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7.03.28 갑작스런 시간여행
  2. 2008.07.01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3. 2007.04.10 영어강의와 지식사회의 철학 1
글 - 칼럼/단상2017. 3. 28. 22:57

갑작스런 시간여행

 

  

요즘 따라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진다.

잠들기 전에 마무리하려고 가져 온 원고를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은 채 잠들었을 때, 서재 어딘가에 있을 책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왔으면서도 늘 그러하듯 무책임하게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잠들었을 때, 더욱 그렇다.

 

새벽 3시나 넘었을 무렵. 서재로 넘어가 책장을 짚어가던 중, 웬 작고 허름한 책자 하나가 손에 잡혔다. “젊은 대지에 사색의 씨앗을 뿌리며...”라는 그럴싸한 제목과 철학과 92학번 일동 함께 씀/1992. 12. 1.”이 명기된 수제(手製) 소책자였다. 순간 25년 전으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되었다.

 

1992년은 숭실 부임 5년째인 병아리 교수 시절이었다. 필수 과목 교양국어와 작문을 국문과 교수와 강사들이 전담하던 당시였다. 그 해 2학기에 나는 철학과 1학년생들의 작문을 맡고 있었다. 참 해맑고 순수한 그들이 좋았다. 철학과 학생들이어서 그랬을까. 글쓰기의 요령도 척척 터득해 나갔다. 말을 걸어도 요즘 학생들처럼 쭈뼛거리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들의 삶과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였을까.

 

학기 내내 써온 글들을 발표하고 비평하게 하니, 그들의 글과 말이 일취월장했다. 전공과목보다도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한 발 더 나아가 수필 한 두 편씩을 쓰게 했다. 그 글들 또한 재미있었다.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워서 한데 묶었고, 한 부씩 나눠 가졌다. 그로부터 25년 동안 내 기억 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가 지금 !’하고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멋쩍은 일이지만, 내 과거에 대하여 감동한 건 처음이다. 그래서 종이 한 장 버리지 못할 때가 많다. 숨 쉬기 어려워질 때마다 몇 아름씩 내보내긴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자는 고맙게도 살아남아 있었다. 혹시 모르니, 내 머리말과 권두수필(<새해의 계획을 세우며...>)을 이곳에 옮겨 놓기로 한다.

 

 

책머리에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의 면소재지에 당시로서는 유일한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철학과에 다닌다고 하였다. 한 여름이 가깝도록 그는 오버코트 비스름하게 생긴, 검고 두툼한 옷을 입고 다녀서인지, 대체로 지저분한 몰골을 면치 못했다. 그리고 늘 고개는 약간 삐뚜름하게 숙인 채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기 일쑤였다. 나는 그의 외모에 덮씌워진 그 분위기의 근원이 바로 철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히 당시 그곳 사람들도 누구든 철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으레 현실과는 동떨어졌거나 약간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철학이 우주와 인간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고도로 정치(精緻)한 사고와 논리적 틀을 요구하는 학문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이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기도 했음을 알게 되기까지 나는 철학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대학에 진학하여 비로소 --을 두루 갖춘 인간 형 만이 지성인의 전형일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 세 분야가 합쳐져 형성하는 인문학이야말로 전통 학문의 중심임을 인식하고 난 뒤 비로소 나는 내가 배우고 있는 공부에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즈음 철학과, 국문과, 사학과에 진학하는 대학생들을 나는 국보(國寶)로 여긴다. 황금 만능, 실용적 기교 만능의 얄팍한 세태를 보라. 모두들 기를 쓰고 금방 돈 될 만한 것들만 찾아다니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래도 정신적인 것을 탐구하겠노라 문사철의 울타리에 들어오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아끼고 북돋워야 할 국보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들이 더욱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촘촘히 박힌 강의 시간들만 아니라면, 밀린 글 빚들만 아니라면, 거의 의무적으로 읽어야 할 전공서적들만 아니라면, 나는 이들과 늘상 어울리며 인생과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연히 이번 학기에 나는 애송이 철학도들과 작문이라는 과목을 통하여 만나게 되었다. 글이란 가슴과 머리 속에 파도치는 순정한 욕구의 흘러넘침이라고 믿고 있는 나로서는 사실 작문의 그 짓는다’()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들에게 문장을 만들고, 꾸미는재주나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대학이라는 제도의 틀에 갇힌 이상 보고서를 내야하고 논문을 써야 할 것이며, 졸업 후에는 자기 소개서도 이력서도 써야 할 것이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보면 단순히 손재주에 불과하더라도 작문을 아니 가르칠 수 없는 터이렷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글 쓰는 기교만을 가르쳐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끝나기 2, 3주 전에 수필을 한두 편씩 써 오도록 하였다. 각자의 작품을 읽히고, 동료들로 하여금 비평하게 하였다. 비록 덜 다듬어지긴 하였으되, 나름대로 발랄하고 생기 있는 삶의 편린들이었으며 예리한 비평들이었다. 그냥 버릴 수 없었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아늑한 강의실에서 우리가 공감했던 작은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고 싶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도 이것을 읽는다면, 그들 또한 마찬가지로 공감할 수 있으리라.

 

자주 싱겁게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최지환이가 이 작업을 자원하였다. 그 깡마른 체구에 킥복싱이라는 엄청난 무기가 숨겨져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자진하여 맡는다는 것도 이해(利害)에 초연할 수 있는 철학도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단히 상쾌하고 즐거운 일이다.

 

임신년의 꼬리가 보이는 어느 날 밤 백규서옥(白圭書屋)에서

 

조규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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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계획을 세우며

 

섣달 그믐날 개밥 퍼 주듯 한다”, “섣달 그믐날 시루 얻으러 다닌다는 속담들이 있다. 시집도 못 가고 한 해를 또 넘기는 노처녀가 홧김에 개밥을 푹푹 퍼 준다는 데서 나온 말이 전자요, 어느 집이나 다 시루를 쓰는 섣달 그믐날에 남의 집에 시루를 얻으러 다닌다는 데서 나온 말이 후자다. 또한 대중없이 인심 쓰는 경우를 빗대는 말이 전자요, 되지도 않을 일을 공연히 벌여 놓는 것을 빗대어 놀리는 말이 후자다. 양자 모두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나 행동을 나타내는 절묘한 표현들이다. 그 비정상적인 상태는 허둥대는 모양을 말하며 그 시간대로 섣달 그믐날을 지정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사람들은 으레 초조한 마음으로 허둥대기 마련인가. 섣달 그믐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차리는 인간의 만각(晩覺)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가 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던 은사 원정(園丁) 선생은 늘 시간의 짧음을 한탄하시며 빈둥거리던 우리의 젊음을 꾸짖곤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한다. 당연히 그 때의 우리도 그런 말씀을, 대책 없이 늙어버린 훈장의 잔소리 쯤으로 흘려듣곤 하였다.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인생의 길이를 계산해 보이셨다. 여기서 인생의 길이란 물리적 시간 혹은 생물학적 수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동물과 구별되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치를 창조하고, 비록 하잘 것 없다 해도 나름대로의 기념비를 세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를 뜻한다. 물론 억지를 쓰자면 자식들을 남기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기념비가 아니냐고 강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일생 동안 이룬 일이 그것뿐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한 인간의 수명을 어림잡아 70이라 하자. 20까지는 아직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기간이고, 60에서 70까지의 10년 역시 삶의 현장으로부터 은퇴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니 70의 수명에서 30을 빼면 40년 정도가 독립적인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가치 창조를 향해 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반 정도는 잠 자는 시간이니 이것을 빼면 20년이 남는다. 그것뿐이랴. 밥 먹는 시간, 변소 가는 시간, 남을 물고 헐뜯으며 쓸 데 없이 낭비하는 시간 등이 줄잡아도 하루의 삼분지일은 될 것이니 이것을 빼면 겨우 13년 정도 남게 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우리의 삶에서 정채(精彩) 있는 시간이 우리의 일생 중 겨우 10년 남짓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지 않은가. 벽시계의 초침은 종착역을 향해 숨 막히게 재깍거리는데 아직도 눈앞의 캔버스에는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 무슨 기념비를 세울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도 못해 본 채 끝내버리는 것이 우리 장삼이사들의 삶이라고 체념해야 할 것인지.

 

열두 해 만에 찾아 온 원숭이가 기엄기엄 고개 마루를 넘으려 한다. 지난 섣달 그믐날에 밤을 밝히며 긁적거려 두었던 새해의 계획표가 뽀얀 먼지만 뒤집어 쓴 채 널브러져 있는 것이 올해라고 다를 리 없다. 기어코 고놈의 기념비라는 것을 윤곽만이라도 잡아 볼 게라고 설치던 정초의 오연한 패기는 칠팔월 땡볕에 엿가락 늘어지듯 우습게 되어 버렸고, 아득한 피로만이 백중사리 밀물 마냥 밀려든다. 괜히 마음으로만 바쁠 뿐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이 때 쯤에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화롯불 옆에서 책을 읽거나 세한도(歲寒圖)를 치면서 마음들을 가다듬은 게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책을 읽거나 화폭을 어루만지며 묵은해를 돌이켜 보고 새해로 넘어가기 위한 원기를 모은 것은 아니었을까?

섣달 그믐날, 한 해의 계획을 점검하며 흡족해 하는 이가 그 얼마이겠는가. 아마 대개는 이것들을 다음 해로 넘겨야 하는 마음 무거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태반이 넘을 것이다. 조율만 계속하다가 제대로 된 연주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마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 계획과 다짐은 수없이 하면서 정작 실행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10년 남짓 허여된 가치 창조의 시간대를 헛되이 까먹으면서도 결국 그 기념비의 내용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니 계획을 세운다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것이 뻔하다 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어찌 계획 없이 새해를 맞을 수 있으랴! 도로 굴러 내려올 줄을 알면서도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던, 신화 속의 시지프스처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분명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세밑의 피곤한 몸을 추스르며 다시 먼지나 뽀얗게 뒤집어 쓸 것이 뻔한 새해 계획표를 끄적거리는 중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7. 1. 19:56
교수신문 원문보기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아끼는 후배 하나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40을 넘긴 나이. 공부를 할 만큼 했고, 연구력도 인정받고 있는 그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그는 매우 지친 낯빛이었다. ‘이제 밀려드는 삶의 피곤함을 어쩔 수 없노라’고, 처음으로 그에게서 진한 푸념을 들었다. 지방에 있는 한 명문 공대의 ‘글쓰기’ 계약교수 채용에서 ‘물먹고 돌아온’ 패장의 행색이었으나, 비굴하진 않았다. 내 앞에서 그는 막 사라지려는 자존심의 끝자락이나마 부여잡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의 낙담한 표정과 절망적인 언사들이 화살이 되어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아, 이 모진 바늘방석이여!


 아무리 어려워도 궁티를 내보이지 않는 게 전통적인 선비들의 법도였고, 그것은 이 땅에 인문정신의 바탕으로 굳어져 내려왔다. 몇몇 존경하는 국문학계의 대선배들은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할 줄 알았고, 그런 정신은 지금도 국문학의 바탕에 얼마간 남아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변했고, 우리들의 생각도 크게 달라졌다. 선배들은 꺼낼 엄두마저 내지 못하던 푸념을 나 스스로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시대가 변한 덕분일까.


 산업화로 치닫던 70년대를 거쳐, 지속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기술 개발과 제품의 고급화를 추구하던 80년대. ‘아랫도리가 찢어지게 가난하여’ 어렵사리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문학 공부를 마친 필자는 ‘좋았던 시절’의 막차에 가까스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5공과 6공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한 엄혹하던 시절이었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정보화의 물결은 도도하게 이 땅을 적시며 흘렀다. 경제의 팽창은 해외여행으로 사람들을 들뜨게 했고, 프로 스포츠와 컬러텔레비전의 도입, 성욕 표현의 무한한 자유는 사람들의 손에서 책을 앗아갔다. 미처 전통학문의 굴레를 빠져 나오지 못한 국문학이 유례없는 도전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짧은 기간 우리가 경험한 것은 바로 ‘격변’이었다. 그 물결에 대응하는 국문학자들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 자신이 ‘제대로 공부하는’ 주류의 대열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나손 김동욱, 연민 이가원 등 한 시대를 이끌던 큰 학자들의 어깨 너머로나마 그 분들의 마지막 숨결을 느낀 건 행운이었다. 비록 그 숨결 속에 움트고 있던 새 시대의 기운을 읽어내지는 못하고 말았지만.


 국문학이 지리멸렬해질수록 그 분들의 통합적 사고나 거시적 안목만큼은 꼭 붙들었어야 했는데, 자잘하고 고만고만한 후학들이 힘들여 잡은 건 ‘썩은 동아줄’에 불과했다. ‘학제 간의 연구’나 ‘통섭’을 논하며 그것들이 흡사 하늘에서 떨어진 보배라도 되는 양 대견해하는 모습들을 보며, 좋은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나날이다.


 사회가 정보화를 담론하고 ‘디지털’만이 살 길이라고 고창(高唱)할수록, 국문학이 그들에게 양질의 원료를 공급하고 떡 부스러기 정도나 얻어먹는데 만족하는 현실은 엄청난 수치다. 한갓 ‘제국주의자들’의 원료 공급기지로나 전락하고 말았으니, 이걸 일컬어 ‘국문학의 식민지화’라 할 수 있을까. 국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디지털 기술자들이 국문학자들로부터 제공받은 콘텐츠로 만들어낸 제품을 다시 사다가 후학들에게 먹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다. 급기야 ‘국문학과’의 간판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다는 몇몇 대학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름까지 바꾸었을까만, 내실까지 바뀌지 않을 경우 간판만 보고 찾아온 어린 학생들이 실망할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그 다음엔 또 무엇으로 바꿀 것인가.


 고리타분하다 꾸중하겠지만, 공자가 말씀한 ‘정명(正名)’은 이 경우에도 합당하다. ‘이름과 실질의 일치’가 정명인데, ‘국문학’의 어디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우리 민족의 문학’이 국문학이다. 그 말 속에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과 지켜야 할 책무가 포괄되어 있으니, 국문학은 그저 ‘국문학’일 뿐이다. 몇 해 농사를 지어먹곤 또 다른 산판으로 이동하여 불을 놓는 화전민처럼 쉽게 이름이나 바꾼다고 풍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변화에 대응하는 ‘철학’이고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끈질긴 탐색이다. 실력 있는 국문학자들에게 밥이 보장되지 않는 문제적 현실. 그 근저에는 상황 판단의 성급함과 가벼움, 그리고 철학의 상실이라는 우리 모두의 병통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교수신문> 2008년 6월 30일자의 '학이사' 칼럼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3:23
영어강의와 지식사회의 철학


최근 몇몇 대학들의 영어강좌 비율이 언론에 공개되었고, 어이없게도 그것은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영어강의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영어강의를 해야 하는지, 목표하는 바가 모호하다. 영어강의의 수강을 원하는 학생들은 주로 ‘유학 준비’나 ‘영어 실력 향상’에 목표를 둔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선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만 목표를 둘 수 없다.

우리말로 하는 경우에도 교수-학생 간의 소통이 어려운 전공분야. 영어로 할 경우라면 그런 문제 뿐 아니라 놓치는 것들 또한 비일비재할 것이다. 다양한 전공분야의 교수들이 영어구사나 교수법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런 영어가 학생들의 영어실력 향상에 그리 큰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전공 내용마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위험성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들마다 영어강의를 확대시키려고 애쓴다. ‘대학 마케팅’에 효과적인 상품 중의 하나가 바로 영어강의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영어로 이루어지는 강좌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수입학문들’이다. 우리와 세계인들의 상호소통을 통해 공감영역을 넓히는 일이 ‘세계화’라고 본다면, 영어강의의 무조건적 확대는 지금껏 우리가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서양학문에의 예속’을 새로운 세대에게 강요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무슨 과목이든 대학의 영어강의는 필요하고 권장되어야 하지만,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실 장기적으로 영어강의가 보다 ‘잘 준비되어야 하고 절실한 분야’는 바로 외국에 보급해야 할 우리의 자생 혹은 자립학문들이다. 우선적으로 영어강의는 우리의 자립학문을 국제학문의 규격에 맞게 ‘표준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해외의 인재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을 찾는다. 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세계화된 학문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배울 수 있는 학문들이다.

우리의 어문학, 사학, 철학 등을 영어로 배울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세계화의 첫걸음이다. 앞으로 폭증하게 될 수요에 대비하여 이들 분야에 관한 영어강의 잠재력을 배양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리의 학생들이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대학들에서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는 결코 학문의 자립국이나 수출국이 될 수 없다. 우리의 학문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말을 익혀오라고 그들에게 배짱을 내밀 단계도 아니다. 합당한 분야의 영어강의를 점차 늘여감으로써 수출 가능한 우리의 자립학문을 세계시장에 상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자립학문을 영어 등 세계어로 체계화 시키고 강의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거나 교수로 영입해야 한다.

후쿠자와 유키지(福澤諭吉)가 대표하던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사회는 서양학문의 도입을 통해 일본사회와 일본학문 근대화를 실천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우리와 방법이 달랐고, 무엇보다 ‘수입상’의 단계를 적절한 시기에 벗어났으므로 자립의 단계까지 뛰어오를 수 있었다. 식민시대를 포함하여 해방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 우리의 지식사회는 학문의 초라한 수입상을 면치 못하고 있다. 수입학문의 영어강의만을 ‘글로벌화의 척도’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학문의 주체적 생산자가 될 수 없다. 영어강좌는 우리 학문의 수출에 긴요한 도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영어강의에 대한 지식사회의 철학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2007. 1. 22.)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