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0. 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6. 14. 16:55

 


이명재 교수

 

 


최미정 박사

 

 


김낙현 박사

 

 


전영선 박사


 


이한창 교수

 

 

 

한국문예연구소 2014년도 전반기 학술발표대회를 마치고

 

 

 

 

학술발표회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예산 확보나 발표자 및 토론자 섭외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장 어렵고 신경 쓰이는 일은 사람들의 무관심과 도외시다. 적지 않은 돈과 신경을 써서 잔치를 벌여 놓고도 손님이 없어 텅 빈 좌석을 망연히 바라만 보아야 하는 주최 측으로서는 괴롭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여 발표논문을 작성해온 발표자들에게 인사가 아닌 것 같아 좌불안석이다. 물론 발표자들이라고 그런 현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학술발표회를 기획하고 주최하는 당사자들이자 그런 참상에 대하여 ‘동병상련(同病相憐)’하는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주인의 입장에서 겪어야 하는 미안함과 민망함은 말로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내 또래의 학자들이 만나면, 이제 ‘학술발표대회는 더 이상 열지 말아야 할까보다’라는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다. 후학들이 더 이상 자신의 선생 혹은 몇몇 선배들을 제외한 남의 논문과 책을 읽거나 인용하려 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 남의 학술발표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하기를 바라는 일이야말로 과람(過濫)한 기대라 할 것이다.

 

***

 

“해외 한인문학의 현주소”라는 타이틀 아래 그 분야의 고수들을 모신 덕이었을까. 그럭저럭 학술발표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 정년 이후 지금까지 현대문학의 비평과 해외 한인 문학의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이명재 교수[중앙대]가 ‘유럽지역의 한인 한글문단’을, 10여년을 미국에 살면서 직접 한인 시인들을 만나면서 연구를 해온 최미정 박사[성서대]가 ‘재미 한인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현장을 바탕으로 하는 예리한 분석력을 구사하는 김낙현 박사[중앙대]가 ‘구소련 고려인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북한문학의 탁월한 전문가 전영선 박사[건국대]가 ‘북한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관록과 끈기의 노학자 이한창 교수[전북대]가 ‘재일 한인문학의 연구현황과 과제’를 각각 발표했고, 유선모 교수[경기대], 강진구 박사[중앙대], 김성수 박사[성균관대], 허명숙 박사[숭실대]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토론도 이어졌다.

 

***

 

현재 7백만의 한인들이 해외에 나가 있다. 남북한 합친 인구를 7천만으로 잡을 때 10%가 넘는 인구요, 남한 인구 5천만의 14%에 해당하는 인구다. 그렇게 많은 한인들이 해외에서 문학을 창작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해나갈 것이다. 문제는 ‘한글문학’의 지속성이다. 해외 한인 3세만 되면 언어나 정서의 면에서 완전히 현지인으로 바뀌게 되는데, 우리말이나 글을 잃어버린(잊어버린) 상태에서 더 이상 우리 문학이 산출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해외 한인 한글문학의 ‘내일’은 어둡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일치를 본 견해였다. <<고려문학>>처럼 문학저널을 우리나라에서 발간함으로써 국내와 현지의 문인들을 결부시켜 현지인 문학을 유지하려는 방법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 시들어가는 현지인 문학을 잠시 부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닐 것이다. 이와 관련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극작가 한진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우리 문단[*고려인 문단: 인용자 주]은 풍전등화의 처지이다. 우리말[*고려말, 즉 한국말: 인용자 주]로 쓴 작품을 읽을 수 있는 독자들도 거진 없다싶이 하지만 우리말로 글을 쓰는 작가들도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니 재쏘고려인문학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기조차 거북한 일이다. 우리말을 부흥시키기 전에는 우리 문학을 부흥시킬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상식일 것이다. 다행히 최근에 와서 재쏘동포들 사이에서는 우리말을 배우려는 열성이 높아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젊은이들 속에서 우리말로 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나오리라고는 기대하기 힘들다. 문학작품을 쓸 수 있는 말은 적어도 어머니의 젖과 함께 몸과 넋에 배인 말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러나 지금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는 그 어머니들도 우리말을 모른다. 이렇게 자꾸 캐여보면 암담하기만 하다.(…)한글문학의 전공시기를 메울 문학은 제 생각에는 아마 로씨야어로 쓴 우리 고려인 작가들의 문학일 것이다. 다행히 지금 우리 문단에는 로씨야말로 글을 쓰는 재간 있고 전망이 있는 신예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작품은 오라지 않아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쏘련에서도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또 조국 본토에서도 우리말로 쓰지 않은 작품이 조선-한국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론쟁이 많이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처한 립장에서 볼 때 아직은 우리 고려인 작가들이 고려인들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은 범민족문학권에 포괄하는 것이 선책이라고 생각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이 진공시기가 짧고 하루 빨리 우리말 문학이 부흥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말이 3, 40년 전에 한진이 진단한 ‘고려인 문단’의 현실이고 보면, 지금 고려인 문단이나 그와 유사한 수준의 다른 지역 한인들의 문단은 거의 완벽하게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왕성하게 이민을 떠나는 미국의 경우라면, 한인문학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새로 태어나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영어로, 한인 1, 2세들은 한국어로 문학창작을 지속함으로써 ‘미국 내 한국문학의 맥’은 이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진의 말대로 러시아어로 창작하는 고려인들에 의해 ‘고려인 문학의 맥’은 이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대로 ‘러시아문학’일 뿐 ‘한국문학’은 아니라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해외 한인들의 자손을 우리나라에 데려와 우리 말 교육을 시키는 방안도 있겠지만, 그 역시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일 터. 해외 한인공동체가 건실하게 성장하고, 그런 공동체들을 바탕으로 한국어와 현지어가 함께 구사되기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어와 현지어를 사용하는 세대들이 공존하거나, 이중어를 사용하는 후속 세대들이 늘어날 때 ‘한국어문학’과 ‘현지어문학’의 병행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의 국력도 해외 한인들의 정치ㆍ경제적 지위나 민족의식도 다 함께 높아져야 그런 일이 가능해질 것은 당연하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해외 한인문학의 연구’는 ‘해외 한인문학 지속의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 학술토론의 주된 논점이었다.

 

 

 

 

 
                                                        유선모 교수

 

 



                                                       강진구 박사

                                              



                                            사회를 보는 윤세형 선생

 

 



                                             토론 마무리 멘트-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30. 16:55

 

 

 


            원동지역으로부터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도착하여 토굴을 파고 살던
   우쉬또베 교외의 황무지. 지금은 공동묘지로 바뀌어 있음.

 


고려인들이 최근까지 거주하다가 모두 떠나 폐허가 된 우쉬또베 인근의 모쁘르 마을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막달레나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들과 함께[수도 민스크에서]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고려 시인 '이 스따니슬라브'

 

 

우쉬또베의 바스쮸베 언덕에서 김병학 시인과 이 스따니슬라브 시인.
뒤쪽으로 보이는 하얀 시설물들이 고려인들의 공동묘지임.[2006년]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호텔 로비에서 소설가 블라지미르 김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 선생의 손녀 한율리아와 김병학 시인.[백규 연구실에서]

                                                                                 

 

 

*이 글은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의 머리말인데, 몇 분의 요청으로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고려인들과 ‘고려인 문학’

 

 

긴 여정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오래 전의 고려인이 되어 그들이 겪어 온 ‘탈향과 이주’의 역정을 추체험하는 길이 간단치 않았다. 그들의 자취를 찾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이른바 CIS[독립국가연합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에 속한 몇몇 나라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곳들에 상상 속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없었다. 김경천 장군의 말발굽 소리도, 홍범도 장군의 신출귀몰도, 작가 조명희의 빛나는 문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기만 한 디아스포라의 역정(歷程)에 지치고 힘들었던 것일까. 자신들이 지켜오던 우리 말 아니 고려 말이 현실 속에서 그리도 무거운 짐이었을까. 스탈린의 폭력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標識)를 내려놓은 그들이었다. 외모와 약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고려인’이라는 민족의 칭호만 뺀다면, 그들에게서 동족으로 생각할만한 요소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유창한 러시아어를 굴리는 그들의 혀 밑에 우리말이 깃들 틈은 더 이상 없었다. 말을 잃으니 문학과 역사를 잃고, 문학과 역사를 잃으니 민족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그들의 지난날들이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옛날 가설극장 영사기의 낡은 필름 돌아가듯 반복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다. 민족의식의 희미한 끈이나마 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1세대 고려인들은 고려극장의 창고 한 구석에 버려진 이름으로 쳐 박혀 있거나 우쉬또베 근교의 황무지에 녹슨 묘비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 고려인 2세와 3세들의 표정 너머에 아련히 남아있는 부모세대의 근심과 좌절을 읽어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모든 소수민족들은 러시아인이 되어야 한다’는 모토가 바로 스탈린이 표방한 동화정책의 핵심이었다. 흉포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해 그 땅에 들어간 소수민족들 중의 하나가 고려인들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또 다른 식민지인으로 타자화 되는 역사적 폭력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끄나풀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주변인’으로 낙인찍혀 제국의 공민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찍이 식민주의⋅억압과 피억압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내놓은 선구자 프란츠 파농의 ‘인종이 곧 계급’이란 말은 사실 고려인들에게도 들어맞는 명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이 해체되고 각 공화국들이 독립된 이후에도 고려인들은 또 다시 ‘새로운 주변인’으로 타자화 되었다. 각 공화국의 주도민족에 밀려 또 다른 소수자로서의 설움을 맛보면서 새로운 식민화의 함정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다. 이처럼 탈식민의 조류 속에 ‘새로운 식민화’의 굴레에 갇히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던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았으나, 이곳 또한 그들에겐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공고한 ‘중심부’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고국에서도 또 다른 주변인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최근 3년 가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한글로 기록된 1세대와 2세대 고려인들의 문학과 예술을 추적하는 고통스런 즐거움을 누렸고,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

 

그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다 꼽을 수는 없으나, 물설고 낯 선 중앙아시아에서 밝은 눈과 귀가 되어 준 김병학⋅이 스타니슬라브⋅김 블라지미르⋅김 빅토리아 등 몇 분은 특히 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김병학 선생으로부터 받은 도움은 결정적이었다. 젊은 나이에 카자흐스탄으로 건너 가 한동안 한글교사로 활약한 뒤 고려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해오고 있는 그를 능가할 만한 ‘중앙아시아 고려인 전문가’는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반영된 귀한 자료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그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그는 국내에서 여러 권의 고려인 관련 서적들을 출간함으로써,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관심이나 수준을 괄목할 만큼 높인 사실도 강조하고 싶다. 이런 인재를 발탁해 쓰는 게 나라의 할 일이다.

 

감사하게도, 이 연구 작업을 위해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제공했고, 학자의 뜻을 세우던 시기에 손을 잡아주신 도서출판 태학사의 지현구 사장님을 27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구 활동의 한 부분을 결산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망외(望外)의 소득이다. 고전문학도로 살아오던 중 우연히 ‘해외 한인문학’을 만나 탐구 영역을 넓히게 되었고, 그 한 부분인 ‘고려인 문학’을 수탐하여 미흡하나마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된 점을 큰 행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소담스런 책으로 만들어 주신 태학사 한병순 부장의 노고에 감사하며, 강호제현의 아낌없는 叱正을 고대한다.

 

 

2013. 6.

 

 

달마산 아래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Posted by kicho
알림2013. 8. 2. 16:05

 


책 표지


1980년대의 한진


                                                        1988년에 펴낸 <<한진 희곡집>>


1965년작 <의부어머니>


1991년 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2011년 8월 백규 연구실에 만난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한양대 박사과정 재학)와 저자들

 

 

조규익 교수(숭실대 국어국문학과)와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김병학 선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 7.]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2로 펴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작가 한진 선생만큼 복잡다단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이는 드물다. 그는 북한에서 인텔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기간에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고 1948년에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에 들어갔다. 공부에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곧바로 학업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전쟁의 와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도 변함없이 최우등의 학업성적을 보였다. 시쳇말로 그는 ‘최고의 스펙’을 쌓은 전도유망한 청년학도였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안정과 명성이 보장된 미래를 던져버리고 돌연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가 격화되면서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예술은 이념의 시녀로 추락하고 있던 조국이 더 이상 기쁘게 돌아가 양심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의 작품들은 그의 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네 단계로 나뉜다. 망명과 정착 과정에서 갖게 된 콤플렉스를 ‘원 모성으로부터의 절리(切離)와 새로운 모성의 발견 및 정착’으로 형상화시켰다고 보는데, 이것을 1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새로운 조국과 이념의 발견]이라 할 수 있고, <의부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등이 이에 속한다. 정착지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지극한 사모(思母)의 정이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조국 북조선의 현실이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2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모정에 대한 그리음과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량반전>, <산부처> 등이 이에 속한다. 2-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천명된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은 소련의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고, 그에 따라 그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풍자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체제의 모순을 비판할 수도 있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으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 3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주제의 다각화와 다양한 미학의 추구]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상황의 변화 덕분이었고, <토끼의 모험>, <나 먹고 너 먹고>, <폭발> 등이 이에 속한다. 4단계에 이르러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진으로서는 이념이나 힘의 우위가 아니라 동질성에 입각한 ‘분열된 민족의 통합’만이 가장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통해 이 시기의 이면적 주제의식[민족통합의 당위성 추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표면상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살아갔지만, 이면적으로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이나 정서를 추구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갔다고 본다. 그 결과 그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극작품들은 독특한 미학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밝혀진 것만 해도 12편의 희곡, 19편의 단편소설 및 소품, 5편의 단행본, 16편의 번역극, 수 미상의 평론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창작 및 번역 희곡들 대부분은 최근까지 고려극장을 통해 상연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영영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는 그가 일평생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었지만, 그는 이 아픔을 자신이 창작한 희곡에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쓴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마라」는 오직 한진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국통일에 대한 독특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전을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과 북의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해답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던 한진이 소련에 유학하던 첫해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며 평생을 붙들고 다듬어온 구상으로,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어릴 적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사진 및 원고사진들을, 후반부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과 연구를 각각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배출한 구소련의 뛰어난 극작가 한진의 전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차례

머리말

 

제1부 사진 및 기록자료

1장. 사진

1. 평양 시절

2. 소련 모스크바 유학 시절

3. 러시아 바르나울 시절

4.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절

5.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전반기)

6.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후반기)

2장. 편지

3장. 육필 원고

4장. 신문 게재 원고

5장. 책․잡지 게재 작품 및 글

6장. 기타 자료

7장. 작품 목록

1. 희곡

2. 단편소설․소품

3. 직접 편찬했거나 편찬을 주도한 단행본

4. 번역 작품

   

 

제2부 한진의 생애와 문학

1장. 한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

2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 세계

3장. 한진 희곡의 고전수용 양상

4장. 한진의 연보

5장. 참고문헌

 

Posted by kicho
알림2013. 7. 13. 15:21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총서 42/태학사]이 출간되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즉 구소련 지역에 거주해 오는 고려인들의 한글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출간한 것이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다. 구소련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생산 및 소비 체제는 정부에서 관장하던 전문예술단(혹은 기관)과 함께 각 지역의 꼴호즈나 솝호스 등 생산단위 별 소인예술단들이 담당하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카자흐스탄 극성 꼴호즈의 ‘가야금 가무단’이나 뽈리뜨옫젤 꼴호즈의 ‘청춘 가무단’ 등 꼴호즈를 비롯한 생산현장이나 고려인 일반대중 사이에서 활동하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 소인예술단이며, 1932년 원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세워진 ‘원동변강 조선극장’을 모태로 여러 지역으로의 이전과 개명(改名)의 과정들을 거쳐 1968년 카자흐 공화국 내각 결정에 의해 알마틔로 옮겨져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 음악극 고려극장’으로 최종 정착된, 이른바 고려극장이 전문예술단(혹은 기관)이다. 이들 예술단에서 창작⋅공연한 한글 노래들과 드라마 등을 분석하여 주제의식과 문예미학 등을 찾아낸 것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총서: 고려인의 문예미학, 그 정맥을 찾아

 

제2부 소인예술단과 한글문학

 

제1장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적 지향

Ⅰ. 생산현장과 소인예술단

Ⅱ.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생산 및 향유방식

Ⅲ. 구소련의 미학과 국문노래들의 주제의식

Ⅳ. 민족적 형식과 대중미학

 

제2장 고려인 노래의 전통노래 수용

Ⅰ. 전통노래와 변이의 당위

Ⅱ. 고려인들의 전통 민요와 변이의 단서

Ⅲ. 지속과 변이, 그리고 문화접변 현상

Ⅳ. 문화접변과 보편정서

 

제3장 고려인의 한글노래와 디아스포라의 정서

Ⅰ.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당위

Ⅱ.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문학적 형상화

Ⅲ. 디아스포라 의식의 관습성

 

제3부 전문예술단[고려극장]의 한글문학

제1장 고려극장의 존재의미와 가치

Ⅰ. 고려극장과 고려인

Ⅱ. 고려극장의 발자취

Ⅲ. 공연된 연극의 내용과 흐름

Ⅳ. 민족의식, 연극, 고려극장

제2장 고려극장에서 불린 한국어 노래들의 의미

Ⅰ. 전문예술집단으로서의 고려극장

Ⅱ. 가창된 노래들의 텍스트 양상 및 갈래

Ⅲ. 주제의식의 양상

Ⅳ. 고려인 민족예술미학의 메카, 고려극장

 

제3장 고려극장 1세대 극작가 연성용의 희곡과 고전 수용 양상

Ⅰ. 고려극장의 개척자, 연성용

Ⅱ. 예술적 성과에 관한 평가

Ⅲ. 고전의 발견과 재해석 향상

Ⅳ. 고전의 재해석과 변용

 

제4장 극작가 태장춘의 희곡과 역사 수용양상

Ⅰ. 고려극장과 태장춘

Ⅱ. 작품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평가

Ⅲ. 텍스트의 성립과 내용적 짜임

Ⅳ. 작가의식 및 주제

Ⅴ. 연극 미학적 해석의 모범적 선례

 

제5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새 고려인’으로서의 한진

Ⅱ. 언어와 민족문학, 고려인 문단에 대한 관점

Ⅲ. 주제적 관심과 미학적 성취

Ⅳ. 새로운 연극미학의 수립

 

제6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고전을 통한 현실의 해석

Ⅱ.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를 통한 봉건체제 비판

Ⅲ. 봉건 착취에 대한 비판과 디아스포라의 정서

Ⅳ. 두 작품의 공시적⋅통시적 위상

Ⅴ. 고전의 해석과 연극미학의 수립

 

제4부 총결: 민족 문예미학으로 피어난 디아스포라의 역정

참고문헌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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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6. 7. 16:33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제공:김병학>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 백규 연구실에서>

 

율리아와의 만남

                                                                                                    백규

몇 년 간 중앙아시아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고려인 극작가 한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승을 뜬 지 올해로 19년째. 말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국립고려극장 문예부장을 지낸 그였다. 10여 편의 희곡작품, 19편의 단편소설,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등을 오롯이 모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김병학 시인이 정리했고, 내가 꾸려나가는 연구소에서 문예총서의 하나로 펴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인가. 책을 펴낸 지 얼마 후 국제한인문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연구’라는 테마의 국제학술회의에서 기조발제<관련 글 보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려극장에서 활약한 극작가를 중심으로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이미 한진의 작품들을 확보해 놓은 터에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병학 선생이 또 하나의 낭보를 보내왔다. 한양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에게 연락해 두었다는 것. 발표회장에서 그녀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자체가 멋진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텍스트를 읽었다. 작품을 읽는데, 모르는 사이에 간간 눈물이 흘렀다. 작품들의 행간에서 그의 외로움과 슬픔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갈등과 방황, 현실과의 밀고 당김을 통해 결국 민족을 발견하게 된 그의 집념이 감동적이었다.

한진은 누구인가. 북한의 극작가 한태천과 모친 박성수 사이에서 1931년 태어난 그는 천재였다. 역사와 전통의 광성중학을 2년만에 마치고 평양제일고급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8년 김일성 종합대학 노문학부에 입학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그의 지도교수이며 훗날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 정상진이었다. 정상진은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장(1948~1950)과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1952~1955)을 지낸, 당대 굴지의 재사였다. 정상진으로부터 문학원론과 세계문학을 배운 한진과 그의 친구 이진[이경진]은 당시 최고의 수재로 인정을 받던 북한의 꿈나무들이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면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전쟁에 참여했고, 1952년 여름 대학으로 돌아와 외국유학시험을 치르고 유학생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인 10월 모스크바 영화대학 시나리오 학과에 입학했다. 모스크바에 유학한 조선 최고의 수재들은 그들의 조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그곳의 분위기에 취하면서 비로소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때마침 흐루시쵸프가 등장하여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전쟁 후 김일성은 자신의 개인지배를 강화해 나갈 요량으로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을 속속 숙청하고 있었다. 마침 당시 연안파로 몰려 파직 당한 모스크바의 북한대사 이상조의 망명 소식은 소련의 심장부에서 자유의 맛을 본 지성인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고, 한진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몇 고비의 우여곡절을 거쳐  1958년 8월에 망명을 결행했고, 시베리아 바르나울시 TV 방송국 책임편집위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를 만나 결혼했다. 그 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옮긴 그는 영화사진연구소, 레닌기치 등을 거쳐 고려극장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설과 희곡창작을 지속한 것은 물론이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말년인 1993년 7월 13일 「서울손님」이란 희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는 잠들었다. [*이상 한진의 전기적인 사실은 김병학의 '한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한진전집>>(인터북스, 2011) 참조.]

소련 고려인 문단의 최고 비평가 정상진도 인정한 바 있지만, 그는 고려인 문단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작품 형상화의 수준에서 여타 작가들은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이처럼 소련의 고려인 문단을 통틀어 미학적 차원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만한 작가로 그가 유일하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진과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브노브나 사이에 안드레이와 드미트리가 태어났고, 율리아는 안드레이와 러시아 여인 마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한진의 손녀 율리아가 러시안의 외모를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북한 지식층의 자녀로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전쟁에서 우리를 적으로 삼아 총부리를 들었던 한진. 그러나 넓은 세상에 나와 이념의 허망함과 남녘 동포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을 체제 경쟁에서 남쪽의 승리를 입증하는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언제나 현실이 이상을 압도한다는 인간세상의 자명한 진리를 보여 준 생생한 사례로 보아야 하는가?

어쨌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이 걸어야 할 미래의 길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그의 손녀 율리아를 바라보며 흐뭇하고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의 행복한 ‘오버센스’인가? <2012. 6. 7.>

*사진 위는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 아래는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백규 연구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