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21. 10:09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언제부턴가 꼭 한 번은 상암벌에 나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거기서 붉은 악마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야성(野性)’을 흔들어 깨우고 싶다는 객쩍은 욕망을 슬그머니 가져본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몰래몰래 가는 눈치를 보이곤 하던 작은 녀석은 끝내 함께 가자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내 청춘은 저물고 말았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몇몇 곳에 폐허로 남아있는 기원전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혹은 극장]에 혼자 오도마니 앉아서 흥분에 달아오른 관중들의 함성을 상상하곤 했다. 우리는 지금 풋볼[American Football]의 나라 미국, 그 중에서도 풋볼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 OSU의 스틸워터에 와 있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 하면 야구를 떠올렸지만, 이곳에 와서 느껴보니 야구나 축구는 간 곳 없고, 풋볼이 이었다. 이 대학에는 큰 규모의 각종 경기장들이 여럿이고, 체육관 시설도 입이 벌어질 정도다. 그러나 규모나 인기도에서 풋볼을 능가할 종목이 없고, 풋볼 경기장인 분 피켄스 스테이디엄(Boone Pickens Stadium)을 능가할 경기장도 없는 듯하다.

 


멀리서 내려다 본 Boone Pickens Stadium



 Boone Pickens Stadium의 앞면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면서 게임데이(game day)’라는 생소한 말을 종종 들었고, 그 때마다 이 한적한 스틸워터에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외부의 차들이 모여들곤 했다. 큰 주차장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RV(Recreational Vehicle) 차량들로 가득하고, 거리 곳곳을 차단하여 차량통행을 막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풋볼게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 한 번은 직접 경기장에 가서 구경하리라 마음먹게 되었다.

 


게임데이 전날이면 이렇게 대부분의주차장에 RV들이 들어찬다


게임데이에 사람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경기장까지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나 티켓을 구하기 어려웠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거의 1년 전부터 대부분의 티켓이 매진된다는 것이었다. 가끔씩 온라인 사이트에 엄청 비싼 표들이 등장하거나 경기 당일 암표 등을 팔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OSU 대학원에서 테솔[Tesol;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을 전공하는 이웃집의 제이슨[Jason Culp]이 풋볼 티켓 두 장을 건네준 것이다. 아내와 장모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구경을 못 가는 바람에 남게 된 두 장의 티켓을 우리에게 선물로 건넨 것이었다.

 

미국 도착 거의 두 달 만에 드디어 미국 Big 12 경기연맹[Oklahoma State, Oklahoma, Texas Tech., Bayolr, Texas, TCU, West Virginia, Kansas, Kansas State, Iowa State] 에서 가장 오래되고 멋진 풋볼 경기장이자 미국 전역의 캠퍼스 안에 있는 것으로는 최고 경기장들 가운데 하나인 OSU의 분 피켄스 스테이디엄에서 난생 처음으로 풋볼 빅게임을 즐기게 된 것이다 

 

오전 1040분 입장. 장관이었다. 경기는 11시부터 시작된다는데 관객 6만 명을 수용한다는 스탠드는 온통 빈틈없는 오렌지 물결로 이미 꽉 들어차 있었다. 학교의 상징색인 오렌지 색 의상들을 입고 응원도구를 들고 나온 학생, 동문, 시민들이 경기장 3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이 경기는 매년 이 시기에 열리는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의 메인 이벤트였다] 그라운드에는 식전 행사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스탠드에서 운동장으로 몰려 내려오는 함성은 지축을 울렸다. 스틸워터 47천의 인구에서 학생과 직원을 합쳐 2만 남짓을 빼면 26천이 남을 것이니, 말하자면 OSU 학생, 교직원, 동문, 스틸워터 시민 등이 총동원 되어 스탠드의 6만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로서는 놀라운 팀스피릿(Team Spirit)’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게임 시작 전의 행사


게임은 시작되고


관람석에서 OSU 식 응원을 보내는 제이슨


2쿼터 이후의 막간 행사

 

경기는 4쿼터로 진행되었다. 각 쿼터 15분씩이었으나, 경기 진행상의 수시 중단, TV 광고를 위한 막간 공연, 작전타임 등이 추가되면서 11시에 시작된 경기는 오후 230분이나 되어서야 끝이 났다. 경기 내내 OSU 카우보이 팀과 텍사스 크리스찬 유니버시티 팀 간의 공방이 숨 막히게 벌어졌고, 대부분 홈팀의 응원자들인 스탠드의 관객들은 질서정연하게 일어나 손을 내뻗으며 ‘OSU Cowboys!’를 연호했다. 그 덕인가. 카우보이 팀은 TCU24:10으로 이기고 학생, 동문, 시민들에게 홈커밍의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경기를 보면서 그것이 서부 개척시대의 랜드 런(Land Run)’으로부터 나온 느낌을 받았을 만큼 미국 정신(American Spirit)’을 듬뿍 느낀 3시간여의 호쾌한 경험이었다.



                   경기를 벌이고 있는 양팀 선수들


 
                    경기장에서 열전을 벌이는 양팀 선수들

 

 


                              카우보이팀이 득점을 하자 카우걸이 말을 타고 등장한다               

 

OSU의 졸업생 분 피켄스가 2003년 대학 역사상 단일 기부로는 최대 액수인 7억 달러를 쾌척하여 세운 이 경기장. 그는 2005년 다시 165천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대학교 체육 경기 분과에서 수령한 기부금으로는 최대액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덕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이 경기장은 OSU와 풋볼 팀에게 환상적인 게임데이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대학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지근 거리에 최고 경기장을 마련하여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좋은 경기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장에는 풋볼 사무실, 미팅 룸, 스피드 및 컨디션 센터, 라커룸, 시설관리실, 선수 의료센터, 미디어 시설실, 명예의 전당, 트레이닝 테이블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무수한 공간들이 복합적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경기장으로부터 밀려나오면서 미국인들의 장점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단합정신, 모교 사랑, 질서 등이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 세 가지에서 그들이 우리보다 앞선 요인을 찾는 것이 과연 부질없는 일일까.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 관객들의 모습

 
                 관람석에서 Melania

            관람석에서 Jason과 그의 Father-In-Law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1. 02:08

 

 


카우보이 박물관 입구


카우보이 박물관 마당


카우보이 박물관 로비에 있는, James E. Fraser(1876~1953)의 조각작품 <The End of Trail>


인디언들의 생활 자수공예


인디언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들(아이들의 의상을 엿볼 수 있음)


인디언 아기들을 담아갖고 다니던 휴대용 도구


인디언의 생활공예(식물 줄기로 짠 바구니)


인디언들의 생활공예
   

카우보이들의 마구들


서부영화에 카우보이로 출연한 배우


레이건과 스탠윅이 출연한 서부영화 '몬태나의 캐틀 퀸' 포스터


서부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와 카우보이 소품들


서부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던 죤 웨인


카우보이 모자들


카우보이 의상들


카우보이 부츠들


서부시대의 마차


블랙 카우보이


서부시대 카우걸의 모습


서부시대 카우보이들의 침실



성장(盛裝)한 카우보이


카우보이의 의상들


카우보이의 마구 및 의상


카우보이의 재산인 소나 말의 등에 찍던 낙인


낙인의 도구와 글자의 뜻



로데오 경기 모습 
               
서부 개척시대 초등학교 교실
            
    Hollis Randal Williford의 Bronz <The Snake Priest, 1980>


                 
Tucker Smith의 유화 <The Return of  Summer, 1990>

      
Martin Grelle의 유화 <Teller of Tales, 2002>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을 보고-

 

 

몇 년 전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성서에 광야로 등장하는 사막지대의 한 곳에서 키부츠들을 만났고, 그것들을 통해 그 나라의 저력을 느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광야에 있다!’는 모토로 몸소 그곳에 들어가 사막을 옥토로 일구다가 생을 마친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인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15년 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들과 사람의 손때 묻지 않은 자연을 둘러보면서 미국의 미래가 함축된 역사의 힘을 느낀 적이 있다. 휘황찬란한 동부보다 거칠지만 힘찬 투쟁과 개척의 역사를 안고 있는 서부가 훨씬 발전적인 그들의 미래를 추동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 힘과 역사적 의미를 마음으로만 느낄 뿐,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

 

지금 우리는 미국의 중남부에 해당하는 오클라호마 주에 와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중남부이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백인들이 서부로! 서부로!’를 외치며 말을 타고 서쪽으로 몰려가던 당시에는 넓게 보아 이 지역 또한 서부의 일부 혹은 서부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쯤으로 보였으리라.

 

미국이 세계 최고 부자의 지위에 오르는 계기가 된 골드러쉬(Gold Rush). 각지의 인디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장관(壯觀), 데쓰밸리(Death Valley) 등에 남아 있는 당시 금광의 유허(遺墟)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서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시공(時空)이 바로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 이하 카우보이 박물관으로 약칭]’이었다.

 

오클라호마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5번 하이웨이와 63번 시내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기가 막히도록 절묘한 위치의 박물관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스틸워터를 출발,오클라호마 시티의 반즈앤노블 서점에 들러 주변 지역의 지도와 인디언 관련 참고서적들을 산 다음, 아름다운 숲을 끼고 달리는 63번 도로를 따라가자 산뜻한 외관의 카우보이 박물관이 나타났다.

 

***

 

이스라엘에 벤 구리온이란 영웅이 있어 집단농장 키부츠를 통해 광야를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듯, 광활한 서부를 품고 있는 미국엔 무수한 개척자들, 원주민들과 투쟁하며 서부를 활개치고 다니던 카우보이들, 그리고 그들을 알아 준 선각자 레이놀즈(Chester A. Reynolds)가 있어 미국 정신의 모델하우스인 카우보이 박물관이 태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카우보이 박물관은 드넓은 황야 오클라호마의 한복판에 찍은 화룡점정(畵龍點睛) 마침표인 셈이다.

 

카우보이, 보드빌(vaudeville) 연기자, 익살꾼(humorist), 사회평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윌 로저스(Will Rogers)의 기념관[오클라호마 클레어모어(Claremore)시 소재]을 보고 자극을 받은 레이놀즈는 카우보이 명예의 전당을 세우고자 했다. “나는 항상 자신을 카우보이, 카우보이 작가, 카우보이 익살꾼, 카우보이 배우 등으로 자처한 한 인물을 위해 세운 기념관을 보았는데, 윌 로저스 기념관의 내외장이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 때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내 마음에 떠올랐다. 서부를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다른 많은 카우보이들, 소몰이꾼들, 목축업자들은 어떤가? 왜 이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명예의 전당은 만들지 않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신선한가? 특정인을 기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서부를 만든 주역은 황야의 먼지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무명의 카우보이들과 개척자들이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의 건립을 위한 장정(長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일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었지만, 연방정부와 의회 및 각 주정부들까지 적극 나서는 등 거국적인 협조 아래 10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모았고, 각 지역의 경합을 거쳐 현 위치에 멋진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19656, 드디어 개관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거사의 장본인 레이놀즈는 개관을 보지 못한 채 1958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호소로 결국 힘을 합치게 된 미국은 개척시대의 꿈과 시련을 역사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대단한 컬렉션이었다. 카우보이와 목축, 인디언의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은 물론 수많은 서부영화들의 명장면이나 배우들이 생생하게 우리의 눈앞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빼고 달려들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죤 웨인도 모두 이곳에선 훌륭한 컬렉션의 한 소품일 뿐이었다. 각종 마구들, 무수한 총기들, 마차들, 인디언의 의상들과 생활용품들, 인디언 화가의 그림들, 재현해 놓은 그 시절의 거리 등 모두 그간 이 땅에서 전개되어 온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그 증거물들을 통해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이 벌이던 싸움의 현장도, 카우보이들의 힘든 삶도, 로데오 경기의 실감도 모두 미국 정신을 이루어 낸 역사의 바탕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미국의 주류는 개척 시대에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고, 지금까지 강제이주나 보호구역 지정 등 원주민 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어쨌든 카우보이 박물관 안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이 미국정신으로 용해수렴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갈등과 반목을 하나로 버무려 나갈 수 있게 하는 미국의 에너지가 이곳 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에서 바야흐로 맛있게양성(釀成)되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10. 12:44

 


로간 교수 연구실 앞에서

 

 

 

 

미국통신 5[로간 교수와의 만남]

 

 

 

현재 OSU 역사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로간[Dr. Michael F. Logan] 교수는 외견상 전형적인 카우보이 스타일의 노신사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고 나서야 황야를 주름잡던 카우보이의 활력보다는 아주 온화면서도 부드럽고 생각이 깊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서구 신사의 기풍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맘에 든 것은 그가 구사하는 영어가 매우 느리면서도 정확하다는 것. 그래서 누구보다 대화하기 편하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교수 크리스 선생이 말하기를 오클라호마는 미국 중남부의 시골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릿한 그곳 방언을 쓸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주로 대학에 근무하는 직원들이나 학생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말들을 뱉어내는지 그들의 말을 따라가기가 벅찬 나날이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다가 로간 교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거나 편안하게 하는 데 말하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나는 크리스 선생에게 자주 제발 말 좀 천천히 하라고 다그치곤 했는데, 그는 그런 지적을 받을 때만 좀 천천히 하는 척 하다가 잠시 후에 보면 아스팔트길의 오토바이 달리듯 저 혼자 내빼곤 했다. 그런 성향은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여학생들이 모여 수다 떠는 현장을 보고 듣노라면 우리말도 영어 못지않게 요란스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말이든 영어든 자꾸만 빨라지게 된 것은 아마도 매사 빠름만을 숭상하는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어쨌든 말하는 방식으로만 따져도 로간 교수는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작년 겨울 초청장을 보내온 것을 기점으로 로간 교수와의 접촉은 시작되었다. 내가 보내는 이메일마다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곤 하던 그의 도타운 자세와 마음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특히 초청장에 담긴 호의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연구계획서만으로 생면부지의 다른 나라 학자에게 그런 호의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사 전공인 로간 교수는 특히 근대 미국의 서부, 도회(都會)지역, 환경 분야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관심이 학문적으로 승화되어 <<사막 속의 도시들: 피닉스와 투싼의 환경사>>, <<줄어드는 물길: 산타크루즈강의 환경사>>, <<스프롤 현상 (도시 개발이 근접 미개발 지역으로 확산되는 현상)에 대한 투쟁과 시청: 남서부 지역 도시의 성장에 대한 저항>> 등의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도시 비평으로서의 탐정소설: 변화하는 장르의 인지(認知)>을 비롯한 많은 논문들이 일관되게 도시개발, 환경파괴 등 현대의 문제적 현상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다룬 노작들이다. 말하자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도시화와 환경보존이란 이율배반적 어젠더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늘 좌우 이념적 대립를 유일한 화두로 안고 끙끙대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표본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큰 공감영역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OSU 역사학과와 영문학과 교수들을 자주 만남으로써 그들로부터 다양한 비전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그는 내가 그동안 추구해온 문학 연구 상의 역사적 관점을 알고자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이곳 패컬티 멤버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시대와 지역, 분야를 초월하는 보편지(普遍知)’의 탐구에 매진해 볼 것이다. 내가 굳이 영문과 아닌 역사학과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 로간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바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8. 31. 23:25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클라호마시티 시가지


하늘에서 내려다 본 오클라호마 산하


한가한 오클라호마 공항에서


오클라호마 공항에서 확인한 자연의 위력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OSU의 Du 교수 내외와 스틸워터의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스틸워터(Stillwater), 그 평온과 정밀(靜謐)의 입체적 공간성

 

 

27일 오전 11[한국 시각] 인천공항을 출발, 큰 원을 그리며 태평양 상공을 건넌 OZ23627일 오전 950[미국 시각] 시카고의 오헤어 공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내외국인들로 장사진을 친 가운데 두 시간이 넘는 검색과 입국 수속을 거친 오후 230. 드디어 오클라호마로 가는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후 한적한 오클라호마 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오클라호마의 산하(山河)이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 뿐. 수없이 가로 세로 직선으로 그어진 도로망은 마치 신의 솜씨인 듯 망망한 평원을 바둑판처럼 분할하고 있었고, 그 위로 부드러운 구름뭉치들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있었다. 평화 그 자체의 정물화였다. 그 위에 어찌 토네이도의 폭력을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바닷가 모래사장에 한참동안 공들여 이쁜성채를 만들어 놓은 어린아이가 갑자기 생겨난 심술로 마구 휘저어 놓듯, 인간의 앞에서 조화를 부리고픈 신의 의지도 그렇게 작동되는 것일까. 한적하면서도 요새같이 든든하게만 보이는 공항의 화장실 팻말 위쪽의 토네이도 피난처[Tornado Shelter Area]’란 팻말을 보고서야 지난 5월의 악몽 같았을 토네이도의 현장이 바로 이 지역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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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짐을 찾은 뒤, 픽업 나온 OSU 역사과의 Du[Yongtao Du] 교수를 만난 것이 오후 5시 반. 한적한 길을 두 시간여 달려 드디어 스틸워터에 도착했다. 오클라호마가 카우보이의 본산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스틸워터는 소떼를 몰던 카우보이들이 소들과 함께 코를 박고 물을 마시며 갈증을 지웠을 만한, 조용한 평원이었다. 시차로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Du 교수 부부를 따라간 곳은 자신들의 홈 푸드를 대접하겠다며 데려간 대형 중국음식점이었다. 그들의 호의와 성의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그곳 식당의 음식을 통해 강남의 유자를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속담을 새삼 확인한다. 잔디 곱게 깔린 구릉에는 나지막한 대학 아파트들이 널찍널찍 앉아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용한 곳이 바로 우리가 들어갈 윌리엄스 아파트[101 N. University Place Apt #1]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시차에 지친 아내는 곯아떨어지고, 나는 나답게불면의 새벽을 맞아야 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