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07. 7. 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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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연구총서>>(전 10권)가 2007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출판계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투자한 도서출판 학고방에 낯이 서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함께 기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서출판 학고방, 2006. 8.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6. 14.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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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시선(醉是僊)!

'취하고 보니 이 경지가 바로 신선'이란 뜻일까.
술을 애호(愛好)하는 동포선생,
일필휘지 보내온 '취시선' 앞에
잠시 넋을 잃는다.

시간은 폭염 속에 쉬임없이 달려가고
욕망과 분노는 녹음마냥 무성하여
지긋이 기지개켜며 눌러보는 이 한낮

이참에 나도 한 번 취한 신선이나 되어볼까나^.^

6. 14.

백규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6. 6. 14:06

* 이 글은 <<불교문예>> 37호(2007년 여름호, 2007/ 6/1)에 실려 있습니다.


위대한 모정의 승리
  --<도천수관음가> 새로 읽기--


                                                                         조규익

하나. 부성보다 강한 모성, 그 전통

입시를 서너 달이나 앞 둔 무렵의 사찰. 손 모아 부처님께 절 올리며 자녀의 고득점과 미래의 행복을 비는 어머니들로 북적인다. 한 사람의 아버지도 보이지 않는 그곳은 조건 없는 사랑이 꽃 피어나는 현장이다.
병원 입원실. 선천적인 불구로 태어난 어린 아들 곁에서 밤을 지새우는 모정이 TV 화면 가득 쏟아진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힘에 겨워 보이는 젊은 엄마의 처량하지만 강한 모습만 의연하다. 기약 없는 세월을 좁디좁은 입원실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임에도 여윈 얼굴에는 담담한 여유마저 흐른다. 아버지라고 어찌 자식 사랑이 없을까. 다만 그 절절함에서 모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 부성이다. 우리는 고려의 속악 <사모곡(思母曲)>을 통해 그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호미도 날이지마는
     낫같이 잘 들 리도 없습니다
     아버님도 어버이시지마는
     위 덩더둥셩
     어머님같이 사랑해주실 이 없어라
     아, 님이시여! 어머님같이 사랑해주실 이 없어라

아버지의 사랑이 어머니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 이 노래 화자의 의도는 아니리라. 다만 양자 간의 차이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훨씬 두드러지는 것은 그 간절함 때문이다.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 자식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사랑을 화자는 노래한다. 어쩌면 이 노래는 지은이의 특이한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거나 듣는 누구라도 그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말하자면 현실 속의 그런 체험이 노래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호미와 낫에 비유한 품새가 범상치 않은 것도 그런 효과를 배가시킨다. 그래서 짧지만 절창이고, 당시 인정의 기미(機微)를 잘 드러낸다고들 하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되는 모티프를 지닌 노래가 <목주(木州)>다. <<고려사 악지>>의 삼국 속악에 실려 있으므로 원래 민간에서 만들어져 불리던 노래일 것이다. 배경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목주에 살고 있던 효녀가 아버지와 후모(後母)를 지성으로 섬겼는데, 아버지는 후모가 그녀를 헐뜯는 말만 듣고 그녀를 쫓아냈다. 쫓겨나 떠돌다가 한 노파에게 구제되었고, 그녀는  노파의 아들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심히 가난한 친정 부모를 모셔다가 극진히 봉양했으나, 부모는 그래도 기뻐하지 않자 그녀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
후모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處事)가 서정화 될 경우 <사모곡> 같은 노래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주>가 <사모곡>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본능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그 가운데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일 만큼 절절하다. <목주>나 <사모곡>이 나왔을 삼국시대에 우리는 절절한 모성애가 흘러넘치는 또 하나의 노래를 만난다.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가 바로 그것이다. <<삼국유사>> 권3 ‘분황사(芬皇寺) 천수대비(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에 실려 전해지는 노래다.

둘. 지혜와 광명을 희구하는 모정

신라 경덕왕 대(재위 742~765)에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希明)의 아들이 생후 다섯 살 되었을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가 아들을 안고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걸려 있는 천수대비의 화상 앞에 가서 아들에게 명하여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다시 시력이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꿇으며
  두 손바닥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고 사뢰는 말씀을 두노라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에서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어
  두 눈 감은 나라
  ‘하나를 주소서!’ 하고 매달리나이다.
  아아, 나를 알아주실진대
  어디에 쓰실 자비인고

기록에는 ‘아들에게 명하여 노래를 지어 기도하게 했다’고 했으나, 다섯 살 된 아이가 이 노래를 지었을 리는 없다. 실제로는 희명 자신이 지은 노래를 그로 하여금 따라 부르게 했을 것이다.
서사 부분인 1~4행은 자비로운 천수관음을 향한 기구(祈求)의 언사이고, 5~8행은 본사로서 그 기구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결사인 9~10행은 마무리 부분으로서 눈 먼 아들의 눈을 뜨도록 만든 천수관음의 자비를 찬양하는 내용이다.
천수관음 즉 관세음보살은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여 중생들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소망과 아픔을 보살펴 준다는 믿음을 받고 있는 존재다. 그만큼 중생들과 가장 친근하여 염불에는 반드시 부처와 함께 칭명되기도 한다.
천수관음은 성관음(聖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준제관음(準提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등과 함께 대표적인 7가지 관음이며, 1천개의 팔에 달린 각각의 손바닥에 눈을 가졌다고 여겨져 온다.
여기서 ‘천’을 단순한 숫자 개념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주만방 즉 넓고 커서 한계가 없는 공간을 나타내며, 관음보살의 보살핌이 끝없이 펼쳐나감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도처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는 일을 관음보살이 수행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중생 희명이 이런 관음보살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기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희구한 것은 아니다. 두 눈을 잃은 자신의 아들에게 눈을 하나만 달라는 소청이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정이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존재가 관음보살이었다. 더구나 관음보살은 눈을 천 개나 갖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노래인가. ‘당신이 천 개의 눈을 가졌으니, 그 가운데 하나만 덜어서 우리 아이에게 주면, 우리 아이는 광명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진술이야말로 무엇보다 진솔하고 담백하다. 그리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하여금 그 노래를 부르게 했다. 아이의 순진성과 노래의 소박함이 만나 이루는 진실함은 결국 관음보살을 움직일 수 있었다.
천수다라니계청(千手陀羅尼啓請)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1.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대원만(廣大圓滿) 무애대비심(無碍大悲心)     대다라니(大陀羅尼) 계청(啓請)
2.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3. 천안광명변관조(天眼光明遍觀照)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관자재보살님과 같이 중생 보살핌이 넓고 크고 원만하여 막히는 데가 없이 자비심을 크게 하는 대다라니 열기를 청한다는 것이 1이다. 2는 관세음보살님이 천 개의 팔로 자비로운 원력을 널리 보급·보호·수지하게 하듯, 천 개의 팔로 중생들의 가정과 사회를 장엄하게 해달라는 뜻이며, 3은 관세음보살의 천 개 눈으로 세상을 두루 비추어 보듯이, 어두운 중생들도 마음을 항상 두루 비추어 보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눈은 무엇일까. 외계의 빛을 내면으로 투과시키는, 마음의 창(窓)이다. 동시에 생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눈을 감는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눈을 되찾는 것은 광명을 찾음과 동시에 잃어버렸던 사회적 권력이나 사랑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소설 <심청전>을 보자. 심봉사의 딸 심청이는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지의 감은 눈을 뜨게 한다. 자신의 몸을 팔아 공양미 삼백 석을 구했고, 자신의 몸을 희생시킴으로써 아버지에게 새로운 삶을 되찾아 드렸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에서 심청이는 눈을 ‘일월(日月)’이라 했다. 말하자면 광명이라는 것이다. 효성으로 아버지에게 광명을 드린 <심청전>은 지극한 사랑으로 자식의 눈을 뜨게 한 <도천수관음가>의 경우와 대조되지만, 그 정신이나 눈이 갖는 의미는 정확히 일치한다.
시력을 잃은 아들. 그를 바라보는 모정의 안타까움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다.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아들이 비록 눈이 없다 해도 그를 먹여 살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늙어 죽고 나면 그 아들은 험한 세상을 살아갈 방도가 없을 터. 그래서 모정은 크게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몸이 불완전한 사람이 홀로 살아가긴 어렵다. 그 가운데 눈은 가장 중요하다.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길이 바로 지혜요 광명이다. 어머니인 희명의 이름이 심상치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희명(希明)’이란 광명을 희구한다는 뜻이다. 이때의 광명은 진리를 비추어 주는 지혜의 빛이다.
지혜란 깨달음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러니 ‘희명’은 자연인이기보다 모든 불도들의 소망이 집약되어 만들어진 관념적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희명이란 존재를 부조(浮彫)할 때 당대인들의 마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어머니의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그 표본 역할을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천수관음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바로 이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 천수관음은 그 아들에게 시력을 주었고, 그 덕에 그는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이에 관한 일연의 찬(讚)은 다음과 같다.

竹馬葱笙戱陌塵     대말과 파피리로, 티끌 거리 노니더니.
一朝雙碧失瞳人     하루아침 파란 두 눈, 동자를 잃었도다.
不因大士迴慈眼     대사의 자비 입어, 눈을 찾지 못했다면.
虛度楊花幾社春     버들 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으리.
                                           (이가원 역)

희명의 아들을 여염의 평범한 ‘장난꾸러기 아이’로 본 것이 일연의 관점이다. 일연은 죽마를 타고 파피리 불며 제 또래 아이들과 장난치다가 눈을 다친 꼬마와 눈높이를 함께 하고자 한 것이다.
대사 즉 관음보살의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버들 꽃 피는 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라고, 자신의 아찔한 심정을 토로했다. ‘버들 꽃 피는 봄’이란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기 혹은 황금기다. 죽음을 준비하는 노년기 보다는 인생의 행복을 구가하는 청춘기에 눈은 더 긴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생의 세속적 행복에 집착하는 공간이야말로 범인(凡人)들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일연은 그런 범인들의 시각으로 희명과 그 아들에게 일어난 이적(異蹟)을 보고자 했다. ‘광명혜안(光明慧眼)을 구비(具備)코자 하는 불도(佛徒)들의 심적(心的) 자세(姿勢)를 집약표현(集約表現)한 어사(語辭)’라는 일부 선학들의 주장도 일견 타당하겠지만, 세속에서 만나는 지극한 모정이 이루어낸 기적으로 보는 편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런 점에서 <도천수관음가>는 지극한 모정의 노래일 수 있는 것이다.        

셋. 시인의 눈으로 본 <도천수관음가>


도천수관음가

                  박윤기
우리가 한 송이 꽃이었을 때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것은
바람이었네.

아직 꽃피우지 못한 마을의 아이들은 눈이 먼 채
不感의 하늘 속으로
잃어버린 點字를 찾고 있었지.

덫에 치인 꿈은
가위 눌린 채로 시위잠을 자고
젖줄 끊긴 살 속으로
뜨거운 嗚咽의 소리는 파고 들었네.

어느 빈 뜨락에도
아침을 몰고오는
소망의 작은 새떼는 날아오지 않고
우리들의 良識은
쉬임없이 강물에 자맥질하는
悔恨이었네.

층층이 내려서는
의식의 깊은 壁에
채찍의 겨울은 또 다른 장막을 둘러치고
바람은 무거운 囹圄마다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窓을
흔들며 있네.

은성했던 꿈의 부스러기가
부서져 내리는 길은 길마다
낮게 낮게 埋沒되고
우울의 계단을 빠져 나올 때
다시 어둠으로 차는 굴레.
모든 思念은 기실
풀었다가 다시 짜는 페넬로페의 織造였네.

돌아다 보면
그곳엔 오랜 묵시의 江이 흐르고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
기폭처럼 바람에 찢겨 나가고 있었지.

三界에 가득히
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앉고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청댓잎 푸른 가지를 비집고
피어오르는 아침은.
海潮音에 실려오는
비취 빛 청아한 아침 노래는.
오랜 冬眠의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외출을 서두르고
회색의 겨울은
부활의 눈을 뜬다.

8연의 매우 긴 이 시에서 시인은 향가 <도천수관음가>를 구체화하고 내면화 시켰다. 향가 <도천수관음가> 및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산문은 ‘암흑→광명’, ‘무명(無明)→지혜’로 전환되는 의미구조를 지니고 있다. 박윤기의 <도천수관음가>도 그런 의미구조를 충실히 따랐다고 볼 수 있다.
1연은 전체의 서사(序詞)로서, ‘꽃’과 ‘바람’으로 환유되는 ‘나(우리)’와 ‘세계’ 즉 우주적 보편상을 노래했다. 2연부터 6연까지는 실명과 암흑, 미망(迷妄)과 불행이 나열된다. ‘덫에 치인 꿈’, ‘젖줄 끊긴 살’, ‘뜨거운 오열’, ‘날아오지 않는 소망의 작은 새떼’, ‘회한’, ‘의식의 깊은 벽’, ‘채찍의 겨울’, ‘무거운 영어(囹圄)’, ‘어둠이 부딪쳐 흩어지는 창’, ‘꿈의 부스러기’, ‘우울의 계단’ 등 어둡고 칙칙한 운명적 상황을 구체화 시키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비로소 신의 힘이 ‘묵시’되는 부분이 바로 7연의 ‘묵시의 강’이다. 물론 아직도 ‘하늘을 더듬는 아이들의 작은 손이/기폭처럼 바람에 찢겨나가는’ 모습을 아프게 보여주는 곳이 그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7연은 단절이 깊어진 성(聖)과 속(俗)의 두 영역 사이에서 하나의 가능한 기적이 역사적 사건으로 구체화 되려는 단초를 마련해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8연에서 시적 의미는 행복으로 전환된다. ‘삼계에 가득히/천사들의 흰 은총은 내려 앉’게 되고. ‘비취빛 청아한 아침 노래’도 해조음에 실려 오게 되는 것이다.
‘오랜 동면의 잠에서 깨어난’ 일은 이미 암흑에서 광명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회색의 겨울’이 ‘부활의 눈’을 뜬 것은 희명의 아들이 시력을 회복하듯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과 등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시인 박윤기는 <도천수관음가>에서 ‘개안(開眼)’의 멋진 서사(敍事)를 길어 올려 서정의 틀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시 내용 가운데 향가 <도천수관음가>에서 필자가 읽어낸 ‘모정’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에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모정 역시 시의 내면이나 바탕에 잠재할 수 있는 정서의 큰 갈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넷. 갈수록 그리워지는 모정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이 바깥으로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그 많은 천수관음의 손과 눈 밑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보살의 힘이나 부처의 힘으로 찬양되던 불교왕국 신라. ‘한기리의 희명 모자’는 그 시절의 ‘힘없는’ 중생을 대표하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오고 가던 정, 특히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은 무엇보다 강했다. 귀족계급도 아닌 시골 사람 희명이 모정이라는 단순 소박한 무기로 관음보살을 움직인 것이다. 그건 감동의 힘이었다.
그래서 “신라 사람들 가운데는 ‘향가’를 숭상하는 자가 많았고, 천지귀신을 감동시킬 만한 노래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삼국유사>>의 편찬자는 말했을 것이다. 희명의 염원을 실은 <도천수관음가>가 천수관음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천수관음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염원에 힘입어 눈을 뜬 어린 아들은 과연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는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모가 되어 보아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말 속에는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진실이 내재되어 있다.
신달자의 <사모곡>과 가수 태진아의 <사모곡>을 통해 <도천수관음가>에 담긴 모정의 실체를 찾아보기로 하자.


사모곡

          신달자   
길에서 미열이 나면
하나님 하고 부르지만
자다가 신열이 끓으면
어머니,
어머니를 불러요

아직도 몸 아프면
날 찾냐고
쯧쯧쯧 혀를 차시나요
아이구 이꼴 저꼴
보기 싫다시며 또 눈물 닦으시나요

나 몸 아파요, 어머니
오늘은 따뜻한 명태국물
마시며 누워 있고 싶어요
자는 듯 죽은 듯 움직이지 않고
부르튼 입으로 어머니 부르며
병뿌리가 빠지는 듯 혼자 앓으면
아이구 저 딱한 것
어머니 탄식 귀청을 뚫어요

아프다고 해라
아프다고 해라
어머니 말씀
가슴을 베어요


사모곡

                            태진아
앞산 노을 질 때까지 호미자루 벗을 삼아
화전밭 일구시고 흙에 살던 어머니
땀에 찌든 삼베적삼 기워 입고 살으시다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
그 모습 그리워서 이 한 밤을 지샙니다

무명치마 졸라매고 새벽이슬 맞으시며
한평생 모진 가난 참아내신 어머니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며
학처럼 선녀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
이제는 눈물 말고 그 무엇을 바치리까

두 노래 모두 어머니의 위대한 힘을 말하고 있다. 문제가 생길 경우 신에게 매달리듯 전자의 화자에게 어머니는 매달리는 존재다. ‘자다가 겪는 신열’은 ‘길에서 겪는 미열’보다 고통의 면에서 심각하다. 그럴 때 화자는 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부른다고 했다.
‘엄마 손은 약손’임을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아프고 괴로울 때 떠올리게 되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자식의 아픔에 눈물을 닦고 탄식하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안타깝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아프다고 해라/아프다고 해라’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벤다고 슬퍼한다. 자식의 아픔과 어려움을 자신이 떠안으려는 존재가 어머니임을 결련에서 밝힌 것이다.
전자의 경우 1→2→3→4연으로 갈수록 모정에 대한 느낌의 강도는 고조된다. ‘불러요→닦으시나요→뚫어요→베어요’ 등 각 연의 결미(結尾) 동사들은 정서적 고양의 극적인 단서들이다. 아픈 자식을 근심스레 바라보며 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어머니, 그 어머니에 대한 자식의 뒤늦은 깨달음을 절절하게 노래한 경우다. 신달자의 <사모곡>에 그려진 모성애야말로 <도천수관음가>의 모성애 바로 그것이다.
태진아의 <사모곡>에는 ‘흙에 살던, 가난한’ 어머니가 등장한다. 모진 가난을 참아내며 땅 속에서 힘겹게 살다가 ‘소쩍새 울음 따라 하늘 가신’ 어머니다. 그토록 어렵게 살면서도 ‘자나 깨나 자식 위해 신령님 전 빌고 빌던’ 분이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의 건강과 미래를 위해 신령에게 기원하던 모정을 ‘눈물로’ 그리워하는 노래다. 따라서 태진아가 부른 <사모곡>의 모정 역시 <도천수관음가>의 모정 그 자체다. 
<도천수관음가>는 천수관음의 영험함을 드러내어 신라사회에 관음사상의 뿌리를 굳히려는 목적으로 만든 노래로만 볼 수는 없다. ‘한기리의 여자 희명’이나 ‘다섯 살에 눈 먼 그의 아들’이 실존했던 인물들일 수 있고, 분황사에 가서 갑작스런 눈병을 고친 사실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실존인물들과 사실을 통해 부처나 관음의 영험함을 선양하려는 의도 역시 분명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시와 배경산문에서 모정을 읽어내려는 것은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모정은 샛별처럼 빛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천수관음가> 이래 시대마다 모정은 위대한 힘을 발휘했고, 여성이 사회적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모정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삶과 생각을 휘어잡고 있다.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은 천수대비를 감동시킴으로써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정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식이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주려고 한다.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으로부터 변화(혹은 변질)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도천수관음가>의 모정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6. 3. 09:09
천하의 큼을 보고 나를 깨닫는 연행 길에 나서며
      -연행 길 사진전, 그 철학과 의미-              


                                                                 조규익(숭실대 교수)

한양에서 북경까지 넉 달 넘어 걸리던 왕복 6천리 길. 삼사(三使)와 군관, 시종 등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여행 길이었다. 교통편이 없으니 숙소며 식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 만무했다. 아랫사람들은 당연히 ‘한둔’이라 불리던 ‘한뎃잠’을 자야했으며, 윗사람들이라고 따뜻한 방을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을 에는 만주벌의 밤 추위에  가끔씩 맹수들이 출몰하기도 하던 험지의 고행 길이었다. 먹는 것 역시 변변치 않았고, 목욕을 한다거나 때에 따라 입성을 갈아입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사치였다. 병들어 아파도 몸 보전하고 누울 자리조차 없었다. 어찌어찌 병이 나으면 행운이고, 죽는 일 또한 허다했다. 시신을 떠메고 가거나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중도에 그냥 묻고 가야 했다. 끔찍한 고행 길이었으나, 지엄한 왕명이니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사직과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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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행차가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에 이른다. 조·명, 조·청 간 외교적 현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제나 문화 교류도 그런 행차들에 숨겨진 중요한 목적이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의 유일한 대외 창구였다. 극동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던 작은 나라 조선이 세상을 보려면 중국이란 창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큼과 세상의 넓음을 서책을 통해서나 알 뿐이던 당대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고행 길인 줄 알면서도 이런 저런 연줄을 통해 사행에 참여하려 했다. 말로만 듣던 ‘대국’의 선진문물을 현지에서 확인하고픈 욕망이 지식인들을 설레게 했다. 특히 중화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오랑캐’들의 사는 모습이 무엇보다 궁금했을 것이다. ‘한 번 몸을 일으켜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겠노라’던 홍대용의 포부는 연행에 나서던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들을 연행에 나서게 한  보다 직접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중화주의와 중국의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조선조 교조적 성리학자들의 당면과제였다. ‘오랑캐 청국’의 존재는 그들에게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오랑캐가 차지한 중원을 보고자 한 당대 지식인들의 깊은 속내엔 자존심을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 맞바꾸어야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가고자 했다. 뻔한 일이긴 했으나 가보지도 않고서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더욱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참담함을 뼈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기술해나간 것이 연행록들이다. 번화한 도회와 풍족한 물화를 보면서 ‘고인 물’ 같던 조선 지식인들의 내면에도 파문이 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문하던 이들에게 중국의 모습은 해답 그 자체였다.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그른 점은 그른 점대로 중국은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해나갈 모델이었다. 시시콜콜 적어놓은 견문들을 단순히 흥밋거리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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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한양을 출발하여 수많은 산과 물, 촌락과 도회들을 지나 연경에 도달했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디고 같다지만, 인정과 풍속이 현격한 이국의 그것들이 어찌 우리와 같을 수 있었으랴. 그래서 연행 떠난 지식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기와 감동을 바탕으로, 오랑캐들도 소중화의 조선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난 중국의 산하와 문물이야말로 수백 년 간 배워온 성경현전(聖經賢傳)보다 그들에겐 더 큰 스승이었다. 조선조 지식사회에 북학(北學)의 기조가 정착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행 덕분이었다!
   그로부터 몇 백 년 후에 태어난 카메듀서 신춘호 선생. 그는 지난 수년간 동호인들을 인솔하고 스스로 연행사가 되어 그 길을 되짚어 훑었다. 연도(沿途)의 풍물들을 모두 기록한 그 옛날의 연행사들처럼 그도 렌즈 속에 그 모든 것들을 잡아넣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국내와 중국의 연행노정을 답사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들을 영상으로 담기에 바쁜 그다. 사실성과 예술미가 조화를 이룬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라. 이미지들의 배경엔 수 백 년 전 연행사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의 모습만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그곳의 모습을 찍는 순간,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의 분위기까지 포착해 내고 있지 않은가.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5. 22. 10:52
 

회원 여러분께


그간 안녕들 하셨는지요?

이제 계절은 슬금슬금 여름으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연초부터 계획했던 여름 학술발표회 겸 답사내용이 확정되어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이번 학술발표회는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소장 허남춘 교수)와 공동으로 제주에서 열기로 결정되었습니다. 6월 27일 출발하여 29일에 돌아오는 2박 3일 일정입니다. 첫날 아침 9시 반경 제주 공항에 도착, 곧바로 서귀포 제주대학 연수원으로 이동하여 학술발표회를 갖게 됩니다. 그곳에서 1박 후 다음날부터 이틀간은 제주도 일대를 답사할 예정으로 있습니다.(아래쪽 일정표 참조)

왕복 항공요금 만으로 2박 3일 동안 제주의 멋진 코스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는 앞으로도 아마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원하신다면, 가족이나 친구를 동반하셔도 좋습니다. 여름이 닥치기 전에 제주의 추억을 만들고 싶으신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립니다.

단체 비행기 표 구입 관계로 5월 31일까지만 신청을 받기로 하겠습니다. 아래에 적는 계좌번호로 1인당 15만원(여행 보험료 포함)의 돈을 입금하신 다음 답신메일로 성함과 주민등록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아니면 총무간사(정영문 : 010-6799-4670)에게 전화를 주셔도 좋습니다.

그럼 여러분의 뜨거운 호응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7. 5. 22.


     사단법인 온지학회 회장  조규익 드림


 *참 가 금 : 1인당 15만원(여행자 보험 포함)

 *송금계좌 : 우리은행 090-07-159601  김인규(온지학회)        








2007년 사단법인 온지학회·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합동학술대회


□ 학술대회 취지


▶ 학술대회 주제 : 옛 문헌 속의 제주


▶ 취지

  사단법인 온지학회는 <옛 문헌 속의 제주>를 주제로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와 공동으로 2007년 학술대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옛 문헌에 나타난 제주의 모습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짚어보고, 이에 덧붙여 제주지역의 민요․설화 등 구비문학도 살펴보려 합니다. 아울러 연구주제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기 위해 제주도 내 관련 사적지에 대한 답사도 실시하고자 합니다. 회원 및 관심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  시 : 2007년 6월 27일(수) ~ 6월 29일(금)

․ 장  소 : 제주대 서귀포연수원 세미나실

․ 주  최 : 사단법인 온지학회,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 주  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 후  원 :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국어교육과


□ 행사일정

[6월 27일(수)]

13:00~13:40  개회사 - 허남춘(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장)/조규익(사단법인 온지학회 회장)

             축사 - 조남권(사단법인 온지학회 이사장)


   전체 주제 : : “옛 문헌 속의 제주”

13:40~15:30  제1부 발표 및 토론

              - 사회: 김인규(영산대)

 ▶ “탐라순력도와 제주, 제주인” ― 이보라(홍익대)

      - 토론 : 송희경(이화여대)

 ▶ “문헌설화에 나타난 제주, 제주인” ― 김준형(순천향대)

      - 토론 : 현승환(제주대)


15:40~17:30 제2부 발표 및 토론

            - 사회 : 허남춘(제주대) 

 ▶ “제주 한시에 나타난 제주, 제주인” ― 박동욱(숭실대)

      - 토론 : 부유섭(한국학중앙연구원)

 ▶ “추사의 언간(諺簡)에 나타난 제주 정서” ― 조평환(건국대)

      - 토론 : 윤치부(제주교대)


17:30~17:40  휴식


 17:50~18:30 제3부 발표 및 토론

 ▶ “고전소설 배비장전에 나타난 제주” ― 김동윤(제주대)

      - 토론 :   장시광(서울대)

  ▶ “조선후기 목자(牧者)의 신분 변동” ― 김동전(제주대)

      - 토론 :   조규익(숭실대)


18:40~20:00   만찬

20:00~       숙박(서귀포시 제주대학교 연수원)


[6월 28일(목)]

 제주 구비문학과 유배문학 유적지 답사

07:00~08:00  아침식사

08:00~08:30  중문관광단지로 이동

08:30~10:30  천제연 폭포, 대포 주상절리 관람(서귀포시 중문동)

10:30~11:00  삼방산으로 이동

11:00~12:30  삼방산-용머리해안 관람(안덕면 사계리)

12:30~13:30  점심식사

13:30~14:00  송악산으로 이동

14:00~15:00  송악산 등산(대정읍 상모리)

15:00~15:30  추사적거지로 이동

15:30~16:00  추사적거지 관람(대정읍 인성리)

16:00~16:30  수월봉으로 이동

16:30~17:30  수월봉-차귀도 관람(한경면 용수리)

17:50         숙소(제주대학교 연수원)로 귀환


[6월 29일(금)]

 제주 구비문학과 유배문학 유적지 답사


07:00~08:00  아침식사(할망뚝배기집. 064-733-9934)

08:00~08:30  천지연폭포로 이동

08:30~09:30  천지연폭포 관람(서귀포시)

09:30~09:40  정방폭포로 이동

09:40~10:30  정방폭포 관람(서귀포시)

10:30~11:00  큰엉해안경승지로 이동

11:00~12:00  큰엉해안경승지 및 김영갑 갤러리 관람(남원읍 남원리)

12:00~13:00  점심식사

13:00~14:00  섭지코지로 이동

14:00~14:30  섭지코지 관람(성산읍 신양리)

14:30~15:00  성산 일출봉으로 이동

15:00~16:00  성산 일출봉 등반(성산읍 성산리)

16:00~17:00  조천 연북정으로 이동

17:00~17:20  조천 포구와 연북정 관람(조천읍 조천리)

17:20~18:00  제주공항으로 이동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5. 20. 00:33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아, 제주 여성의 운명이여!-


아주 어릴 적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읽었다. 오래 전의 일이라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으나, 마지막 장면은 지금까지 가슴에 오롯이 남아있다. 사랑하는 왕자님의 배를 따라가던 인어공주. 그 왕자님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러 가는 길이었다. 마법의 힘으로 꼬리는 뗐지만 말을 못하게 된 인어공주였다.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간세상으로 환생했으나, 말을 잃어 사랑의 성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인어공주로 돌아가려면 왕자의 가슴을 찌르고 그 피를 자신의 다리에 발라야 했다. 가까스로 왕자의 침실에 들어갔으나 결국 그 일을 포기하고 물에 몸을 내던져 포말로 사라졌다는 인어공주의 슬픈 이야기였다. 처절한 자기희생을 통해 결국 ‘영원한 사랑’을 성취한 것일까. 그게 바로 인어공주의 운명이었다. 고귀한 것을 위해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은 이처럼 비장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


미끈하게 심해를 유영(遊泳)해 들어가는 해녀들의 모습에서 인어공주와의 유사성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듣기에 따라 ‘이미지의 폭력적 결합’이라 할 만큼 둘 사이의 유사성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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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의 모습(해녀박물관)

그러나 상상의 공간이든 현실의 공간이든 양자 모두 바다를 무대로 한다는 점. 억척스레 자신의 꿈을 가꾸지만, 운명을 거역하기보다 순응한다는 점 등이 해녀와 인어공주에 대한 내 생각을 결정한 요인이리라. 어려서부터 물질로 세월을 보내 바닷물과 해풍에 주름이 깊어진, 나이 든 해녀들을 보라. 그들의 모습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환상과 낭만의 서정이 아니라 현실과 투쟁의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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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 딸 때 사용하는 빗창

 추우나 더우나 365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제주 해녀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삶의 엄혹(嚴酷)함을 확인하기 위해 죽음의 공간을 밥 먹듯 드나들고 있는 것이다. 깊은 바다를 자맥질하는 수십 초의 짧은 순간. 가쁜 숨비소리와 함께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한 알의 전복이 전부이지만, 죽음의 허무보다는 삶의 뿌듯함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존재가 해녀들이다.


   ***


정방폭포 앞 해변에서 좌판을 벌이고 갓 따온 해물들을 팔고 있는 늙은 해녀와 제주 민속촌박물관, 해녀박물관 등에서 ‘박제된 해녀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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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아래 쪽 해변에서 해산물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해녀들

모두 시간을 초월하여 ‘삶에 봉사하는’ 제주해녀들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삶을 통해 ‘억척스러운 제주의 여성성’을 형성해왔지만, 결코 자신들의 삶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래서 가끔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도 했으리라. 특히나 제주도에 태어난 것을.

 사방을 둘러봐야 시퍼런 바다. 그 장벽이 가로막고 있으니, 그들은 그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주 해녀의 바다 개척은 그런 현실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과 투지 의 소산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라는 속담을 만들어냈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낳지’라는 뜻이다. 운명에 순응하면서 살길을 개척하는 제주 해녀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속담이다. 가족을 살리고, 제주를 살려온 해녀들의 삶. 그 정신을 다시 살려내고,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제주 해녀 만세!!!

                                      <2007. 5. 19. 아침, 제주도 한경면 청수리에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