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26. 09:16

 

 

 

길 가다가 아이오와(Iowa) 족을 만나다!

 

 

 

 

 

 

미국에 온 이후 갖가지 일들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왔으나,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다니는 분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 지난 10월 털사(Tulsa)에서 34일간 진행되었던 ‘2013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여하여 오세이지(Osage) 인디언 보호구역을 방문한 이래 11월 하순 체로키(Cherokee) 인디언 네이션까지 답사함으로써 문명화된 다섯 인디언 부족들[Civilized 5 Indian Tribes]’ 중 두 개를 체험한 셈이었다. 그러나 오클라호마 주만 해도 36개의 인디언 부족들이 주로 남부지역에 터를 잡고 있는데, 최소한 다섯 부족만이라도 접해보는 것이 내 목표였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 초반에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나선 길이었고, 그 행선지가 바로 치카샤(Chickasha) 인디언 네이션이었다.

 

***

 

20131216일 아침 10시쯤 집을 나섰다. 첫 목표지는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이 있는 아다(Ada)였고, 거기로 가기 위해 타는 길이 177번 하이웨이였다. 177번길의 스틸워터 시내 구간은 퍼킨스 로드(Perkins Road)였고, 묘하게도 그 길은 퍼킨스 시티(Perkins City)로 연결되었다. 즉 퍼킨스 로드를 따라 스틸워터에서 벗어나 30분쯤 가니 퍼킨스 시티가 나오고 그로부터 남쪽으로 계속 4마일쯤 달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Iowa Tribe of Oklahoma”란 글자들 밑에 이상한 모양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앙증스러운 표지판이었다.

 

 


스틸워터 시내의 퍼킨스 길(Perkins Rd.)

 


177번 도로에서 2~3분 가량 들어간 B의 위치에 아이오와 네이션이 있다.


 


177번을 달리다가 길가에 있는 이 표지판을 발견했다.

 

 

부족을 뜻하는 ‘tribe’란 말과 독수리 깃털로 만든 문장의 디자인이 분명 인디언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전에 아이오와 주[Iowa State]’는 들어보았으되, 그런 이름을 달고 있는 인디언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의아해 하면서도 처음엔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1~2분 정도 달리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인디언 부족인 이상 그냥 가면 나중에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를 돌려 이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하이웨이로부터 빠져나가 5분 정도 들어가니 과연 오하이오 네이션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관리 사무소에 들어가니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었으나 기초적인 사항을 제외하고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책임 있는 인사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묻자 한참 만에 족장[Tribal Chairman]이 나와서 나를 자기 방으로 불러 들였다. 수인사를 나눈 뒤 그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는 자기네 부족의 과거와 현재가 술술 흘러나왔다.

 

 


네이션 입구의 간판


아이오와 네이션


 


아이오와 네이션의 친절한 아가씨 Miss Kent Tehavno

 

 

토착 원주민들 가운데 하나인 아이오와 부족은 (연방정부와의) 각종 조약과 법령으로 인정된 자치정부를 갖고 있는, 말하자면 독립적 주권국가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자체 헌법과 각종 법률, 통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설명이었는데, 정말로 당신네 공동체가 독립국가냐고 물으니, 미국민이지만 어느 정도 자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식으로 정정하기도 했다.

 

 


아이오와 트라이브의 족장[Tribal Chairman] Mr. Gary Pratt

 

 

아이오와 사람들은 자신들을 회색 눈[grey snow]’을 뜻하는 바코제(Bah-Kho-Je)’로 부르는데, 그 말은 겨울 몇 달 동안 난방 연기로 그을린 눈에 뒤덮인 그들의 집이 회색으로 보인 데서 나왔으며, 아이오와 주[Iowa State]의 이름도 아이오와 부족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했다.

 

오네오타(Oneota) 지역민들의 후손인 아이오와 부족은 1600년대에 남서 미네소타의 파이프스톤 쿼리(Pipestone Quarry)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1730년에는 북서 아이오와 오코보쥐(Okoboji) 호수와 스피릿(Spirit) 호수 지역의 마을들에 살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들은 아이오와 주 카운슬 블렆스(Council Bluffs) 인근에서 남쪽으로 이동했고, 18세기 중반에는 그들의 일부가 드 모인(Des Moines) 강으로 이동해 올라갔다. 당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미주리의 그랜드 플랫강(Grand and Platte River)가에 정착했고, 연방정부와의 조약에 따라 미주리, 아이오와, 미네소타 등의 땅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었다. 연방정부와 맺은 1936년의 워싱턴 조약에 따라 그들 중 일부에게 네브라스카와 캔자스에 있는 그레이트 네마하 강(Great Nemaha River)을 따라 보호구역을 할당해 주었으나, 나중에 아이오와 족 일부가 오클라호마의 인디언 구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883815일 날짜로 발령된 대통령령[Executive Order]에 의해 설립된 것이 원래 오클라호마 주 아이오와 보호구역이다. 나중에 아이오와 네이션은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는데, 오클라호마의 아이오와족은 남부 아이오와이고, 캔자스와 네브라스카의 아이오와족은 북부 아이오와다.

 

 


오클라호마 주 인디언 분포 지도 가운데 Iowa 족의 구역

 

 

 

족장은 특히 자신의 부족이 강인한 정신력으로 고난과 불공평 등 그들을 억압한 역사의 시련들을 견디어 온 데 대한 자부심을 강하게 피력했으며, 아이오와 족은 현재 490명 이상의 등록 인구를 갖고 있으며, 페인(Payne), 오클라호마(Oklahoma), 링컨(Lincoln), 로건(Logan) 카운티 전역 혹은 부분들을 아우르는 사법 관할구역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이오와 족은 지역 행정 기관과 부족 기업들의 회계부서, 부족이 운영하는 경찰과 소방서 등을 포함 다양한 분야에서 160여명이 고용되어 활약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이 끝나고, 족장 뒤편에 있는 문장에 대하여 물었다. 인디언 부족들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의 실(Seal) 즉 문장(紋章)이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는 사실이었다. 각 문장에는 해당 부족들의 현실과 꿈, 그리고 철학이 응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문장은 1978년 밥 머레이(Bob Murray)가 디자인한 것인데, ‘생명의 순환 고리를 의미하는 원은 신성한 독수리의 깃으로 장식된 아이오와 전사의 전투모를 상징한다. 원 안에는 신성한 파이프[담뱃대]가 있는데, 아이오와 족의 각 클랜(clan)은 그 자신들의 신성한 파이프를 클랜 우두머리 집에서 가까운 방어구역 안에 갖고 있으면서 각종 제사나 의식(儀式), 특히 평화와 동맹을 맺는 절차들에 사용했다고 한다. 원 안의 쟁기는 아이오와 족의 농경 전통을 나타내며, 원의 양쪽에 매달려 있는 총채 비슷한 털 자루는 전통적으로 버팔로의 은신을 본뜬 떨림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오와 족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활과 화살을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원 아래 쪽의 독수리 깃털 네 개는 사방의 바람과 사계절을 나타내는데, 전통적으로 아이오와 족은 독수리를 존경해왔으며, 부족과 신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독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치 않은 의미가 바로 이 문장에 숨어 있었다.

 

 

 


아이오와 족의 문장

 


아이오와 족이 존경하는 독수리

 

 

족장의 설명을 듣고 난 다음 방문한 갤러리에는 부족의 삶을 보여주는 물건들과 예술품들이 가득했다. 비록 흩어져 있는 부족원들을 모두 합해 봐야 1000명이 채 되지 않는 소수그룹이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모습이 이방 나그네의 눈에는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비쳤다. 그러나 과연 이 작은 공동체가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이오와 족 부족 축제

 


갤러리에 전시된 Eric BigSoldier의 작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 06:06

 

 

 

체로키어 ‘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1128일 아침 스틸워터를 출발, 털사를 거쳐 오후 3시쯤 체로키 네이션(Cherokee Nation)의 수도 탈레콰(Tahlequah)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자 전체적으로 약간 이색적인 기풍이 느껴지는 점만 제외하면 미국의 여느 지역 도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면 미국 판 만족(蠻族) 이라고나 할까. 간판의 영문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체로키 글자들이 병기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 교통체계, 건물 양식,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여타 지역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미국 땅이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깃발


체로키 네이션의 문장(紋章)


stop 사인 위쪽의 글자는 같은 뜻의 체로키 글자

 

미국 백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거나 말거나 이곳에서는 체로키인들 나름의 생활을 볼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내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호텔과 월마트, 주유소 및 맥도날드 몇 군데만 열려 있을 뿐 모든 곳이 꽁꽁 닫혀 있었다. 일단은 실망이었다.


 


체로키 네이션 안에서 유일하다는 체로키 고유 음식점. 명절날 점심에 잠깐 열었다가
닫은 모양이다.

 

***

 

인디언으로 보이는 호텔 프런트 아가씨들의 설명을 듣고 체로키 네이션 본부와 헤리티지 센터 및 뮤지엄을 찾아갔으나, 사람 없는 곳에 청설모들과 사슴들만 분주하게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베테란 센터


체로키 네이션의 정부 청사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입구


헤리티지 입구에서 만난 사슴(노루?)들

 

하릴없이 돌아오면서 월마트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엔 사람들이 미어질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품 매대(賣臺)마다 금줄이 둘러져 사람들의 손을 막고 있었고, 그 앞과 옆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원들은 그들의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 이제 6시만 되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들이 점찍어둔 물건들을 카트에 실을 태세들이었다. 이른바 몇 시간 앞당겨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였다.

 


이 날 월마트(Walmart)는 블랙프라이데이 때문에 붐볐다.

 

미국 전역에서 Thanksgiving Day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점들은 엄청난 할인 가격으로 재고물량을 소진시키는 행사들을 갖곤 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가전제품 등 고가의 물품들이 그 주된 대상일 텐데, 비디오 코너나 어린이 용품 코너에도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든 품목이 다 해당되는 듯 했다. 인디언 문화를 보고자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왔으나, 정작 인디언들은 보지 못한 채 멀미나게 목격해온 미국의 물질문화, 소비문화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릴없이 하룻밤을 호텔 방에서 묵고 다음 날 찾은 뮤지엄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체로키 사람들이었고, 명절 연휴라서인지 관람객은 한 두 가족에 불과했다. 뮤지엄에서는 체로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찍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으로 불리는 강제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기록으로, 모형으로 세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자그마한 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정복당한 민족의 운명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컬렉션을 설명해주던 큐레이터에게 한국과 체로키 문화의 동질성에 관한 내 의견을 말하며, 일례로 그들의 인사말인 ‘Osiyo[welcome의 뜻]’가 우리말의 오세요/어서 오세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물론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나의 희망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말보다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이 박물관의 핵심 테마인 눈물의 여정에 기막히게 오버랩 되어 있었고, 정작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사진 전시회의 포스터


'눈물의 여정' 설명판 


국립 체로키 뮤지엄


Andrew Hartley Payne의 달리는 모습. 그는 1928년 열린 '미 대륙횡단 도보 경연대회'
[1928년 3월 4일 LA를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26일 뉴욕에 골인]의 우승자로서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다.


체로키 레스토랑의 출입문에 쓰여진 'Osiyo'


체로키 네이션에서는 어딜 가나 'Osiyo'가 보인다.

 

건물 밖에도 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착 당시의 일반 가정들과 학교, 교회, 상점, 대장간, 마굿간, 닭장까지, ‘눈물의 여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기증으로 그곳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체로키의 관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체로키 남성 가이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젊은 가이드는 체로키 의식(儀式)’에서 불리던 노래와 춤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체로키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그는 작은 돌들을 집어넣은 소형 거북이 껍질들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그들만의 타악기를 보여 주었다. 발에 전대처럼 차고 처륵처륵소리를 내며 많은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많은 거북이들이 땅 위로 출몰한다고 했다.

 


정착 초기에 살던 집


집 앞에 서 있던 음식 저장고


새 희망 교회[New Hope Church]


가정집에서 부인이 사용하던 직물 기계. 우리의 베틀과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다.


농가


농가의 내부


집 바깥에 걸어둔 등


학교 건물


교실. 영어 알파벳과 체로키 문자가 함께 적힌 칠판이 보인다.


야외 마굿간에서 만난 '명상에 잠긴 말'

 


가이드 나탄의 노래를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세요.

 


마른 거북에 돌들을 넣어 만든 악기를 들고 의식의 실제를 보여주는
젊은 가이드 나탄(Mr. Nathan Wolfe)


젊은 가이드의 또 다른 포즈

 

다른 두 명의 중년 가이드들은 각각 전통 사냥법과 활 전문가였다. 한 사람은 대나무에 침(針)을 넣고 입으로 불어 토끼 등 작은 동물들을 잡는 시범을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고, 강하고 큰 활에 그 화살을 메겨 적에게 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해 총으로 무장한 백인 침입자들의 출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당시 체로키 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역사의 아이러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대롱에 넣은 침을 입으로 불어 작은 동물을 잡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돌 화살촉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헤리티지 뮤지엄을 떠난 우리는 탈레콰 다운타운으로 진출했다. 조용하고 널찍한 도로 양 옆으로 건물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1자형 간선도로가 끝나는 곳, 도시의 핵심이자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위치 양지바른 곳에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0명 규모의 작은 대학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교 중앙에 세쿠오야(Sequoyah)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대학은 이곳 체로키 네이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듯 했다.

 


탈레콰 다운타운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멋진 캠퍼스

 

체로키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쿠오야는 문화의 기록과 전승을 가능케 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원래 그는 은 세공장이었는데, 1821년 독자적인 체로키어 음절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지적 활동에 큰 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글자 없던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쓰기 체계를 만들어 준 일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이 음절표를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은 체로키 네이션에서 급속히 번지게 되었고, 1825년에는 네이션에서 공식 채택됨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주변의 백인 정착자들을 뛰어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로키인들에게 세쿠오야는 우리민족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이곳 체로키 네이션 어딜 가나 세쿠오야의 사진이나 동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세쿠오야의 동상

 

NSU에서 나온 우리는 체로키 국립 대법원 박물관[The Cherokee National Supreme Court Museum]’체로키 국립 감옥 박물관[Cherokee National Prison Museum]’ 등에 들렀다. 탈레콰 타운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대법원 박물관은 1844년 피어스(James S. Pierce)가 세웠으며, 체로키 네이션의 대법원 청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또한 체로키 네이션의 공식 간행물이자 오클라호마 주 최초의 신문인 체로키 애드버킷’[Cherokee Advocate, 1844년부터 1906년까지 간행]의 첫 인쇄 행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건물이다.

 


상공회의소 겸 관광안내소


탈레콰 시청


국립 체로키 대법원 뮤지엄 표지판


국립 체로키 감옥 박물관


1880년대 사용되던 수갑을 본떠 다시 만든 것


죄명에 따른 당시의 판결. 살인범은 교수형에 처했다. 계획살인에 단 3~5년형을 부과해놓고도
'중형'이라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의 법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법 정신이다.


당시 감옥의 주방


당시 감옥의 모습

 

체로키 애드버킷은 문화민족 체로키 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간행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1844926일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권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란 그들의 모토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수시로 외치는 구호가 아닌가? 당시 이 신문은 체로키 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인들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체로키어와 영어로 매주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내의 유일한 민족 신문이었으며, 이 신문의 발간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850년엔 촉토 인텔리젠서(Choctaw Intelligencer)’, 1854년엔 치카사 인텔리젠서(Chickasaw Intelligencer)’가 각각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하여 잘못 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도 누구 못지않은 지능과 식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의 박물관들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Cherokee Advocate> Vol. 30, No. 3.[1906년 3월 3일자]

 

***

 

체로키 네이션을 방문한 것은 아직도 광활한 미국 땅에 온존하고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와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다수자들의 통치논리에 순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을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자체계를 만들었고, 신문까지 발행했으며,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까지 운영했던 그들의 지능과 문화를 과연 지배자로서의 백인들은 제대로 인식해온 것일까.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복수를 위한 근거자료 만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완전히 잊어버릴 경우, 삶의 바탕인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주 아름답고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들에 그 증거물들은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살아 있었다.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빌리지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백규


빌리지 가옥 앞에서 Melani


북동부 주립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오세이지족 인디언 소년 Joshua군과 함께.
부자간으로 보이지요?^^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 08:40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3일차-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성격으로 보아 사실상 마지막 날인 오늘. 여러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을 통해 어제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오세이지 족 보호구역을 둘러보며 갖게 된 감흥을 구체적으로 내면화 시키는 날이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일정이 바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

 

8시에 버스를 타고 길크리스 박물관 강당으로 이동하여 털사대학교 영화학과 제프[Jeff Van Hanken]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과거의 그 때에 있던 일들이 아니다!-미국 서부 이미지들의 신뢰성과 정의에 관한 환상들[That ain’t how it was! Illusions of Authenticity and Justice in Images in the American West]”이라는, 약간은 난해하면서도 도발적인 제목의 강연이었다. 말하자면 영화에 들어 있는 서부의 이미지들이 인디언이나 서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여타 미국인들이나 세계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의 기초로 작용했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화면들을 보며 그간 접한 서부영화들이 인디언이나 미국의 서부에 대한 내 편견의 형성에 적잖이 기여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결부되면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짐을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기록영화의 화면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화면


인디언 출신 헐리웃 배우 Hattie McDaniel


서부영화의 한 장면


서부영화의 한 장면

 

제프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같은 자리에서 감동적인 이벤트를 겸한 또 하나의 행사가 이어졌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원주민 연락관[Tribal Liaison]을 맡고 있는 마크씨[Mr. Mark Wilson]가 무대에서 다양한 종족의 이름을 부르자 초등학교 학생들이 큰 깃발을 하나씩 들고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털사 지역 공립학교 인디언 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고,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은 오클라호마 주에 본부를 갖고 있는 39개 원주민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오클라호마 인디언 종족들은 1830년의 인디언 강제 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근거, 미합중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혹은 자발적이거나 토지소유권을 받아 이 지역에 재배치되었다고 한다. 인디언 교육 프로그램은 털사지역 공립학교들에 출석하는 인디언의 후예들[대략 4600]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과거 미국 인디언이 갖고 있던 풍부한 유산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깃발을 들고 입장한 초등학생들


초등학생들은 퇴장하고 남아 있는 학교의 깃발들

 

39명의 초등학생들이 무대 안쪽에 촘촘히 도열하자, 인디언 복장을 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오더니 앰프를 통해 울려나오는 배경음악에 맞추어 가냘픈 목소리로 미국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가 차라리 쨍쨍하게 높은 목소리로 불렀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흡사 식민지배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소수민족의 가냘픈 아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배자의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이란! 글쎄. “비록 우리들이 이주해온 백인들에게 땅도 빼앗기고 민족의 정체성도 빼앗겼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충실한 미국인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력한 가냘픔으로 자신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내 마음에 전해져 오는 내 나름의 공감때문에 감동적이긴 했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대표로 미국 국가를 부르던 인디언 어린이

 

점심 후 미국 서부의 실제 역사라는 패널 토의에서는 다양한 연사들의 의미 있는 발표들이 이어졌다.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크리슨 박사[Dr. Kristen Oertel]의 사회로, 스테이튼 아일란드 대학[College of Staten Island] 지리학 교수인 드보라 박사[Dr. Deborah Popper]서부 지역 환경사: 바람 속에 쓸려간 옛 약속들[Western Environment History: Old Promises in the Wind]”, 아칸사 대학교[University of Arkansas] 역사학과 교수인 엘리엇 박사[Dr. Elliot West]휘청거리는 인디언들과 실제 인디언들[Reel Indians and Real Indians]”, 노쓰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Northwe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의 역사학과 교수인 로저 박사[Dr. Roger Hardaway]서부지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각각 발표했고, 박물관 전시물들을 관람한 뒤 각계의 저명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임으로써 주최 측이 애당초 내건 서부지역의 미래[The Future of the West]”라는 세미나의 마감 타이틀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패널리스트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 받은 인물은 변호사, 인디언 부족 판사, 학자 등으로서 종교적 자유, 죄수들의 권리, 수자원 권, 조약의 권리 등을 포함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30여년을 노력해온 포니족(Pawnee) 출신의 명사 월터 씨[Mr. Walter R. Echo-Hawk]였다. 인디언들이 받는 법의 보호와 한계에 대한 그의 설명을 통해 이 지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드보라 박사의 강연 제목


점심이 차려진 길크리스 박물관의 비스타 홀(Vista Hall)


식사를 마치고 발표를 듣는 각국의 학자들


패널리스트들의 클로징 토론을 듣고 있는 학자들


학자들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받은 포니(Pawnee)족 출신의 Walter Echo-Hawk씨


토론 후 학자들과 함께 한 월터씨

 

마감 패널 토의가 끝난 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로비에서 삼삼오오 저녁식사를 초대한 호스트와 만나 호스트의 차로 각자의 가정이나 레스토랑으로 흩어져 갔다. 대개 한 사람의 호스트에 2~4명이 배정되었는데, 나를 초청한 호스트는 바로 첫날 나를 픽업해준 자원 봉사자 클라크[Clark Frayser]씨였다. 첫날 그의 차를 타고 호텔로 오면서 그의 한국 방문 경험과 한국에 대한 호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미국인으로서는 지나치다 싶게 소탈한 점이 처음엔 의문이었다.

 


패널 토론장에서의 클라크 씨[Mr. Clark Frayser]

 

다른 호스트들과 달리 나 혼자만을 초청한 이유를 묻자 한국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10년 전 한국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서울에서의 즐거웠던 체험, 현대자동차와 포항제철 등에서의 놀라웠던 체험, 비무장 지대 땅굴에서의 긴박했던 체험 등등 한국에 대한 추억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또 다른 미국인들과 그의 분위기가 다른 이유를 묻자,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혈통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인 할아버지와 체로키 인디언 할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자신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50%의 체로키 족 피를 갖게 되었고, 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자신이 태어났으므로 자신은 40%의 체로키 족 피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순수 유럽계 백인들에 비해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고 했다.

 

이혼 후 만나 함께 살고 있는 걸프렌드(girl friend)’가 저녁에 일을 하므로 집에서 식사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다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서 꼭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클래식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대중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후자를 선택하자 지체 없이 출발하여 30여분 뒤 도착한 곳이 산타페(Santafe)’라는 레스토랑이었다. 호스트이든 게스트이든 대개 클래식한 분위기만을 경험해온 나로서는 산타페의 이색적인 분위기에 놀라게 되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땅콩을 껍질째 볶아 한가득 넣어놓은 통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릇에 그득그득 담아갖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서 땅콩을 까먹으며 함부로 껍질들을 바닥에 버리곤 했다. 다른 식당들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술들이 진열장에 가득했고, 손님들 대부분이 음식과 술을 함께 마시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기준의 미국 레스토랑은 아니었고, 클라크씨는 그 점을 내게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천정 장식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산타페에서 돌아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클라크씨
 

 

다른 곳보다 비교적 맛있었던 스테이크와 몇 잔의 맥주를 마신 뒤, 우리는 거기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여 내가 미리 마련해간 하회탈 선물을 내밀자, 뛸 듯이 기뻐하며 놀라는 것이었다. 선물을 가져왔으리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가 불쑥 선물을 내미니 우선 놀란 것 같았고, 그 선물이 [mask]’이라는 점에 또 놀란 듯 했다. 주최 측으로부터 이메일로 미리 받아본 프로그램에 가정 초대 만찬[Home Hospitality Dinners]’이란 내용이 있음을 알고, 혹시 몰라서 미국에 올 때 준비한 선물들 가운데 하회탈을 갖고 온 것이었다.                                         

                                                                                      



클라크 집의 안쪽 출입문 유리에 새겨진 체로키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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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등 클라크 씨 집의 내부


거실


거실에서 백규


클라크 씨의 딸

 

내가 큼지막한 하회탈을 건네자 깜짝 놀라며 다짜고짜 자신의 서재로 나를 끌고 갔다. 그런데 한쪽 벽면이 각종 탈들로 가득한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는 탈 애호가였던 것이다. 체로키 탈, 중국 무희 탈, 일본 가부키 탈 등 다양한 탈들이 걸려 있는 사이에 아이들 조막만한 하회 각시탈도 걸려 있었다. 그곳에 대감탈만 빠져 있었는데, 바로 내가 그걸 갖고 온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절묘한 선물이었다. 말 그대로 뛸 듯이기뻐하는 그의 모습이란!

 


                                   내가 건넨 선물을 들고 서 있는 클라크 씨 

 

그의 안내로 집안을 두루두루 구경했는데, 온통 체로키 유물 일색이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정신이 집안에서 묻어나온다고 할 정도로 좁은 집안에 그득한 그림, 공예품, 사냥도구 등 유별난 컬렉션이었다. 자신의 가계도[family tree]를 보여주며 체로키와의 인연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공개적으로 체로키 혈통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만은 아껴두기로 했다. 그는 이 지역에 자신을 포함, 체로키 등 인디언 혼혈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고 강조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쩜 그는 우리가 지난 3일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인디언 문화의 표본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부이긴 하지만, 주류의 미국인들이 감추며 살아왔을 혼혈의 사실을 흔들며 자랑하는 것은 다민족다문화의 공존과 융합의 시대를 맞이하여 의식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가 아닐까.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공예가의 목각(모기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만든 작품)
 

 


                    자신의 거실에서 체로키 사냥법의 시범을 보이고 있는 클라크 씨
 

 

    ***

세미나 셋째 날.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강당에서 설파한 미래의 서부는 배제나 차별 아닌 공존과 포용, 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을 것이고, 클라크 씨는 그 사례로서의 자신을 내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끌벅적한 산타페에서 체로키 식(?)을 가미한 식사를 대접했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일부분이나마 체로키 생활양식을 보여준 것이나 아닐까. 이런 분위기가 과연 공고한 레이시슴(racism)의 벽을 얼마나 허물 수 있을지, 역사의 진행이 항상 순조로운 방향만을 타게 되는 것인지 등등.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 작은 희망이나마 갖기로 한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