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9. 9. 16:08

       이르쿠츠크의 꿈, 러시아의 꿈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4

 

 

                                                                                                            조규익

 


우리는 바이칼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앙가라강과 이르쿠츠크 시가 개념도


아름다운 이르쿠츠크


앙가라강



이르쿠츠크 강


사진 찍으러 강가에 나온 한 쌍

 

725() 아침 무렵 단잠을 깬 우리는 하바로프스크 역에 잠시 내려 고려인협회장을 비롯 인사차 나온 여러 명의 고려인들을 만났다. 조선 볼셰비키 여성 혁명가인 김 알렉산드라, 19184월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임정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등이 활약한 역사적 공간이자 극동 최대의 도시가 바로 하바로프스크였다. 횡단열차를 탈 경우 모스크바로부터는 약 8,500km 지점으로, 7시간의 시차가 생기는 곳이다. 시의 중심부분은 우수리강과 아무르강이 합류하는 부분의 우안(右岸)에 있었고, 철도역사 뒤로 부요한 시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데,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듯 했다. 원래 러시아의 극동진출을 위한 거점이었으나, 1918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만난 고려인들과 헤어진 뒤 다시 열차에 올랐다. 그로부터 또 한밤을 새워 만주횡단철도(TMR: Trans-Manchurian Railway)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연결되는 카림스카야를 지나 울란우데를 만났다. 그 지역부터 환바이칼 코스가 전개되는데,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바이칼 호수와 시베리아의 밀림이 만화경처럼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울란우데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구간 최고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코스이자 몽골 횡단철도 분기점이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더 달려 바이칼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톡 출발 사흘째인 27() 오후 4시경. 72시간 만에 드디어 땅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참 아름다운 도시, 이르쿠츠크(Irkutsk)였다. 앙가라(Angara) 강과 이르쿠츠크 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하여 그 풍광이 기가 막혔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수도원들을 비롯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전통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돋보이는 것들은 예수공현 성당(Epiphany Cathedral), 즈나멘스키 수도원과 보고야블렌스키 성당(The Znamensky Monastery and the Bogoyavlensky Cathedral). 전자는 1718년 건축을 시작하여 1746년 완성된 성당이었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에게 봉헌된 후자 즈나멘스키는 시베리아를 대표하는 수도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은 이르쿠츠크 최대의 종교적 기념비이자 시베리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었다.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1689년 건립되었고, 보고야블렌스키 성당은 1693년에 건립되었으니, 300여년이 넘은 건축물들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막 완공한 듯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예수공현 성당


성당내부


성당 내부


즈나멘스키 수도원


시청 앞 영혼의 불꽃

 

러시아의 파리로 불리는 이르쿠츠크. 동 시베리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자 바이칼 호 서쪽 65km 지점에 위치하여 차분하게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여름 휴양지였다. 앙가라강을 통해 흘러드는 바이칼호수의 깨끗한 물이 한낮의 햇살에 반사되어 도시 전체를 청결하게 만들었다. 65만 명이 모여 사는 곳. 바이칼 호수 관광의 기점으로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이곳이 1920년 한인공산당이, 1921년 고려공산당이 창립된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버스는 칼 마르크스 거리를 지나 벨릐 돔 부근의 앙가라 강가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칼 마르크스 거리는 앙가라강변에서 도심 북쪽까지 연결된 중심대로로서, 길을 따라 박물관과 극장, 대학교 등이 늘어서 있었다. 우리의 관심은 우뚝한 동상으로 남아 있는 알렉상드로 3세와 현재는 이르쿠츠크 국립대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는 벨릐 돔. 알렉상드로 3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나, 정작 그 아들 니콜라이 2세에 이르러 제정러시아는 종말을 고했으니, 위대한 황제가 이룬 역사(役事)와 역사(歷史)의 아이러니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그 철도 덕에 개발의 시대가 개막됨으로써 버려졌던 시베리아에 온기가 돌았는데, 그럼에도 제정 러시아는 막을 내리지 않았는가. 그 동상에서 대각선으로 보이는 건물이 우리로서는 몸서리쳐지는 조선공산당 선언식이 있던 벨릐 돔이었다. 천만리 머나먼 곳에까지 와서 자신들의 정치적 결사체의 선언을 한 것은 이곳이 바로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의 핵심부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그 이유가 있었다. 식민 치하의 조국에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소련의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의식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바이칼로 떠나기 전 찾은 곳은 데카브리스트(Dekabrist) 박물관. 데카브리스트의 정신적 지주 세르게이 발콘스키(Sergey Volkonsky) 공작의 집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182512월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시도한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는 러시아어로 ‘12이니, 데카브리스트란 ‘12월 당원을 뜻한다. 182512,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낙후된 러시아를 살리기 위해 짜르 체제를 전복하려는 목적을 갖고 청년 장교들 100여명이 봉기했으나, 실패한 혁명이었다.

6백여명이 체포되고 121명이 재판을 받았다. 그 결과 주모자 5명은 교수형, 116명은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그 가운데 31명은 종신유배, 85명은 장기유배였다. 형이 끝난 뒤 이들의 상당수가 이르쿠츠크에 정착한 것이다. 실패로 끝난 혁명이었지만, 친 유럽적인 이들의 삶이 이르쿠츠크에 자유로운 유럽문화를 이식하고, 농노제의 폐지와 입헌정치의 실시 등 민주주의의 기풍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는 등 이 사건의 반향은 매우 컸다. 이들 모두 귀족의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은 시대에 저항한 혁명가들이었고, 그 정신을 대표한 사람이 바로 발콘스키 공작이었다. 발콘스키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20년 유형의 판결을 받아 1826년부터 네르친스크 탄광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1835년부터 1851년까지 이르쿠츠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1847년부터 이 집에서 살았고, 1851년 형기 만료와 함께 떠났으며, 이 집은 1985년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방들에는 피아노, 침대, 의자, 식탁 등 당시의 삶을 보여주는 생활 집기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사진도 잘 정돈되어 있어,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푸쉬킨의 시 낭송 소리가 들려올 것 같고, 피아노에서는 무도곡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비록 뜻은 꺾였으나, 출중했던 이상주의자 데카브리스트들이 시국을 담론하면서 잔을 기울이던 기개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비록 볼셰비키 혁명으로 마무리되어 오늘날의 우리를 괴롭히는 비극의 단초가 되긴 했으나, 러시아 청년장교들의 꿈은 누구나 본받아야 할 보편 이상으로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갑지만 시원한 동시베리아의 이르쿠츠쿠에서 자유혼을 크게 호흡한 우리는 다음 여정 바이칼호로 내쳐 달렸다.<계속>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1985년 박물관 개장날 몰려든 인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4. 20. 20:25
 

러시아 기행1


회색빛 알쫌공항과 자작나무의 기품



                                                                                                                       조규익

2008년 4월 3일, 인천공항 42번 게이트. 역사적인(?) 러시아 기행에 나서며 차분함과 설렘이 교차했다. 마피아의 천국, 악마처럼 생각되던 맑스․레닌주의의 원조, 매서운 시베리아의 눈보라,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툰드라의 혹한... 그간 멀게만 느껴지던 러시아였다. ‘그런 곳에 언제 가볼 것이며 꼭 가볼 필요까지야 있으랴?’라는 게 평소 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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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쫌 공항에서 내리고 있는 승객들>

그러다가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가 선조들이 피를 흘려가며 항일투쟁을 벌인,  ‘성지(聖地)’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최근이었다. 1920년 4월 4일의 참변은 우리 역사의 상처였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한반도의 영역 안에서 일어난 일들만 열심히들 토론하고 써내는 중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스리스크에서, 사할린에서, 빨치산스크에서, 하바로프스크에서 추위와 냉대를 무릅쓰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죽어간 우리의 이름 없는 선조들을 애써 외면해온 것은 아닐까. 4월 참변의 추모제와 국제학술대회의 한 축을 우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가 담당키로 한 일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

찬바람은 가슴을 파고들지만, 벚꽃들이 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으니, 계절은 봄의 문턱을 넘어선 셈이었다. 해맑게 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러시아 투폴레프 비행기의 움직임은 무표정한 승무원들과 러시아인들의 표정과 달리 산뜻하고 날렵했다. 두 시간 가까이 날아간 ‘인천-블라디보스톡’ 구간. 기내식이라고 주어지는 음식은 오늘날 러시아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두 시간 남짓의 만남 동안 단 한 조각의 웃음조차 보여주지 않던 승무원들의 표정처럼 차갑고 딱딱한 빵엔 이빨자국조차 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무성의의 표본이랄까.

 하늘에서 시곗바늘을 두 시간 앞당긴 뒤 도착한 알쫌은 비에 젖어 있었다.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인형처럼 굳은 제복 차림의 여군. 그녀의 눈매는 매우 날카로웠다. 저만치 초라하게 서 있는 북한의 고려항공을 ‘도둑촬영’하고자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그녀들은 바늘 끝만큼의 기회조차 허용치 않았다. 그녀들의 차가운 아름다움을 ‘도촬’하려던 곽원석 선생도 몇 번이나 시도하다가 그만두었다. 짐을 찾고 세관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들 앞에 우리는 손님 아닌 죄인들이었다. 흡사 잡아온 죄인들을 심문하듯 날카롭고 의심에 찬 물음들을 툭툭 던지는 그들이 고약했다. 알량한 우리의 호주머니를 털려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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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쫌 공항에서 현지 안내인 발렌찐-발레리아의 차에 짐을 싣고 있는 곽원석박사>

 가까스로 알쫌 공항을 나선 우리들은 발렌틴 선생의 차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석탄 타는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깔려 있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주변은 황량하고 집들은 대

체로 윤기를 잃은 채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에 떨고 있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단 하나. 황량함을 다소 지워주는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독일을 거쳐 넘어간 체코의 산들에서도, 크로아티아의 산록에서도 우리는 하얗게 서 있는 자작나무의 숨결을 체험한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자작나무의 물결도 동유럽의 그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동토의 땅 시베리아를 거쳐 이곳 동방까지 밀려 왔으리라.   

***

교통사고로 막혀버린 울퉁불퉁한 외길. 블라디보스톡까지는 1시간 40분이 소요되는데, 4시로 예정된 총영사와의 약속시간을 기약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들른 곳이 길 가의 러시아 식당 ‘밀레니엄’이었다. 한 방엔 수십 개의 식탁들이 놓여 있었고, 음악에 맞추어 무도를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공간도 있었다. 러시아와 중국 음식을 섞어놓은 듯한 서너 가지 요리로 시장기를 지운 다음 블라디보스톡 행을 포기하고, 길을 돌아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그 길 또한 자작나무의 수해를 뚫고 나 있었다. 산록 곳곳엔 러시아인들의 별장인 ‘다차’*들이 모여 각박함 속에서 여유를 구가하던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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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쫌에서 우수리스크 가는 길에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식당 밀레니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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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우수리스크. 인구 7, 80만의 블라디보스톡보다는 작지만 우리 고려인들이 오래 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는, 고향 같은 곳이다. 마침 햇살이 비쳐 들었다. 거리는 한산했으나, 정겹고 따스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최고급 호텔이었고,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우수리스크 호텔. 시설은 열악했으나 마룻바닥을 걸으니 울리는 구두소리가 정겨웠다.

 우리를 이곳까지 픽업해준 발렌틴 선생의 안내로 그의 부인 발레리아 선생, 그들의 딸 악사나, 고려신문 편집장 엘레나를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드루즈바(우정)’란 이름의 건물로서 자치회 회장인 김니꼴라이 선생의 소유였다. 이들과 우리 5인(반병률  교수, 김보희 박사, 곽원석 박사, 엄경희 교수, 나)과 이들의 협의 아래 추모행사와 학술행사의 모든 순서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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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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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건물 안의 고려신문사에서. 왼쪽은 편집장 엘레나, 오른쪽은 유망한 대중연예인 지망생 악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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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참변 추모비에서. 왼쪽부터 조규익, 엄경희, 김보희, 반병률, 곽원석>

석양 무렵 꼬마로바 1번지 근처에 세워진 4월 참변 추모비를 찾아, 추모식의 규모와 순서를 확정한 다음, ‘일출’ 식당에서 학술행사의 러시아측 파트너인 우수리스크 사범대학 린샤 교수를 만났다. 우수리스크 호텔의 침대에 피로가 솜처럼 젖은 몸을 누인 것은 밤늦은 시각. 아직도 피워보지 못한 고려인들의 꿈이 안타까운 순간순간이었다. 아, 우수리스크의 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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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엄경희 교수와 린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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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러시아 정교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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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시대부터 도시인들에게 교외의 땅을 불하해 주어 집을 짓고 야채 등을 자경(自耕)하여 자급자족하게 했었는데, 그럴 목적으로 지은 일종의 별장이 바로 다차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