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21. 11:54

 

 

 

 

길 이야기

 

 

 

 

 

그대는 우울한 시절 햇살과 같아

그 시절 지나고 나와 지금도 나의 곁에서

자그만 아이처럼 행복을 주었어

 

~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든 가야만해

 

혼자서 걸어간다면 너무나 힘들 것 같아

가끔이라도 내 곁에서 얘기해 줄래

그 많은 시간 흐르도록 내 맘속에 살았던 것처럼

 

사랑도 사람도 나를 외면했다고 하지만

첫 새벽 공기처럼 희망을 주었어

 

오랫동안 소리 없이 내게 살아왔던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모처럼 접해 본 윤도현의 노래 <>이다. 행복한 사람도 상처를 입은 사람도 살아있는 이상 걸어가야 하는 것이 길이다. 길을 말하다가 너에 대한 사랑으로 끝맺는 윤도현의 노래가 좀 낯선가. 작사자는 누군가 먼 길을 가다가 문득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길동무로서의 를 발견했을 것이다. 혹은 를 통해 함께 걸어가야 할길을 예감했거나 함께 해야 할운명을 깨달은 건 아닐까. 그래서 윤도현의 와 함께 함으로써 운명적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가. 아니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이 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없다.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그건 길이 아니다. 언젠가 시작되었겠지만, 그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 길이고,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는 것이 길이다. 잘 찾아간 것으로 여겼지만, 곰곰 생각하면 잘 찾아간 길이 아닌 경우가 전부다. 그래서 다시 출발점을 찾지만, 그 찾으려는 출발점도 마치 끝인 양 잘 찾아지지 않는 것이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이 길다의 형용사와 관계가 깊은 명사라 한다. 옛 사람들은 마장으로 그 길이를 가늠해왔고 현대인들은 kmmile로 그 길이를 재고 있지만, 그건 그냥 인간의 짧은 인식이 만들어놓은 편리한 단위일 뿐이다. 끝인 것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길인데, 그 길을 누가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길을 찾다 보면 시작과 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지 않는가.

 

누군가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 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한시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웃으며 쉬면서도 갈 길을 걱정해야 하고, 다 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다시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갈 길과 돌아오는 길은 한 치도 끊어지지 않는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걸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사이에 부지런히 올레길을 찾고 둘레길을 찾으며 골목길을 헤맨다.

 

길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이 가면 길이 되고 길을 내면 사람이 다닌다. 그래서 인간세상에 길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옳은 길그른 길을 구분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길이 옳았는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시간의 기준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길을 찾아왔으나 제대로 찾은 사람은 많지 않고, ‘올바른 길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지만, 올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길을 찾으러 길을 나서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발로 밟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길이나 찾아다니며 맛볼 따름이다.

 

***

 

미국에 체류하면서 휴일이나 휴가에는 반드시 길을 나선다. 남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오클라호마 주는 미국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갖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음지에 속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식민주의'가 백인들의 원죄라면, 그 원죄의 역사적 표본을 이곳에 만들어 놓은 그들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새로운 삶터를 건설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백인들.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쫓겨나 눈물의 장정[Trails of Tears]’이란 쓰라림을 맛보며 대부분 오클라호마의 한 구석에 강제로 정착당한 인디언들. 그들 두 부류의 인간들은 오늘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클라호마주 전역 교통도

 


이번에 여행을 하고 있는 치카샤 및 촉토 인디언 지역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른바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 그늘을 확인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물론 각종 휴가나 방학 등을 활용하지만, 길이 너무 멀어서 쉽지 않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길의 매력에 있다. 내가 지금 사는 곳과 가려는 곳이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그 연결고리로서의 길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의 길들은 넓고 곧다. 특히 가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오클라호마의 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솜씨 좋은 장인이 대지에 그은 미학적 직선처럼 보인다. 그저 자를 대고 종이 위에 쭉 긋는 선이 미학이나 철학을 갖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대지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직격(直擊)하는 선은 생명이나 미학, 혹은 철학과 직결된다. 그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직선의 미학이 이곳 길들에는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동안 내가 천착해온 ‘66번 도로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직선으로 쭉 뻗은 오클라호마 주의 길들에는 들어 있다는 것이다.

 

 


Route 66 표지판

 


클린턴에서 스틸워터 오는 도중

 

땅이 넓으니 그런 것 아닌가라고 항변할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다만 나는 이미 나 있는 길들의 해석적 의미, 혹은 내 나름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길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장 큰 요소는 인공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길을 따라 형성된 도시나 주택 등 인공의 구조물들은 철저히 자연의 질서와 호흡을 함께 하는데, 그 점이 그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요인이다. 땅 넓이에 비해 사람 숫자가 턱 없이 적으니, 굳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아니라 어떤 나라라도 이런 도로들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엘크에서 클린턴 가는 도중

 

6개월 가까운 기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길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다. 자동차를 몰아 스위스의 산하를 건너고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잊을 수 없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다 밑으로 잠기는 듯한 충격을 스위스에서 운전하는 동안 느꼈기 때문이다. 동쪽의 바리항에서 서쪽의 나폴리까지 이태리를 횡단할 때 느낀 평화로움과, 프랑스 남부로 가기 위해 몽블랑 산맥의 터널을 넘을 때 느꼈던 혼돈과 재생의 희열을 그 후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프랑스 중남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하이웨이와 독일 로만틱 가도를 달릴 때의 편안함과 드라이버로서의 자긍심을 그 후 다시 느껴본 적이 없다. 동유럽 루마니아를 종단하면서 열악한 도로사정과 그들의 험한 운전 관습 때문에 흘린 땀과 긴장감을 그 후 어디에서도 다시 체험하지 못했다.

 

 


엘크 시 초입


치카샤에서 촉토로 넘어가는 길 어디쯤

 


OSU 중심을 가로지르는 먼로 길[Monroe Street]

 

***

 

15년 전 LA에 머물 때 간헐적으로 미국 안에서의 장거리 운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때 달리던 캘리포니아 서쪽의 1번이나 101번 해안도로를 잊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를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을 종단할 때의 그 천상에 오른 듯하던기분도 잊지 못한다. 미국 서부지역 사막지대의 가물가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난데없는 폭우를 만나 흔들거리던 차 안에서의 말 못할 두려움 또한 잊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시도 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길과 운전자들이다. 땅은 좁은데, 사람도, 차도 많아 참으로 운전하기 어렵다. 시간은 없는데 도로가 막히면 짜증이 난다. 교통신호나 법규를 지키려다간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규정 속도를 지키려다간 뒤차 운전자에게 모진 욕설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집단 스트레스에 걸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평소에 점잖고 존경받는 사람도 일단 핸들만 잡으면 매우 거칠어지는 것이 우리나라라고들 말한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누구나 세계 어딜 가도 최고의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끼어들기 천재, 앞지르기 천재, 신호위반 천재, 차선 안 지키기 천재, 경적 심하게 울리고 라이트 번쩍거리기 천재, 창유리 내리고 욕설 퍼붓기 천재 등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숨을 건 곡예운전의 달인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운전을 그만 두어야 그나마 제 명대로 살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

 

미국에서는 길, 특히 오클라호마 주와 같은 전원지역의 길들 덕분에 행복해진다. 야산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 사이를 달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진다. 길 좌우에는 목장이 이어지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검정 소들이 가끔 고개를 들어 달려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목초지에서 베어낸 풀들을 말아놓은 건초뭉치들도 흡사 십대 남자 아이 얼굴의 여드름처럼 아름답게 돋아 있다.

 

 


킹피셔 인근 지역도로

 


킹피셔 인근지역에서 포착한 지평선 위의 소들

 


치카샤에서 촉토로 가는 도중, 산중의 한 목장을 지나면서 만난 소들. 이들을 가까이 보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더니 글쎄 이 녀석들이 웅얼거리며 걸어와 우리를 유심히
쳐다 보더군요. 우리가 그들을 구경한 게 아니고,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형국이었지요.
      사람 보기 어려운 산 속의 목장에서,동양인을 보기란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신기한 눈초리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의 모양을 보며
내심 얼마나 멋쩍던지요.

 


촉토 인디언 지역[이곳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한 산악지역임]에서 만난 길

 


치카샤 지역의 길을 달리다가 만난, 어떤 목장 입구

 


토우손(Towson) 포트(Fort) 근처 길가에서 만난 농장입구[아마 주인 부부의 이름이겠지요?]

 

그 뿐 아니다. 땅 속에서 원유를 퍼내는 검은 색 채굴기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것들은 흡사 사마귀처럼 끄덕거리며 원유를 길어 올린다. 흡사 까치집처럼 생긴 겨우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은 교목들이 길 좌우에 즐비하고, 다운타운을 벗어난 도시 외곽의 나무숲에는 멋지게 지은 집들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을마다 하얀색의 교회들이 하늘 높이 첨탑을 높이 올린 채 서서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쳐져 흥미로운 서사구조들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그래서 길은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고, 각종 사건을 재료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발효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사랑하고 길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마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글로벌 시대에 누군들 역마살을 피해갈 수 있으랴. 그리고 어쩌면 역마살이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의 매력에 심취한사람들일 것이다. 역마살이 끼었대도 좋으니, 의미를 찾아 방황할만한 좋은 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스틸워터로 돌아오는 길에 잡은 한 컷[주택 옆에 목장이 있고,
그 곁에서 원유채굴기가 작업을 하고 있음].


아무 보는 사람 없어도 끄덕거리며 혼자서 열심히 원유를 길어 올리는 장한 채굴기

 


177번 도로를 달리다가 발견한 소규모 인디언[Iowa Tribe] 집단 거주지의 표지판

 


오클라호마주 길 위에는 늘 태양이 빛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8. 15:31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3: 클린턴 시티(Clinton City)‘66번 도로 박물관[ Rt. 66 Museum]’-

 

 

 

손 형,

 

엘크시티를 떠나 동북쪽 30분 거리에 있는 클린턴시티로 가는 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득히 넓은 들판의 연속이었소. 가끔 고개 들어 우리를 쳐다보는 소떼들과 끄덕거리며 땅 속의 기름을 길어 올리는 사마귀 모양의 원유 채굴기 만이 시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움직임의 전부였소. 거칠 것 없는 바람은 그 들판 위를 달리는 차를 흔들어 나그네의 마음을 마냥 스산하게 만들었소. 그저 에머럴드 빛 하늘에 번지는 새하얀 구름만이 땅 위에 깔린 초록빛 목초와 어울려 그나마 운전자의 지루한 마음을 달래 줄 뿐이었다오.

 

 


엘크 시티에서 클린턴, 엘 르노, 오클라호마 시티 등이 표시된 66번 도로(I-40) 주변 지도

 


엘크시티에서 클린턴 오는 길에 만난 들판의 관개시설(?)

 

 

***

 

넓은 대지 위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 있는 클린턴시티는 엘크시티보다 더 휑했소. 그러나 이곳에도 역시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소. 우리나라는 역사가 길어 대도시를 제외한 소규모 도시들은 유래를 알기 어렵고, 도시 형성에 관련된 스토리 또한 딱히 찾아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 아니오? 그러나 미국은 역사가 짧아서인가 도시 형성의 유래가 분명하고, 영고성쇠(榮枯盛衰)로 요약되는 역사의 굴곡 또한 분명하더이다. 처음에 우리는 이 도시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일가와 관련이 깊을지도 모른다는 가소로운 추정을 해보았소. 빌 클린턴의 기반 지역인 아칸사 주는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해 있는 만큼본관(本貫)을 가진 한국인들처럼 그 옛날 클린턴 가문도 이곳에서 일어난 뒤 그 쪽으로 이주했으리라는, 그럴듯한 상상을 했던 것이오. 그러나 뮤지엄 관계자에게 물어보자마자 일언지하에 ‘No!’랍디다.

 

 


클린턴 시청 

 


클린턴 다운타운 입구의 시원한 모습

 


66번 도로 박물관 앞에 세워진 윌 로저스 기념비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에서 만난 각 도시의 관광안내서들

 

 

1899년 아반트(J.L. Avant)와 블레이크(E.E. Blake)가 와쉬타(Washita) 강 옆의 계곡에 도시를 세우기로 결정한 데서 클린턴시티는 출발을 보았다고 하오. 이 지역 인디언들로부터 320 에이커의 땅을 사들여 와쉬타 지역 교차점에 작은 정착지를 조성함으로써 클린턴 지역 공동체는 시작되었소. 1902년 의회로부터 승인을 받음으로써 와쉬타 공동체는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커스터 카운티 크로니클 신문사(Custer County Chronicle Newspaper)’1국립은행(The First National Bank)’ 같은 기관들이 지역 사업체로서는 처음으로 등장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체국이 신설되면서 체신부가 와쉬타 교차점이라는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자 세상을 떠난 이 지역 재판관 클린턴 어윈(Clinton Irwin)’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것이오.

 

어쨌든 클린턴 시티는 66번 도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해 왔고, 그 덕분에 많은 이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소. 66번 도로 가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클린턴도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업종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지요. 예컨대, 각종 레스토랑, 까페, 모텔, 주유소, 자동차 정비소 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 업소들 가운데 하나만 예를 든다면, ‘팝 힉스 레스토랑(Pop Hicks Restaurant)’ 같은 경우는 66번 도로에서 가장 오랫동안 운영되던 식당이었다지요. 말하자면 길에서 돈이 생기는환상적인 체험을 적어도 66번 도로가 거쳐 가는 도시민들은 절감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이 도로가 쇠락의 길을 걷다가 다시 부활한 것도 이 길과 이해를 함께 한 사람들의 추억 덕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옛날의 영광이여, 다시 한 번!’이란 인간 욕망의 구현이라고나 할까요?

 

 


66번 도로 박물관에 협찬한 기업들과 인물들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접수대 및 매점)

 


66번 도로와 각 지역의 우편 스탬프

 


당시 66번 도로 가에 있던 방울뱀 쇼 포스터

 

 

1970년대만 해도 이 도시를 우회하던 I-40¹[Interstate highway #40]이 오늘날엔 이 도시를 통과하게 되었고, 많은 길들이 이에 연결됨으로써 이 도시는 이 지역에서 매력적인 관광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렀다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가까운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와 오클라호마 시티를 연결하는 66번 도로 가의 큰 도시들 중의 하나이자 여행객들을 위한 중간 쉼터로서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는 거지요. 이 도시 안에 일찍부터 해군비행단과 군용비행장이 있었고, 그에 따라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많은 부침(浮沈)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 도시가 66번 도로와 함께 되살아난 점은 길이 인간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66번 도로 박물관[Rt. 66 Museum]을 찾았어요. 규모는 엘크시티의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보다 작았으나, 질 높은 컬렉션과 정제된 기획력이 돋보이는 박물관이었어요. 특히 66번 도로의 역사성을 미국 현대사나 문명의 변화와 직결시킴으로써 길과 인간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다른 어떤 박물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었어요.

 

 


66번 도로 박물관

 

 

66번 도로의 개통 및 변화, 길 주변 도시들의 영고성쇠 등과 정치경제사회의 변화가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지요.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의 산물이 바로 66번 도로였고, 2차 세계대전과 산업의 발전이 이 도로를 쇠락하게 만든 주범이었으며, 과거에 대한 집단적 회상과 추억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이 이 도로를 부활시킨 힘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고비마다 위대한 대통령들이 등장하여 그런 분위기를 견인해 나온 미국 현대사의 물결이 바로 이 도로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너무 과한 해석을 한 걸까요?

 

 


1928년 66번 도로를 만들던 당시 사용하던 시멘트 믹서

 


66번 도로를 닦던 당시 작업 모습과 도구

 


가뭄으로 고통을 겪던 당시, 66번 도로 가에서 목격되던 이른바 'Dust Bowl'의 참상

 


66번 도로 가의 목화 수확 장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 소식

 


베트남전 당시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던 제인 폰다와 신인 정치인 존 케리(현재 미 국무장관)

 


지미 카터의 대통령 당선 소식

 

 

이런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세계 대공황으로 무너진 산업의 기반을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길이란 필연적으로 여행의 욕망을 부추기는 공간이고, 여행은 어쨌든 소비 행위라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2차 세계대전 같은 비상시에 소비행위는 억제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66번 도로의 쇠락은 필연적인 결과였겠지요. 전쟁 이후 산업화 시대에 들어오면서 새로운 길의 수요에 따라 66번 도로 대신 넓고 빠른 하이웨이들이 건설되어 효율성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그 길은 다시 쇠락의 길을 걸었지요. 그러나 다시 시대가 바뀌어 삶의 질과 내면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버려졌던 66번 도로는 부활하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66번 도로의 탄생-성장-쇠락-부활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컨셉으로 짜여 있는 곳이 바로 이 박물관이었어요.

 

 


당시 길가의 주유소

 


당시 버스 정류장 표지판

 


당시 66번 길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던 도시들

 


버스 대합실의 풍경[고약하게도 당시는 백인 대기실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음]

 


당시 66번 도로를 통해 전국으로 달리던 고속버스 그레이하운드의 트레이드 마크

 


당시 66번 도로를 달리던 화물차

 

"
당시 66번 길가에 있던 자동차 정비소

 


당시 66번 도로 휴게소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

 


당시 66번 도로가에 있던 카페

 


당시 코카콜라 서비스와 선전문구

 


당시 66번 도로 가의 카페

 


당시 66번 도로 가에 즐비하던 숙박업소들

 


당시 66번 도로에 설치되어 있던 각종 교통 표지판 및 경고표시들

 


당시 자동차에 사용하던 에어컨

 


당시 장거리 여행할 때 자동차에 갖고 다니던 유아용 젖병 보온기

 


당시 66번 도로 여행자들은 자동차 지붕에까지 짐을 싣고 다녔다.

 


66번 도로 부활 운동의 소식

 


66번 도로가 황폐화 되고 폐쇄된 여러 모습들

 


66번 도로에 관한 소식

 


66번 도로를 사랑한 작사가 바비 트룹

 


66번 도로에 관한 노래들과 가수들

 



66번 도로에 관한 노래들을 담은 음반들

 

 

***

 

우리는 클린턴에 와서야 비로소 미국인들의 꿈과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뚜렷한 철학과 방향을 갖고 있는 두뇌들이 역사를 견인하고, 그 외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합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들을 뒤따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1세기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66번 도로는 탄생과 쇠락, 부활의 과정을 거쳤지만, 그거야말로 2세기 남짓한 미국 역사의 축도(縮圖)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제 판단이지요. 책임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뚜렷한 해명을 들은 건 아니지만, 66번 도로를 사랑하는 미국인들의 심리 저변에 이런 철학이 잠재되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봐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바로 클린턴 시티의 ‘66번 도로 박물관[Rt. 66 Museum]’이었어요.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번으로 넘기지요. 그 때까지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66번 도로 박물관 로비에 각국어로 쓰여진 인사말 간판

 


박물관을 살펴보고 나서 방명록에 쓴 백규의 소감

 


엘크시를 떠나기 앞서 

 

 

¹ I-40은 미국에서 I-90, I-80에 이어 세 번 째로 긴 -서 주간(州間) 고속도로. 그 서쪽 끝은 캘리포니아 주 바스토우(Barstow)I-15이고, 동쪽 끝은 117번 도로와 북 캐롤라이나 주 윌밍턴의 북 캐롤라이나 하이웨이 132번과 합쳐진다. 오클라호마 시로부터 바스토우까지 I-40 서쪽의 많은 부분은 역사적인 미국 66번 도로와 병행하거나 겹쳐진다. I-4010개의 주요 -남 주간 고속도로들가운데 여덟 개(I-5I-45를 제외한 모든 것)와 교차하고, I-24, I-30, I-44, I-81 등과도 교차하는 만큼, 미국에서 가장 쓰임새가 많은 도로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8. 13:18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2: 엘크 시티(Elk City)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t. 66 Museum Complex]’를 보고-

 

 

 

 

손 형,

 

2,400마일에 달하는 66번 길은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에서 시작하여 캘리포니아의 산타모니카까지 8개 주[일리노이(Illinois)-미주리(Missouri)-캔자스(Kansas)-오클라호마(Oklahoma)-텍사스(Texas)-뉴멕시코(New Mexico)-애리조나(Arizona)-캘리포니아(California)]에 걸쳐 있고 시간대도 세 개나 들어 있으니, 이 도로의 길이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이 길이 주변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미국의 간선도로[Main Street of America]’, ‘미국 도로의 어머니[Mother Road of America]’ 라는 별명들까지 얻게 되었지요.

 

 


66번 도로가 통과하는 8개 주

 

 

이 길은 숱한 질곡의 역사를 겪기도 한 것 같습니다. 길을 만들기 위해 전국 규모의 추진 기구를 만들어 각 주의 동의를 얻고, 길을 뚫고 포장을 하고, 각종 부대시설을 만드는 등 지난(至難)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거쳐 이 길은 태어난 것이지요. 그러나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하이웨이가 뚫리고, 그것이 각 방면의 다른 길들과 연결되면서, 기존의 66번 도로는 버려지게 되었고, 그 도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도시들과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겠지요.

 


남 미주리주, 스프링필드 바로 남쪽 옛 철교와 길의
황폐화된 모습 


황폐화된 66번 도로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건물


66번 도로 가의 황폐화된 식당 간판

 

 

그러나 언제부턴가 버려진 채로 죽어가던 66번 도로의 가치가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지요. 자연스럽게 그 길은 새로운 모습으로 회생하게 되었고, 주변의 도시들 역시 쇠락의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 기지개를 켤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만, 그 과정들은 매우 극적이었겠지요?

 


국립 66번 도로박물관의 네온사인

 

 

66번 도로가 지나는 곳곳에 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여러 권의 책과 팜플렛,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이런 사연들이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어쨌든 애버리[Cyrus S. Avery]라는 사람이 AASHO[the American Association of State Highway Officials]의 회장이 되어 66번 도로를 완공했다 하여 그를 ‘66번 도로의 아버지[the Father of Route 66]’라 부르는 모양인데, 그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이라는 점은 66번 도로를 공유하는 다른 주들과 달리 오클라호마 주의 한 복판을 대각선으로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는 사실과 흥미로운 연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군요.

 


66번 도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버리(Cyrus S. Avery)

 

 

사실 이 도로가 오클라호마 주와 일리노이 주만 중앙을 관통하고 있을 뿐, 나머지 주들의 경우 형식적으로 걸쳐 지났다는 것이 저 만의 느낌인지 모르겠네요. 미주리 주에서는 하단을 지났고, 캔자스 주에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하고 지났으며, 텍사스 주에서는 북부의 일부를 통과한 정도지요. 그나마 뉴멕시코와 애리조나가 북쪽으로 약간 치우치기는 했으나 관통한 경우로 볼 수 있고, 캘리포니아는 남쪽을 통과하여 산타모니카로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군요. 더구나 주도(州都)인 오클라호마시티를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지요. 그는 어쩜 이 도로야말로 미래의 역사적 공간으로 영속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고향인 오클라호마 주에 긴 부분을 할당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여덟개의 주를 통과하는 66번 도로

 

 

오클라호마 주 안에 배당된 66번 도로의 길이도 시기마다 약간씩 달라지는데요. 1926년의 추정 거리는 415.4 마일이었는데, 1936년에는 383.7 마일, 1944년에는 381.7 마일, 1951년에는 368 마일로 점점 줄어들었어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길을 고치거나 포장을 새로 하면서 굽은 길을 펴기도 하고 지름길을 찾아내면서 그렇게 된 것이나 아닌가 합니다만. 어쨌든 총 연장 2,400 마일의 8개 주 산술평균이 300 마일인데, 400마일 가까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 도로의 큰 몫을 오클라호마 주가 갖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네요.

 

 

이 도로가 지나는 오클라호마 주의 큰 도시들만 헤아려 보아도 열 개가 넘어요. 아래 텍사스 주 쪽부터 꼽는다면, 에릭(Erick)-세이어(Sayre)-엘크(Elk)-클린턴(Clinton)-웨더포드(Weatherford)-엘 르노(El Reno)-오클라호마시티(Oklahoma City)-아카디아(Arcadia)-챈들러(Chandler)-스트라우드(Stroud)-새펄파(Sapulpa)-털사(Tulsa)-클레어모어(Claremore)-빈타(Vinta)-마이애미(Miami) 등으로 연결되지요. 물론 이 도시들 사이사이에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도시들까지 포함하면 이 도로에 연결된 도시들은 무수하지요.

 

 


오클라호마 주 내의 66번 도로

 

 

 

글쎄요. 우리는 이들 가운데 몇 군데나 둘러보았을까요? 맨 처음 오클라호마시티와 아카디아를 들렀고, 그 다음이 털사와 유콘, 그리고 최근 엘크 시티와 클린턴을 들렀네요. 사실 오클라호마시티를 다녀오는 길이면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66번 도로를 탔다가 177번을 만나 스틸워터로 방향을 틀곤 했으니, 66번 도로는 우리에게 꽤 낯이 익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몇 군데도 못 돌아 본 주제에 무슨 66번 도로를 말하려 하느냐?’고 책망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어디 한 솥의 국물을 다 마셔야 국 맛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된 겁니다.

 

 


오클라호마주의 66번 도로 지도

 

 

저는 이미 아카디아의 라운드 반[Arcadia Round Barn], 털사(Tulsa)의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 유콘(Yukon City)의 유콘 역사박물관[Yukon Historical Museum] 등을 둘러보고 그 공간들이 갖는 의미나 느낌들을 적어 이곳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앞쪽에 올린 미국통신 10, 12, 27을 참조해 주세요].

 


66번 도로 가에 있는 아카디아(Arcadia)의 라운드 반(Round Barn)

 

 

엊그제 우리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66번 도로를 통과하게 되었지요. 달라스로부터 포트워쓰(FortWorth)를 경유하여 오클라호마 주 66번 도로 상의 엘크 시티에서 1박을 하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클린턴 시티를 둘러본 다음 이곳 스틸워터로 귀환했지요. 그래서 이곳에 엘크와 클린턴의 뮤지엄 방문기를 중심으로 66번 길에 관한 인상을 남기려 하는 겁니다.

 

달라스 가는 길도 엄청나게 멀었지만, 달라스를 탈출하여 엘크로 돌아오는 길도 그에 못지않더군요. 달라스를 빠져나오는 데만도 스무 번 가까이 길을 바꿔 탔으며, 완전히 빠져 나온 후에도 십여 개나 다른 길을 거쳤으니, 미국의 길들이 넓고 곧으며 길게 뻗어 있긴 하지만 길을 한 번 잘못 들면 한참 고생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요. 어쨌든 달라스의 숙소로부터 계산하여 5시간 가까이 걸려 엘크시에 들어왔습니다.

 

고층빌딩들 중심의 다운타운을 갖고 있는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의 어느 도시나 그렇습니다만. 이곳도 평탄한 들판에 넓은 중앙로와 주변도로들을 중심으로 양 옆에 띄엄띄엄 집들이 들어서서 시가를 형성하고 있더군요. 다만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거리에 따라 약간씩 고풍이 느껴지는 곳들도 있고 새롭게 형성된 신시가지나 상업지구들이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갖고 있는 점은 아주 좋았어요.

 


엘크 시에 들어오며

 

 

엘크 시티가 언제 출발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1541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코로나도(Francisco Vásquez de Coronado)가 이 지역을 통과한 첫 유럽인이긴 했으나, 실제로 엘크 시티의 역사는 오클라호마 서부 지역에 셰이옌-아라파호족 (Cheyenne-Arapaho)의 보호구역이 문을 연 1892419일을 출발로 보아야 한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군요. 이 때는 첫 백인 정착자들이 모습을 드러낸 때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이 도시 역시 아메리칸 인디언과 인연이 깊은 곳임은 말할 것도 없어요.

차를 몰고 시내에 진입하자 낮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깔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고, 보자마자 걷고 싶은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 먼저 박물관을 찾기로 한 우리는 잠시 달려 신시가지 끝부분에 넓게 조성된 박물관을 만났지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박물관들이 하나의 부지 안에 세워져 큰 단지를 형성하고 있었지요. 이 도시의 작은 규모에 비하여 꽤 큰 박물관 단지라고나 할까요? 여기서는 이 단지 이름을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National Route 66 Museum Complex]’라고 부릅디다. 이 안에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National Route 66 & Transportation Museum]’,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등이 들어 있었어요.

 


엘크시 '옛 동네 박물관'의 건물과 입간판

 

 

우선 옛 동네 박물관[Old Town Museum]’에 들어갔지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할머니 큐레이터가 우리를 안내하여 가정생활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코너와 각종 생활사 자료들을 둘러 보았지요. 초기 오클라호마 주 개척자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어요. 1층에는 초기 개척자의 삶, 성조기들, 아메리칸 인디언 갤러리,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수잔(Susan Powell)의 사진과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고, 2층에는 초기 카우보이와 로데오에 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사실 2층에 전시된 많은 것들은 유명한 로데오 증권 도입자인 뷰틀러(Beutler) 형제들이 기증한 것들이라네요. 참 대단합디다.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거실 및 식당)


 '옛 동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가정의 모습(아이들 방)


옛날 생활용품들


당시 피아노


엘크시티의 역사를 보여주는 휘장


생활사 자료실


1981년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엘크시티 춣신의 수잔(Susan Powell)


로데오로 유명한 뷰틀러(Beutler) 형제들


로데오 회사 지분 일부를 뷰틀러의 아들에게 결혼선물로
양도한다는 증서


로데오 관련 포스터와 의상 및 소품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들


당시 카우보이 관련 자료 및 랜드런을 소재로 한 그림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로데오 경기 포스터


당시 카우보이를 묘사한 그림

 

그 다음으로 들른 곳이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이었어요. 그곳에 들어서자 길 가는 이들을 유혹하기 위해 길 주변에 흔히 있던 것들이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되어 있습디다. 옛날 풍의 차들, 주막, 레스토랑, 자동차 번호판 등과 미국 하이웨이의 서사적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문건들로 전시장 안이 가득 차 있었어요. 특히 1955년도에 만들어진 핑크색 캐딜락, 자동차 영화관에서 고전적인 쉐보레의 임팔라(Impala)를 타고 앉아 감상하던 흑백영화 등이 압권이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전시된 각종 자동차들은 애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눈길을 잡아 두는 효과를 발휘하는 듯 했어요.

 


매점 등이 들어 있는 건물


66번 도로 표지판들


66번 도로 표지판 도안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당시 차량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소장된 자동차와 도로 상황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인디언 가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생활사 자료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차량 번호판들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셰보레에서 출시한
당시 최고급 자동차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화물적재 트럭


국립 66번 도로와 운송 박물관에 전시된 주유소와 군용 지프

 

 

거기서 나와 길을 건너니 붉은 색의 창고 형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데요. 오른쪽이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Farm & Ranch Museum]’, 왼쪽이 대장간 박물관[Blacksmith Museum]’ 이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없어서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만 보기로 했지요. 박물관에 들어서자 그곳을 지키시는 노인이 우리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대뜸 물으시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니까 자신이 21살 때(1954) 부산에 미군으로 주둔해 있었다고 하시네요. 그 후 원주, 강릉 등으로 주둔지가 바뀌었던 모양인데, 고령으로 말씀은 어눌하셔도 우리나라에 대한 기억들을 분명히 갖고 계셔서 아주 반가웠어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는 서부 오클라호마주 초기 농업과 축산업자들의 생활에 쓰인 도구들이 광범하게 수집, 전시되어 있었어요. 대장간의 실제 모습, 각종 풍차 콜렉션, 트랙터의 각종 시트, 각종 수수 탈곡기, 가시철망 콜렉션 등이 이채로웠어요.

 


왼쪽은 '대장간 박물관', 오른쪽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 


'농업과 축산업 박물관'에서 만난 80대의 노인 관리자[21세 되던 1954년
한국에 파병되어 부산, 강릉, 원주 등지에서 근무했다 함)


박물관에 전시된 풍차


트랙터


농기구 전시장


밭을 갈던 트랙터의 일종


당시 주유기


당시 전화기들과 전화선 수리공의 모습


각종 농기구들의 전시장


당시의 각종 공구


당시의 각종 공구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는 미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풍차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농업에 바람을 이용한 이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지요. 지금도 이런 모습의 풍차들은 들녘에 많이들 서 있었어요. 말하자면 삶의 역사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모습이었지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자 철로와 역사(驛舍)가 재현되어 있고, 당시 사용되던 엄청난 증기기관도 생생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어요.

 


농업과 축산 박물관 밖에 전시된 각종 풍차들


엘크역에 근무하던 역장의 모습


당시 열차의 증기기관


재현해 놓은 당시의 오페라 하우스

 

 

***

 

텍사스 주를 기점으로 할 경우 66번 도로상에서 엘크는 에릭(Erick), 세이어(Sayre) 등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게 되는 거점도시인 셈인데, 우리가 둘러본 박물관 역시 규모나 내용상 그에 걸맞은 것들이었어요. 우리는 특히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꼈지요.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은 대부분 1980년대 말에서 1920~1930년대의 것들이었는데, 특히 자동차와 농업기계들에서 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시기 우리는 어땠나요? 사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의 농촌에서는 꼬박꼬박 지게로 짐을 져 나르고, 괭이와 쟁기로 논밭을 갈아 왔거든요. 그 경험을 저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 어머니와 함께 목화밭에 나가 한 송이 두 송이 여린 손으로 목화를 따 앞자락에 담던 기억들이 왜 그렇게 가슴을 저리게 하는지요? 그런데 이들은 당시에 모든 일들을 기계로 해내고 있었어요. 목화 따는 일은 물론 목화로부터 솜을 뽑아내는 일까지 일관작업으로 해내는 기계를 이 박물관에서 목격하고 말았답니다. 하기야 끝이 보이지 않는 농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계가 필수적이었겠지만, 우리와 너무도 대비되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더군요. 요즘 아이들 말대로 이들과는 잽도 안 되는우리가 이제 기술이나 무역의 면에서 이들과 경쟁을 벌이는 위치로까지 올라섰으니, 장하지 않아요? 가끔은 우리 스스로 자랑도 하고 살아봅시다. 어쨌든 다음 날 클린턴(Clinton)을 거쳐야 하는 우리는 조용히 깊어가는 엘크의 밤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었지요.<나머지는 다음번에 계속됩니다>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


당시의 우물


농기구 전시장에서 


오클라호마 지역의 가축 우리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0. 14:53

 

 

우린 언제쯤이나 존경할만한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미국에서 알래스카 주 다음으로 크고 캘리포니아 주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내 느낌으론 미국 내에서 최고로 부유한 텍사스 주[State of Texas]의 달라스(Dallas)시에 와 있다. 1836년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다가 18451229, 미국의 28번째 주로 흡수된 텍사스 주. 이른바 '바이블벨트'로 불리는 이곳과 오클라호마 등 중남부의 여러 주는 전통적으로 높은 공화당 지지율을 보여주는 등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미국 입성 이래 서서히 쌓여온 피로에도 불구하고 달라스 행을 무리하게 시도한 것은 아무리 바쁘고 귀찮아도 오클라호마 주와 인접한 텍사스를 생략하고 떠날 순 없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나 초조감 때문이라 할까?

 

16일 오후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난 17일 오전. 도착 당일부터 오클라호마와는 현저하게 다른 교통체계와 북적대는 인파에 지친 우리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로 당장 돌아가고픈 마음이 절실했지만, 그 욕망을 잠시 억누른 채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한 사람은 매사추세츠 주 출신의 35대 존 F.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529~ 19631122] 대통령, 다른 한 사람은 텍사스 출신의 43대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76~ ] 대통령이다. 케네디는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민주당적 대통령, 부시는 개신교 집안 출신의 공화당적 대통령이었다.

 


시민이 그려 박물관 계단에 붙여놓은 케네디 대통령의 초상화 

 

하버드대 정치학과 출신인 케네디는 44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46세에 암살되었고, 예일대 역사학과 출신인 부시는 200155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첫 임기를 마치고 2005년에 재선된 뒤 200963세까지 임기를 마친 행복한 인물이다. 정치경력으로는 케네디가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을 지냈고,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를 두 번째 역임하고 있었으니, 이만 하면 똑같이 대권을 거머쥔 두 대통령이지만 상당히 다른 인생역정을 걸어왔음을 알 수 있다.

 


취임연설을 하는 부시 대통령 

 

두 대통령의 가문이나 경력, 정치적 성향, 정책의 성패, 개인적 성격 등 자세한 사항들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 글에서 번거롭게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묘하게도 우리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에 이곳을 찾게 되었다. 그 점을 깨달은 우리는 달라스라는 같은 공간에 자취를 남긴 두 대통령을 찾아보고자 했다. 존경하는 대통령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다고 자탄하는 우리 입장에서 이 좋은 기회에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먼저 방문한 곳이 이른바 ‘6층 박물관[The Sixth Floor Museum at Dealey Plaza]’.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리 하비 오스왈드가 창틀에 앉아 총을 쐈다는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 마련된 박물관인데, 사실은 일종의 사건 전말 영상 기록관인 셈이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이 이용한 교과서 보관건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음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교과서 보관건물[오렌지색 건물] 6층 창문틀에서 오스왈드는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이 사진 속의 아스팔트 위를 지나던 케네디 대통령을 저격했다. 

 

19631122일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달라스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케네디 대통령은 딜리 플라자(Dealey Plaza) 인근의  교과서 보관창고 6층에서 오스왈드가 쏜 3발의 총탄 가운데 두 번째 총탄을 머리에 맞고 숨졌다. 이 사건의 전말이나 상세한 재판 과정, 저격범 오스왈드를 둘러싼 의혹 등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에 크나큰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래서 그런지 사건의 발발에서 종말까지의 전 과정을 40여 장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박물관의 핵심 컨셉이었다.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나자 암살사건의 전모와 함께 왜 미국인들이 케네디 대통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지를 석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외견상 허름하지만, 이 박물관은 매우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위치 및 사이트                                                            

                   
                                                              케네디 대통령 박물관 입구
                                                                                     


달라스를 방문한 케네디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시민들

 
                    어떤 시민이 그린 케네디 대통령

 
어느 초등학생이 표현한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애정

  

그 다음 방문한 곳이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George W. Bush Presidential Library and Museum]. 남부 감리교 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 캠퍼스 안의 부시 대통령 센터 안에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부시와 어머니 바버라 여사 및 부인 로라 여사 등을 비롯한 화목한 가족들, 학창시절과 군복무 시절의 각종 자료, 대통령 시절에 이룩한 대내외 업적들, 백악관 생활자료 등등. 엄청난 규모의 자료들이 생생한 사진들과 함께 기념관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대충 둘러보아도 대통령 스스로의 자부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나아가 세계인을 위해 미국 대통령이 걸어 온 영예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정말로 이국인인 내가 보기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대통령의 암살에 대한 전말이나 의혹, 기념관에 전시된 업적들의 화려함이 아니었다미국인들은 과연 대통령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걱정했던 대로 관람객이 많이 몰려 우리가 케네디 박물관에 입장하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고, 넓게 만들어진 부시대통령 박물관에서도 사람들의 어깨가 걸려 편안한 관람에 지장을 느낄 정도였다. 그 뿐 아니라 대부분 미국인들인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진지하고 긍지에 찬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 점들 만으로도 대통령에 대한 관심과 존경의 증거로는 충분했다.

 

케네디 박물관에서 만난 그들은 대부분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어폰에서 울려나오는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나는 40대의 젊은 대통령이 단 2년 동안 이룩한 업적에 놀랐고, 그가 바로 이곳에서 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물론 숱한 여인들과의 염문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고, 쿠바 미사일 위기나 흑인 민권법 등에 관한 대처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진실이 밝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아직은 비운의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을 크게 손상시키지는 않고 있는 듯 했다. 대통령이 피격된 지점의 길바닥에는 지금도 x 표시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내 눈에는 그것이 십자가[cross]로 보였는데, 어쩌면 미국은 폭력으로 점철된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케네디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나 아닐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 없이 이곳에  x 표시를  해 놓았으리라. 차라리 그어놓지나 말든지 이왕 표시하려거든 말뚝을 박아 새끼줄이라도 쳐놓든지. 공사장 인부들이 아스팔트에 굴착지점 표시하듯이 백묵으로 찍찍 엇갈려 그어놓은 모습이란! 그러나 그것이 미국인들의 장점이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피격당한 지점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 재키 여사


케네디 대통령 추모비


추모비 안쪽의 상석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는 역사 진행의 합리성에 맞추어 가고자 한 그의 노력들을 읽어냈고, 대통령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들로부터는 잔잔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 박물관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긍심과 존경심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흐뭇한 미소들을 띠고 있었고, 나 역시 그랬다. 물론 이라크 전쟁을 두고 부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정책의 실수 혹은 판단착오는 그것대로 계산하면서도 대통령으로서의 전체적인 공적이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는 일은 민주국민의 성숙한 자세일 수 있을 것이다. 

 


1994년 9월 12일 달라스의 Texas State Fair에서 아버지 부시와 함께.
부자 간의 다정한 모습과 미소가 국보급이지요?


세계적인 테러와 투쟁해온 부시 대통령


초등학교 교실에서 1일교사로 참여한 부시 대통령


어린이들의 건강 캠페인에 참여한 로라여사 모녀


2005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로라 여사가 어린이들과 함께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펼치는 부시 대통령


연례 100km 산악자전거 대회에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에서 오른쪽 발을 잃은
다니엘[Daniel Gade]소령을 부축하고 있다.


 자궁경부암과 유방암 치료를 위한 부시 연구소 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 잠비아 Kabwe의 Ngungu Health Center 리노베이션 작업에 나선 부시 전 대통령.
왜 우리 대통령들에겐 이런 모습이 없는 걸까요?


2000년 12월 대통령 당선자 부시의 인사말 "나는 한 당파에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으로
뽑힌 게 아니고, 한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뽑힌 것이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들의, 
모든 인종들의, 그리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대통령이다. 당신이 내게 표를 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나는 당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며, 당신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할 것이다."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조지 W. 부시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 앞면

 

그렇다면 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같은 자신들의 대통령이면서 서로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에게 똑같은 존경을 보내는 미국인들을 보며 나는 왜 슬픔을 느껴야 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내겐 그들처럼 존경할만한 우리 대통령이 없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직을 맡아 수천만 생령(生靈)들의 기대와 소망(素望)을 한 몸에 받은 입장이라면, 더구나 자연수명으로도 이제 살만큼 산 입장이라면, 무슨 세속적 욕망을 다시 추구하고 싶단 말인가. 아주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에라도 나서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받은 벅찬 사랑을 아주 겸허한 자세로 한 톨 한 톨 갚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었으련만, 하나같이 가당찮은 물욕과 권력욕에 찌들어 재직 중엔 신성한 대통령직을 더럽히고 물러나서도 오욕(汚辱)의 구렁텅이에서 지금껏 헤매고 있단 말인가. 국민들에겐 실망을 안겨주고 역사에는 더러운 자취를 남기는 그들을 어떻게 존경스런 대통령으로 대접할 수 있단 말인가.

 

케네디 박물관의 매점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샀다. 앤 보섬(Ann Bausum)<<Our Country’s Presidents>>란 책이었고, 이 책에는 조지 워싱턴부터 지금의 오바마 대통령까지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이란 자긍심 넘치는 책을 쓸 수 있게 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1. 02:08

 

 


카우보이 박물관 입구


카우보이 박물관 마당


카우보이 박물관 로비에 있는, James E. Fraser(1876~1953)의 조각작품 <The End of Trail>


인디언들의 생활 자수공예


인디언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들(아이들의 의상을 엿볼 수 있음)


인디언 아기들을 담아갖고 다니던 휴대용 도구


인디언의 생활공예(식물 줄기로 짠 바구니)


인디언들의 생활공예
   

카우보이들의 마구들


서부영화에 카우보이로 출연한 배우


레이건과 스탠윅이 출연한 서부영화 '몬태나의 캐틀 퀸' 포스터


서부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와 카우보이 소품들


서부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던 죤 웨인


카우보이 모자들


카우보이 의상들


카우보이 부츠들


서부시대의 마차


블랙 카우보이


서부시대 카우걸의 모습


서부시대 카우보이들의 침실



성장(盛裝)한 카우보이


카우보이의 의상들


카우보이의 마구 및 의상


카우보이의 재산인 소나 말의 등에 찍던 낙인


낙인의 도구와 글자의 뜻



로데오 경기 모습 
               
서부 개척시대 초등학교 교실
            
    Hollis Randal Williford의 Bronz <The Snake Priest, 1980>


                 
Tucker Smith의 유화 <The Return of  Summer, 1990>

      
Martin Grelle의 유화 <Teller of Tales, 2002>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을 보고-

 

 

몇 년 전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성서에 광야로 등장하는 사막지대의 한 곳에서 키부츠들을 만났고, 그것들을 통해 그 나라의 저력을 느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광야에 있다!’는 모토로 몸소 그곳에 들어가 사막을 옥토로 일구다가 생을 마친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인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15년 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들과 사람의 손때 묻지 않은 자연을 둘러보면서 미국의 미래가 함축된 역사의 힘을 느낀 적이 있다. 휘황찬란한 동부보다 거칠지만 힘찬 투쟁과 개척의 역사를 안고 있는 서부가 훨씬 발전적인 그들의 미래를 추동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 힘과 역사적 의미를 마음으로만 느낄 뿐,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

 

지금 우리는 미국의 중남부에 해당하는 오클라호마 주에 와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중남부이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백인들이 서부로! 서부로!’를 외치며 말을 타고 서쪽으로 몰려가던 당시에는 넓게 보아 이 지역 또한 서부의 일부 혹은 서부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쯤으로 보였으리라.

 

미국이 세계 최고 부자의 지위에 오르는 계기가 된 골드러쉬(Gold Rush). 각지의 인디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장관(壯觀), 데쓰밸리(Death Valley) 등에 남아 있는 당시 금광의 유허(遺墟)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서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시공(時空)이 바로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 이하 카우보이 박물관으로 약칭]’이었다.

 

오클라호마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5번 하이웨이와 63번 시내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기가 막히도록 절묘한 위치의 박물관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스틸워터를 출발,오클라호마 시티의 반즈앤노블 서점에 들러 주변 지역의 지도와 인디언 관련 참고서적들을 산 다음, 아름다운 숲을 끼고 달리는 63번 도로를 따라가자 산뜻한 외관의 카우보이 박물관이 나타났다.

 

***

 

이스라엘에 벤 구리온이란 영웅이 있어 집단농장 키부츠를 통해 광야를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듯, 광활한 서부를 품고 있는 미국엔 무수한 개척자들, 원주민들과 투쟁하며 서부를 활개치고 다니던 카우보이들, 그리고 그들을 알아 준 선각자 레이놀즈(Chester A. Reynolds)가 있어 미국 정신의 모델하우스인 카우보이 박물관이 태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카우보이 박물관은 드넓은 황야 오클라호마의 한복판에 찍은 화룡점정(畵龍點睛) 마침표인 셈이다.

 

카우보이, 보드빌(vaudeville) 연기자, 익살꾼(humorist), 사회평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윌 로저스(Will Rogers)의 기념관[오클라호마 클레어모어(Claremore)시 소재]을 보고 자극을 받은 레이놀즈는 카우보이 명예의 전당을 세우고자 했다. “나는 항상 자신을 카우보이, 카우보이 작가, 카우보이 익살꾼, 카우보이 배우 등으로 자처한 한 인물을 위해 세운 기념관을 보았는데, 윌 로저스 기념관의 내외장이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 때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내 마음에 떠올랐다. 서부를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다른 많은 카우보이들, 소몰이꾼들, 목축업자들은 어떤가? 왜 이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명예의 전당은 만들지 않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신선한가? 특정인을 기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서부를 만든 주역은 황야의 먼지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무명의 카우보이들과 개척자들이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의 건립을 위한 장정(長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일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었지만, 연방정부와 의회 및 각 주정부들까지 적극 나서는 등 거국적인 협조 아래 10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모았고, 각 지역의 경합을 거쳐 현 위치에 멋진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19656, 드디어 개관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거사의 장본인 레이놀즈는 개관을 보지 못한 채 1958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호소로 결국 힘을 합치게 된 미국은 개척시대의 꿈과 시련을 역사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대단한 컬렉션이었다. 카우보이와 목축, 인디언의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은 물론 수많은 서부영화들의 명장면이나 배우들이 생생하게 우리의 눈앞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빼고 달려들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죤 웨인도 모두 이곳에선 훌륭한 컬렉션의 한 소품일 뿐이었다. 각종 마구들, 무수한 총기들, 마차들, 인디언의 의상들과 생활용품들, 인디언 화가의 그림들, 재현해 놓은 그 시절의 거리 등 모두 그간 이 땅에서 전개되어 온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그 증거물들을 통해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이 벌이던 싸움의 현장도, 카우보이들의 힘든 삶도, 로데오 경기의 실감도 모두 미국 정신을 이루어 낸 역사의 바탕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미국의 주류는 개척 시대에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고, 지금까지 강제이주나 보호구역 지정 등 원주민 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어쨌든 카우보이 박물관 안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이 미국정신으로 용해수렴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갈등과 반목을 하나로 버무려 나갈 수 있게 하는 미국의 에너지가 이곳 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에서 바야흐로 맛있게양성(釀成)되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8. 31. 22:51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다시 미국에 가며 

 

 

도전과 힐링!

 

사실 도전과 좌절이야말로 인생을 엮어가는 날줄과 씨줄일 텐데, 그 좌절을 힐링으로 바꿔치기하는 세상의 지혜를 새삼 배우기로 한다. 도전을 통해 희망을 그리면서도 그 실현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좌절하거나 더 멋진 신기루를 찾아나서는 게 인간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러했다. 국문학도로서의 외길을 걸어오며 내 지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사유와 모색을 끊임없이 반복해왔고, 그것들이 바로 도전과 좌절이라는 최대공약수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내 분야의 블루오션이 해외 한인문학임을 깨달았고, 몇 년간의 여행을 마친 후 최근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란 책 한 권을 냄으로써 또 한 단계의 모색과 방랑을 가까스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해외 한인들의 문학을 제외할 경우 한국문학사에 대한 내 나름의 비전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나의 대책 없는 방랑벽을 잠재울 수 있었다. 결국 15년 전 UCLA에서 만난 재미 한인문학을 이번 기회에 다른 차원으로 모색하고 싶다는 욕망과 도전의 결기(決起/決氣)가 나를 추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

최근 Fulbright Commission에서 내 과제를 선정해 줌으로써 ‘Fulbright Researcher’ 혹은 ‘Visiting Fulbright Scholar’라는 영광스런 타이틀, 선망하던 미국의 대학가를 다시 밟게 되었다. 15년 전 선발되어 캘리포니아의 UCLA에서 나를 새로운 세계로 입사시킨 LG 연암재단의 해외연구교수와는 또 다른 의미의 학문적 커리어가 아닌가. 과연 1998년 이후 15년 동안 모색과 수정’, 아니 대책 없는 지적 방랑을 거듭해오던 연구도정에 내 나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까. 인식의 깊이와 폭을 넓히려는 무작정의 새로운 도전보다는, 그간 벌여놓은 너절한 공사판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후배들과 담소를 나눌만한 언턱거리라도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아내와 함께 17시간 비행의 고통을 감내하며 이곳에 날아온 이유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