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2.14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을 조상(弔喪)함
  2. 2007.04.10 대토지 소유자들의 나라
글 - 칼럼/단상2008. 2. 14. 21:00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을 조상(弔喪)함


                                                                            조규익


그간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면서 문화의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우리가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편집증에 사로잡힌 ‘늙은 미치광이’의 소행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천박한 문화의식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게걸스레 눈앞의 먹을 것만 탐하고, 민족의 찬란한 과거와 미래는 남의 것인 양 날뛰던 우리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


숭례문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역사의 문이요, 문화의 문이요, 마음의 문이었다. 문을 없애버렸으니, 과연 우리가 들어갈 곳이 어디며, 나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들고 날 수 없으니, 우리는 꼼짝없이 무덤 속에 갇힌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자존심도 자부심도 역사에 대한 책무도 모두 방기(放棄)한 채 남이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나 주워 먹는 우리 속의 거먹 돼지들이 되었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엄숙, 단정, 의연했던 우리의 숭례문


숭례문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개경에서 혁명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는 풍수론을 근거로 즉시 천도하려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옮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우여곡절 끝에 태조 3년 9월 혁명세력의 실권자 정도전의 의견을 수용하여 한양을 신도로 정했으며, 그 한 달 후 천도는 단행되었다. 마음이 급한 태조는 우선 천도를 감행한 다음 신도를 건설했다. 천도 이후 태조 5년 9월 사이에 종묘·사직·궁궐 등 기본 건축물과 북악·낙산·남산·인왕산을 연결하는 전장(全長) 19km의 도성이 완공되었고, 동시에 그 출입문인 흥인문(동)·돈의문(서)·숙정문(북)과 함께 숭례문(남)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숭례문은 남방에서 나랏님이 계신 서울을 바라보고 몰려오는 백성들 누구나 몸을 굽히고 통과해야 하는 ‘나라의 문’이었다. 백성들에게 나라 법도의 엄숙함을 보여 온 위풍당당함, 외적으로부터 이 나라 최후의 보루를 지켜온 의연함과 강함, 역사의 갈피갈피 우여곡절을 극복해 나온 이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 준 굳건함과 불변하는 아름다움 등. 숭례문은 모진 세월을 견디며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불사조(不死鳥)의 이미지’로 살아남은 생명체였다.


그런데, 그걸 태우다니! 나라 땅을 침범한 외적과의 싸움에서 불탄 게 아니요, 우연한 사고로 불탄 것도 아니다. 70을 바라보는, 한 미친 노인의 소행이라니! 인생 70이 청춘으로 예찬되는 요즈음이며, 죽을 때까지도 철 못 드는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이라 하나, 그래도 70이 적은 나이인가. 아무리 가슴에 맺힌 억울함이 병으로 돌았다 하나, 몹쓸 해코지의 대상으로 하필 숭례문을 택했단 말인가.


***


유럽을 가보라.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기원전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위용을 뽐내는 그 문화의 꽃밭을 가보라. 과연 그들 중에 성벽의 돌을 빼내다가 구들을 놓는다거나 책장을 찢어 벽지로 바르거나 종이공예의 재료로 삼는 망나니들이 있는가. 지금도 몇 푼의 돈에 팔린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알게 모르게 ‘나까마’들의 품에 실려 일본으로 넘어가는, 비통한 현실을 우리 중의 몇 %나 알고들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 트리어 시의 북쪽 문인 포르타 니그라. 기원전 2~3세기 로마지배 시절의 유적임


오호 통재라, 국보 1호를 통째로 구워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보하는 ‘너와 나’의 무감각이여! 내려앉은 가슴 저 깊이에 미래의 탑은 산산이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는데, 그 불쌍한 잔해들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숭례문의 최후를 슬퍼하노라.  

 


      숭례문이 불타던 다음날 아침


                        백규 통곡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5:43
우리 인구의 상위 1%가 전국 사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상위 100명이 여의도 면적의 절반 수준인 평균 115만평씩을 갖고 있다 한다. 행정자치부의 이 발표는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사회적 함의(含意)를 지닌다.

이성계(李成桂)와 신흥사대부들에게 체제전복의 명분을 부여하여 고려의 명줄을 결정적으로 끊은 것은 토지제도의 문란이었다. 어림짐작으로 100명도 안 되는 여말(麗末)의 권문세족들이 점탈(占奪)·겸병(兼倂) 등 온갖 탈법적 만행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여 국가의 재정을 파탄내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림으로써 혁명세력에게 좋은 발판을 마련해준 것은 불과 6-7세기 전의 일이다.

‘이쪽 산봉우리에서 저쪽 산봉우리/이 골짝에서 저 골짝’ 으로 표현되던 그들의 땅. 그 규모와 ‘여의도의 절반 크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순과 역리(逆理)의 역사는 이 시점에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할 뿐이다.

상당수의 권문세족들이 불량배들을 시켜 농민을 폭행하거나 협박하여 토지를 빼앗았다는 기록들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은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와 체제의 붕괴가 서로 맞물리는 문제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물론 오늘날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여말의 권문세족과는 사회적 위치가 다르며, 토지를 소유한 경위나 배경 또한 다르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고려의 권문세족들은 대대로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가운데 형성된 문벌들이다.

지금의 대토지 소유자들 가운데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부는 투기(投機)와 탈법(脫法)으로 당대에 부를 이룬 경우도 적지 않다. 고위직에 발탁되었다가 여론의 질타에 밀려 낙마한 일부 인사들의 사례는 그런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이 즐겨 사용한 ‘위장전입’, 금융이나 세제상의 각종 탈법·위법 등은 토지를 점탈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여말의 권문세족들 못지않게 사회정의 상 용납되기 어렵다. 법망을 피한다거나 규정을 왜곡시키려면 작으나 크나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권위와 공권력을 능멸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경제는 나날이 나빠지고 있으며, 국민들 간의 빈부 격차 또한 점점 벌어지고 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과 권력을 소유하는 것을 질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우리는 다만 탈법을 통한 부의 편중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할 뿐이다. 정당한 룰(rule)을 지키며 얻은 부와 권력은 존경의 대상이다. 그러나 치부의 과정이 대부분 떳떳치 못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조사가 20 여 년 전에 이루어졌으면서도 지금까지 발표되지 못한 점을 새삼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를 소유한 자는 백성의 재물이 적음보다 고르지 못함을 근심하고, 가난함보다 편안하지 못함을 근심한다’고 했다. 즉 고르면 가난함이 없고 화목하면 적게 가진 불만이 없으며 백성들이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가난함에서 오는 고통보다 균등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고통이나 불안의 사회적 파장이 훨씬 크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고려 왕조가 무너진 원인은 편법과 탈법에 의한 대토지 소유가 백성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든 데서 찾아져야 한다. 이 땅은 대토지를 소유한 100명만의 나라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2005. 7. 19.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