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7. 6. 29. 12:02

도깨비와의 씨름

 

 

첩첩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마을은 내 어린 시절 세계의 전부였다. 가끔 꽉 막힌 공간에서 활짝 열린 먼 곳을 꿈꾸기도 했지만, 열린 공간이란 게 무엇인지 도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보고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몸은 대처에 나와 있으나 마음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있음을 느낀다. 세상사 별 것 아니라는 깨달음일까.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허무감일까. 다시 그 좁은 공간으로 숨고 싶은 것은 복잡한 세상의 원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는 깨달음 때문이리라

 종종걸음으로 학교에 모여든 우리들의 관심사는 뻔했다. 누가 팔뚝만한 망둥어를 잡았고, 누구네 소가 송아지를 낳았으며, 누구네 누나가 이웃마을로 시집간다는 등등 사실보도를 빼고 나면 귀신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가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귀신보다 도깨비가 훨씬 좋았다. 귀신 이야기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지만, 도깨비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유쾌했다. 

 우리는 툭하면 씨름을 즐겼다. 시골이라 힘이 최고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도깨비 이야기와 무관치 않았다. 당시 우리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도깨비 이야기는 씨름과 관련된 것이 압도적이었다. 요지는 이렇다. 윗마을의 어떤 아저씨가 밤중에 재빽이(당시 우리들은 등성마루를 그렇게 일컬었다)를 넘다가 도깨비를 만났다. 그런데 그 도깨비가 다짜고짜 씨름을 걸어왔다. 만약 이 씨름에서 도깨비를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란 걸 그 아저씨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 도깨비의 허리춤을 잡았다. 건곤일척의 씨름판이 나무 울창한 재빽이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 아저씨도 힘이라면 누구 못지않았고, 씨름판에서 양은냄비 몇 세트는 이미 상으로 받은 경력의 소유자였다. 말하자면 마을의 씨름 챔피언과 원조 씨름 챔피언인 도깨비의 심판 없는일전이 심야에 벌어졌으니, 가관이었으리라. 

 몇 시간을 끙끙대며 씨름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마을에서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도깨비는 스르르 손을 풀더니 냉큼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저씨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훔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앞에 수십 년 된 몽당 빗자루 하나가 널브러져 있는 게 아닌가. “, 내가 밤새 씨름한 것이 바로 이 몽당 빗자루였단 말인가?” 아저씨는 허탈해졌고, 집에 돌아온 후 집안을 탈탈 뒤져 몽당 빗자루들을 모조리 불살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의 우리는 몽당 빗자루를 싫어했다. 언제 도깨비로 변해 씨름을 걸어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 지난 1년 가까이 온 국민이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며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하나를 내 쫓고, 하나를 들여놓았다. 그런데 참! 허탈한 것은 우리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웠건만, 우리 앞에 서 있는 건 두 개의 몽당 빗자루뿐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는 법. 결국 각자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누가 나를 위해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님을 깨닫기까지 5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간 넓은 세상에 나왔다고 우쭐대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가 문득 깨달으니, 그 옛날 고향 재빼기의 한 뼘 공터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8. 24. 21:43

헬조선(토피아) 조선으로!

 

 

 

 

며칠 전, 작은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여러 세대가 골고루 섞인 자리. 젊은이들이 약간 많았다.

어쩌다 헬조선이란 말이 나왔고, 그에 대한 논전이 들을 만 했다.

젊은 세대의 대부분과 비판적인 중늙은이들은 대체로 우리나라를 헬조선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말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지고 든 소수의 온건한 젊은이들이 오히려 돋보이기도 했다. 물론 가스통 할배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헬조선이란 명칭의 부당성을 성토했다. 그 말이 생각보다 이념적 내포가 복잡하다는 것을 즉석에서 깨닫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가 처음 이 말을 고안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분열적 단면들을 뚜렷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 말을 두고 우리 지식사회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잘 안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나는 그들의 해석을 듣고 싶지 않다. 건방진 단정일지 모르지만, 보나마나 서구 이론가들을 들먹이며 자신의 생각을 현학적으로 분식하는 게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땅의 불행한 세대가 자조적으로 만들어낸 용어를 잘도 활용하여 논문으로, 저서로 찍어내는 그들이 부러울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십중팔구 특별한 결론은 없을 것이다. 서양 학자들의 담론을 끌어다가 우리 젊은이들의 자포자기적 심정을 분석하여 논리화 시켜본들 무엇이 후련하단 말인가. 지금도 갈 곳이 없고, 이른 아침 직장으로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어 아침 식탁에도 못 나오는 자식들이 그득한 이 나라의 현실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학부 고학년의 강의를 맡고 싶지 않다. 생기 잃은 그들과 눈동자를 맞추는 일이 곤혹스럽다. 대학 강의에서는 눈빛만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 눈을 맞추지 못한다면,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고, 그들의 영혼과 만날 수도 없다. 대학을 나와도 휘파람을 불며 나갈 직장이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어쩌다 직장을 마련해도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일이 과중하고 직장의 분위기가 뭣 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보수가 쥐꼬리 만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계약직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상사들이 개차반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교통지옥에 파김치가 되어야 갈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같은 처지의 또래들끼리 만나면, 무슨 좋은 말들이 나올 수 있으랴. 대충 짐작되는 온갖 불평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그런 것들의 최대공약수로 뽑힌 말 하나가 바로 헬조선아닌가.

 

그렇다면, 그 헬조선의 화살은 어디로 향할까. 기성세대, 재벌, 정부여당 등 이른바 기득권세력, 그 중에서도 현실적인 힘을 가진 계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괜히 딴죽 걸기 좋아하는 이 땅의 운동권 출신들이나 좌파들이 이들을 만나 어울리게 되면, 그 장소는 자연스럽게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성토장이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헬조선의 책임을 몽땅 이들에게 뒤집어씌운다면, 그들이 참 억울하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헬조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체로 젊은 세대나 좌파인사들임을 최근 확인한 자리가 바로 그 공간이었다.

 

가끔씩 배낭을 짊어지고 해외여행에 나서곤 하는 어떤 젊은이가 그 속에 있었다. ‘외국에 나가봐야 우리나라 좋은 줄 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그래, 누구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집이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나보다 못한 이웃들을 만나 봐야 비로소 내 집의 장점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세계 최강 미국에도 1~2%만 빼곤 모두 허덕대는 장삼이사들이다. 심지어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몇 년 전 잠시 머물던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병원에 갈 일이 생겼었다. 예약이 필수라 하여 해당 진료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접수 아가씨가 대뜸 무슨 보험을 갖고 있느냐?’는 생소한 질문을 던졌다. 보험사 이름을 대니 자기네 병원과는 거래하지 않는 보험사란다. 세 번 째 전화를 걸고 나서야 비로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게 의료보험이 없었다면, 아예 병원을 갈 수 없는 곳이 미국이었다.

 

그 학교의 교수에게 물으니, 그의 말로는 미국인의 약 40%가 보험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과장이겠지만, 그런 곳이 미국이다. 요즘 나는 툭하면 몸 이곳저곳에 문제가 생겨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든다. 그럴 때마다 이름과 주민번호만 내면 값싸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루 이틀 지나 몸이 좋아지면 미국 생각이 나곤 한다. 아무리 미국이면 무엇 하랴. 몸 아플 때 비싼 보험 없으면 아예 예약도 못하는 곳인 걸. 미국인들이 지방 어느 곳엘 가도 어느 병원엘 가도 의사로부터 친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임을 알게 된다면, ‘헬조선이란 말을 이해하겠는가.

 

우연히 문화일보를 서핑하다가 유머코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공감이 가는 글이라 송두리째 옮겨본다.

 

두 직원이 자기네 회사가 교도소보다 안 좋은 이유를 들먹이면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직원 A : “교도소는 세끼 밥을 무료로 먹여 주는데, 회사는 내 돈 주고 사 먹어야 하잖아?”

직원 B : “그러게 말이야. 교도소에서는 가끔 TV를 볼 수 있는데 회사에서 TV보면 바로 잘리지.”

직원 A : “하루 종일 2평짜리 공간에 갇혀 있는 건 교도소와 다를 바 없다니까.”

그때 공교롭게도 이 말을 들은 사장이 두 사람을 불렀다.

사장 : “기쁜 소식이 있네. 자네들은 가석방되었어. 이제 자유의 몸이라구!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네!”

 

절대적인 지옥이나 천당은 없다. 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 장점을 살려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헬조선을 노래하면 진짜로 우리나라가 지옥으로 변한다. 왜 지옥인지,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먼저 확인하고 자기 비하를 해도 늦지 않다. 케이팝(K-pop)에 취한 외국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환상의 나라로 알고 있다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돈 벌러 한국에 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만난 젊은 학자를 도와 우리나라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1년간 공부할 수 있게 해줬더니, 코가 땅에 닿게 고마워했다. 몇 년 전 학술 답사 차 중국에 갔다가 불편해서 죽을 뻔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 상공에 이른 것을 보고 괜히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좋은 우리나라의 장점을 우리만 모른 채 살고 있다. 괜히 종북주의로 의심받을 대열에 섰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북한으로 보내라!’는 욕을 얻어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한 친구가 있다. ‘헬조선의 주문(呪文)을 외우다 보면, 어느 덧 자신도 헬조선의 주민으로 고착되고 만다. 우리는 한 순간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헬조선(토피아)조선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으니, 우리나라를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 어느 정치인의 거짓말이 아님을 외국에 나가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2. 16. 17:28

    


원서 표지

 

 

 


번역서 표지

 

 

 

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클로디아 드라이퍼스

 

 

         대학은 아직도 지성의 유토피아인가?

-앤드류 해커클로디아 드라이퍼스의 <<비싼 대학>>을 읽고-

 

 

대학은 제한 없는 학문 탐구와 자유로운 지성 발현의 전당이어야 함을 믿는 사람들이 많고, 한동안 그 표본을 수백 년 역사의 유럽 대학들에서 찾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유럽 명문 대학들의 고색창연함보다 시대정신을 창도(唱導)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훨씬 매력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고, 내 입장도 그렇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기회가 생길 때마다 미국의 대학들을 돌아보며 그들이 누리는 풍요와 자유, 고품격의 시스템을 선망해오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는 좀 쑥스럽지만, 최근 큰 아이가 컴퓨터학 교수로 자리를 잡은 뉴욕대학의 면면을 훔쳐보면서 그런 인식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바야흐로 붕괴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학들의 현실을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입장에서는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퇴출대상 1호로 지목되고 있는 후진국 대학의 인문학자. 우리나라의 대학을 되살리기 위해 선진국의 대학들을 열심히 벤치마킹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한 채의 집을 놓고 생각해보자. 근자 리모델링이란 기법이 유행하고 있는데, 리모델링을 잘만 해놓으면 그럴 듯하게 탈바꿈하는 경우들은 드물지 않다. 그러나 리모델링이란 것도 원본이 그럴 듯해야 가능한 공법이다. 여기를 손대면 저기가 무너지고 지붕을 고치면 구들이 내려앉는 등의 경우에야 그냥 무자비하게부숴버린 다음 새로 짓는 편이 오히려 낭비를 줄이는 일일 것이다. 뜻 있는 사람들이 한국의 대학들이 어서 빨리 망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라운드 제로위에 새로운 대학들을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리라.

 

최근 충격적인 책 하나를 읽었다. 그렇게도 선망해오던 미국 대학들의 속살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매섭게 질타한 저자들의 혜안과 용기가 놀라웠다. 원제는 Higher Education?: How Colleges Are Wasting Our Money and Falling Our Kids-And What We Can Do About It 이었으나, 번역자들(김은하박수련)“<<비싼 대학: 미국 명문대는 등록금을 어떻게 탕진하는가>>/강의는 뒷전인 교수, 돈만 삼키는 연구소, 대출에 허덕이는 학생교육을 우롱하는 대학!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제목을 더욱 구체화시켰다. 번역서 표지의 굵은 글자들에 이 책의 내용은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었다. 아마도 번역자들은 한국의 대학들에게 경종을 울리려 했을 것이다. 간혹 귀 있는 자라면, 그들의 말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번역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미국 대학들의 문제점일 뿐 우리나라 대학들과 무관하다는 식의 태평함에 젖어 있을 우리나라 대학인들에게 무지막지한 비판을 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옛날식으로 그럭저럭살아가다가 함께 벼랑에 떨어져 죽은들 어떠냐는 식의 무사안일과 기득권 의식에 매몰된 이 시대 한국의 대학인들. 선뜻 나서서 자기 혁신의 짐을 지려는 사람은 없고, 그동안 맛보던 자잘한 열매의 달콤함에만 취해 있는 이 시대 한국의 대학인들. 명목 상 지식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대학인들에게 속된 말로 몽둥이찜이라도 안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과연 일생 밥을 먹여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준 대학을 환자로 삼아 냉혹한 외과적 수술을 가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원론적 질문이 그 하나이고, 세계 대학들의 롤모델이자 무흠한 상아탑으로 생각되어온 미국 대학들이 안고 있는 구조적 결함이나 비도덕적 기득권 주의, 혹은 대책 없는 비현실성을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다른 하나이다.

어두운 면이 정확히 오버랩된다는 점에서 미국대학들을 벤치마킹하다가 지쳐 널브러진 한국 대학들의 현재는 암울하고, 그 현재를 바탕으로 만들어가야 할 미래는 이미 잿빛으로 변해버린 채 신기루가 사라진 사막의 생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은 미국 대학들의 잿빛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그 중심에 교수 집단의 그악스런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저자들은 대학의 많은 불편한 사실들을 이 책의 도처에서 고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결국 학생학부모에 대한 착취와 대학교수집단의 부도덕한 기득권으로 요약된다. 이 책의 특이한 장점은 뒷부분에 추가한 우리의 제안에 있다. 본문 속에 늘어놓은 장황한 고발들을 결국 이러한 제안으로 요약하여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자 했으니, 저자들이야말로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달의 메커니즘을 꿰고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들의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학의 존립 이유는 교육이다.

2. 대학의 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출에 의존하는 삶을 그만 두어야 한다.: 대학의 각종 활동, 직원, 교수 때문에 생기는 비용 문제로 치솟는 등록금, 은행 빚을 얻어 등록금을 충당하는 관행은 이제 청산해야 한다.

3. 학생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편적 대학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교수들은 자신이 썼거나 쓰고 있거나 쓸 예정인 논문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4. 대학은 직업훈련소가 아니다.: 학부생 때는 흥미를 돋울만한 지적인 사람들을 많이 접해야 한다. 그래야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절반이 넘는 64%의 학생들이 직업훈련을 전공으로 삼고 있다. 비실용적인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대학에서 더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길이며, 궁극적으로는 더 유용한 투자가 된다. 철학, 문학, 역사 또는 물리학 대신 대다수 학생들은 말() 관리학, 용접술, 패션 마케팅 같은 분야를 선택하는데. 모두 명문대에 개설된 전공들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학부 시절에 수익을 계산하지 않고 걱정 없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지성을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5. 종신교수제를 폐지해야 한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종신교수제를 폐지하고, 다년 계약제로 대체해야 한다.

6. 유급 안식년 제도를 없애야 한다.: 학자들은 7년마다 정신적으로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쓸모없는 연구를 제한해야 한다.

7. 시간강사들의 노동 착취는 그만 해야 한다.: 안정된 직장에 정착한 교수들과 똑같이 수업하는 사람에게 교수의 6분지 1의 연봉만 주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부적절한 짓이다.

8. 특급 명문대학들의 가치를 제대로 따져 보아야 한다.: 자녀들이 명문대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자식을 걱정해서라기보다 부모 자신의 출세 지향주의를 자식에게 투영했기 때문이다. 대학의 간판 너머를 보아야 한다.

9. 총장은 공공의 종복(從僕)이다.: 이사회에서 연봉 100만 달러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을 주겠다고 하면 총장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말해야 윤리적이다.

10. 의대와 연구소를 대학에서 분리해야 한다.: 대학은 캠퍼스 내 연구소나 산하기관 뿐 아니라, 의과대학과의 고리도 끊어야 한다.

11. 테크노 티칭, 첨단 기기를 활용한 강의에 주목해야 한다.

12. 기부가 필요한 곳에 기부해야 한다.: 재정 여건이 훌륭한 대학들에만 기부가 편중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부금이 많은 대학의 동문들과 여타 기부자들은 진정으로 기부금이 필요한 다른 대학을 골라 기부하는 것이 좋다.

 

책을 마치면서 이 책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두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은 글을 쓰는 교수였고, 한 사람은 기자이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날 이 나라의 대학을 지켜보는 일은 마치 공사판에서 그 어떤 목표나 목적도 없이 제멋대로 바닥을 깔아뭉개며 달리기만 하는 증기 롤러를 보는 듯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침통한 마음을 가누며 이 책을 썼다.() 특히 고집 센 교수 집단이 모인 대학이란 곳에서, 교수들과 직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관행을 지키려고 완강히 버텼다. 이 책의 출간을 열렬히 환영해 준 대학 밖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대학에 몸 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현재 학생들이 학비를 낸 대가로 얻는 것이 별로 없고, 이 문제의 책임은 캠퍼스에서 개인의 실적을 쌓는 데만 여념이 없는 어른들(즉 교수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316쪽)

 

그렇다. 대학을 바꾸기 위해 최대의 기득권 집단인 교수들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은 미국의 대학들이나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다르지 않다. 대학의 개혁! 벌써 서산에 해는 지는데, 할 일은 많고 갈 길도 멀다.

 

 

 


 Holyoke Center에서 바라본 하바드 캠퍼스(Harvard Yard) 

 

 

 


예일대학교 올드 캠퍼스(Yale Old Campus)의 이른 봄 풍경

 

 

 


UCLA의 로이스 홀(Royce Hall)

 

 

 

뉴욕대학교 건물들 한 복판에 있는 Washington Square Park의 아치

 

 

 

교토대학 정문

 

 

 


연세대학교의 언더우드 홀(Underwood Hall)

 

 

 


숭실대학교 정문

 

 

 


서울대학교 정문의 학교 마크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Washington University Saint Louis)의 브루킹스 홀(Brookings Hall Quad)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