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0. 28. 23:55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미래의 꿈을 찾다!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제1일차-치밀한 미국인들

 

 

 

 

풀브라이트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미국 내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들에 체류하고 있는 학자들은 기간 중 최소 1회 이상 34일의 발전 세미나에 참석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최근 나는 미리 3회까지의 시기와 주제만을 알려 준 다음, 신청을 받아 배정하는 풀브라이트 측[CIES(Council for International Exchange of Scholars, 국제 학자 교류 위원회’) Enrichment Seminar Team]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광대한 미국 땅에서 미리 장소를 알려 준다면 대개 한쪽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고안해낸 지혜였을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옛날의 서부에서 새로운 서부로: 미국 스토리의 형성에 기여하는 땅의 역할 [Old to New West: The Role of Land in shaping the American Story](10/23-26)

2. 법의 지배: 인권과 정의[Rule of Law: Human Rights and Justice](11/20-23)

3. 사회적 기업가 정신: 혁신하는 비영리 단체들과 발전하는 공동체들[Social Entrepreneurship: Innovating Nonprofits Developing Communities](2014 3/19-22)

 

모두 유익했으나, 그래도 나와 가까운 쪽은 1번이었다. 1번을 1순위, 2번을 2순위로 선택하여 신청했으나, 1번의 지원자가 많아 부득이 나를 대기표에 올렸다는 연락이 왔다. 어쩔 수 없이 2번으로 갈 각오를 하고 있던 차 928일에 털사 전 지구 연합[Tulsa Global Alliance, 약칭 TGA]’에서 이메일이 왔다. 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번을 주제로 자신들이 이번 세미나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신청할 사람은 하라는 연락이었다. 대기표에 올려놓았다던 나에게까지 연락한 것을 보면, 막상 뚜껑이 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오클라호마의 털사시티(Tulsa City)가 세미나 장소임을 알게 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포기한 모양이었지만, 나로서는 사막 속의 단비인 셈이었다.

 

스틸워터에서 차를 몰고 달리면 1시간 남짓 걸리는 털사가 아닌가. 어차피 풀브라이트에서 비행기 표를 비롯한 모든 비용을 대 주는데 이왕이면 여행하는 셈 치고 먼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으냐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썩 좋지도 않은 미국 비행기들을 갈아타면서까지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무엇보다 1번 주제가 내겐 환상이었다. 1012TGA가 보내 준 Overview[행사개요]를 보고는 더더욱 가슴이 설렜다. 이 지역 인디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탐구가 세미나 내용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이 결정되면서 주최 측의 주도면밀함이 감지되었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참석자들[이번에는 40개국 70명의 학자들]의 교통편과 숙박 및 식사 주선, 세미나 장소 마련, 강사 및 패널리스트 섭외, 자원 봉사자 동원, 이동 차편 마련, 현장 견학 등 행사 전반의 일정을 짜고 조정하는 일들일 텐데, 사실 가까이에 사는 내가 오히려 쉽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 표를 사서 보내주고 공항에 픽업을 나가면 그만이지만, 내 경우는 나 스스로 차를 몰고 가거나 주최측이 누구를 보내서 라이드를 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 차를 몰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규정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TGA의 행사 책임자 Bob Lieser씨와 이곳 역사학과 학과장 사이에 몇 번의 이메일이 오고 가는 것 같더니 최종적으로 내게 이메일이 왔다. 스틸워터에 있는 OSU 메인 캠퍼스와 OSU 털사 캠퍼스를 왕래하는 셔틀버스[Orange Big Bus]에 자리를 예약해 놓았고, 털사에 도착하는 대로 Mr. Clark Frayser가 픽업을 나갈 것이며, 세미나가 끝나고 돌아오는 날엔 Dr. Ron Bussert가 스틸워터의 집까지 나를 태워다 준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통보해 주는 것 아닌가. 참으로 한 치의 빈 틈도 보여주지 않는 그들이었다. 내가 만약 이런 행사를 주관했을 경우, 참가자가 스스로 차를 몰고 오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규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는 이들의 자세가 첫판부터 범상치 않았다.

 

***

 

23일 오후 310. OSU 털사 캠퍼스에 도착하니 클라크 씨가 차를 대놓고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로 호텔[Holiday Inn City Center]에 도착하여 등록 후 체크인을 한 것이 330. 방에서 쉬다가 5시 정각에 호텔 2층의 시마론 포이어(Cimarron Foyer)와 테라스 등에서 간단한 음식을 들며 참석자들끼리 환담을 나누다가, 버스를 타고 세미나 장소인 길크리스(Gilcrease) 뮤지엄[미국통신 12 참조]으로 이동했다.

 


TGA에서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준 일정표


세미나 기간동안 패용한 명찰


참가자들의 숙소[Holiday Inn City Center, Tulsa]

 


호텔 방에서 내다 본 털사 다운타운의 모습[가운데 첨탑 건물은 성가족 성당]

 

뮤지엄 강당에서 열린 행사의 내용은 환영사와 기조연설이었는데, 털사 대학교 세계교육 담당 교무 부처장인 셰릴 박사(Dr. Cheryl Matherly), 미 국무성 교육문화국 성인 프로그램 매니저인 레빈(David Levin) , IIE[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 국제 교육 연구소]의 캠벨(Kristin Campbell), 털사 대학교의 길크리스 박물관 담당 부총장인 듀안 킹 박사(Dr. Duane King) 등의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환영사에 이어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인 론다 박사(Dr. James Ronda)로부터 미국 서부의 발견[Finding the American West]’이란 주제의 기조연설을 들었다. 그는 미국 서부의 광범한 역사를 소개한 다음 서부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한 핵심 장소로 오세이지(Osage) 카운티를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넓은 의미의 서부, 특히 오클라호마가 갖고 있는 무궁한 현실적 의미와 한계를 설파했고, 우리가 내일 보게 될 Tall Grass Prairie[대초원, 이하 TGP로 약칭]가 갖고 있는 인간적물질적 경관의 의미를 이해해 줄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우연이겠지만, 그는 강연 서두에 오클라호마 주를 소개하면서 "Oklahoma State is taller than South Korea."라고 '콕 집어' 말했는데, 미국의 1개 주보다 작은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작은 나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기조발표를 하는 Dr. James Ronda

 

***

 

730. 우리는 박물관의 비스타 룸(Vista Room)으로 이동,하여 Rick Morton, Nathan Eicher, Isaac Eicher 3인조 스윙밴드(swing band)의 서부 지역 컨트리 뮤직인 블루그라스를 감상하며 첫날의 만찬과 대화를 즐겼다. 그 자리에는 오클라호마 지역의 풀브라이트 동문들, 털사 커뮤니티의 지도자들, TGA 관리 이사들, 기업 회원 등 많은 지역 유지들이 초대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색적인 인사가 바로 인디언 출신의 이 지역 최고 기업가 메슈리 박사[Dr. Dayal T. Meshri]였다. ARC[Advance Research Chemicals, Inc.]CEO인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반복하여 강조했다. 특히 현대자동차를 방문한 일과 부산에서 술을 마시던 추억을 크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소통의 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찬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3인조 밴드


만찬장에서 스리랑카의 학자 Dr. Asanthra, 인디언 출신 CEO Dr. Dayal T. Meshri와 함께


만찬장에서  Dr. Dayal T. Meshri, Mr. Clark Frayser와 함께


만찬장에서 TGA 대표 Ms. Becky 및 Mr. Charles와 함께


만찬장에서 Mr. Clark Frayser와 함께


만찬장에서 Dr. Cheryl Matherly, 털사대학교 한국인 학생 김세연과 함께

 

***

 

9시쯤 만찬이 끝났다. 첫날의 몇 시간을 보내며 나머지 일정도 빡빡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세미나 기간에 무엇을 배워야 할지 뚜렷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40개국에서 몰려든 70명의 학자들이 영어라는 기호 하나로 훌륭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영어와 미국의 현실적인 힘을 느끼기 시작했고,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모든 일들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미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나와 우리의 쓸데없이 대범함에 일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 순간 톱니바퀴처럼 철저한 정확성을 중시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대충 해!”라는 상투어야말로 나와 우리의 진로를 막는 커다란 돌덩어리임을 깨닫게 된 것은 세미나 첫날에 얻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7. 13:57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Beaver effigy pipe, Woodland period


<Breaking Through the Line> Charles Schreyvoge 작


<Ceremony, Spirit Ascending>, Woody Crumbo작


<Creek Chiefs>, Acee Blue Eagle 작


<George Washington>, Rembrandt Peale 작


<Indian Council(Sioux)>, 1847 George Catlin 작


Mask, Chumash 족


Moccasins Cheyenne 족, 19th century


<Mourning Her Brave>, 1883년 George De Forest 작


<Overleaf-Ranchos Church with Indians>, Ernest L. Blumenschein 작


<Siouxs족의 Playing Ball>, Charles Deas 작


<Syacust Ukah>, 1762년 Sir Joshua Reynolds 작


<Taos Deer Hunter>, Bert G Phillips 작


<The Wild Turkey>, John James Audubon 작


<Thomas Gilcrease>, Charles Banks Wilson 작


<Warriors on Horses>, Acee Blue Eagle 작


길크리스 뮤지엄 앞에서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Tulsa)의 길크리스(Gilcrease)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921일 토요일. 아낌없이 쏟아 붓는 햇살이 평원을 달구기 시작할 무렵, 언제부턴가 가보고 싶었던 털사로 길을 떠났다. 대략 한 시간 반 거리라곤 하지만 자동차 몇 대 다니지 않는 드넓은 길임을 감안하면 실제 거리는 우리 생각과 많이 다르리라. 과연 맑은 공기와 화사한 햇살,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의 짙은 활엽수들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시내에서는 조심조심하던 미국인들도 가속페달을 눌러 밟는 듯 412번 하이웨이에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지역에서도 유명한 박물관이 유독 많은 문화도시 털사.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첫 방문처는 인디언 관련 미술품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는 길크리스 박물관(Gilcrease Museum)이었다. 인디언 미술품에 대한 호기심 뿐 아니라 일생 모은 콜렉션으로 만든 박물관에 깃들었을 한 인물의 정신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호수 같은 아칸사(Arkansas) 강가의 샌드스프링스(Sandsprings)를 지나고 털사 카운티 경계를 들어서서 잠시 달리다가 한적한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서 길크리스 뮤지엄 로드로 접어들었다. 그로부터 눈 깜짝하는 사이 좌측 언덕배기에 숨듯이 앉아 있는 뮤지엄을 만났다. 주소는 ‘1400 North Gilcrease Museum Road’. 털사대학에 속한 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널찍한 규모도 규모려니와 컬렉션의 양과 질에 놀라 자빠질 뻔 했다. 12,000점의 미술품, 300,000점의 민족지적(民族誌的)고고학적 유물들, 100,000점의 희귀 서적과 육필 원고 등을 포함,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소장품들이 빽빽했다. 누가 미국을 문화의 불모국이라 했던가. 유럽의 건축이나 박물관들에서 느끼는 고색창연함은 아니로되, 이곳만의 잘 보존된 예술과 문화재야말로 쉽게 측량하기 어려운 미국의 힘과 깊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이 박물관은 미국의 예술과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미국 정신의 산실이었다. ‘미술작품으로 승화된 민족의 서사(敍事, epic)’ 바로 그것이었다. 그 정신의 구현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이 박물관을 세운 토마스 길크리스(Thomas Gilcrease)라는 인물.

 

그는 1890년 루이지애나에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 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 등으로부터 이어진 그의 부계(父系)와 달리 어머니 엘리자벳은 무스코기(Muscogee)와 크리크(Creek) 등 원주민의 피를 25%쯤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길크리스로서는 자연히 인디언에 대한 관심이나 애착심을 타고 난 셈이었다. 게다가 그가 태어난 몇 개월 후 그의 가족은 인디언 구역의 크리크족 거주지로 이사했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려받은 13%의 크리크족 피 덕분에 엄청난 땅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털사 남쪽 20마일의 160에이커에 달하는 땅도 있었다. 1908년 인디언인 오세이지(Osage) 족 출신의 벨레(Belle Harlow)와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그는 1912년부터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지금의 길크리스 박물관의 중심이 되는 주택을 사들였고, 1922년에는 길크리스 석유회사를 세웠으며, 1941년 곳간과 차고를 예술품 수장고로 리모델링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1947년 뉴욕의 수집가 질레트(Gillette Cole) 박사로부터 엄청난 컬렉션을 통째로 사들이고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알렉산더 호그(Alexander Hogue)를 고용하여 뮤지엄을 설계하여 그의 소장품들을 전시하게 했으며, 1949년에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를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단계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58년 길크리스 재단은 뮤지엄의 건물과 땅을 털사시티에 기증함으로써 길크리스 뮤지엄은 본격적인 출발을 보게 된 것이다.

 

***

 

뻐근한 다리를 끌다시피 뮤지엄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그가 1949년에 붙였다는 미국의 역사와 예술에 관한 토마스 길크리스 연구소란 이름이야말로 이 뮤지엄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일별한 많은 작품들은 대부분 실제 삶을 그려낸 극사실주의 미학의 소산들이었기다. 지난주에 들른 오클라호마시티의 카우보이 박물관에서는 인디언들과 카우보이들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삶의 파편들을 감상했으나, 지금 이곳 털사의 길크리스 뮤지엄에서는 예술가들의 해석을 거친 삶의 모습들을 확인하게 되었다.

 

, 해는 짧고 힘은 달리는데 촘촘하게도 짜여 있는 이 역사와 예술의 숲을 어찌 헤쳐 나갈까? 무정한 길크리스 뮤지엄은 이국의 나그네들에게 한없이 너그럽기도 하고, 한없이 무정하기도 하구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1. 02:08

 

 


카우보이 박물관 입구


카우보이 박물관 마당


카우보이 박물관 로비에 있는, James E. Fraser(1876~1953)의 조각작품 <The End of Trail>


인디언들의 생활 자수공예


인디언 아이들이 갖고 놀던 인형들(아이들의 의상을 엿볼 수 있음)


인디언 아기들을 담아갖고 다니던 휴대용 도구


인디언의 생활공예(식물 줄기로 짠 바구니)


인디언들의 생활공예
   

카우보이들의 마구들


서부영화에 카우보이로 출연한 배우


레이건과 스탠윅이 출연한 서부영화 '몬태나의 캐틀 퀸' 포스터


서부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와 카우보이 소품들


서부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던 죤 웨인


카우보이 모자들


카우보이 의상들


카우보이 부츠들


서부시대의 마차


블랙 카우보이


서부시대 카우걸의 모습


서부시대 카우보이들의 침실



성장(盛裝)한 카우보이


카우보이의 의상들


카우보이의 마구 및 의상


카우보이의 재산인 소나 말의 등에 찍던 낙인


낙인의 도구와 글자의 뜻



로데오 경기 모습 
               
서부 개척시대 초등학교 교실
            
    Hollis Randal Williford의 Bronz <The Snake Priest, 1980>


                 
Tucker Smith의 유화 <The Return of  Summer, 1990>

      
Martin Grelle의 유화 <Teller of Tales, 2002>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을 보고-

 

 

몇 년 전 이스라엘을 여행하면서, 성서에 광야로 등장하는 사막지대의 한 곳에서 키부츠들을 만났고, 그것들을 통해 그 나라의 저력을 느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광야에 있다!’는 모토로 몸소 그곳에 들어가 사막을 옥토로 일구다가 생을 마친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짓는 요인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였다.

 

15년 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서부의 유서 깊은 도시들과 사람의 손때 묻지 않은 자연을 둘러보면서 미국의 미래가 함축된 역사의 힘을 느낀 적이 있다. 휘황찬란한 동부보다 거칠지만 힘찬 투쟁과 개척의 역사를 안고 있는 서부가 훨씬 발전적인 그들의 미래를 추동하는 기반이었다. 그러나 그 힘과 역사적 의미를 마음으로만 느낄 뿐,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

 

지금 우리는 미국의 중남부에 해당하는 오클라호마 주에 와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중남부이지만, 대서양을 건너온 유럽의 백인들이 서부로! 서부로!’를 외치며 말을 타고 서쪽으로 몰려가던 당시에는 넓게 보아 이 지역 또한 서부의 일부 혹은 서부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쯤으로 보였으리라.

 

미국이 세계 최고 부자의 지위에 오르는 계기가 된 골드러쉬(Gold Rush). 각지의 인디언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금을 찾아 서부로 몰려가던 장관(壯觀), 데쓰밸리(Death Valley) 등에 남아 있는 당시 금광의 유허(遺墟)들을 보며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서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시공(時空)이 바로 ‘The National Cowboy & Western Heritage Museum[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 이하 카우보이 박물관으로 약칭]’이었다.

 

오클라호마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35번 하이웨이와 63번 시내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 기가 막히도록 절묘한 위치의 박물관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스틸워터를 출발,오클라호마 시티의 반즈앤노블 서점에 들러 주변 지역의 지도와 인디언 관련 참고서적들을 산 다음, 아름다운 숲을 끼고 달리는 63번 도로를 따라가자 산뜻한 외관의 카우보이 박물관이 나타났다.

 

***

 

이스라엘에 벤 구리온이란 영웅이 있어 집단농장 키부츠를 통해 광야를 생명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듯, 광활한 서부를 품고 있는 미국엔 무수한 개척자들, 원주민들과 투쟁하며 서부를 활개치고 다니던 카우보이들, 그리고 그들을 알아 준 선각자 레이놀즈(Chester A. Reynolds)가 있어 미국 정신의 모델하우스인 카우보이 박물관이 태어날 수 있었다. 따라서 카우보이 박물관은 드넓은 황야 오클라호마의 한복판에 찍은 화룡점정(畵龍點睛) 마침표인 셈이다.

 

카우보이, 보드빌(vaudeville) 연기자, 익살꾼(humorist), 사회평론가이자 영화배우였던 윌 로저스(Will Rogers)의 기념관[오클라호마 클레어모어(Claremore)시 소재]을 보고 자극을 받은 레이놀즈는 카우보이 명예의 전당을 세우고자 했다. “나는 항상 자신을 카우보이, 카우보이 작가, 카우보이 익살꾼, 카우보이 배우 등으로 자처한 한 인물을 위해 세운 기념관을 보았는데, 윌 로저스 기념관의 내외장이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 때 하나의 생각이 번개처럼 내 마음에 떠올랐다. 서부를 건설하는 데 큰 공헌을 한 다른 많은 카우보이들, 소몰이꾼들, 목축업자들은 어떤가? 왜 이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명예의 전당은 만들지 않는가?”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신선한가? 특정인을 기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서부를 만든 주역은 황야의 먼지와 함께 사라진 수많은 무명의 카우보이들과 개척자들이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의 건립을 위한 장정(長征)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일이 성사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들을 겪었지만, 연방정부와 의회 및 각 주정부들까지 적극 나서는 등 거국적인 협조 아래 10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모았고, 각 지역의 경합을 거쳐 현 위치에 멋진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19656, 드디어 개관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거사의 장본인 레이놀즈는 개관을 보지 못한 채 1958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호소로 결국 힘을 합치게 된 미국은 개척시대의 꿈과 시련을 역사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이다.

 

***

 

대단한 컬렉션이었다. 카우보이와 목축, 인디언의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은 물론 수많은 서부영화들의 명장면이나 배우들이 생생하게 우리의 눈앞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총을 빼고 달려들 듯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죤 웨인도 모두 이곳에선 훌륭한 컬렉션의 한 소품일 뿐이었다. 각종 마구들, 무수한 총기들, 마차들, 인디언의 의상들과 생활용품들, 인디언 화가의 그림들, 재현해 놓은 그 시절의 거리 등 모두 그간 이 땅에서 전개되어 온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들이었다.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그 증거물들을 통해 개척자들과 인디언들이 벌이던 싸움의 현장도, 카우보이들의 힘든 삶도, 로데오 경기의 실감도 모두 미국 정신을 이루어 낸 역사의 바탕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미국의 주류는 개척 시대에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했고, 지금까지 강제이주나 보호구역 지정 등 원주민 정책에 대한 비판도 많았지만, 어쨌든 카우보이 박물관 안에서만큼은 그 모든 것들이 미국정신으로 용해수렴되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갈등과 반목을 하나로 버무려 나갈 수 있게 하는 미국의 에너지가 이곳 국립 카우보이 및 서부지역 유산 박물관에서 바야흐로 맛있게양성(釀成)되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