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9. 30. 15:15

  아, 바이칼!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5   

                                                                            조규익   

 


우리의 바이칼 탐사는 리스트비양카에서 시작되었다.


식당에서 바라본 리스트비양카 마을 모습


점심 후 들른 스키장(전망대 리프트 출발점)


전망대 가는 리프트 출발점


리프트를 타고 미끄러지듯.


일행 뒷모습


아, 저 숲!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쁜 꽃들이! 혹시 구절초인가요?


러시아에만 있다는, '이반차이' 만드는 꽃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에 오르자 드디어 보이기 시작하는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뚜렷한 증거물


부랴트 족 무속의 증거물


잠두봉 산악회도 다녀갔군요!

 

 

                                                                                                                        조규익 

    

언제부턴가 바이칼을 만나고 싶었다. 민족의 시원(始源)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을까. 호수 물을 쭈욱!’ 소리 나게 들이마심으로써 내 협애(狹隘)한 인식의 천박한 때를 벗겨내고 싶기도 했다. 고려인 강제이주의 발자취를 추체험하는 대장정, 그 한복판에서 바이칼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르쿠츠크에서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을 떠난 게 오전 10시 남짓. 한 시간 넘게 달려 바이칼의 한 계곡 리스트비양카(Listvyanka)에 도착했다. 호숫가를 따라 5km나 이어진, 크지만 작아 보이는 마을, 자연과 어울리는 목조 주택들이 정겨운 곳이었다. 언덕배기에 붙여 지은 식당에서 감자를 주 재료로 만든 러시아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허나, ‘개똥이 어딘들 없으랴?’ 그곳에서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젊은 중국인 여성과 그 가족을 만났다. 러시아의 한복판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음식 값을 내지 않으려 작전을 쓰는 듯한 중국 관광객들을 통해 이제 배 밖으로 삐져나온 중국인들의 간덩이와 몰염치를 그곳에서도 목도했다. ‘러시아에 있긴 하지만 엄청난 바이칼을 친견하고자 온 내겐 시끄럽고 불쾌했으나, 참 볼만한 광경이었다.

 

점심 후 30여분을 달려 국립공원 안의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 행 리프트의 출발지에 도착했다. 겨울에는 스키 객들을 위해, 그 외의 계절에는 바이칼 호 탐승객들을 위해 리프트는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앙가라 강이 흘러나오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체르니셰프스키 전망대에 오르자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 호수의 진면목이 비록 일부분이지만 드러났다. ‘아름답다는 말은 너무 가벼워 차라리 입을 닫을 수밖에! 굳이 미학으로 따지자면 숭엄미라고나 할까.


전망대에서 호수를 담는 사람들


바다같은 호수가 꿈처럼 펼쳐져 있었다!


김병학 선생이 자신의 감동을 표현했다.


한반도 평화문화제를 지낸다고 했다. 기원의 대상은?


바이칼의 물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


호숫가에도 이꽃은 만발해 있었다!


바이칼에서만 산다는 민물고기 오물(omul). 담백한 맛이었다.


구워낸 오물을 안주 삼아 일행과 보드카 한 잔을. 블라디미르 김 선생과 정막래 선생.


호수 물에 흥분한 사람들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와 부랴트 자치공화국의 사이에 위치한, 세계 최고(最高/最古)의 바다 같은 호수. 2,500만 년은 누가 헤아린 역사이며, 최고 수심 1,621m는 누가 헤아린 깊이란 말인가.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2,000m 급의 산들은 대체 언제부터 생겨나 호수의 물을 가두고 있단 말인가. 360여개의 강이 흘러 들어오지만, 출구는 앙가라 강 오직 하나 뿐이기 때문일까. 저토록 깨끗한 물은 세계 담수(淡水)1/5에 달하는 양이라고 한다.

 

2,000m 이상의 연봉들로 둘러싸인, 면적 31,722, 길이 620km, 24~79km, 해안선 2,100km 최고 수심 1,642m의 바이칼. 바이칼에서의 우리 민족의 원류를 상상하는 것은 이곳에서 둥지를 틀었다는 인구 40여 만에 달하는 부랴트 족의 샤머니즘과 우리의 그것이 적잖이 겹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누가 매어놓았는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엔 형형색색의 끄나풀들이 칭칭 둘러 매여 있었다.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무당굿의 흔적들이다. 뿐만 아니라 주몽의 탄생지가 이 근처였다는 설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우리 민족의 발원처가 여기 아니겠느냐는 의문은 확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바뀌어갔다.

 

유람선이 호수 복판으로 다가갈수록 시원의 생명이 풍기는 비린내가 나의 내면으로 차올랐다. 주변의 참한 봉우리들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곳에서만 산다는 물고기 오물(omul)'은 두껍게 이랑지는 코발트블루를 차고 올라왔다. 조용한 호수의 표면에 팽팽한 긴장이 느껴지는 것도 그 속에 생명들이 깃들어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상념에 젖어 말을 잊어버리고, 호수를 둘러 싼 병풍산들은 흡사 물 한 방울이라도 흘러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 촘촘히도 어깨들을 겯고 있었다. 바람은 살랑살랑 수면을 훑으며 땀에 쩐 여행객들을 위로하고, 저 건너 산 위로 석양은 엷어지고 있었다. 눈 깜짝 사이에 낯선 다음 행선지로 나그네들을 몰아대는 바이칼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하늘, 구름, 호수


일행들과 함께


물에 비친 산 언덕


물에 비친 산,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인가들


산, 그리고 물


호수에서 앙가라강이 갈라져 나가는 곳, 그 언저리를 안개가 살짝 둘렀네요! 


고기잡이 배일까요?


호수에서 뒷산을 배경으로...


그 배가 또 오는군요.


호수를 나와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숲에서 티피를 만났다.


사냥꾼들의 티피


여러 채의 티피들이 자작나무 숲에...


돈 받고 말을 태워주는 곳도 있었다.


식당 앞의 즉석 노점상. 주로 차 종류, 열매 종류들이 많았다.


아버지와 함께 노점상으로 나선 이쁜 딸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5. 6. 15:19

       갈수록 새로워지는 역사의 의미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
   
                                                                                                          조규익(숭실대 교수)

문고본으로 출간된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학부 3학년 때였다. 길현모 선생 번역의 ‘가볍지만 무거운’ 책이었다. 두세 번 곱씹어가며 읽으라던 선배의 권유로 열심히 밑줄 그으며 읽은 덕분이었을까. 어수룩한 후배들에게 역사나 역사철학, 아니 현실에 관한 ‘그럴 듯한’ 언설들을 제법 풀어놓을 수 있었다. 역사를 떠나 존립하기 어려운 우리의 문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탈근대의 담론을 지향하는 최근의 역사서들까지 두루 섭렵해왔으나, 이 책이 내 마음에 심어준 생각의 그루터기는 처음부터 요지부동이었다.  
최근 나는 당시 그 선배의 마음으로 돌아가 ‘한국문학사’를 수강하는 학부 3학년생들에게 이 책을 ‘반 강제로’ 읽혔다. 그런데 아이들의 눈이 ‘번쩍’ 빛나는 듯 했다. 지적 충격이었으리라. 카아의 생각을 수용하는 그들의 논리는 서툴지만 풋풋했다.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의 말 가운데 ‘그른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예비 지식인들의 마음에 지적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책의 힘이 30년 세월에도 변함없다면, 이제 그 책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도 되리라. 더구나 우리의 과거가 ‘드라마’란 그릇에 담겨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우리 또한 그것을 ‘역사’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요즈음 아닌가. 어린 시절 열심히들 외워온 ‘태정태세문단세’. 그걸 두고 ‘역사를 배웠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이다. 옳건 그르건 학창시절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본 적도 없는 ‘역사의 해석’을 TV 드라마에서 비로소 접하는 현실이다. 그러니 혹시 우리는 역사에 대하여 잘못 알아 왔거나 그릇 배워온 것이나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해보지 못한, 학문적 불모지의 백성들임이 분명하다.
‘역사는 과학이며, 진보한다’는 대전제를 쉽게 풀어나가는 언술들의 집합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을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 중시한다. 다시 말하면 사건들의 맥락이나 갈피들마다 숨어있는 의미를 ‘해석’해 내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사건들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래서 카아는 역사가의 태도야말로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역사적 사건들의 지위(地位) 또한 해석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논리적 바탕으로 삼은 것도 사건들의 해석을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고자 한 그의 철학 때문이었다. 이런 근거 위에서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멋진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일들이 ‘역사적 사실들’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가의 해석과 평가가 필요하며, 그 상호작용인 ‘대화’야말로 역사 기술의 대상들을 무한한 가능태로 격상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비전이 현재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통찰에 의해 빛을 받을 때에만 쓰이는 것이 ‘위대한 역사’라는 관점도 이런 전제를 통해 얻어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한 시대를 만든 위인(偉人)은 어떤 존재인가. 한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다음 시대에 그것을 전해주며 그것을 완성하는 인간상, 즉 자기 시대를 실현하는 존재를 카아는 위인이라 했다. 이처럼 카아는 역사의 과정에서 세계의 형세와 인간의 사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개인을 중시했다. 그가 시대를 만들고 이끌어간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보통사람들은 그런 위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위인은 자기 시대보다 너무 앞서 가기 때문에 뒷시대에 가서야 겨우 인정받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그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부단한 대화’라는 그의 핵심명제를 부연한 내용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역사가란 단순한 분석가, 해석가에 그쳐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과거 사실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란 언제나 도덕적 판단이나 가치판단을 내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추상적인 도덕개념 속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져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자 산물이란 것이다. 이런 역사나 역사철학 혹은 역사 서술에 관한 본질적 견해를 바탕으로 카아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는 역사가의 방법적 모색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시도해왔다. 인과(因果)의 문제, 진보의 문제, 이성의 확대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모색하는 문제 등이 인류에 대한 역사 혹은 역사가의 임무라고 본 것이다. 비록 현재를 잣대로 삼긴 하지만, 단순히 과거 사실들의 해석이나 평가에만 머물 수는 없고, 미래에 대한 지평을 확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역사가의 책무라는 것이 행간에 숨어있는 그의 생각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들을 허구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거나 해석하여 보여줌으로써 대중적 흥미를 유발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가의 통찰이나 시선이 결여되기 마련인 이른바 ‘팩션(faction)’이란 새로운 장르가 범람함에 따라, 일반인들은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몽이나 대조영은 분명 과거 한 때 이 땅에서 활약한 위인들이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무대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지만, 그 사건들이 과연 역사가의 책임 있는 비전으로 해석 또는 재현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바로 지금 동북공정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역사왜곡으로 심기가 불편한 우리가 재확인해야 할 역사철학의 금과옥조를 카아의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자소개

E. H. 카아

1892년 영국 런던 출생의 역사학자이자 국제정치학자.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졸업 후 1916년∼1936년까지 20여 년 간 외무성 관리로 공직생활에 몸을 담았다. 특히 1919년에는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36∼1947년까지 웨일즈대학(University of Wales)의 국제정치학 교수로 있으면서 '타임(The Times)'지 논설위원을 겸했고,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장, 옥스퍼드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55년 이후 모교인 트리니티 칼리지로 돌아가 1982년 타계할 때까지 고급연구원으로 지내면서 소비에트 러시아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외교관이나 언론인으로 활약하면서 쌓은 현장경험은 역사와 정치에 관한 그의 시각(視角)을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혹은 이론과 실제의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도적 균형을 잡고자 노력했으며, 이런 성향은 그의 학문적 업적에도 잘 나타나 있다. 과거와 미래의 대화, 사실과 해석의 상호작용 등 그의 역사인식 역시 그러한 현장경험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