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2. 12. 17:19

*<교수신문> 758호(2014. 12. 1.)에 실린 글을 퍼다 놓습니다.

 

 

‘메모리얼 뮤지엄’, 그리고 어떤 기억들의 보존 방식

어느 국문학자의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 답사기
2014년 12월 10일 (수) 15:53:56 조규익 숭실대·국어국문학과 editor@kyosu.net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2013년도 풀브라이트 지원의 방문학자로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연구하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이곳에서 틈틈이 아내 임미숙과 함께 주변지역을 두루 답사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오클라호마 곳곳에서 그는 삶의 어떤 순간들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뒤 그는 이런 경험을 묶어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 刊, 이하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를 내놨다. ‘조규익·임미숙의 해외문화 답사기 2’라고 작은 타이틀도 붙인 책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문학도로서의 외길을 걸어오며 내 지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자유로운 사유와 모색을 끊임없이 반복해왔고, 그것들이 바로 ‘도전과 좌절’이라는 최대공약수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다.” 그가 말하는 도전과 좌절은, 그의 시선을 일찍이 ‘해외 한인문학’으로 돌리게 했고, 몇 년간의 여행을 거친 후 『CIS지역 고려인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란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번 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역시 그런 경험이 녹아든, 그러나 조 교수가 말한 것처럼, 지적 방랑을 거듭해오던 연구도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작은 쉼표 다. 오클라호마라는 낯선 세계에서 그는 마주치는 삶의 현장마다 얽혀있는 사건과 역사의 깊이를 측량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소환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읽어나갔다.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에는 비극 속에 단련된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노력을 엿본 장면 하나가 인상적이다. 역사와 예술, 인디언의 문화, 대학 등 폭넓게 조망하고 있는 가운데,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을 두고 그가 읽어낸 시선은 타자를 통해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오는, 뚜렷한 성찰적 旅路의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관련 대목을 소개한다.

 

   
 

▲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건너편 추모공원의 ‘눈물 흘리는 예수님’ 상

 
 


인간은 착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 궁리해왔지만, 앞으로도 쉽게 결론 날 문제는 아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학자나 성악설을 주장한 학자나 아무리 복잡한 논리들을 늘어놓았어도 모두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경우 공자의 말씀(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공자 말씀하시되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혀 얻게 되는 성품은 서로 멀어지게 된다, 『논어』, 「양화」 제2장)에서나 어떤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지 선한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태어나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가는 것 뿐 아니겠는가. 다만 착한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는 대개 그 정도에 한계가 있으나, 악한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 그 끝을 헤아릴 수 없고, 진행 양상 또한 극적이다. 그래서 고금의 많은 문학가들이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인간의 악마성을 그려내고자 노력해온 것이리라.


얼마 전부터 “오클라호마에 왔으니 메모리얼 뮤지엄은 봐야 할 것”이라고 어느 지인이 권유했다. 18년 전에 뉴스를 보며 ‘끔찍한 사건’이란 생각은 했으면서도 실감이 안 나 그냥 들어 넘기고 만 셈인데, 이제 그 현장에 온 만큼 안 볼 수는 없는 일. 더구나 훨씬 규모가 크고 끔찍했던 2001년의 ‘9·11 테러’로 치를 떨었던 만큼, 인간 악마성의 한계를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흔히 용의선상에 오르곤 하던 이슬람 테러단체 아닌 미국인들이 자국민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였다는 점을 누군들 쉽게 이해하겠는가.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트럭에 실려 온 2천kg 이상의 폭발물이 터져 오클라호마의 연방청사는 처참하게 망가졌고, 보육원 어린이 상당수를 포함 168명 사망에 6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연방청사의 공무원들, 어린이들, 일반인들 모두 테러범들과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소 일면식도 없었을 이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폭탄 테러를 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주범인 중산층 출신의 걸프전 참전용사 티모시 맥베이(1968~2001)와 종범인 테리 니콜스(1955~)는 둘 다 미시간에 근거를 둔 급진 우익 서바이벌 그룹의 멤버들이었다. 서바이벌 그룹이란 자신이나 자신의 그룹(혹은 국가)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미치광이 집단이다. 이들의 광기 앞에는 망상을 바탕으로 한 테러나 무차별의 증오만이 있을 뿐, 상식이나 이성은 있을 수 없었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건의 전말은 석연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미국사회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테러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전망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사실 우리 같으면 빨리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식간에 잔해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보란 듯이 번쩍번쩍 빛나는 새 건물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 뒤면 새 건물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나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었냐는 듯 태평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모조리 사라진 건물터엔 희생자들의 공동묘지와 기념을 만들어 놓았고, 위에서 아래로 1/2가량 파손된 건물을 세심하게 수습한 뒤 박물관으로 재생시켜 놓은 것이었다. 사건 직전부터 발발, 수습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대별 전 과정과 내용, 범인의 체포와 형 집행 등 사건 처리 과정, 희생자들의 신원 및 제반 관련 정보들, 시민들과 전 세계인들의 반응, 국가의 대응 등 사건과 관련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폭발의 위력에 깨지고 부서진 시멘트 벽,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각종 철 구조물들, 소방관들의 희생적인 구조 활동, 구조견의 대견한 활약상, 상태가 심한 부상자들을 구조하다가 정작 자신은 숨을 거둔 민간인 부상자들의 영웅적 활동, 시민들의 자발적 구조 활동 참여 등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미국인들, 아니 이곳을 방문한 세계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살아남은 이들을, 그리고 삶이 영원히 변해버린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이곳을 보고 떠나는 모든 이들은 폭력의 충격을 잘 알게 됐다. 부디 이 기념관이 평안을, 강건함을, 평화를, 희망을, 그리고 평온함을 주기를……”

 

이라고.

 

 


부끄러운 테러, 혹은 비극적 참상을 ‘교육의 현장’으로 바꿔놓을 줄 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위대한 미국인들이었다. 이곳을 끊임없이 찾아와 그 때의 충격을 느끼며 자손들에게 테러의 죄악을 교육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 뿐 아니다. 보존된 현장을 바탕으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그들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가 만약 무너진 삼풍 백화점을, 다리의 상판이 떨어져 내려앉은 성수대교를 그대로 보존해 반성과 경각의 자료로 삼을 수 있었다면, 그토록 비통한 세월호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쯤 우리는 선진국 대열의 앞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잘못의 현장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며 깨우쳐야 한다.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의 부조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짧은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는 비극이다. 이제 우리도 큰 사건의 현장은 오래 보존해 후세를 위한 교육의 자료로 삼아야 할 때다.

조규익 (숭실대·국어국문학과)

Posted by kicho
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5. 08:22

 

빛나는 한국학생 Hyunjun Brian Choi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창 자식들을 키울 때엔 그 녀석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모자랐는데, 이제 웬만큼 홀로서기들을 했다고 생각되면서 내 눈에 다른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실에서도 학생들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내 시야에 들어온다. 요즘 들어 부쩍 남학생들은 아들로, 여학생들은 딸이나 며느리로 바꾸어 생각해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운 좋게도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을 만나면서 거의 저런 학생을 아들이나 딸로 둔 부모는 참 좋겠구나!’, ‘저런 아이는 며느리 감으로 딱인데!’, ‘참 잘 키웠구나!’ 등의 생각만을 갖게 되었으니, 참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자랑스럽게도 이처럼 내 주변에는 반듯하면서도 이쁘고 착한학생들뿐이다.

 

잠시라도 해외에 나가 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인 동시에 잘 몰라서 불안한 일일 수도 있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으로 결정하고 대부분의 중요한 서류작업들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이곳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대학의 학장, 학과장, 외국인 학자 관리처, 주택 관리처, 풀브라이트[미국 본부 및 한미교육위원단], 대사관 등 우리가 접촉한 기관이나 부서들 모두 공적인 업무 상대들일 뿐이었다. 친척이나 친구 등 좀 더 사적이면서도 내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사이트를 뒤지다가 이곳 대학의 한인학생회를 발견했고, 궁여지책으로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서 부득이 부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득달같이 생동감 넘치는 문체의 영문 답신메일이 날아왔다. 그가 바로 ‘Hyunjun Brian Choi’였다. 어려서 이곳에 왔기 때문에 한글을 쓰는 것보다 영문을 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편하여 영문으로 이메일을 쓰게 되었노라는 해명까지 덧붙여가며 이곳 생활의 이면들을 자세하게 적어 보내온 것이었다. 참으로 예의 바르고 의젓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그의 이메일을 받아보곤 호기심이 생겼다. ‘한인 학생회의 부회장이라니, 대학원생 쯤 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몇 번 오고 간 그와의 메일 연락 덕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다.

 


Cafe 88에서 


레스토랑 Bad Bread에서 


OSU의 풋볼 경기장 Boone Pickens Stadium에서               
                                                                                                       

와 보니 정착이 쉽지 않았다. 시차 적응이 쉽지 않아 눈꺼풀은 스르르 내려앉는데 시장은 가야하고, 시장을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는데, 차를 사는 절차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또 자세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그의 이메일을 통해 연결된 분이 바로 기계공학과의 장영배 교수였다. 장 교수의 호의로 우리는 나머지 정착과정을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브라이언을 집으로 불렀다. 아직 차를 구입하기 전이었다. 시장을 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하자 강의가 끝나는 즉시 친구의 차를 빌려 몰고 부랴부랴 와 주었다. 놀랍게도 그는 앳된 학부 3학년생이었다. 첫 인상이 착하고 성실했다. 말을 시켜보니 의젓하고 생각 또한 깊었다. LA에 있는 명문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대학 기간을 단축하려는 계획을 갖고 이 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그였다. 벌써 1년 반이란 기간을 단축했단다. 학부를 졸업한 뒤에는 로스쿨에 진학하여 국제변호사[아마 경제 전문 변호사가 목표인 듯하다.]로 활약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한국의 유수한 로펌에서 인턴의 경력도 쌓아놓았다고 했다. 매학기 학점을 초과 이수하면서도 아주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그였다. 예컨대, 상위 10% 이내의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는 ‘National Society of Collegiate Scholars’, ‘Phi Eta Sigma’, ‘Golden Key International Honor Society’ 등의 멤버로 활약하는 것만 보아도 그의 출중한 능력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2012년에는 ‘Baugh, Russell, and Florence’ 장학금을 받았고, 2012년 봄 학기, 2013년 봄여름 학기에는 우등생으로 학장의 상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총장으로부터 우등상장을 받기도 했다.


Boone Pickens Stadium 건물 1층에서 

         

브라이언이 속한 College of Honors 건물 

 

나는 해외에서 빛나는 우리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게 된다. 물론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도 중요하고 어렵다. 그러나 낯설고 물 선 해외에서 그들과 경쟁하여 앞서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다. 어머니의 젖과 함께 물려받은 모어[mother tongue] 사용자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발휘하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아이들과 경쟁하여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인즉, 그 나이 또래에 누구나 맞이하는 질풍과 노도’, 내부의 욕망과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유혹들을 억누르거나 물리치고 시시각각 침투하는 외로움과 맞서가며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브라이언이 풍겨내는 담담한 내면을 통해 나는 범상치 않을 그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었고, 그의 빛나는 미래를 점치게 되었다. 브라이트(bright) 브라이언 만세!!!

 


백규 연구실에서 브라이언과 함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8. 07:40

 

 


OSU의 백규 연구실에서. 왼쪽이 수잔, 오른쪽이 다이아나

 

둘쨋날 부재중에  다이아나가 써놓고 간 메모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Fulbright Scholar로 선정되었음을 통보 받은 뒤 미국 내의 연구기관을 정하고 그 책임자로부터 초청장을 받는 일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토네이도 소식이 좀 걸리긴 했으나, 학교의 자매대학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아니라 한적한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연구와 힐링을 겸할 수 있다고 본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은 망설일 필요가 없는 적지(適地)였다.

 

우리의 인문대학에 해당하는 OSU‘College of Arts and Sciences’의 대닐로위츠[Bret Danilowicz] 학장에게 이메일을 보내자 하루 만에 쾌락의 응답이 왔고,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역사학과 학과장 로간[Michael F. Logan] 교수로부터 초청장이 도착했다. 그런데 그 초청장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내용은 선생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우리는 선생님께 연구실, 비서의 지원, 컴퓨터와 인터넷 서비스 등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During your stay here, we will be able to provide you with and office space, secretarial support and computer and internet access]라는 요지의 약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비서의 지원(secretarial support)’.

 

대학에서 비서는 으레 총장실에나 앉아 있는 묘령의 여직원으로 알고 있던 내 상식으로 비서의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로간 교수의 말은 묘한 감동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0년 가까이 한국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제자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인 조교들로부터 강의와 연구에 도움을 받아오던 나로서는 학과 비서의 존재나 성격에 대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바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제목의 책과 드라마로 번역소개된 ‘The Paper Chase’가 한동안 대중의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 킹스필드(Kingsfield) 교수에게 비서 노팅엄(Mrs. Nottingham)이 있었다. 외부인들 특히 학생들에게 타협을 모르던 고집스런 캐릭터였지만, 교수에겐 매우 충직한 비서였다. 이처럼 명비서 노팅엄[배우는 베티 하포드(Betty Harford)]의 존재 같은 간접자료를 통해 나는 겨우 미국 대학 학과들의 비서 상을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역사학과의 비서는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인데,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주로 수잔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이메일을 보내자마자 간결하면서도 자상하게 답신을 보내주던 그녀 덕분에 나는 준비과정에서 많은 수고를 줄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킹스필드 교수의 노팅엄을 잠시 잊은 채, 한결같이 이쁘고붙임성 좋은 한국의 비서들만 상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부친 짐의 배달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끙끙대다가 아무래도 학과 비서를 통해 알아보아야겠다는 계산으로 시차 적응도 안 된 사흘 만에 학과 사무실로 나가 수잔과 다이아나를 만났다. 중년 혹은 중년에 가까운 두 여성이 나를 맞았고, 그 가운데 약간 젊은 수잔이 매우 사무적으로 나를 배정된 연구실로 안내하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 아닌가. 그 때서야 이곳이 미국이고, 미국 대학의 학과들에는 노팅엄만 있을 뿐, 한국의 비서들은 없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미국 우체국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와 연락처를 주며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자 ‘Yes!’하며 나가더니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학과 사무실에 가서 다이아나에게 수잔의 행방을 물은 즉 짐을 찾으러 우체국에 나갔다는 것이다.

 

 아뿔싸, 엄청난 무게의 박스 두 개를 연약한 여성이 어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이곳 스틸워터(Stillwater)의 지리에 어두웠던 나는 다만 내 짐이 어느 우체국에 보관되어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찾아야 하는지만 알고자 했으나, 그녀는 내 말을 듣자마자 해당 우체국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조교에게 우체국 편지 심부름조차 시키길 꺼려하던 나인지라, 그 소식에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40 만 원 이상의 탁송료가 들었던 박스 두 개의 중량이 미안함으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아무리 비서라지만, 첫 대면에 짐꾼 노릇을 명()한 셈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남아 있던 다이아나에게 사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노라고 구구하게 해명했지만, 그녀의 말은 간단했다. ‘It’s our duty!’란다. 결국 수잔을 만나지 못한 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고, 하루 뒤 다시 들른 내 연구실에는 태평양을 건너 온 박스 두 개가 오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수잔, 박스에 대한 언급은 입도 뻥긋 아니 한 채 우리를 맞아 주는 게 아닌가.

 

그 해프닝을 통해 제 할 일에만 충실한미국인들의 업무 철학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연구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교수들의 일을 충실하게 거들고 해결해주는 것이 학과 비서들의 업무이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자신들의 본업임을 그들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혹 생색이라도 내면 어쩌나?’하고 걱정하던 내게, 그녀는 사무실의 꽃이 아닌 충직한 전문가로서의 존재의미를 120% 보여주고 말았다. 미국 도착 이후 내 인식의 한계가 심각하게 도전을 받은 첫 사례였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