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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29 스마트폰 2
  2. 2008.05.05 소에 관한 단상
글 - 칼럼/단상2010. 12. 29. 21:01

스마트폰

 

체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툭하면 시골 들판을 떠올려 비유하는 나 같은 촌놈들을 보면 분명하다.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쟁기와 써레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괭이와 삽이 전부였을 것이다. 논뙈기 밭뙈기에 들러붙어 괭이와 삽으로 파고 두드려 논밭을 손질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쏟은 인간의 피땀은 엄청났을 것이다. 쟁기와 써레가 등장하고 소를 동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허리를 폈을 것이고. 그러다가 경운기가 등장했고, 트랙터도 굴러다니게 되었다. 나는 시골에서 써레질을 하면서 경운기와 트랙터의 위력을 흠모한 적이 있다. 불행히도 나의 노부(老父)는 경운기와 트랙터의 시대를 맞이하고도 쟁기질과 써레질을 고수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젊은이들과 함께 ‘우당탕’ 경운기를 몰고 다닐 자신이 없으셨을 것이다. 아니, 물렁한 진흙 속에서 소와 교감하면서 느릿느릿 삶을 영위해온 우리네 부모들은 경운기의 재빠름을 수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게 못내 아쉬웠다.

 

그 때문인가? 중늙이가 된 지금도 나는 도구에 관심이 많다. 80년대 중반, 밤중 몰래 학원에 다니며 타자기를 배웠으면서도 꼬박꼬박 만년필로 원고지 수백 매 분량의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기계에 익숙지 않아서였을까. 그러나 우리 또래에게 흔한 ‘독수리 타법’을 웃어줄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 타자기 덕분이었다. 그러다가 ‘문서작성기’가 나오자 냉큼 갈아탔고, 컴퓨터가 나오자 겁 없이 달려들었으며, 오늘까지 업그레드 되는 족족 그것들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제 ‘아, 옛날이여!’를 외치며, 컴퓨터에 사로잡혀 되는 말 안 되는 말 가리지 않고 내뱉으며 사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로 여긴다. ‘286→386→펜티엄’으로 숨가쁘게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누구보다 빨리 갈아탔기 때문이다. 단어를 쉽게 외우는 기계, 환상적인 디지털 사진기, 사진 보관용 외장하드, 휴대용 복사기, 종이 안 걸리는 프린터, 등등. 이름을 대기에도 숨찬 많은 기계들을 그때그때 남들보다 일찍 어답팅해온 것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벅찬 기대감을 갖고 사용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좀 느긋하게 ‘지둘렸으면’ 성능도 개선되고 가격도 내려갔으련만,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남들보다 앞서서 그런 기기들을 널름널름 사 제꼈는지 참으로 한심한 내 청춘시절이었다. 그러니 내 곁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눈총을 받은 것도 당연했다.

 

그래서 휴대 전화기에 대해서만큼은 처음부터 인내심을 발휘하려 했다. 사실 휴대전화가 나올 때부터 내심 꼴불견들이란 생각을 했다. 집과 연구실에 놓인 전화기만으로도 충분 이상인데, 막중한 국가대사를 수행하는 것도 아닌 친구들이 무엇 때문에 손바닥만한 기계를 들고 걸어다니며 급하지도 않은 말들을 지껄이는지 도통 납득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학교 학생들까지 휴대폰을 쓰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 스마트폰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아들놈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다. 들어보니 환상적이었다. ‘고놈’ 하나만 들고 있으면 ‘만사OK'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살짝 들었다. 트위터란 것을 잘만 활용하면 내가 상대하는 학생들은 물론 소설가 이외수처럼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수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번거롭게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은행과 거래를 할 수 있고, 이메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단어공부도, 영화감상도, 독서도 할 수 있고, 신문을 읽을 수도 방송을 듣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일일이 기억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기능들이 나를 유혹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내가 스마트폰을 갖고 나자 갖가지 문제점들을 알려주었다. 은행거래나 이메일의 기능은 해킹의 위험이 있으니 쓰지 말라 하고, 민감한 정보는 절대로 올리지 말라고 겁을 주는 것이었다. 트위터를 열었으나 내 강의에 들어오던 한 녀석만이 내게 팔로윙을 해주었을 뿐이다. 내 전화기의 트위터를 클릭하면 이외수의 글만 몇 페이지에 걸쳐 빽빽하게 올라와 있을 뿐이니, 그간 내가 올린 ‘주옥같은 글들’은 과연 누가 읽고 있단 말인가.ㅠㅠ

 

***

 

길을 걸어가는데 평소에는 연락도 하지 않던 누군가가 전화를 해왔다. 왜 전화를 했느냐고 물으니, 그는 되레 나보고 ‘왜 자기에게 전화를 걸었느냐?’고 묻는다. 아뿔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전화기를 끄지 않은 채 호주머니에 넣었더니, 무심결에 내 손에 닿은 전화기가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불러낸 모양이었다. 아, 이 스마트폰의 무지막지한 민감함이여!

문자를 찍으려 해도 둔감한 손끝이 자꾸만 오타를 낸다. A의 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실수로 B의 번호를 눌러 황급히 끊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둔중한 내 생체리듬과 스마트폰의 민감함이 빚어내는 불화는 가뜩이나 피곤한 삶을 더 괴롭게 하는 나날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고 만다면 ‘얼리 어답터’의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을 터. 눈 꼭 감고 ‘천수만의 새우 튀듯’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스마트폰을 다루는 10대 아이들을 부지런히 곁눈질하리라. 혹시 아는가? 1년만 고생하면 환상적인 새 삶이 열리게 될지. 어쨌든 스마트폰 만세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5. 5. 19:22
 

소에 관한 단상


                                                                           조규익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유화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광우병이 빈발했고, 미국산 소에 광우병의 인자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니 미상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어느 방송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구인들에 비해 광우병 발병 가능성이 두 배 가량 높은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까지 했다.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이다. 한쪽에서는 문제없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큰일 났다 하는데, 우리 같은 서민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그 뿐 아니다. 광우병에 온통 신경을 쓰다 보니 우리나라 축산 농가들의 어려움은 뒷전이 되어 버렸다. 미국 쇠고기 들어오는데 광우병 논란만 해소되면 축산 농가들 줄 도산하는 건 큰 문제 아니라는 뜻일까. 국민 전체가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끙끙대는 형국이다.
               
 미국 쇠고기에 관련된 ‘학술용어들의 복잡성’ 또한 도통 알기 어렵고, 마땅히 따져 물을 곳마저 없다. 검역주권이니 프리온 단백질이니 MM형이니, 나같이 무식한 사람들은 매우 곤혹스럽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귀동냥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은근히 걱정되는 일 하나가 있다. 한 10년 전쯤인가. 1년 남짓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값싼 LA갈비를 배불리 먹은 우린데, 들어보니 광우병의 잠복 기간이 10년이란다. 그간 우리 몸속에서 숨죽이며 잠복해 있던 광우병의 바이러스(?)란 놈들이 발광할 시점인데, 그렇다면 이것 참 야단 아닌가.^-^ 배고픈 동족들 몰래 미국 땅에서 허리띠 풀어놓고 갈비 뜯은 죗값을 비로소 받는 게 아닌가 하여 은근히 켕기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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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독일 여행 중 알펜 가도의 한 농가 목장에서 만난 독일 소들>
 ***

 우리 국민 전체가 광우병의 볼모가 될 판에 무슨 한가한 타령이냐고 핀잔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소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내 부모는 농사꾼이셨고, 나는 흙 속에서 자랐다.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 소는 반려(伴侶)로 대접받던, ‘동물 아닌 동물’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시어 소죽을 끓이시던 아버지의 기침소리와, 사방으로 번져가던 구수한 소죽 냄새에 우린 덜 깬 잠을 털고 일어나야 했다. 배부름에 만족스러운 누렁이의 고삐를 거머쥔 채, 나는 온몸에 차가운 이슬을 받으며 아침마다 백사장으로 달리곤 했다. 남들보다 먼저 무성한 풀밭의 성찬을 누렁이에게 맛보이기 위해서였다.
 길게 쇠 바(소고삐에 이어 묶은 밧줄)를 늘이고 쇠말뚝으로 고정한 다음 부리나케 달려 이십 리나 떨어진 학교로 달려가는 것이 오전 중의 내 일과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책보를 집어던진 다음 백사장의 누렁이에게 달려간다. 하루 종일 시달렸을 누렁이의 갈증과 허기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언덕 너머로 달랑거리며 내 작은 체구가 나타나면, 누렁이는 ‘음메~’소리를 길게 뿜으며 반가움을 표하곤 했다. 쇠말뚝을 뽑자마자 쇠 바를 서릴 사이도 없이 나와 누렁이는 언덕 너머 둠벙으로 내달렸다. 누렁이는 ‘쭈욱 쭉’ 소리를 내며 촘촘히 자라난 부들 풀 사이로 고개를 박은 채 한 배 가득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난 큰 체구의 누렁이가 초등학교 3학년 꼬마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 촉촉한 눈망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땐 몰랐지만, 아마도 고마움의 표시였으리라.
  서해바다를 물들이던 황혼을 등지고 누렁이와 내가 다정한 친구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소죽 끓는 집으로 돌아오면, 내 일과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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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소와 송아지>
***

그렇게 그 시절 소는 우리의 가족이었다. 그는 봄철이면 논갈이와 써레질을 해야 했고, 틈틈이 밭도 갈아야 했다. 그 뿐인가. 한 해에 한 번씩 발정기가 되면 아버지는 누렁이를 이웃 동네의 수소에게 데리고 가셨다. 농사일이 끝나는 겨울이면 누렁이는 어김없이 ‘이쁜’ 송아지 한 마리씩을 우리에게 안겨주곤 했다. 누렁이가 보여주던, 일에 대한 철저함과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린 내 눈에도 경이로웠다. 세상만사를 달관한 고행의 수도자처럼 누렁이는 땡볕에도 싫은 내색 한 번 보이지 않고 묵묵히 쟁기를 끌었다. 그의 희생 덕에 우리는 한 섬지기가 넘는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삶을 이어나올 수 있었다.

***

그 옛날 우리네 부모들은 소를 상전으로 모셨다. 소와 함께 살아가는 한, 하루 이상의 출타는 불가능했다. 소에게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먹이를 만들어 먹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누렁이는 가고 없다. 그의 빈자리는 경운기와 트랙터의 굉음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시원한 목장에서 맛난 풀을 뜯으며 노역(勞役)의 신산함을 잊어버린 새로운 누렁이들. 그러나 그들의 눈망울엔 새로운 불안감이 가득하다. 주인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마지막엔 한 점 살코기로 변해 주인의 몸으로 스며들던 우리네 누렁이들. 그러나 그들도 이젠 사람들의 잔인한 탐욕과 무절제를 어떻게든 경고할 수밖에 없으리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수도자처럼 그저 묵묵한 태도와 덤덤한 표정으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