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 7. 6. 12:05

 

 

관련 유튜브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z4CNmiLF-YU&feature=youtu.be

 

 

팔불출(八不出)의 변(辯)-학자로 자란 아들을 보며

 

 

누군가는 말했다. ‘저 잘났다 자랑하는 놈, 마누라 자랑하는 놈, 자식 자랑하는 놈, 선조와 부모 자랑하는 놈, 형제 자랑하는 놈, 후배 자랑하는 놈, 돈 자랑하는 놈, 고향 자랑하는 놈을 팔불출(八不出)이라 부른다고. ‘불출이란 사전적으로 못난이란 뜻이지만, 어감(語感) 상으론 엄청 못난 놈쯤 되는 말이다. 체면 중시 사회에서 수오지심(羞惡之心: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뼛속 깊이 간직하고 이 나이까지 살아 온 나다. 그런데 지금 팔불출 가운데 세 번째 불출이 되어 보고자 한다.

 

근래 한두 가지 일을 경험하면서 내 알량한 자존심의 메커니즘이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내 생각에 자존심이란 살아 갈 날들이 살아 온 날들보다 많을 때생겨나기 쉬운, 특이한 심리다. 이제 교수로서 내 인생의 한낮은 기울었고, 내 뒤에 끝도 없이 늘어선 후생(後生)들은 빨리 비켜서라고 재촉한다. 가당치 않은 자존심으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한 과거를 버리고,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면서 슬그머니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 그 길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출구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따라서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장점을 인정하는 것도 즐거움일 뿐 자존심 차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내 협소한 울타리를 걷어내려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견지해 온 학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는 중이고, 어쩌면 그런 도전들의 정당성이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조경현(Kyunghyun Cho)33살 된 내 큰 아들이다. 이번 방학에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일을 계기로 망설임 없이 이 공간에서 그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20022,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카이스트(KAIST)로 진학하는 그를 보내며 쓴 글(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 인터북스, 2009)의 마무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 소망을 담은 바 있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 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247~248)

 

이것이 16년 전 집을 떠나던 그에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표명한 소망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카이스트를 나온 그는 핀란드의 알토대학(Aalto University: 201011일에 설립된 핀란드의 대학교. 2010년부터 정부 주도 하에 핀란드의 산업경제문화를 선도하는 기존의 세 대학-헬싱키 기술 대학교헬싱키 경제대학교헬싱키 미술 디자인 대학교-을 합병하여 출범했음)에서 석박사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친 뒤, 2016년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 그가 영국이나 스웨덴 등의 전통 명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면서도 핀란드의 대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고집을 알고 있었고, 그를 믿어야 한다는 나의 자기억제(self-control) 소신' 때문이기도 했다. 그 후 우연한 기회에 핀란드의 그 대학에서 유능한 교수의 지도로 인공지능분야를 공부한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인공지능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고, 그 때만 해도 내겐 뜬구름 잡는 듯한그 분야나 공부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물론 핀란드로 간 뒤에도 그는 부모에게 돈 한 푼 요구하지 않았다. 매우 궁금했지만, 그것도 묻지 않았다. 다만, 핀란드는 학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당시만 해도 우수한 핀란드 교육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파견되던 우리나라 시찰단들을 위해 그가 틈틈이 영어 통역 알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박사과정에 진학한 뒤에는 큰 규모의 핀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해외 컨퍼런스 참여에 따르는 모든 비용을 해결할 만큼 풍족한 것이었다. 그 장학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비로소 나는 핀란드라는 나라를 존경하게 되었다. 외국인을 무료로 교육시켜주고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가능성 있는 젊은 인재라면 국적을 불문하고 국가가 나서서 양성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야말로 국가 이기주의가 그악하달 정도로 팽배한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숭고한 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인구 550만의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를 존경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런 과정에서도 나는 그가 컴퓨터 계통을 전공한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인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문외한이기도 하려니와 내 전공에 묻혀 살아 온 나로서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렴풋이 그가 당시에 갖고 있던 학문적 비전(vision)을 짐작하게 되었다. 석사논문(Improved Learning Algorithms for Restricted Boltzmann Machines/2011)과 박사논문(Foundations and Advances in Deep Learning/2014)에 그가 꿰뚫어 본 미래가 분명 담겨 있지 않은가! Dr. Juha Karhunen, Dr. Tapani Raiko, Dr. Alexander Ilin 등 유수 학자들의 지도 아래 그는 이미 8년 전부터 10년 이내에 핫이슈로 부상될 딥 러닝(deep learning)의 중요성을 알고 차곡차곡 준비해 왔음을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학위를 받고 핀란드를 떠난 그는 캐나다의 몬트리올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자기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요슈아 벤지오(Dr. Yoshua Bengio) 교수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으로 간 지 1년쯤 지났을까. 채용 공고에 응모한 미국과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의 유수 대학들에서 교수직 제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저울질한 것은 미국의 뉴욕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두 곳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오래도록 대학물을 먹은 나로서는 전통적인 명성과 함께 정년보장 직으로 채용되는 옥스퍼드가 나아 보였으나, 결국 그는 뉴욕대학을 선택했다. 그 대학에 딥 러닝 분야의 석학 얀 르쿤(Dr. Yann LeCun) 교수가 있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인 뉴욕, 경쟁과 자기혁신의 용광로인 미국 대학사회에서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치고자 한 그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잘은 모르지만, 캐나다로 건너 간 뒤부터 그의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는 랩(lab)에 몰려드는 세계의 수재들을 지도하며 다양한 테마의 연구에 몰두하고, 한 주에 한 번씩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을 이끌어주며, 연간 십여 차례씩 국내외 컨퍼런스와 연구교류 여행을 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컴퓨터의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 with deep learning)’인 듯하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는 NMT(Neural Machine Translation/신경망 기계번역)는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 언어학습 분야의 핫 이슈가 되어 있고, 현재 그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통번역을 자유자재로 처리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

 

1년에 단 한 번, 체류기간은 단 1주일. 그는 여름 방학 초에만 부모가 있는 서울로 온다. 그 짧은 체류기간도 이곳저곳에서 요청한 강연 스케줄로 빡빡하다올해 강연들 중 핵심은 네이버(NAVER)의 커넥트(Connect) 재단에서 있었다. 등록자 200명을 위해 하루 네 시간 씩 이틀 동안 여덟 시간을 강의하고 온 그는 늘 그러하듯 담담했다. 강연료는 얼마나 받았느냐고 농담조로 묻자 천만 원이오. 그런데 모두 기부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강연료 액수에 우선 놀랐고, 기부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무심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래도 태연한 척 어디에 기부했니?”라고 물으니, “여성 과학자들을 위해 소셜 벤처 걸스로봇(Girlsrobot)에 기부했어요.” 한다. “잘 했다고 대답은 하면서도 궁금증은 커졌다. 그의 전공 지식이 대체 무엇이관대 8시간 강의에 천만 원씩이나 받는 것이며, 그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배포나 철학은 또 뭐란 말인가. 궁금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아버지이지만, 가난한 나라의 국문학 교수가 그 내용을 자꾸만 캐묻는 것도 후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었다. 이삼일 후 그가 떠나고 나서 우연히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동아일보의 놀라운 기사 한 건을 접하게 되었다.

 

donga.com

 

과학인 키워달라” 30대 과학자 통 큰 기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

국내 강연료 1000만원 전액 쾌척

30세에 신경망 기계번역논문으로 딥러닝 분야 세계적 연구자 반열에

 

 

딥러닝 분야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는 젊은 한국인 과학자가 국내 대중을 대상으로 연 강연의 강연료 전액을 여성 과학 기술인을 지원하는 국내 소셜 벤처에 기부해 화제다. 주인공은 조경현 뉴욕대 컴퓨터과학과 교수(33·사진). 그는 공동연구를 위해 방한한 이달 11, 12일 커넥트재단 초청으로 경기 성남시 네이버 본사 강당에서 딥 러닝을 이용한 자연어 처리강연을 했다. 8시간 동안 2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형 강연이었다.

 

해외 석학을 초청한 자리인 만큼 강연료가 1000만 원에 이르렀지만, 조 교수는 예비 여성 과학기술인과 대학원생을 지원하는 데 써 달라며 전액을 소셜벤처인 걸스로봇에 쾌척했다.

 

조 교수는 평소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이공계 분야 여성의 활약과 진출이 아직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뉴욕대 학부에 개설한 머신러닝 입문과목은 정원이 70명이지만 이 중 여학생 수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한국은 미국보다 상황이 더 열악할 것이라는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과학, 공학 발전을 위해 교수들이 연중 몇 주씩 현지를 찾아가 강의를 하는 등 지역별, 인종별 격차를 줄이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미국 동료 과학자들의 이런 자세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구글 번역과 네이버 파파고 등이 채용 중인 신경망 기계 번역기술의 이론적 토대가 된 기념비적인 논문을 2014년 공동 저술해 학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정렬 및 번역 동시 학습에 의한 신경망 기계번역이라는 제목의 이 논문은 20일 현재까지 3674회 인용된 딥 러닝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꼽힌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80621/90681370/1#csidxc09a80b7f83fa0ea2f4c765d86099f0

 

 

 

, 그랬구나! 세상은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데, 나만 그의 성장을 모른 채 늘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1997년 첫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 초등학교 6학년인 그와 4학년인 둘째 아이에게 초급 영어 회화를 가르치며 초조해 하던 나를 떠올렸다.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낯설고 물 선 미국 땅에서 무사히 1년을 지내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내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를 살려 이 철부지들을 낯선 미국 땅과 문화에 잘 적응시킬 수 있겠는가. 가족들을 끌고 물을 건너는 가장에겐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에 건너가자마자 영어도 미국 생활 자체도 그들에게 대뜸 추월당한 나였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앞서 갔지만, 바로 어제까지 그들은 내게 코흘리개 아이들일 뿐이었다. 올해 초 그는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이 선정한 ‘201850개 분야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에 들었다. 사실 놀라워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뭘 갖고 그러지?’라고 심드렁하게 생각한 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새 그는 이미 남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인 학자가 되어 있었다. 논문의 인용지수나 강연파일들의 태그 건수가 내 상식을 초월하고, 미국 안에서는 물론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그를 찾는 곳들이 많아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공지능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는 오늘날 그는 순풍을 탄 독수리처럼 하늘로 솟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가 대견하다. 좀 잘 나간다고 까불다가 추락하는 세상 천재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밤낮으로 노력하는 그를 보며 안심을 한다.

 

인천공항 출국장. 그를 탑승구로 들여보내고 나는 아내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 보니 저 녀석은 대양을 헤엄치는 고래이고, 나는 고향 마을 실개천의 붕어나 미꾸라지일세. 고래가 실개천으로 돌아올 이유도 없고, 붕어나 미꾸라지가 대양으로 나갈 이유도 없겠지. 나는 개천 속 붕어와 미꾸라지의 삶을 녀석에게 보여주며 항상 교만하지 않고 초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셈이네!”

 

제주도의 호텔 로비에서

제주도 목장에서 오른쪽부터  조경현, 백규, 임미숙, 김미언, 조원정, 조영빈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5. 17:19

 

 

정신 차립시다!-웬디 셔먼의 말을 듣고

 

 

#1 유럽 여행 중, 독일의 본(Bonn)에 들른 적이 있다. 여행 정보가 필요하여 시내의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더니 대뜸 일본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니오. 한국인이오!” 하고 대답했더니, 순간 표정과 응대가 사뭇 사무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2 정확한 장소는 잊었지만, 유럽 또 다른 도시에서의 일이다.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이 우리에게 야뽕이냐고 물었다.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확신하고 물었을 것이다. 내가 대뜸 아니오!” 라고 대답하자, ‘그럼 시이나인가?’ 라며 또 물었다. ‘일본 사람 아니면 중국 사람이겠지!’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오. 한국인이오!”라고 약간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자 머쓱해하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주인이 서빙을 하다가 지도 한 장을 펴 보였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당신네 나라를 찾았소. 그럼 남이냐 북이냐?’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남쪽에 사는 한국인이오!” 라고 대답하자, 그 때서야 미소를 보였다. 그는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듯 했다.

 

#3 재작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지역 박물관들 몇 군데를 도는 동안 625 참전용사를 만났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작고한 참전용사의 아들을 만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1950~53년 어름의 한국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말을 나누다 보니, 그들 마음속의 한국은 아직 ‘195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연민과 경이의 상반된 정서가 착종되어 있었다. 폐허 속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초콜릿을 구걸하던 그 모습과, 그나마 외국여행이랍시고 나선 우리에게서 일종의 심각한 언밸런스를 발견했을 것이다.

 

#4 최근 다녀 본 미국과 유럽,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등의 도로들엔 일본차들이 부지기수로 달리고 있었으며, 새 차는 물론 중고차도 일본차들은 인기 만점이었다. 미국에서 차를 사려고 하니 대부분 이왕 사려면 일본차를 사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품질도 믿을만하고 중고로 팔 때 제값을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한국인은 삼성 폰을 만지작거리던 미국사람에게 그게 어디서 만든 것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일본 제품이라고 답하더라며 탄식을 했다. 그 정도로 서양에서 일본 브랜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5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원어민 영어 교수와 가끔 만난다. 서로 간에 흉허물이 없어졌다싶을 즈음 싱거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왜 당신을 포함한 서양인들은 일본이나 일본인을 좋아하는가? 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어 싸운 적국 아닌가?” ‘이 친구도 일본을 좋아하겠지?’라는 내 추정을 확신으로 깔고 던진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분명히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만들어 온 물건들과 그들이 지속해온 문화와 깔끔한 성품 땜에 일본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고, 함부로 역사를 수정하려 하며, 약삭빠른 그들을 꼭 좋아해야 하는가?”고 다시 물었더니, “지난 일은 내가 알 바 아니고, 지금 좋으면 된다.”고 답했다.

 

과거사는 한··3국 모두가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해야’/‘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고, 정치인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등은 최근 웬디 셔먼(Wendy Sherman) 미 국무차관이 공식석상에서 했다는 말의 요지다. 일본 편을 들어 우리를 비난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누구는 뭐 한갓 아녀자의 말이니 그냥 모른 척 하자고 하는 모양이지만, ‘세계의 조정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외교 수뇌부가 공식석상에서 뱉은 말에 우리가 대범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국인들을 몇 번 만나 보면 개인이든 공인이든 마음과 달리 외교적 언사가 매우 매끄럽고, 이른바 포커 페이스’(poker face)에 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구한말의 일본 놈 일어난다. 소련 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 놈 믿지 말자는 항어(巷語)도 나왔으리라. 미국 고위관료의 말과 표정만 믿고 돌아와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된통 당하기만 하던 과거 우리나라 관료들의 순진함도 이런 외교적 언사와 포커 페이스에 당한 결과들이리라.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사실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다. ‘625 때 자국의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었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 ‘세계대전에서 악랄한 일본군으로부터 몹쓸 시련을 받았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등등. 우리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다. 미국에 가보면 주류사회에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고, 일본 여자와 결혼한 미국의 고급관료들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을 꽤 보게 된다. 그 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엔 소니의 게임기에 빠져 살았고, 자라면서 워크맨이나 모바일, PC 등에 조종당하며, 토요타 등이 생산하는 일본차를 타고 일생을 보내던 사람들이 잘 나가는 미국인들이었다. 1998년 미국에서 만난 어떤 아이에게 나중에 자라면 어디를 젤로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일본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이렇게 재밌는 게임기를 만들어낸 나라에 꼭 가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일본 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오바마 대통령이 짐짓 일본을 꾸중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경험칙으로 보아 포커 페이스임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는 집단적 착각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세계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론들은 우리 전화기, 자동차, K-POP이 세계를 제패한 듯 떠들고, 흡사 세계인들이 모두 우리를 주목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망한다 해도 더이상 군대를 보내주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이나 생존의 문제를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일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 순간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국제사회의 냉혹함에 언제까지 둔감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6. 04:52

 

 

 


숲속 길-1

 

 

 

 


숲속 길-2

 

 

 

 


숲속 길-3

 

 

 

 


숲속 길-4

 

 

 

 


숲속 길-5

 

 

 

 

 

 

아찔했던 순간, 엔젤 파이어 마운틴의 환상

 

 

 

 

타오(Taos)로부터 빠져나왔을 땐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는 길은 두 갈래였다. 다시 산타페 쪽으로 돌아가 I-40을 타는 코스, 그 반대로 북쪽에 가로막힌 산맥을 넘는 지름길 코스 등 두 개의 옵션이었다.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타오 산의 절반 이상을 덮었고, 저녁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지름길이든 우회로이든 I-40에 접어들어야 뉴멕시코를 벗어난 뒤 애당초 계획대로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에서 1박을 할 수가 있었다. 지도상으로 지름길은 긴 코스에 비해 절반가량의 거리였다. 순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다. 지름길로 간다. 1,800년 이태리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지름길인 알프스를 넘던 기백을 상상하며 산길을 타기로 한 것이다.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산길은 예상보다 험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오고가는 차량들도 뜸했고, 말 두 마리와 검정 소 10여 마리가 서 있던 목장을 끝으로 인가도 사라졌다. 석양은 저 멀리 산 끝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다시 울창한 삼림으로 들어서면서 사위(四圍)는 어둑해지고, 하늘의 구름은 더 두꺼워졌다. 눈발이 날렸고, 설상가상으로 아스팔트가 끊기면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흙과 자갈이 적당히 섞인 길바닥엔 1~2인치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산속의 기후가 평지와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도상에 점선으로 표시된 길이가 매우 짧았음을 생각하고 애당초 가졌던 나폴레옹의 기개를 견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눈 덮인 산길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가슴 저 밑에서 작지 않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사령관이 흔들리면 전투력은 와해되는 법. 그냥 밀고 나갔다. 이미 인적(人跡)이고 차적(車跡)이고 끝난 지 오래되어 적막한 산길임에도 주변의 경치는 끝내주게좋았다.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에는 하얀 눈이 덮여 어딜 보나 한 폭의 겨울풍경화였다. 군데군데 손바닥만하게 펼쳐진 풀밭들에는 눈과 수정모양의 얼음이 어울려 하늘이 조화를 부린 듯 했다.

 

몇 구비 산을 넘은 뒤 우리는 진짜로 동화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분지 형으로 생긴 계곡 한쪽의 산록에 수많은 사슴들이 눈밭을 헤집으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 , 전 세계 산타 할아버지들이 타고 다니는 사슴들이 여기서 사육되는 것이로구나!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인 이 산중에 도대체 이 많은 사슴들은 어떻게 모여 있단 말인가.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몇 녀석은 풀을 찾다 말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고, 다른 녀석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게 바로 동화의 세계가 아닌가.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1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2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3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4

 

 

 

 

온통 눈에 덮여 순백으로 변한 무대에 사슴의 무리가 연출해내는 환상의 순간을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자연의 위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것이다. ‘어떻게 이 산을 벗어날 것이며,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라는 걱정과 불안은 이미 우리의 뇌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저 아름다운 사슴들이 살아가는 이 공간에 무슨 위험이 있을 것이며, 설사 차가 전진하지 못한다 한들 저 녀석들과 하룻밤 지새지 못할 이유가 뭔가?’라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그 녀석들에게 눈길을 주는 동안은 단 한 점의 걱정도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저들은 환상 속의 존재들이고, 우리는 현실의 존재들 아닌가.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그로부터 자동차를 살살 달래가며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했다. 묘하게도 사슴을 만난 곳으로부터 30분쯤 지나자 숲이 끝나고 다시 광대한 대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분을 달리자 하나 둘 민가가 나타나고, 10여 분을 더 달리자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까맣게 밤이 내린 드넓은 대지를 쾌속으로 달려 밤 8시나 되어서야 겨우 모텔 하나가 있는, 주 경계선 지역의 작은 도시 로건(Logan)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텔에 도착한 뒤 하루 행적을 복기(復碁)해 보았다. 모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울 동안 미국 각지의 산악지역에서 조난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조난당했을 때 얼마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장비들은 갖추고 다니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어땠나? 우리의 트렁크엔 간단한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흔한 담요도, 랜턴도, 간식거리도, 여분의 옷도 없었다. 스모커 아닌 내게 라이터나 성냥이 있을 턱도 없었다. 그 산중에서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인가가 있다 해도 미국의 관습상 찾아들어가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지만, 아예 그런 인가마저 없었다.

 

그 눈 내리는 산 속에서 자동차가 덜컹하고 서거나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작은 눈이 폭설로 변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꼼짝 없이 그곳에 갇혔다면, 자동차의 연료가 소진되는 순간, 우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 많은 인연을 남겨 둔 우리가 미국 뉴멕시코의 산길에서 속절없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무한 일 아닌가.

 

미국에서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자동차 트렁크에 각종 구난 장비들을 철저히 챙겨두시라. 차를 구입하자마자 어디서나 터지는 스마트 폰, 성능 좋은 랜턴, 라이터나 성냥, 담요, , 여분의 옷가지, 충분한 간식, 작은 톱[조난 시 불 지필 나무를 자를 때 필요함], [혹시 간단한 요리나, 사냥 혹은 위급할 때 필요함] 등을 챙기시라. 6개월 동안 유럽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면서도, 한국의 그 험한 산길들을 종횡무진 다니면서도, 아무 문제없었다는 자만과 안이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청난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만은 금물이다.

 

다만, 그 순간에 만난 사슴 떼는 우리의 불안을 잊게 만든 하늘의 배려였다. 그래서 그 순간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그 사슴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산 속의 작은 공간-1

 

 

 


산속의 작은 공간-2

 

 

 


눈 내리는 산길

 

 

 


눈 맞은 자작나무 숲

 

 

 


눈 내린 고갯길

 

 

 


다시 찾은 대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21. 10:09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언제부턴가 꼭 한 번은 상암벌에 나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다. 거기서 붉은 악마들과 함께 함성을 지르며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야성(野性)’을 흔들어 깨우고 싶다는 객쩍은 욕망을 슬그머니 가져본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몰래몰래 가는 눈치를 보이곤 하던 작은 녀석은 끝내 함께 가자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내 청춘은 저물고 말았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몇몇 곳에 폐허로 남아있는 기원전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혹은 극장]에 혼자 오도마니 앉아서 흥분에 달아오른 관중들의 함성을 상상하곤 했다. 우리는 지금 풋볼[American Football]의 나라 미국, 그 중에서도 풋볼을 중심으로 아름답게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 OSU의 스틸워터에 와 있다. 한국에 있을 때 미국 하면 야구를 떠올렸지만, 이곳에 와서 느껴보니 야구나 축구는 간 곳 없고, 풋볼이 이었다. 이 대학에는 큰 규모의 각종 경기장들이 여럿이고, 체육관 시설도 입이 벌어질 정도다. 그러나 규모나 인기도에서 풋볼을 능가할 종목이 없고, 풋볼 경기장인 분 피켄스 스테이디엄(Boone Pickens Stadium)을 능가할 경기장도 없는 듯하다.

 


멀리서 내려다 본 Boone Pickens Stadium



 Boone Pickens Stadium의 앞면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면서 게임데이(game day)’라는 생소한 말을 종종 들었고, 그 때마다 이 한적한 스틸워터에는 사람들이 북적대고 외부의 차들이 모여들곤 했다. 큰 주차장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RV(Recreational Vehicle) 차량들로 가득하고, 거리 곳곳을 차단하여 차량통행을 막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풋볼게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 한 번은 직접 경기장에 가서 구경하리라 마음먹게 되었다.

 


게임데이 전날이면 이렇게 대부분의주차장에 RV들이 들어찬다


게임데이에 사람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경기장까지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그러나 티켓을 구하기 어려웠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거의 1년 전부터 대부분의 티켓이 매진된다는 것이었다. 가끔씩 온라인 사이트에 엄청 비싼 표들이 등장하거나 경기 당일 암표 등을 팔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OSU 대학원에서 테솔[Tesol;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을 전공하는 이웃집의 제이슨[Jason Culp]이 풋볼 티켓 두 장을 건네준 것이다. 아내와 장모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구경을 못 가는 바람에 남게 된 두 장의 티켓을 우리에게 선물로 건넨 것이었다.

 

미국 도착 거의 두 달 만에 드디어 미국 Big 12 경기연맹[Oklahoma State, Oklahoma, Texas Tech., Bayolr, Texas, TCU, West Virginia, Kansas, Kansas State, Iowa State] 에서 가장 오래되고 멋진 풋볼 경기장이자 미국 전역의 캠퍼스 안에 있는 것으로는 최고 경기장들 가운데 하나인 OSU의 분 피켄스 스테이디엄에서 난생 처음으로 풋볼 빅게임을 즐기게 된 것이다 

 

오전 1040분 입장. 장관이었다. 경기는 11시부터 시작된다는데 관객 6만 명을 수용한다는 스탠드는 온통 빈틈없는 오렌지 물결로 이미 꽉 들어차 있었다. 학교의 상징색인 오렌지 색 의상들을 입고 응원도구를 들고 나온 학생, 동문, 시민들이 경기장 3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이 경기는 매년 이 시기에 열리는 홈커밍데이(Home Coming Day)’의 메인 이벤트였다] 그라운드에는 식전 행사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스탠드에서 운동장으로 몰려 내려오는 함성은 지축을 울렸다. 스틸워터 47천의 인구에서 학생과 직원을 합쳐 2만 남짓을 빼면 26천이 남을 것이니, 말하자면 OSU 학생, 교직원, 동문, 스틸워터 시민 등이 총동원 되어 스탠드의 6만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로서는 놀라운 팀스피릿(Team Spirit)’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게임 시작 전의 행사


게임은 시작되고


관람석에서 OSU 식 응원을 보내는 제이슨


2쿼터 이후의 막간 행사

 

경기는 4쿼터로 진행되었다. 각 쿼터 15분씩이었으나, 경기 진행상의 수시 중단, TV 광고를 위한 막간 공연, 작전타임 등이 추가되면서 11시에 시작된 경기는 오후 230분이나 되어서야 끝이 났다. 경기 내내 OSU 카우보이 팀과 텍사스 크리스찬 유니버시티 팀 간의 공방이 숨 막히게 벌어졌고, 대부분 홈팀의 응원자들인 스탠드의 관객들은 질서정연하게 일어나 손을 내뻗으며 ‘OSU Cowboys!’를 연호했다. 그 덕인가. 카우보이 팀은 TCU24:10으로 이기고 학생, 동문, 시민들에게 홈커밍의 큰 선물을 안겨 주었다. 경기를 보면서 그것이 서부 개척시대의 랜드 런(Land Run)’으로부터 나온 느낌을 받았을 만큼 미국 정신(American Spirit)’을 듬뿍 느낀 3시간여의 호쾌한 경험이었다.



                   경기를 벌이고 있는 양팀 선수들


 
                    경기장에서 열전을 벌이는 양팀 선수들

 

 


                              카우보이팀이 득점을 하자 카우걸이 말을 타고 등장한다               

 

OSU의 졸업생 분 피켄스가 2003년 대학 역사상 단일 기부로는 최대 액수인 7억 달러를 쾌척하여 세운 이 경기장. 그는 2005년 다시 165천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대학교 체육 경기 분과에서 수령한 기부금으로는 최대액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덕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이 경기장은 OSU와 풋볼 팀에게 환상적인 게임데이를 가능케 하는 환경을 선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대학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지근 거리에 최고 경기장을 마련하여 학생들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좋은 경기를 직접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경기장에는 풋볼 사무실, 미팅 룸, 스피드 및 컨디션 센터, 라커룸, 시설관리실, 선수 의료센터, 미디어 시설실, 명예의 전당, 트레이닝 테이블 뿐 아니라 크고 작은 무수한 공간들이 복합적으로 구비되어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경기장으로부터 밀려나오면서 미국인들의 장점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단합정신, 모교 사랑, 질서 등이었다.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그 세 가지에서 그들이 우리보다 앞선 요인을 찾는 것이 과연 부질없는 일일까.

 


                            경기가 끝나고 나오는 관객들의 모습

 
                 관람석에서 Melania

            관람석에서 Jason과 그의 Father-In-Law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4. 19:15
‘코 푸는 미녀스타’

                                                                                                         조규익

몇 년 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받은 문화적 충격 하나가 있다. 호텔, 모텔, 펜션, 민박 등 잠자리는 다양했지만, 정해진 시각에 다양한 사람들과 아침식사를 함께 한 점은 어디서나 같았다. 식당에 빵과 햄, 치즈, 우유, 요거트, 잼, 커피 등등, 다양한 메뉴들이 차려져 있고,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음식들을 담아다가 식탁에 앉아 먹은 다음 말 없이들 떠나곤 했다.

유럽 사람들은 동양 사람들 특히 중국이나 한국인들과 달리 식탁에서 말이 없거나 톤을 낮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들의 ‘코 푸는 습관’이었다. 대부분 앉자마자 아니 식사 중에도 이곳저곳에서 예사로 ‘팽! 팽!’하면서 코들을 풀어 제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만 서로 어안이 벙벙하여 앉아 있을 뿐, 그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밥상 앞에서 말을 많이 하여 꾸지람을 들어온 우리였다. 밥그릇을 앞에 두고, 더구나 많은 손님들이 주변에 앉아 있는 자리에서 소리 높여 코를 푸는 일이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말로 나직하게 ‘야만인들이로군!’하면서 킥킥댄 것도 당연했다. 우리는 그들이 밥상 앞에서 코를 푸는 행위에 대해 관대한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코에 무언가 들어 있으면 숨을 쉴 수 없고, 숨을 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밥을 먹는 일보다 코를 푸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다급한 일이다!’ 라고 그들은 오랜 세월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며 그들의 무례한(?) 행위를 용인하기로 했다.

       ***

오늘 아침 인터넷 속의 오솔길을 어슬렁거리다가 영화배우 송승헌이 “바로 옆에서 ‘팽’하고 크게 코 푸는 김태희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는 기사를 보고는 픽 웃음이 나왔다. 송승헌이 아마도 유럽여행 중에 식탁에서 거침없이 코를 풀어 제끼는 선남선녀들을 보았다면 졸도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배우 김태희는 해외여행을 하다가 식탁에서 코를 푸는 외국인들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런 일들이 국제 예의의 표준 상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는 착각을 했으리라. 그러나 유럽은 유럽,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다. 송승헌 같은 멋진 신사가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개된 장소에서 코를 ‘팽!’ 푸는 일을 생소하게 받아들일 만큼 우리는 아직 꽉 막혀버린 동방예의지국에 살고 있는 걸까?
                                                                   <숭실대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