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7. 26. 22:05

 


오클라호마주 무어(Moore) 시 초입의 조형물과 자동차들

 

 

 

 

에프 엠(FM)대로 살면, 망할까?

 

 

 

미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차를 구입하여 몰기 시작했다. 오클라호마의 스틸워터는 십 몇 년 전에 지내던 LA보다 도로가 훨씬 한산하고 넓었다. 미국에서는 교차로에 진입하기 직전에 반드시 정지한 다음 어느 방향이든 먼저 와 서 있는 차가 진입하도록 양보해야 한다. 비록 사방에 차 한 대 없어도 반드시 정지하여 두리번거리며 확인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 정해진 법규였다. 저 멀리 차도로 사람이 걸어가면 무조건 서서 기다리는 것도 그들의 원칙이었다. 신호등을 지키는 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 법규를 철저히 지키는 미국인들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초기에는 가끔 착각하여 한국에서의 운전 습관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런 미국의 운전 관습이 몸에 배기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이처럼 내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감동을 받았던 건 미국인들의 이른바 리걸리즘(legalism)’이었다. ‘고집스런 법칙 존중주의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까. 간혹 답답하기도 했으나,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최고의 장점이었다.

 

***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일리걸리즘(illegalism)’이 관습화된 나라다. ‘고집스런 범칙주의(犯則主義)’  혹은일상적 범칙주의’  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어기는 맛에 법을 만든다는 말이 상식처럼 되어 있고, ‘예외 없는 법 없다는 속담을 진리처럼 숭상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차를 몰고 거리에 나가보라. 아무리 차량 대수에 비해 길이 좁아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틈만 나면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에 사람이 지나가면 전속력으로 가속페달을 밟아 그 앞을 !’하고 가로질러 내빼는 건 일상적인 모습이다. 직진차선에 차가 밀린다 싶으면 그 옆으로 빠져 나가는 우회차선을 쌩 달려 앞쪽으로 간 다음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운전자들을 조롱하듯 끼어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총기 소지가 미국처럼 자유로워진다면, 아마도 사망자의 90% 이상은 도로에서 생겨날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내비게이터 덕분이긴 하지만, 감시카메라의 위치를 귀신같이 알아낸 뒤 그 사이사이에선 엄청난 과속도 일삼는다. 당국에서는 구간 단속이라는 지혜까지 내놓았지만, 요즘은 머리 좋은 운전자들 때문에 그것도 무력화 된지 오래다.

이런 일리걸리즘이 교통에만 국한되는 문제일까. 많은 돈을 벌면서 세금 한 푼 안 내고, 건장한 체구로 태어났으면서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고, 집 지을 수 없는 땅에 호화주택을 짓고, 선박의 구조를 변경하면서까지 화물을 과적하고...주워섬기자면 끝이 없다.

 

***

 

세월호 사고가 일어난 뒤 국가 대개조에 나서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도 날이 갈수록 무뎌지고 있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지하철 사고, 열차 사고, 비행기 사고... 운전자, 정비사 등이 간단하지만 중요한 수칙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충대충 해!’라거나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겄어?’라는 무심함과 대범함의 천국이 우리나라다. 집을 지을 때도 넣으라는 철근을 다 넣지 않고, 시멘트의 품질규격이나 분량을 지키지도 않는다. 업자들이 찔러주는 돈 봉투에 감독하는 놈들은 슬쩍 눈을 감아주곤 한다. 식당 하면서 식재료의 원산지 표시 원칙을 지키면 멍청이다. 앞 손님이 먹다 남긴 음식을 다른 손님에게 다시 제공하는 것은 애교. 식재료가 쉽게 상한다고 농약을 치는 인간들이 그들먹한 나라가 우리나라다. 남이야 먹고 죽든 말든, 차를 타고 가다가 바퀴가 빠져 죽든 말든, 곤히 잠자다가 집이 무너져 죽든 말든, 북괴군들이 쳐들어 올 때 포탄이 발사되지 않아 귀한 우리 장병들이 죽든 말든, 열차가 부딪쳐 수십 명의 귀한 사람들이 죽든 말든....내 주머니에 돈만 들어오면 장땡인 나라다.

 

***

 

Field Manual, 에프엠이란 야전 수칙이다. 야전에서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군들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절체절명의 원칙이 바로 에프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에프엠 대로 살면망한다. 미련하고 답답하다고 욕을 먹는다. ‘바쁜 세상 대충 살지. 뭔 일 났다고 원칙 지킨다나? 아니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다고 저렇게 규정을 지키며 답답하게 군디야?’ 온갖 욕이 쏟아진다. 그러니 에프엠을 지키려던 사람들도 슬그머니 반칙의 대열로 끼어든다. '망할 놈'의 관습이요, 분위기다. 법을 지키는 사람이 욕먹는 사회를 생각해 봤는가툭하면 범칙자들에게 욕을 퍼붓기 좋아하는 우리들. 스스로의 행동들을 한 번 돌아보자. 하루 중 에프엠대로 법규대로 살아가는 순간이 몇 %나 되는지 살펴보자. 사건이 터지면 정부나 대통령만 욕한다. 자신들은 에프엠대로 법규대로 살아 왔는데,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자가 무능하고 사악하여 사고가 났다는 투다. 온통 범법자들로 이루어진 이 땅의 야당 인사들은 한 술 더 뜨면서 대중을 선동하려까지 든다. 한심하다 못해 슬프도록 재미있는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미 만들어진 에프엠만 제대로 지켜도 국가 대 개조는 당장 이루어진다!!!

 

 

 


뒤집어진 채 점점 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네이버 사진]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28. 18:08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최근에 발간된 그의 책들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올해 2월로 접어든 어느 날 오후. 미소가 멋진 중년 신사 한 분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역사학과의 프레너 교수라고 소개했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알고 본즉 그는 지난 해 연구년으로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작년 8월에서야 OSU에 입성했기에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는 내 연구실의 문패에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는데, 말을 나누는 도중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큰 흥미를 갖는 것이었다. 떠날 날에 임박해서야 만난 점에 대하여 그 또한 애석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그의 전공은 크게 보아 에너지사()’, 좁히면 에너지 개발 및 이용사’, 더 좁히면 에너지 개발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 등 사회문제사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공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강제이주를 당한 처지였지만, 주로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평원 오클라호마 주는 어딜 가나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천혜의 땅이었다. 오클라호마 번영의 역사는 석유 등 천연자원 개발과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역사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그저 한국사/동양사/서양사혹은 고대사/중세사/현대사쯤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온 것이 한국의 역사학계나 내 의식 수준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든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역사학으로 수렴되는 모든 부분들이 인문학의 범주일 것은 분명하지만, ‘에너지 개발의 역사가 어엿한 학문 테마로 정립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였다. 그렇게 프레너 교수[Dr. Brian Frehner]OSU의 한켠에서 만나게 되었다.

 

프레너 교수와의 인터뷰

 

 

그의 학문적 관심을 정확히 짚어내어 나열하면, ‘1860~1945년 미국/미국의 서부/환경/기술/공공분야로 집약될 수 있다. 그는 UCLA에서 학부를, 라스베가스의 네바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OS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매력적인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가 바로 크리칼러지(Creekology)[석유 탐사학’]에서 지질학(Geology)으로: 1860~1930년까지 남부 대평원에서의 석유 탐사와 보호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하여 애리조나를 거쳐 오클라호마에 정착을 본 그의 지적 탐구 여행이야말로 흡사 대평원에서 석유를 탐사하듯 진행되어 온 것이나 아닐까.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테마들이 존재해왔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새로운 테마들이 개발될 것인가.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사건들의 해석이나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은 E.H. Carr가 자신 있게 내세운 것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역사학이란 앞으로도 지식사회의 마를 수 없는 오아시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레너 교수는 흡사 살아있는 현장에서 꿈틀거리는 노다지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버팔로 떼가 밀고 지나가는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석유채굴기가 끄덕거리며 기름을 퍼 올리는 오클라호마의 풍경을 보면서도 그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지 않을 역사학도나 인문학도는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 프레너 교수는 자부심 강한 행운아였다.

 

그는 최근 들어 <<석유의 발견: 1859-1920 석유 지질학의 본질>>, <<인디언과 에너지: 미국 남서부의 개발과 기회>>, <<라스 베가스에서 쥬스 짜기: 미국 소도시의 성장에 대한 소견들>> 등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많은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탁월한 학자였다. 그런 업적들을 바탕으로 여러 건의 학술상과 연구비 수혜를 받았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면학의 열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프레너 교수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제 우리도 화석처럼 굳어진 대학의 전공체계를 유연화시켜 시의적절하고 지역 친화적인 분야들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20세기 중반에 구축한 패러다임을 21세기 한복판으로까지 지속시키려는 배짱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은 입만 열면 전공영역의 정체성[identity]’을 강조하지만, 그건 강한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에 불과하다는 점을 프레너 교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바야흐로 다원화되고 있는 우리네 삶을 어떻게 학문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23. 14:15

 

 

 

                         6개월간 몸을 담고 있던 South Murray 홀

 

 

 



                              OSU Student Union

 

 

 



                                        머레이 홀 1층에 있던 연구실 팻말

 

 

 



                                       연구실 내부

 

 

 

 

스틸워터를 떠나며

 

 

 

 

예정 체류기간 6개월을 모두 써버리고, 오늘 드디어 스틸워터를 떠난다. 그동안의 추억에 쩐 짐들이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그득하건만 마음은 대체로 허하다. 그 옛날 유목민들이 이랬을까. 천막을 대충 걷어 말 등에 올려 메우고 정처 없이 또 다른 풀밭을 따라 길을 떠나던 그들의 기분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농경 정착민의 후예인 내가 노마드라니? 스스로의 몸에서 노마드의 애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시대의 변화 때문이리라. 풀이 자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떠나는 아침이면 그 옛날의 유목민들은 무수히 되뇌었을 것이다. 삶터 앞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을, 천막 주변에서 재잘거리던 작은 새들을, 가끔씩 찾아와 기웃거리던 사슴이나 토끼들을, 환하게 미소 짓던 꽃들을, 귓가에 스쳐가던 바람결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천 년의 세월을 격()한 노마드의 서정이 이 순간 내 마음을 치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24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출발 예정.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 미련이 남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둘러 볼 곳들이 남아있어 스틸워터 출발 날짜를 며칠 당기기로 한 것이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Creek)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동쪽의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

 

스틸워터를 떠나는 이 순간의 기분은 9년 전 중남부 유럽의 20개 나라들을 자동차로 돈 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에 오르던 그 기분과 동일하다. 사실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면서도 타고 난 낙천성과 조심성 하나로 무사히 그 길을 주파(走破)해낸 것처럼, 달력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체류해온 오클라호마 주와 스틸워터 역시 까맣게 모르던 공간들이면서도 그다지 숨차 하지 않고 골인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중남부 미국인들의 보수성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일반적 성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에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그들의 보수성이란 자기표현의 미숙함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나는 그들을 만나는 순간 간파할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선 그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길과의 만남, 이상적인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아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야 할 단 하나의 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 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소떼를 몰고 재입사(再入社)하기로 한다.

 

 

 

 


산책로의 한 부분

 

 

 

 


가끔 산책하던 부머 호수의 오리들

 

 

 

 


부머 호수의 서정

 

 

 

 


아파트 뒤켠 풀밭에서 식사하고 있는 기러기들[Canadian Goose]

 

 

 

 

 
아파트 주차장까지 진출한 기러기들

 

 

 

 


산책로의 전선을 점령한 새들

 

 

 

 


산책로에서

 

 

 

 


산책로에서

 

 

 

 


눈 내린 산책로의 한 부분

 

 

 

 


산책로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

 

 

 

 


산책로에서 만난 다람쥐

 

 

 

 


추운 날 산책길에 만난 이름 모를 새

 

 

 

 


OSU 스포츠의 대명사 풋볼 팀 광고사진

 

 

 

 


'2013년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석한
 각국의 학자들 중 몇몇과 함께

 

 

 

 


스틸워터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4. 12:03

 

 

 

 

 


OSU의 중앙도서관

 

 

 


OSU 중앙도서관의 서고

 

 

 


오클라호마주 거쓰리시티(Guthrie City)의 카네기 도서관
(오클라호마 주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음)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부럽기만 한 미국의 도서관들

 

 

 

 

15년 전 미국의 유명대학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도서관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대학의 질을 좌우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당시의 내 의식수준으로 그들의 도서관 시스템은 환상 그 자체였다. 도서관에 신청만 하면 미국 전역, 아니 유럽의 대학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까지 입수해 빌려주는 그들의 제도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도서관이 교수와 학생들에게 연구와 공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다른 미국의 대학에 와 있다. 그런데 웬만한 자료들이 거의 모두 디지털화 된 지금의 상황이 도서관 시스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구 자료를 신청하면 세계 전역의 디지털 자료까지 일일이 찾아내어 이메일로 서비스해주는 환상적인 체험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의 대학들은 장서 숫자의 확충이나 새 건물들의 건립에 치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대학평가의 주요 항목 가운데 장서량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 대학 도서관들과 자료를 교환하기는커녕 국내 대학도서관들 사이에서도 자료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좋은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큰 대학들이 그 제도에 응할 리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학의 도서관들만 훌륭한 건 아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각 지역에는 공공도서관들이 있고, 질 좋고 풍부한 장서를 자랑한다. 수시로 독서 관련 이벤트를 여는 등 도서관은 그 지역의 문화센터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 뿐인가. 도서관마다 새로운 도서들이 수시로 들어오니 오래 된 책들이나 복권(複卷)들은 퇴출시키는데, 그걸 주민 상대로 공짜에 가까운 가격[수십 센트에서 1불 혹은 2]으로 판매하는 행사를 주기적으로 연다. 많은 사람들이 흡사 선물 받아 기쁘다는 표정으로 좋은 책들을 한 아름씩 안고 가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본 경험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퇴근 무렵 직장인들이 책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반납한 뒤 새로운 책들을 빌려가는 모습, 마트 가는 길에 들러 책을 반납하고 빌려가는 아주머니들, 손자손녀들과 손을 잡고 도서관에 들러 독서삼매에 빠져 드는 할아버지할머니들, 도서관에 비치된 고급 서적들을 꺼내 놓고 읽어가며 과제물 작성하기에 바쁜 고등학생들, 설치해 놓은 컴퓨터들을 통해 각종 인터넷 정보를 검색하고 출력하는 데 몰두하는 일반인들... 대학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을 알 수 있고, 지역의 공공 도서관에 가보아야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변함없는 내 지론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카네기(Andrew Carnegie)20세기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 스코틀랜드 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미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쓴 인물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도서관을 짓는 일에 헌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1883년부터 1926년까지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다. 그 가운데 1,689개는 미국에, 660개는 영국과 아일랜드에, 125개는 캐나다에, 나머지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세르비아피지 등에 각각 세워졌다. 1919년 미국 전역에 3,500개의 공공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카네기가 지어준 것이라니, 얼마나 놀랄만한 일인가.

 

돈과 권력을 자손들에게 넘겨 줄 욕심으로 독직(瀆職)의 죄를 지어왔고 지금도 짓고 있는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세습하기 위해 애쓰는 이 나라의 재벌들이 우리의 현주소다. 그들이 어렸을 적에 카네기의 전기를 단 한 페이지만 읽어 봤어도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을 텐데. 단돈 한 푼 책이나 도서관에 기증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며, ‘참 돈 쓸 줄 모르는그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던 때는 우리 사회에 책이 몹시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도 도서관은커녕 읽을 만한 낱권의 책조차 없었다. 서울의 어떤 독지가가 기증했다는 수십 권의 동화책들이 전부였는데, 그나마 늘 자물쇠가 채워진 채 교무실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게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그렇게 60년대~70년대의 학창시절 내내 지적인 궁핍의 상황은 지속되었다.

 

정치적문화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던 80년대. 책의 생산량과 국민들의 독서량이 막 늘어나려는 찰나 프로 야구가 시작되었고, 컬러 TV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책을 잡는 대신 한층 야해진 영화, TV 드라마, 프로 스포츠에 빠져들었다. 도서관이래야 잡동사니들을 다 합쳐서 100만권을 소장하는 대학들이 거의 없었고, 공공도서관 없는 지역들도 수두룩했다. 도서관은 그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우리 사회에서 최근까지 지속되었다. 도서관이란 한낱 독서실’, 그것도 시험 때나 잠시 찾아가는 공부방이란 것이 우리 학창 시절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러니 독서열풍은커녕 책이 뭣에 쓰는 물건인지에 대한 기본 상식을 지닌 국민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 국민의 화끈한 성품대로 시절은 순식간에 디지털 시대로 넘어갔다. 정신 나간 교육부 인사들이 이젠 종이 책을 없애고 아이들 교과서도 이북[e-book]’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 종이 책을 아날로그 시대의 뒤쳐진 산물, ‘이북디지털 시대 발전의 산물로 동일시하는 인사들이 나라의 정책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다. 공짜로 주어지는[아니, 사실은 아주 비싼 값으로 주어지는] 단말기를 손에 넣자마자 아이들은 게임을 즐기기에 바빠 그것을 교과서로 쓰는 시간은 하루에 단 몇 분, 길어봐야 한 두 시간에 불과했다. 그게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 그나마 개꼬리만 하던독서시간은 아예 사라져 버려, 다시 독서 시대의 영광을 되돌리기엔 불가능해졌다. 독서의 습관을 처음부터 가져 보지 못한 기성세대와, 디지털에 사로잡힌 신세대가 어우러진 이 나라의 현실이 걱정이다.

 

지금 우리가 국민소득 2만 불을 가까스로 넘겼다고는 하나, 국민의식이 변하지 않고는 3~4만불 대의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어렵다. 그러나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국민의식을 변화시킬 수 없고, 지금 같은 교육열만으로 세계와 경쟁할만한 인재를 길러내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올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은 기본적으로 독서를 통한 자발적 공부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두뇌의 용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교육에 큰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부정적 풍조를 고쳐야 나라가 산다. 그러기 위한 지름길이 바로 독서운동이다. 어머니나 주부들이 하루에 단 한 두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책을 읽어보라. 아버지들이 퇴근 후 곧바로 집에 들어와 단정한 모습으로 책을 읽어보라. 휴일에 부모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좋은 서점에 가서 몇 권의 책을 사주고, 책 읽은 아이들에게 칭찬이라도 건네 보라. 그 순간 아이들의 분위기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은 책을 멀리하면서 아이들보고만 공부하라, 책을 읽어라!’고 야단치는 것처럼 모순적인 행동은 없을 것이다. 부모들부터 바뀌면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하게 될 것이고, 아이들이 책과 가까이만 할 수 있다면 사교육비로 큰 돈 쓸 필요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700개 정도의 공공도서관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네마다 한 개씩 도서관이 있어야 한다. 방과 후 학생들의 학습이나 독서, 어른들의 여가활용도 동네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국가 예산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재벌들이나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이 도서관 운동에 헌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카네기가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도서관을 지어준 것도 도서관에 국가의 장래가 걸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책을 왜 읽어야 되는지, 도서관이 왜 필요한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국민이나 국가는 결코 흥할 수 없다. ‘책 읽는 민족에게 미래가 있고, 도서관이 우리 삶의 희망 공간임을 이제 우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 서가

 

 

 


       오클라호마주(Oklahoma State) 스틸워터(Stillwater)의 시립도서관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주민들에게 도서관 서고에 있는 책[겹치는 책이나 퇴출시키는 책]을
'몇 센트~1, 2 불' 정도의 싼 값으로 판매하는 행사장

 

                                                                               @@@@@

 

                                  ***이 글은 태안도서관에서 발간하는 <<천자만홍>> 14호에 특집으로 실렸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7. 06:44

 

 


오클라호마와 텍사스를 거쳐 뉴멕시코로 연결되는 I-40을 비롯한 각종 도로들

 

 


오클라호마의 길가에서 흔히 보이는, 목장과 유전이 어우러진 모습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로 들어가는 입구

 

 


텍사스의 도로

 

 

뉴멕시코의 남성미, 오클라호마의 여성미

 

 

아름다움이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나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걸출한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며 인기있는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저서 <<미의 역사>> 머리말에서 강조한 미학의 원리다. 그렇다. 아름다움이란 그렇게 상대적인 것이다. 에코 뿐 아니라 현대 미학자들 가운데 아름다움의 상대성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아름다움에 관해 겨우 아마추어 수준의 인식을 갖고 있는 백규에게조차 미의 상대성론은 부담감 없는 상식이다.

 

***

 

오클라호마 체류 기간 끝 부분에 뉴멕시코를 다녀오기로 했다. 머나먼 길을 운전하여 텍사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곳이라서 더 매력적이었다. 오클라호마 인디언들을 대충 만나 보았으니, 그곳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는 푸에블로(Pueblo) 인디언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나마 세 개 주의 인상(印象)을 비교해보고 싶은 것이 내심의 욕구였다. 무엇보다 역마살을 사랑하는 내가 새로운 길을 만나는 일을 마다할 리 없으니, 그야말로 일타삼피(一打三被), 일석삼조(一石三鳥), 혹은 One Serve, Triple Purposes’의 쾌거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중심을 서남쪽으로 뚫고, 텍사스의 팬 핸들(Panhandle)을 가로질러, 앨버커키(Albuquerque)와 산타페(Santa Fe), 반들리어(Bandlier), 타오(Taos) 등 뉴멕시코의 북부 일대를 돌아오는, 총연장 2천 마일에 가까운 장도(壯途)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우리나라[남한] 면적의 두 배인 181,195, 텍사스 주는 7.8배인 696,241, 뉴멕시코 주는 3.5배인 315.194이니, ‘눈물겹도록광활한 땅 아닌가. 비록 그 면적의 작은 부분들만을 거치는 노정이었으나, 그 장대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2014. 1. 19. 오전 8시 스틸워터 출발. 타고 가던 35번 하이웨이를 오클라호마 시티에서 40번으로 갈아타면서 쾌속의 질주를 계속했다. 르노(El Reno), 엘크(Elk), 세이어(Sayre) 등 오클라호마 구간을 지나자 풍광이 바뀌면서 I-40은 텍사스로 접어들었다. 주 경계를 넘어 텍사스 경내의 전망대 겸 휴게소에 들어서니 사방에 돌투성이의 언덕들과 까마득하게 늘어선 야산들이 보였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와 잠시 달리자 이내 오클라호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텍사스의 벌판이 펼쳐졌다. 그렇게 텍사스의 팬 핸들 지역을 몇 시간 동안 달리자 66번 도로(Historic Route 66)’ 상의 핵심도시 아마리요(Amarillo)’가 나오고, 그로부터 두어 시간 더 달려 뉴멕시코에 들어섰다.

 

매혹의 땅 뉴 멕시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New Mexico, Land of Enchantment]’라고 도로를 가로질러 세운 경계표지가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확연히 달라진 풍광이었다. 오클라호마에서 텍사스까지 끝없이 펼쳐지던 벌판들, 비옥해 보이진 않았으나 온갖 식물들을 키워내던 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척박한 돌투성이의 땅에 깔리듯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사막식물들의 삶터가 무한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텍사스와 뉴멕시코를 변별(辨別)하는 표지야말로 경계표지가 아니라 이런 경관의 변화였다.

 

경계표지를 지나자마자 만난 글렌리오 뉴멕시코 관광 비지터 센터[Glenrio Visitor Center NMDOT]’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늘 그렇게 해왔다는 듯, 우리의 인사에 응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지도를 펼치면서 묻지도 않는 관광명소들을 일사천리로 설명했다. 관광 비수기이긴 했으나, 우리가 보고자 한 포인트들은 가까스로 겨울철 폐장을 하루 이틀 앞두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곳이 바로 시간 변경대인 듯 직원은 우리 시계의 시침을 한 시간 뒤인 3시로 되돌리라고 했다.

 

미국에는 동부 시간[Eastern Time], 중부 시간[Central Time], 산악 시간[Mountain Time], 태평양 시간[Pacific Time] 등 네 개의 시간대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출발한 오클라호마는 텍사스와 함께 중부 시간대에 속해 있었고 뉴 멕시코는 산악 시간대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먼 곳을 가는 길에 한 시간 벌었구나! 쾌재를 불렀으나, 태양은 이미 저 멀리 지평선 바로 위에 걸려 있었다. 한 시간을 벌긴 했으나, 앨버커키까지 세 시간이 넘어 걸린다는 비지터 센터의 직원 말에 오후 4시쯤 도착하여 느긋하게 숙소를 정하리라 생각한 우리의 계획이 멋지게 빗나갔음을 알게 되었고, 가끔씩 속도제한[Speed Limit] 상한선 75마일을 넘기며 달려 나갔다.

 

 

비지터 센터를 나온 우리는 목적지인 앨버커키(Albuquerque)까지 3~4백 마일을 더 달려야 했다. 엔디(Endee), 바드(Bard), 투쿰카리(Tucumcari) 등 연도의 대소 도시들을 지나고 앨버커키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을 표현할 말이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황량함이란 말 은 사전에 나오겠지만, 그 말도 결국 우리 인식의 한계만 드러낼 뿐이었다. 약간씩 오르내리는 구릉들을 제외하고 산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지평선에 아련히 보이는 것이 바로 버날리요(Bernalillo) 카운티와 샌도발(Sandoval) 카운티에 걸친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일 것인데, 그마저 저녁 어스름과 아련히 피어오르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앨버커키에 들어서기 위해 넘을 때에야 그 산맥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을 포함하여 뉴멕시코 전역의 평균 높이가 해발 1710m이고, 가장 낮은 지역도 852.6m에 달하니 뉴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내내 1천 미터가 훨씬 넘는 산길을 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넓은 땅을 덮고 있는 것은 거무튀튀한 돌들, 그 사이에 모습을 내민 블랙 그래머(Black Grama), 아리스티다 퍼푸리아(Aristida Purpurea), 크레오소트 부쉬(Creosote Bush) 등 사막식물들 뿐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이 깃들만한 교목은 한 그루도 보이지 않고, 기껏 쥐나 프레이리독 같은 작은 짐승들이나 몸을 숨길만한 식물들이 듬성듬성 성장을 멈춘 채 사막의 맨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뉴멕시코로 들어가는 입구

 


끝없이 펼쳐진 뉴멕시코의 평원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뉴멕시코의 황량한 대지

 

 

 


Rio Grande 강과 George Bridge 주변에 펼쳐진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Sandia Mountains)과 앨버커키(Albuquerque) 사이의 사막지대

 

 


샌디아 산맥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앨버커키 시가지

 

 


앨버커키 인근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황량한 평원

 

 


스카이시티 가는 길에 만난 어도비 건축양식의 천주교 성당

 

 


성당 옆쪽에 마련된 성모상

 

 


애코마(Acoma) 푸에블로(Pueblo) 스카이시티에서 내려다 본 관광안내소

 

 


뉴멕시코를 달리며 찍은 황량한 모습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

 

 


뉴멕시코의 끝없는 지평선 너머로 아련한 여운을 남기면서 해가 지고 있다.

 

 

해발 1,619.1 m의 고지대에 위치한 앨버커키에 도착하자 붕 뜬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만큼 기압이 낮은 때문일 것이다. 1박을 한 다음날 찾은 곳은 스카이 시티(Sky City). 예의 그 광활한 평원 한 복판에 잔구 형태의 돌덩어리들과 엄청난 규모의 돌산이 서 있고, 그 위에 만들어진 애코마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의 공동체가 바로 그곳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돌 주거지.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곳에서 상상되는 그들의 삶 역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 날 만난 아름다운 산타 페(Santa Fe) 역시 2,134 m 의 고도(高度)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앨버커키보다 기압이 더 낮은 때문일까, 자동차에 넣어 갖고 온 과자 봉지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산타페 산맥에 안겨 넓은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대도시. 이곳 역시 뉴멕시코의 주 건축양식인 어도비(Adobe) 일색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앨버커키도, 스카이시티도, 산타페도, 타오(Taos), 그 도시들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주택들도 대부분 어도비 양식이었다. 어도비란 모래, 진흙, , 막대기, , 동물의 배설물 등 섬유질이나 유기질 재료 등을 섞어서 벽돌을 만들고 햇볕에 말리는 공법으로 짓는 건축양식이다. 볼그레한 땅 색깔과 어울리게 지은 어도비 건축물들이야말로 자연에 맞추어 살려는 이 지역 주민들의 미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직선과 기하학에만 익숙해 있던 내게 곡선과 흙빛의 따사로움을 갖춘 이 건축양식이 첨엔 좀 생소했지만, 눈에 익을수록 미학이란 결국 자연과의 위대한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평범한 이치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고, 결국엔 정겨움을 느끼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비록 일부분이나마 뉴멕시코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나서야 그곳에 차원 높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돌투성이의 사막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수만 년 웅웅거리며 쓸어오는 바람결 외에 움직임 하나 없는 이 벌판을 전통 미학의 기준으론 추하다고 보는 게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 벌판을 달리면서 감동과 함께 울고 싶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까. 나는 이미 오클라호마 북부의 오세이지(Osage) 인디언 구역에서 대초원[Tall Grass Prairie]을 만나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好哭場)’을 떠올린 바 있다. 광대한 요동 들판을 걸어가던 박지원은 그곳을 가히 울어볼 만한 곳이라 말하고, 인간 7(七情)의 발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초원 앞에 선 나도 연암선생이 느꼈던 그 심정을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미움이 극에 달해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니,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 버리는 것으로 소리 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 뇌성벽력에 비할 수 있는 것이니, 북받쳐 나오는 감정이 이치에 맞아 터지는 것이 웃음과 다를 게 뭐겠는가.”라는 연암 선생의 논리야말로 뉴멕시코의 대평원 앞에 선 내 감정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감정적 여과를 거치고 나서야, 뉴멕시코 대자연의 추함은 결국 아름다움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극도의 추함이 아름다움과 합치될 수도 있다는 미학의 상대성이야말로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으로부터 터득하게 되는 진리 아닌가.

 

***

 

잠시 오클라호마에 체류하면서 평원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고, 텍사스를 보고 나서 그 아름다움의 선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멕시코의 사막 벌판을 만나면서 새로운 미학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오클라호마의 평원에는 나무가 많고, 돌보다는 기름 진 흙이 많다. 기름 진 흙으로 나무를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여성성(女性性)’의 본질 아닌가. 오클라호마의 대지를 달리다 보면 식물을 키우고 인간을 길러내는 지모신(地母神)’의 속삭임을 듣게 된다.

 

이와 달리 돌투성이의 사막, 뉴멕시코의 대지에서는 쩌렁쩌렁 울리는 거친 남성의 포효를 들었다. 뉴멕시코를 달리면서 눈물 나는 감동으로 긴장하다가 오클라호마에 들어오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숭고와 비장의 남성 미학적 공간에서 부드럽고 우아한 모성 미학의 공간으로 입사[入社, initiation]했기 때문이리라. 다른 시간대 즉 Mountain Time에서 Central Time으로 넘어가면서 미학적 차이까지 경험하게 된 내 가슴에 희열이 넘치는 순간이다.

 

 


애코마 푸에블로 인디언 스카이시티의 광장에서
(기우 제의에 쓰이는 사다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상부의 가로막대는 구름을 각각 상징한다 함.
비가 부족한 이곳의 상황을 보여주는 물건임) 

 


스카이시티에 있는 성당[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앨버커키의 푸에블로 문화센터(Indian Pueblo Cultural Center)에서
공연을 마친 푸에블로 남성 무용수와 함께

 

 


앨버커키를 떠나 산타페에 들어가는 중. 멀리 보이는 것이 산타페 산맥이며
그 앞에 널리 퍼진 것이 산타페 시가지임.

 

 


산타페 시내의 산 미구엘(San Miguel) 성당. 미국 최초의 어도비 양식 성당임.

 

 


어도비 양식의 호텔 산타 페 


 


타오(Taos) 시내 어도비 양식의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

 


타오 시내의 '랜처 장로교회[Rancho's Presbyterian Church)

 


타오 시 외곽에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전통 가옥

 


푸에블로 인디언의 전통가옥. 앞에 있는 둥근 것이 빵을 굽는 화덕임.


타오(Taos)로부터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의 농장 입구

 


타오(Taos)에서 로건(Logan) 가는 길에 지나온 Angel Fire Mountain 속에서 만난 사슴떼.
환상 속의 한 장면 같지요?

 


뉴멕시코의 카운티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