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4. 17. 11:45

촌놈들의 향연-성완종과 이완구-

 

 

 

 

성완종이 뿌리고 간 오물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누구의 험한 말대로 ‘달라고도 하지 않은 돈을 주어놓고 부린 지랄’이 온천지에 악취를 풍기는 나날이다. 녹음된 성완종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의 어눌하면서도 약간 순박하기까지 한 듯한 톤에 동정이 갔는데, 두 번 세 번 들으면서 참으로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슬쩍 돈을 받아 챙긴 인물들도 구린 건 사실이나, 성완종이 흘리고 다닌 엄청난 양의 오물들은 참으로 처치곤란이다. 설사 수백억의 돈을 받았다한들, 요즘 같은 세상에 죄인의 구명을 목적으로 누군들 검찰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돈을 받고도’ 구명에 나서주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면, 그야말로 앞뒤 분간 못하는 멍청이다.  

나는 지금까지 ‘촌놈’을 자처하며 살아왔다. 충청도, 그것도 성완종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출신이니, 내가 자처하지 않아도 남들 보기에 내 몸에서 촌티가 줄줄 흘렀을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촌놈인 덕에 남으로부터 지탄받을 죄 지은 적 없고, 황소처럼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촌놈’이란 딱지가 그나마 내 자부심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성완종의 출현으로 ‘촌놈’에 대한 내 철학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성완종은 결코 ‘촌놈’이 아니다. 무늬만 촌놈으로 어수룩해 보일 뿐, 그의 야망이나 사기성은 여느 ‘도시 놈들’ 못지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남의 돈’으로 힘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옭아맬 덫을 놓고 다닌 것이 그의 한평생이었다. 돈 봉투로 만든 덫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돈에 약한 인간의 심성을 그리도 교활하게 간파하고 이곳저곳에 덫을 놓고 다닌 그였다. 그러니 그를 결코 내 사전에 규정된 ‘촌놈’의 범주에 넣을 순 없는 일.  

엊그제 고향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고향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섰다고 탄식했다. 한쪽은 성완종 편, 다른 한쪽은 이완구 편일 것이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헛똑똑이’라 할 만큼 순진한 이완구도 교활함에서 성완종 못지않은 인물이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내가 생각하는 ‘촌놈’들은 아니다. 어리석음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부나비처럼 야망의 불꽃에 몸을 던진 존재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촌놈들이 아니다.

참, 세상 살기 어렵다. 촌놈으로 사는 일은 더 어렵고, 제대로 된 촌놈으로 사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무늬만 촌놈’인 촌놈들이 득실대는 세상에 나 혼자 ‘제대로 된 촌놈’임을 표방하기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애국가>의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태안사람 태안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알아 온 내 ‘촌놈성’은 성완종과 이완구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아니 그 두 ‘사기 혐의자들’을 둘러싸고 갈려 있는 고향 사람들의 딱한 모습으로 인해 내 ‘촌놈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부끄러운 나날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2. 20. 04:11

갑오년 그믐날 밤의 단상: 이완구 총리를 보며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한 게 인생사다.

많은 관계들이 얽혀 여러 의미들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 한 두 가지 개념의 공약수로 수렴되는 것이 세상사다욕망과 허무는 내 경험으로 파악한 인간사의 두 공약수다. 위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서지지 않는 성채(城砦)가 어디 있으랴! 잘 되었든 못 되었든 욕망으로부터 기획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인간만사이며, 성서의 말씀대로 창대해지지 못한 채그 끝은 허무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 세상사다.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작품 큰 바위 얼굴이 있다. 어머니로부터 앞 산의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이 생긴 위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을 전해 듣고 이 이야기를 철썩 같이 믿으며 그를 기다려 온 어니스트(Ernest). 부자장군정치가시인 등이 거쳐 갔지만, 그 중에 큰 바위 얼굴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지독히 평범한 촌부 어니스트는 자애와 진실사랑을 설파하는 설교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모습에서 큰 바위 얼굴을 발견하지만, 어니스트는 여전히 위대한 인물을 기다린다는 것이 작품의 요지다.

 

이 늦은 밤, 사람들의 이목을 한껏 끌어올렸다가 바닥에 내팽개친 이완구란 인물을 생각해 본다. 나를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를 난국 구제의 해결사쯤으로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누구도 수완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금의 문제적 상황을 그만은 어느 정도 해소해 내리라 보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며 흠결이 나타나다 못해 급기야 '조무래기 기자들' 몇을 앉혀놓고 힘자랑하다가 들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누구의 표현대로, 인간 최후의 자존심마저 팽개치고 허겁지겁 재상의 자리에 기어오른그였다. 정작 그가 아니면서도 그의 부끄러움을 내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같은 욕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참모습을 일찌감치 깨닫게 해준 그가 고마운지도 모른다. 그 점 때문에 그를 함부로 미워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헛발질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한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으로 남아 한동안 우리를 더 농락했을지도 모른다. 국회에서 고만고만한 인물들과 어울리면서 기고만장하던 그의 모습에 잠시 우리는 판단력을 잃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 역시 욕망의 덩어리였고, 그 욕망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그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으니, 다행스런 일인가. 이렇게 잠시나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 이완구는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다시 허무에 직면하는 것이다.

 

욕망과 허무! 정치인종교인학자사회운동가 등 우리 시대 리더의 직함을 달고 있는 인물들이 바야흐로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욕망의 운명적인 더러움에 빠져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부끄러움을 모르니, 허무를 인식할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대다수 민초들은 부끄러움과 허무감에 몸부림친다.

 

새해 을미년도 그런 허무와 부끄러움의 연속일 것이다. 욕망과 허무의 삐에로가 되어 무대에 오른 이완구 총리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