업들의 놀라움 등 그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노가재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다

그는 천산의 영안사(永安寺)에서 불승 숭혜(崇慧)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불교와의 만남이었고,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평등의식과의 만남이었다. 헤어질 때 “사람에게 안팎은 있지만 불성은 한가집니다.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던진 숭혜의 말은 노가재로 하여금 그간 굳게 지녀오던 차별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용천사의 중 운생(雲生)에게 보낸 편지글 속의 “온전히 도력(道力)에 힘입어 영경(靈境)을 두루 밟았으니 구제받음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는 술회에서도 나타난다. 수행하던 젊은 승려 낭연(朗然)에게 준 시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함께 용천사에서 잤으니/응당 전생의 인연 있음 알겠네”도 그런 깨달음의 기쁨을 드러낸다. 그런 깨달음의 실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 참된 도리 그 자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연행을 통해서 노가재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문물을 만났다. 달자들은 물론 시정인(市井人)들, 벼슬아치, 학자, 예술인 등 다양했다. 옥전현에 묵을 때는 선비 하나가 춘화도를 팔기 위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대목엔 춘화도에 미련과 흥미를 보이는 서장관의 모습도 나타나고, “유학을 공부하는 성문(聖門)의 제자로서 어떻게 춘화도를 품고 와서 남에게 보이시오?”라고 핀잔하는 노가재의 기개도 나타난다. 산해관을 지나면서는 반군 이자성에게 성문을 열어준 오삼계의 사실(史實)에 대한 노가재 자신의 사평(史評)을 개진했는데, 논리가 당당하고 정연하다. 오삼계가 어차피 깨질 산해관을 포기하고 황제의 원수를 갚았으니, ‘임시변통의 의리’는 지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명나라의 왕실을 세우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렸고, 스스로 왕을 참칭하다가 끝내 패망했으니, 그는 이름을 망치고 절의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구동성으로 오삼계의 모든 행적을 비판하는 역사서들에 대한 노가재의 반론은 조선 선비의 균형 잡힌 혜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걸출하다.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46일, 총 거리는 6천 28리인데, 연경에서 출입하거나 길에서 돌아다닌 것이 6백 75리이며, 시문(詩文) 402편을 얻었다고 노가재 스스로 『연행일기』의 말미에서 밝혔다. 그는 왜 그곳에 가려 했으며, 책의 말미에 돌아다닌 거리와 얻은 시문을 특별히 들어 놓았을까. 중국에 가기 전 노가재는 중국에 관한 서책들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차지가 되긴 했지만, 중국은 세계 그 자체 혹은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랑캐도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 증조부가 청나라에 적극 대항하던 김상헌이었고, 부친 역시 청국을 이적시하던 노론의 영수였다. 노가재는 분명 그런 가문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지식인의 본령이니, 노가재는 그 본령에 충실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가재 스스로 변화의 기미를 준비하던 17세기 조선 지식사회의 대표로 자리매김 될 만한 단서가 바로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9. 17. 17:57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 틈을 벗어나고자 한
 홍대용의 연행길 육천리-『을병연행록』


                                           조규익(숭실대 교수)

               연행 길, 고행 길

1765년(영조 41년) 동지사행의 서장관 홍억을 따라나선 그의 조카 담헌 홍대용. 자제군관의 자격이었다. 실학을 발흥시킨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당대 유학자 김원행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대표 박지원과 교제가 깊었다. 그러나 화이관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이 지배하던 그 시절. 명분과 현실은 크게 괴리되어 있었다. 담헌 스스로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도 그 괴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이러한 괴리감을 청산하고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연행'의 기회를 고대하다가 드디어 그 기회를 잡았던 것. 거기서 나온 것이 "을병연행록"이다.
 그가 두 달 걸려 도착한 연경까지는 편도 3천리, 왕복 6천리의 장도였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 여행길'. 교통편이 마땅치 않으니 숙박시설인들 변변할 리 없었다. 윗사람들이라고 으레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목욕은커녕 제때 옷을 갈아입는 일마저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만큼 행차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군말을 보탤 수 없었다. 지엄한 왕명으로 나선 길이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적 연결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 담당했다. 조선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에 정례적인 사행단을 파견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 왕의 죽음에도 사행단을 보냈으며, 왕위를 물려줄 때도 선왕을 추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은 수시로 파견되던  임시 사행단이었다. 정사·부사·서장관 각 1인, 대통관 3인(수역 당상관 1인·상통사 2인), 호공관(護貢官) 혹은 압물관(押物官) 24인 등 30명 내외가 공식 인원이었으나, 의원·서자관·화원 및 기타 수행원과 노자(奴子)들을 합하면 총인원 기백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그렇게 다녀 온 사행이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 경제와 문화의 교류도 사행단이 수행하던 실질적 사명의 큰 부분이었다.

              서양문물과의 만남과 깨달음
                  
 "여름 버러지와는 족히 더불어 얼음을 이르지 못하고, 오곡한 선비와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의논치 못한다"는 『장자』의 말을 끌어와 담헌은 조선의 답답한 선비들을 비웃고 '길 떠나는'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그는 또 "간밤에 꿈을 꾸니/요야(遼野)를 날아 건너/산해관 잠긴 문을/한 손으로 밀치도다"라고 도도한 패기를 자신의 노래에 표현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평소 역관을 만날 때마다 한어를 부지런히 익혀둘 만큼 연행의 기회를 노리며 준비를 철저히 해온 그였다. 그 덕분으로 연경에 가서도 웬만한 대화는 한어로 통할 수 있었다. 오직 간정동의 세 벗(엄성·육비·반정균)과 나눈 대화들만은 필담으로 주고받았다. 정확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연행 길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했으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정동 세 벗과의 만남, 서양문물과의 만남이었다. 담헌은 연경에 도착한지 두어 달 째인 1766년 1월 7일·8일·9일·13일·19일과 2월 2일에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사제 유송령·포우관 등과 만났다. 그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비로소 서양세계와 우리의 같고 다름을 깨닫고 개안을 하게 되었다. 정월 7일 천주당에 사람을 보내 유송령·포우관을 만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9일에서야 결국 두 사람을 만난다. 천주화상을 보며 그 화격(畵格)이나 천주교리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오르간의 구조와 음계를 자세히 관찰한 다음 즉석에서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일에도 천주당을 찾은 담헌은 그들과 장시간 만나 종교와 교리, 역서(曆書), 혼천의, 관상대, 망원경, 흑점(黑點), 안경 등 과학과 문물에 관한 문답을 교환했고, 2월 2일에는 자명종, 서양과 중국의 문자 언어 및 방위(方位) 등에 관한 문답도 나누었다. 처음으로 접한 천주화상을 담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편 벽 위에 당중하여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으니 계집의 의상이오,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색과 근심하는 기색이라. 이것이 천주라 하는 사람이니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있는 모양이오, 선 곳은 깊은 감실(龕室) 같으니, 첫 번 볼 제는 소상(塑像)인 줄만 여겼더니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 깨달았으나, 안정(眼睛)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이오.

 처음 보는 예수상에 놀랐던 것일까, 묘사의 세밀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사실 담헌은 그림 뿐 아니라 거문고를 능숙하게 탈 정도로 악기를 좋아했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처음 보는 오르간으로 우리나라의 음악을 연주해보이기도 했고, 악기를 접할 때마다 구조와 연주법을 묻거나 조선의 악기와 비교하기도 했으며,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어 반정균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도 했다. 거문고 연주로 연경의 역관 서종맹의 탄성을 자아낸 담헌. 그는 악기상 유씨의 <평사낙안> 연주를 악사들로 하여금 익히게 한 다음 밤마다 그들을 불러 그것을 배웠다. 그처럼 그는 악기 연주의 매니아이기도 했다.

              간정동에서 만난 세 벗, 그리고 천고의 우정

 『을병연행록』 권 6에서 권 9까지 26일간은 담헌이 중국의 세 선비를 만난 간정동 이야기다. 이 부분은 전체 기록의 삼분지일을 넘을 만큼 양으로나 내용으로나 중국 체험의 핵심이다. 간정동을 처음 방문했을 때 왕어양의 『감구집(感舊集)』에 실린 김상헌의 시가 화제로 올랐으며, 2차 방문 때는 허난설헌의 시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담헌은 도학과 절의로 저명한 김상헌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려 했고, 시율에 비해 덕행이 미치지 못함을 들어 난설헌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섯 번째로 간정동을 방문했을 때, 담헌은 육비·평중 등과 형제의 의를 맺고 '오늘의 모꼬지가 천고의 기특한 연분'이라 말하며 기뻐했다. 국경을 넘는, 지극한 우정이었다. 『담헌서』 외집의 <항전척독(杭傳尺牘)>은 연행에서 돌아온 담헌이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33통이 실려 있는 글이다. 육비에게 주는 편지 4통, 엄성에게 주는 편지 3통, 반정균에게 주는 편지 5통, 손유의에게 주는 편지 4통 등이 그 중심이다. 이들 중 담헌과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엄성이었다. 엄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아버지·형·동생·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7통이나 될 정도였다. 엄성이 죽은 뒤 반정균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엔 감동적인 우정이 흘러넘친다.

 철교(엄성의 호 ; 인용자 주)의 무덤에 풀이 이미 두 달을 묵었구료. 매양 깊었던 우정을 생각하면 벽을 돌며 기가 꺾이고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 초상을 꼭 한 번 보고 싶건만 부쳐 주기가 쉽지 않겠지요.

 엄성은 담헌의 초상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정작 담헌은 그의 초상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 엄성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토록 그들은 우정으로 맺어진 큰 선비들이었다. 담헌이 보기에 단순히 '오랑캐 나라의 시시한 선비'들은 아니었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조선의 선비들이 얕잡아 봄직한 인물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담헌은 연행 길에 나서면서 "대개 사람이 작은 일을 즐기고 큰일을 모르는 자는 그 가슴에 호준한 뜻이 적음이요, 좁은 곳을 평안히 여겨 너른 곳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는 그 도량에 원대한 계교가 없음이라"고 일갈했다. 어쩌면 그는 중국에 가서 이런 선비들과 교제하고 좀 더 큰 문제들을 담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담헌은 당시 조선의 꽉 막힌 선비들을 비판하고 매도했다. 담헌 자신 연행을 통해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들' 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을 소중화로 부르긴 하지만, 100리 되는 들판이 없고 천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며 땅덩어리가 좁고 좁아 중국의 한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가운데 도사리고 앉아 부릅뜬 눈으로 소소한 영리를 추구하고 악착한 언론을 구사하니 그들이 가련하다고 했다.
 오랑캐가 웅거하여 중국의 문물이 비록 변했다 하나 사람만은 고금이 없으니,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며 저들의 규모와 기상을 한 번 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포부를 지닌 담헌이었기에 국경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교우관계의 모범적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반년 동안의 연행길이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