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8. 20. 21:01

박사학위를 받은 두 제자를 보며

 

 

 

 

 

 

 

 

박사학위만 받으면 그럴 듯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박사학위는 사람까지 달라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박사학위는 아무나 받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세상사람들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을 외경(畏敬)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박사학위 수여식은 긴 가방끈의 종착역이었으며, 상아탑 안에서의 연찬(硏鑽)을 종결하는 표지가 바로 박사학위였다. 세상 사람들이 박사학위를 존경하니,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박사학위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지긋이 눌러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방 소도시의 어느 대학에서 있었던 일 하나. 당시 그 도시엔 작은 대학 둘이 있었다. 둘 중 큰 대학의 학장이 그 도시의 유일한 박사였다. 대학의 졸업식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그는 집에서 가운과 박사모를 착용한 채 휘적휘적 걸어서 학교 혹은 행사장까지 나가곤 했다고 한다. 그 스스로 자신의 박사학위가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으며, 그곳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존경스러웠을까.

 

구제(舊制) 박사 시대가 오래 지속되면서, 박사학위는 그야말로 학문의 완성자에게 주어지는 완장 같은 역할을 했다. 정말로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게 당시의 박사학위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명분과 이념을 중시하는 시대정신이 무너져 가면서 그 자리를 실용과 실리가 메우기 시작했고, 박사학위의 의미 또한 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가끔은 약간 우스운 인사들이 박사학위를 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고, 박사학위가 돈으로 거래된다는 소문들이 심심치 않게 돌기도 했다. 구제 박사의 구제(舊制)’구제(救濟)’로 희화화되기 시작한 것도, 가짜박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시절부터였다.

 

서양에서 받아들인 제도이겠지만, 우리 사회에도 신제박사가 등장했다.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시험과 논문만 통과되면 누구나 박사를 받을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든 건 일종의 혁명이었다. 박사모의 아우라가 바람처럼 사라지고, 근엄한 박사가운의 신비로움은 거추장스러움으로 전락했다.

바야흐로 박사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한참 전에 '도나 개나 모두 박사 되는세상에 살게 되었다고 도 넘은 탄식을 내뱉던 구제박사 한 분을 만난 적도 있다. 권위와 우상이 파괴된 보통인들의 사회이자 대중 사회가 그에게는 바로 도나 개나 모두 박사인 세상으로 비쳐진 모양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박사가 드문 세상, 표절박사들이 고위직에 앉아 거들먹거리는 세상, 우리가 지금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사실이다.

 

***

 

오늘, 내 제자 둘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가운데 열정 하나로 힘겹게 박사학위를 받은 그들을 힘 빠지게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옛날의 박사학위는 값이 나갔는데, 지금의 박사학위는 그렇지 못함을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옛날은 옛날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박사모를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사실 신제박사 초창기에는 박사학위를 받고나서 크게 앓아눕는 인사들이 많았고,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나왔으며, 심지어 학위수여식장에 가기 직전 삶을 마감한 분들도 더러 있었다. 박사학위가 통과된 뒤 혹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동안 앓아눕는 사례를 지금도 자주 목격한다. 예나 지금이나 박사학위 공부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리라.

 

최연 박사는 중국 산동성 옌타이에 있는 노동대학교(魯東大學校) 교수다. 2012년 과정을 시작한 두 학기 만에 아이를 출산했고, 첫 돌도 안 된 아기를 떼어놓고 돌아와 박사공부를 이어온 입지전적여성학자다.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낸 저력의 근원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뛰어난 천품이나 자질이 1차적 요인이었겠지만, 아가와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분투노력한 지극한 모정이야말로 결정적 요인이었으리라. 한국에서 살아온 우리도 재미없고 어렵게 여기는 계녀가류 규방가사이쁜 아가 옷 누비듯한 땀 한 땀 떠 내려 간 작업이 바로 그의 논문이다. 시간·공간의식이나 에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꽉 막힌 규방에서의 한심함을 정연한 담론으로 승화시킨 그 옛날 여성들의 삶을 잘도 요리하여 먹음직스런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최 박사는 조만간 출간될 그의 책 머리말에서 계녀가류 규방가사에 대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계녀가류 규방가사를 공부하면서 놀라운 깨달음이 왔다. 사실 여성 억압적 담론의 계녀가류 규방가사로부터 시대정신과 어긋나는 따분함을 느끼고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한 꼭지 두 꼭지 작품들을 읽어나가면서, 마냥 따분한 이야기들의 반복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 하나의 구조 안에 공존하는 표층성과 이면성을 해석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여성들에게만 엄혹한 잣대가 적용되던 암흑시대에 여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돌파구는 무엇이었을까. 이면적 의미를 역으로 마련해 놓은 그 시대 여성들의 지혜가 바로 생존을 위한 돌파구였고, 의도하지 않고도 오늘날의 여성시대를 마련하게 된 그 시대 여성들의 역사적 혜안이었다. 작품들에서 공간이나 시간의식, 생태여성주의 등을 읽어낸 것도 바로 그런 깨달음의 결과였다. 남성들의 기세가 등등하지만, 결국 그들도 언젠가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 고유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리라는 믿음 아래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나온 건 아닐까.”

 

그의 깨달음이 명료하여 나는 일단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 시대 여성들에 대한 동정이나 공감 없이 이런 논리가 가능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정도의 결심과 노력을 지속한다면, 조만간 학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던 것이다.

 

2002년 강의실에서 만난 학부 초년생 이상욱(무늬상점 대표)의 반전(反轉)과 발전(發展)은 내 자긍심의 바탕이다. 학부 초기 술에 찌들어 지내던 그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꾸짖음과 결심으로 학구(學究)에 몰두하면서 보여준 변신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강의와 논저들을 통해 노래문학으로 보아야 하는 고전시가의 본질을 잘도 캐치하여 오늘날의 케이팝(k-pop)으로 연결시킨 그는 얼마나 명민한가!

그는 싱어송라이터(singer-song writer)로서 음반도 여러 장 냈고, 음악시장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으니, 그의 미래는 참으로 밝다. 사실 케이팝이 세계 음악 시장의 핫한이슈로 떠올라 있긴 하지만, 현상에만 열광할 뿐 그 미학적 근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지한 것이 우리의 한계였다. 조만간 출간될 그의 책 머리말 가운데 한 부분을 보자.

 

“'우리의 가맥(歌脈)은 단 한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철부지 학부생 시절, 스승인 조규익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별 생각 없이 흘려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옛 노래와 지금 노래가 이렇게나 다른데 무슨 말인가? 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연구는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겉모습만을 가지고 성급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될 일이다.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대상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왕조나 국가가 바뀌었다하여, 전쟁이 일어났다하여, 심지어 국권을 빼앗겼다하여 한 민족의 노래 문화가 한순간 단절되거나 송두리째 바뀔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 노래는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어졌다. K-pop에서 전통의 요소와 외래의 요소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은 K-pop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한국 노래의 지속과 변이의 양상, 미학 등에 대한 연구서이다. 아울러, 음악 산업의 현장에서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을 정리한 실무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렇다. 내 말을 흘려듣지 않고 결국 박사논문으로까지 승화시킨 사례로는 그가 유일하다. 옛 노래문학으로부터 흘러오는 전통을 인식하며, 스스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을 업으로까지 삼고 있으니, 그가 내 학문적 자부심의 바탕이 되어 준 것은 분명하다. 융합과 통섭이 시대정신으로 정착한 지금, 반려자의 전공이자 주업인 디자인과 그의 노래가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그의 시대가 꽃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누구는 주마가편(走馬加鞭)하라했고, ‘미운 자식에겐 떡 하나 주고, 이쁜 자식에겐 매 한 대 안기라는 옛말도 있다. 그러나 옛 말들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면 그냥 쓰러질 수도 있다. ‘매 한 대보다 떡 하나가 젊은이들에게 오히려 도움 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시대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옛 어른들의 말씀을 묵수(墨守)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내 철학을 바탕으로 오늘 학위를 받은 두 제자들의 단점 대신 장점을 들어 보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니 당사자들이나, 이 글을 읽으시는 강호제현은 부디 양찰(諒察)하시기 바란다. 

 

 

 

백규 연구실에서

 

                                선배들, 지도교수와 함께

 

Posted by kicho
알림2016. 8. 3. 21:34


 

 

 

 

<<한국문학과 예술>>을 사랑하시는 학문동지 여러분께


그간 댁내 두루 무고하셨는지요?
근래 경험하지 못했던 더위와 싸우시며 연구에 몰두하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말복만 지나면 시원해지겠지요?
저는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구 한국문예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조규익입니다. 늘 논문투고를 간청하는 메일만 드렸으나, 오늘은 좀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좋은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한국문학과 예술>>이 이번에 ‘등재학술지’로 승격되었습니다. 등재후보학술지로 1년을 지낸 뒤에 받아든 ‘계속평가’의 결과라서 좀 얼떨떨하긴 합니다만. 제대로 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무겁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학문동지 여러분께서 좋은 논문도 주시고 기꺼이 심사도 맡아주시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덕택이라 생각하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연구소는 ‘문학과 예술의 융합’을 모토로 2006년 4월에 출범했고, 2008년 3월에 학술지를 창간하여 올해 7월말로 18집이 나왔습니다. 현재는 매년 3회(3월말/7월말/11월말) 발간하고 있으며, 조만간 4회로 늘려볼까 계획 중입니다. 모두 짐작들 하시겠지만, 연구소 10년 세월이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돈 벌어오는 연구소에게만 공간과 예산을 지원해주는 것이 대학의 연구소 정책이니, 현재는 한 뼘의 공간도 한 푼의 예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좋아지리라는 희망으로 ‘고난의 행군’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학문동지 여러분께 맨 처음으로 이 소식을 알려드리는 것은 저희 연구소를 더욱 사랑해 주시기를 간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를 믿고 여러분의 좋은 논문을 기꺼이 맡겨 주시는 일, 저희들의 심사요청이나 토론요청을 기꺼이 수락해 주시는 일, 정기 학술대회에 좋은 발표를 해주시고 참석하시어 경청 해주시는 일, 저희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을 많이 거론해주시고 인용해 주시는 일 등입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께서 적극 도와주셔야 저희 연구소와 학술지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문학의 쇠락을 절감하면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 원래 제가 연구소를 만든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힘만 합친다면, 괜찮은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함께 노력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도움 덕택에 좋은 소식 전해드릴 수 있게 된 점, 거듭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내 연구소려니’ 생각하시며 많은 도움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잘못 하는 점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조만간 나가게 될 논문공모에 많이 응해 주시고, 올해 안에 갖게 될 하반기 학술대회장에서 여러분을 많이 뵈올 수 있길 기대하며 부실한 인사의 말씀을 줄이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2016. 8. 3.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7. 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알림2016. 6. 18. 05:49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2016년도 제2회 전국학술대회
- 한국문예에 관여한 <<시경>>의 텍스트와 콘텍스트 -

 



  주제: 한국문예에 관여한 <<시경>>의 텍스트와 콘텍스트
  일시: 2016년 6월 18일(토) 13:00~18:00
  장소: 숭실대학교 벤처중소기업센터 311호

 



                                                                            사회: 정영문(숭실대)


  13:00~13:20  개회사: 조규익(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13:20~13:50  송지원(서울대)  조선조 음악의 <<시경>> 수용 양상

                                                                        

                                                                                    토론 김수연(한중연)


  13:50~14:20  양훈식(숭실대) <<시경>>에 나타난 민중의식의 본질

      
                                                                                   토론 최연(중국 노동대)


  14:20~14:30                   휴식


  14:30~15:00  홍유빈(고려대) 다산의 시경학을 통해 본 조선조 후기 <<시경>> 인식의
                                        양상


                                                                             토론 윤세형(숭실대)


  15:00~15:30  김수경(계명대) 한국 한문학에서의 <<시경>> 표현 운용 양상에 대한 유
                                        형적 접근

  
                                                                             토론 김성훈(숭실대)


 

  15:50 ~16:20  정상홍(동양대) <<시경>>을 통해 본 '상고시가'의 발생적 기반


                                                                              토론 조규백(한국외대)


  16:20~16:50  조규익(숭실대) 조선조 원구악장의 텍스트 양상과 의미


                                                                              토론 구사회(선문대)


  16:50~17:00                     휴식 및 정리


 

  17:00~18:00   종합토론  좌장: 김종성(숭실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4. 23. 17:37

고서(古書)의 마력(魔力), 인산(印山) 박순호 선생의 힘!

 

 

 

선생 댁 거실에서

 

 

 

선생댁 거실에서

 

 

 

선생댁 거실에서 양훈식, 선생, 백규

 

 

 

인터넷 서핑 중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글(<훔친 책 몰래 보관하기>)을 접했다. 책배 곯으며 고생해온 그분의 어린 시절이 어쩜 그리도 나와 똑 같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고희를 훨씬 넘기신 그 분과 나의 시차를 생각하며, 내가 겪은 책 굶주림이야말로 세대를 초월하는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게는 그 분이 고백한 책 도둑의 과거는 없으니, 책에 관한 절실함에서 내가 몇 수 정도 뒤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 때문인가. 나는 지금도 책에 관해서라면 사족을 못 쓴다. 아직도 책배 곯던 시절의 궁핍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책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해지고, 지방에 가서도 그곳 대학 도서관의 장서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고서점의 서가가 무척 궁금해진다. 해외에 나가서도 서점들이나 대학 도서관에서 눈에 번쩍 불이 나는 경험을 하는 건 마찬가지다. 늘 지방의 고서점과 고서 탐색 대열에서 만난 몇몇 동지들이 눈에 어른거리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훌쩍 지방행에 나서는 경우도 더러 있다. 가끔은 꼭꼭 숨겨놓은 몇 권의 고서들을 어루만지면서 한 자 한 자 써나간 책 주인의 정성을 느껴보기도 한다.

 

사실 고서이든 신간이든 내겐 모두 보물이다. 잘 만들어진 신간은 독서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세월이 흐르면 고서가 될 것이고, 후손들도 나처럼 그 책들을 어루만지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지은 책들은 아낌없이 나눠주지만, 내가 마음먹고 사 모은 남의 책들은 선뜻 주지 못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40여년의 세월을 버텨오는 중이다. 그러다가 뵙게 된 분이 원광대 명예교수이신 인산(印山) 박순호 선생이다.

 

대학원 재학 시절, 거질(巨帙)로 영인 출간된 <<한글 필사본 고소설 자료총서>>를 보며 인산 선생의 자료실이 궁금했고, 후학들에 대한 칭찬에 엄격하시던 나손 선생조차 인산 선생에 대해서만큼은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는 이유 또한 늘 궁금했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부초처럼 강호를 떠돌다가 21세기에 들어서고 나서야 선생을 면전에서 뵙게 된 것이다. <거창가>에 빠져 지내던 무렵 당신이 소장하고 계시던 이본들을 수차에 걸쳐 보내주셨고, 그 덕에 저서 <<봉건시대 민중의 저항과 고발문학 거창가>>는 크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로도 가끔씩 몸소 전화를 주시며 새로운 자료에 갈급하던 내게 중요한 귀띔과 격려를 건네곤 하셨다. 직접 찾아뵙고 자료를 받겠노라는 내 간청을 바쁜 데 그럴 필요 없다고 번번이 단칼에 자르시며 우편이나 인편을 통해 보내주시는 것이었다. 그저 감사의 편지나 전화로, 출간된 책이나 논문으로, 송구스런 마음을 표할 뿐이었다.

 

언젠가 인편에 보내주신 <궁즁도회가>를 분석하여 <<국어국문학>>(157)에 발표했는데, 그것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며 전화를 주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보내주신 10여 종의 <한양가> 이본들을 나와 내 문하생 5명이 함께 달려들어 분석연구하여 공저 <<박순호 소장본 한양가 연구>>(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3/조규익정영문김성훈서지원윤세형양훈식/학고방)를 출간했다. 그 직전에는 연구소 주최로 한국문예에 반영된 서울의 형상이란 주제의 전국 학술발표대회를 갖고, 그 자리에 인산 선생을 모셔 고문헌 탐색의 길에 만난 <한양가>”라는 발제 강연을 부탁드리기도 했다. 극도로 가난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울컥 눈물을 삼키시던 선생의 당시 모습이 내 마음에도 충격으로 다가와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은 선생의 가난과 내 가난이 순간적으로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최근 많은 자료들을 한글박물관을 비롯한 공공기관에 넘기심으로써, 좀 더 많은 학자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평소의 도타운 뜻을 실현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엄청난 자료들이 서고에 그득하시니, 그 점이야말로 민속학자와 서지학자로서 학계에 기여해 오신 선생의 생애가 남들이 추종하기 어려운 넓이와 깊이를 갖추고 계시다는 방증이 아닌가.

 

최근 찾아뵙기를 간청하여 처음으로 허락을 받았고, 차를 몰고 내려 가 뵌 것이 지난 주말이다. 도착해보니, 놀랍도록 해박하시며 열정적인 신선한 분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책들의 숲에 조용히 앉아 계셨다! 선생의 장서들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고 계신 고려조의 불서(佛書) 세 권을 황감한 마음으로 친견했고, 보물급의 회화작품들로 오랜만에 안구(眼球)를 세정(洗淨)할 수 있었으며, 각종 필사본들과 두루마리 가사들에 손때를 묻혀보는 호사도 누렸다. 그보다 감격스러운 사실은 선생께서 몸소 귀한 자료들을 한 보따리나 챙겨 주신 점이다. 물론 그거야말로 내 둔한 머리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숙제이자 마음의 짐이지만, 어쩌랴. 학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다니면서 달라붙어 씨름해야 할 화두(話頭)’ 한 자락 없다면, 그 또한 한심한 일 아닌가.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 나로서는 선생의 깊은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나라면 고색창연한 옛 문헌들을 자식에겐들 선뜻 맡길 수 있을까. 일생 손때 묻혀가며 애장해오시던 필사본들을 연구 자료로 기꺼이 내어주시는 선생의 깊은 뜻은 무엇이며, 나는 그 뜻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텍스트로부터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하는 작업 못지않게 난해한 또 다른 과제까지 안게 된 것이다. 그 옛날 누군가가 힘들여 써놓은 것들이 수백 년 풍우(風雨)와 수화(水火)의 고비들을 넘은 뒤 불쏘시개나 벽지, 아니면 종이공예의 재료로 망가지지 않은 채 학자들의 손에 오롯이 들어오게 된 것은 과연 누구의 공인가. 선생으로부터 자료를 받아 석박사논문과 저서를 쓴 수십 명의 학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영인으로 발간된 자료들로부터 혜택을 받은 수백, 수천 명의 학인들을 생각하면, 선생이야말로 우리나라 국문학계를 실질적으로 견인해 오신 주인공 아닌가.

 

아직도 유년 시절의 책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한 내 입장에서 스러지지 않는 책 욕심땅보다 두껍다’. 게다가 그 외경(畏敬)’^^의 영역인 고서에까지 욕심을 내게 되었으니, 욕망의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게 사실인 모양이다. 누구는 최신판으로 활자화된 자료를 갖고 논문 쓰는 학자들이 대부분인 우리 학계가 한심할 정도로 천박하다고 개탄한다. 원본의 글자를 잘못 읽어 오류를 범한 책들이 부지기수임을 감안하면, 그런 비판도 아주 근거 없는 건 아니다. 사실 원본을 최신 활자로 정확하게 옮겨주기라도 한다면, 비록 소수만이 원본을 접할지언정 그나마 학계의 장래를 위해 다행한 일 아닌가. 이처럼 국문학계를 천박성의 나락에서 건져 주신 셈이니, 선생의 걸어오신 생애와 이루신 업적이 더욱 빛나고 그 빛은 앞으로도 영속되리라 느껴지는 순간이다.

 

 

<<구운몽>>

 

 

 

두루마리 규방가사들

 

 

 

두루마리를 펼친 가사작품

 

 

 

한국에서 가장 오래 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서

 

 

 

규방가사 <부여행신젼>

 

 

 

<궁즁도회가> 연구논문

 

 

 

박순호 본 <거창가> 소개부분

 

 

 

<<거창가>>

 

 

 

<<한양가 연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2. 19. 16:10

사랑하는 국문과 졸업생 여러분!

 

 

 

 

대학에 대한 기대와 젊음의 열정으로 반짝거리던 여러분의 새내기 시절이 엊그제인데, 벌써 사회로 나가는 문지방에 서 있음을 보고, 시간이 덧없다는 생각을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서 졸업 축하의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도 교수님들 가운데 내가 맨 먼저 시간의 무상함을 절감하는 계절에 들어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며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때를 생각합니다우중충한 유신 말기의 냉기가 대지를 덮고 있던 때였습니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어떻게 입신할 것인가 고민에 싸여 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수렵 채취 시대-농경 시대-산업화 시대-정보화 시대-고도 지식정보화 시대를 두루 거쳐 왔음을 우스갯소리로 내세우곤 합니다만, 사실 내가 당시 농경시대에서 산업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존재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세계사를 관찰할 때 내 세대 즉 한국의 베이비부머들만큼 다이내믹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서 고도 경제성장과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두루 경험한 세대이지요. 우리 세대 구성원들 사이엔 간혹 금수저도 있었지만,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은 나와 같은 흙수저들 뿐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아 차라리 과감하게 베팅해볼 수 있는나 자신이고 우리였습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책 없는' 계획을 세운 뒤 한눈팔지 않고 밀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다시 올 수 없다는 절박감이야말로 '몸뚱이' 하나로 '도박판같은 세상'에 나서게 한 동력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부모 형제가 뒷배를 보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략 20년 전쯤인가요. 차를 몰고 미국 모하비 사막( Mojave Desert)과 그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데쓰밸리(Death Valley)에서 아무도 없는 가운데 황혼을 만났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그 때 느낀 막막함이야말로 나를 위해 책임 져 줄 아무도 없다는 실존적 자아인식으로 이어지는 두려움과 절망감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孔子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는 말이 <<맹자>>에 나옵니다. 공자 역시 어떤 계기를 만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 처한 자아를 인식했고, 그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말이겠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모하비 사막과 데쓰밸리에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꼈고, 그런 두려움과 외로움은 내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인식 위에서 강한 투지가 생겨났고, 그로부터 종이 위에 어설프지만 미래의 시간계획표를 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신입생들을 만날 때마다 시간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습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권유를 했으리라 믿습니다. ‘하루, 한 달, 한 학기, 일 년, 십 년, 일생단위의 시간계획을 짤 수 있어야 그나마 '모험 투성이'인 인생에서 패착의 가능성을 줄여준다는 사실을 모하비 사막 한 가운데서 깨쳤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암울하고 막막했던 내 젊은 시절, 흐릿하나마 어떤 가능성을 부여잡고 용기를 낸 덕분에 지금 여러분 같이 별처럼 빛나는 젊음들 앞에서 보잘 것 없는 내 인생의 경험이나마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점을 고맙게 여길 뿐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총아(寵兒)들인 여러분의 손에도 어떤 정해진 형태의 성공이 주어진 건 아닙니다. 안정된 직장이나 소시민적 행복이 지금 당장 가시화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나침반을 들고 광야에서 길을 찾는 개척자의 자세로 용감하게 저 문을 나서야 합니다. 지금까지 시간 계획을 하지 않았다면, 바로 지금부터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무궁한 가능성들을 촘촘하게 계획된 시간의 그물로 그들먹하게 건져 올려야 합니다.

 

외로움과 막막함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러분이 자신감만 갖는다면, 최후의 승리는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리라 믿습니다. 모하비 사막을 돌아 수백 마리의 소떼들을 거느리고 돌아오는 여러분을 10년 혹은 20년 후에 다시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며,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2016. 1. 19.

 

 

 

국어국문학과 조규익 교수

 


졸업식을 마치고

 

 

 

졸업식 후 연구실로 찾아온 양훈식 박사 가족과 함께

 

 

 


졸업식 후 연구실로 찾아 온 임민주, 국미진

 

 

 


졸업식 후 연구실로 찾아온 고조, 국미진, 임민주

 

 

 


졸업식 후 연구실에서 고조와 함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