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8. 2. 16:54

책 도둑

 

 

 

 

 

 

최근 긴요한 책 한 권을 샀다. 한 달 평균 두어 번씩 여러 권의 책들을 사지만, 이처럼 긴요한 책은 모처럼이다. 고전 자료들을 읽다가 풍수지리학 용어만 나오면 그 난해함에 의욕이 다운되곤 하던 터. 먼 지방의 서점에서 그에 관한 사전을 팔고 있었다. 대금을 지불한지 하루 만에 책이 배달되어 왔다. 만져보고 넘겨보니 좋았다. 알아야 할 것들이 빠짐없어 좋았다. 늙은 아빠, 늦둥이 어루만지듯 그 무거운 걸 집으로 들고 가서도 사랑스러워했다.

 

집에서 다시 학교로 옮겨 놓은 지 이틀. 그만 책이 사라졌다. 누군가 집어간 것이다. 가슴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삼엄한 경비 시스템! 엘리베이터 앞엔 카메라, 문에는 세콤이란 게 걸려 있는데... 누구였을까. 내가 방심한 채 문을 열어놓는 순간들을 되짚어 보았다. 가끔 화장실에 다녀오는 5, 세면실에 가서 설거지하는 5~10분이 전부인데. 그렇다면 그는 그 틈을 노린 것일까. 출입문 바로 앞의 티테이블에 그 책은 놓여 있었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하면 남들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괜찮을까? 그 걱정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열린 문으로 한 발짝만 들여놓으면 책을 안을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굴 원망하랴? 내가 바보였다.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나만큼 누군가도 그 책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 안도하기로 했다. 그저 정가보다 몇 푼 낮춰 팔아버릴 책장사만 아니라면 다행이리라. 불현 듯 책 도둑(The Book Thief)’이란 소설이 생각났다. 영화로도 나왔으니, 책은 꽤 많이 팔렸을 것이다. 마커스 주삭(Markus Zusak)의 작품. 2005년에 첫 출간되었고, 브라이언 퍼시벌(Brian Percival) 감독의 영화는 2013년에 나왔다. 세상에! 도둑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낸 예술이 있을까. 나찌 치하 독일에서 남동생과 함께 입양된 소녀 리젤의 이야기다. 동생은 죽고, 숨어 지내던 유대인 청년 맥스와 교감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고립된 맥스에게 책을 구해다 주고 세상일을 들려주는 리젤. 그러니 그 책 도둑은 더 이상 도둑이 아니다. 책은 영혼이고 도둑은 영혼의 소유자 혹은 매개자일 뿐. ‘훔친 책을 읽는 책 도둑은 아름다운 연금술사다. 도둑질을 통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그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놓지 않는가. 내 책을 가져간 이가 눈꼽 만큼이라도 책 도둑’만 같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책이 짐이어서 아무도 책을 원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책을 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쉽사리 증정 못하는 이유다. 그래서 주기 전에 조심스레묻곤 한다. “책 한 권을 냈는데, 혹시 한 부 증정해도 될까요?”라고. 혹시 고맙지만, 필요 없어요!”란 대답이 나올까 두려워 조심스레묻곤 한다. 매몰찬 거절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표정에서 나는 상대방의 마음들을 읽는다. “, 또 귀찮은 짐이 하나 생겼구나!”라는 '말 없는 말'을. 그래서 그간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지냈는지 모른다. ‘그냥 집어가라 한들 누가 집어갈 것이냐, 이 무거운 짐들을이란 심정으로...

 

두어 해 전 어떤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연구실을 정리하는데, 조 교수님의 책이 하나 나왔어요. 그냥 버릴까 하다가, 돌려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무언가가 뒷머리를 땅 치고 갔다. “그럼 학과 사무실로 보내주세요.” 간신히 대답한 뒤 한 시간 가량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처음의 야속했던 마음은 고마움으로 변했다. 내게 연락도 없이 폐기처분했다면, 쓰레기장에서 중고서적상으로 넘어가 뭇 사람들의 손때나 묻히는 광경이 우연히 내 눈에 뜨였다면...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아픈 추억 하나 더. 지난봄의 일이다. 완주군청에서 특강을 하게 되었다. 완주군과 합작으로 삼례에 책 마을을 꾸미고 있던 호산방 박대헌 사장의 부탁이었다. 책들의 계곡에서 그와 환담을 나누는데, 작업 중이던 직원 한 사람이 눈에 익은 책 한 권을 골라 내 눈 앞에 디밀었다. “교수님이 사인하신 책이네요!” 내 첫 수필집(<<꽁보리밥 만세>>)이었다. 그는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숭실에서의 병아리 교수 시절. 눈에 뜨이는 몇몇 학생들이 있었다. 증정 대상은 그 가운데 한 녀석이었다. “책이란 원래 그런 거예요!” 내 표정을 살피던 박 사장의 위로 멘트였다. “그렇겠지요!”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가슴은 내내 아려왔다. 어쭙잖은 책들의 저자가 받을만한 마음의 상처였다.

 

***

 

방금, 내 연락을 받은 서점에서 다시 보낸 그 사전을 받았다. “누군가 집어갔어요!”라고, 어제 그 서점 주인에게 전화하자, 그 책 좋은 줄 아는 사람이군요. 재고는 있어요!” 라고 껄껄 웃으며 대꾸하고는 득달같이 보낸 것이다. 다시 받은 책은 누군가 집어간 그 책보다 가벼웠다. 몇 줌의 영혼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텅 빈 가슴의 한 구석이나마 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21. 15:27

<추천의 말>

 

존재의 자각, 그리고 간절한 신앙고백

 

 

조규익 

 

조물주는 인간에게 영혼과 육신을 허락했으나, 영혼에 비해 육신은 덧없고 허망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에 육신을 잃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주체는 영혼이고, 그 영혼의 완성이나 구제는 신의 영역이다. 육신은 욕망의 근원이므로 육신에 집착하는 자에게 육신은 굴레(bondage)’일 뿐이라는 것이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과연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탈각하고 정결한 영혼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신의 손길을 갈망한다. 신의 손길만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인간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닥쳐 올 심판의 시간을 외면한 채 육신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지금 이 순간, 시인 백승철의 신앙고백이 눈물겹도록 귀하다. 그는 몸을 불사르며 영혼의 완성을 간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도자의 그것이고, 그의 시는 편편이 신앙고백이다. 종교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핵심을 그의 시에서 발견한다. 전능하신 조물주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빌라도의 박해 속에서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조만간 도래할 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 등등. 그래서 그는 필사적이면서도 의연하다. ‘박해의 쓴 잔을 물리치지 않고 부활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인가. 그 역시 육신을 짓부순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영혼의 완성에 매진한다. 육신보다 영혼의 불멸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육신의 굴레를 간단히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내뱉는 그의 말들 모두가 절절한 신앙고백인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도신경>, 아니 성서 자체의 패러프레이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우러르며, 스스로의 삶 갈피갈피 묻어나는 고통과 회한을 순화시켜 가는 구도자의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백 시인의 시편들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는 얼마나 처절한가.

 

 

그래

아무리 밉다 곱다 해도

된서리에 쪼그라들어

비굴해진다 해도

뿌리 하나만큼은

꿋꿋이 뻗치고 있으니

또 어찌어찌

견디게 되겠지

오롯이 살아지겠지

혹독한 겨울을 딛고

한 치라도 더 파고들어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되겠지

 

-<겨울나기> 전문-

 

 

우리는 흔히 겨울나기월동(越冬)’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두 말의 내포가 사뭇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심상하게 일컫는 월동이란 겨울을 뛰어넘은 그곳에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봄을 상정하거나 기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시인의 겨울나기는 절망의 심연 그 자체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 견디게 되겠지라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매서운 추위에 줄기와 가지는 얼어 죽어도, 뿌리는 남아 있기에 나무는 새로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국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 희망은 믿음이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 본 사람 만이 희망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백 시인은 지금 빠져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지난 시간대의 모진 겨울을 회감(回感)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 시인의 그 희망이 도타운 신앙의 심지가 되어 커다란 횃불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이 시는 내포하고 있다.

 

 

학창 시절의 백 시인은 과묵했다. 말을 걸어도, 빙긋 웃을 뿐 끝내 말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은 시가 되어 나왔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실 풀려나오듯 그의 시들은 늘 빛나고 단정했다. 교단생활을 거치며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시의 폭은 넓어졌고, 신을 발견하면서 신앙고백으로 상승했다. 자아성찰을 바탕으로 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안(詩眼)이 견고하다. 흡사 <사도신경>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려는 듯 그의 필치는 거침이 없다.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신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고민과 고통 속에 허우적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막힌 가슴을 뚫어볼 일이다. <2015. 12. 30.>

 

 


백승철 시집 표지

 

 


약력

 

 


아름다운 삶이고 싶다

 

 


식장에서 백 시인

 

 


발표와 낭송을 하고 있는 백 시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2. 29. 13:52


추천의 말

존재의 자각, 그리고 간절한 신앙고백


                                                 조규익(숭실대 교수/한국문예연구소장)


조물주는 인간에게 영혼과 육신을 허락했으나, 영혼에 비해 육신은 덧없이 짧다. 대부분의 인간은 영적으로 성숙되기 이전에 육신을 잃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주체는 영혼이고, 그 영혼의 완성이나 구제는 신의 영역이다. 육신은 욕망의 근원이므로 육신에 집착하는 자에게 ‘육신은 굴레(bondage)’일 뿐이라는 것이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다. 과연 인간은 육신의 욕망을 탈각하고 정결한 영혼의 세계에서 노닐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신의 손길을 갈망한다. 신의 손길만이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인간을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머지않아 닥쳐 올 심판의 시간을 외면한 채 육신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방황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
지금 이 순간, 시인 백승철의 신앙고백이 눈물겹도록 귀하다. 그는 몸을 불사르며 영혼의 완성을 간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도자의 그것이고, 그의 시는 편편이 신앙고백이다. 종교 역사 상 가장 뛰어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핵심을 그의 시에서 발견한다. 전능하신 조물주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빌라도의 박해 속에서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조만간 도래할 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 등등. 그래서 그는 필사적이면서도 의연하다. ‘박해의 쓴 잔’을 물리치지 않고 부활의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기 때문인가. 그 역시 육신을 짓부순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영혼의 완성에 매진한다. 육신보다 영혼의 불멸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영혼의 구원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육신의 굴레를 간단히 뛰어 넘을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내 뱉는 그의 말들 모두가 절절한 신앙고백인 것도 그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도신경>의, 아니 성서 자체의 패러프레이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우러르며, 스스로의 삶 갈피갈피 묻어나는 고통과 회한을 순화시켜 가는 구도자의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백 시인의 시편들이다. 다음과 같은 그의 시는 얼마나 처절한가.  

그래
아무리 밉다 곱다 해도
된서리에 쪼그라들어
비굴해진다 해도
뿌리 하나만큼은
꿋꿋이 뻗치고 있으니
또 어찌어찌
견디게 되겠지
오롯이 살아지겠지
혹독한 겨울을 딛고
한 치라도 더 파고들어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되겠지
       -<겨울나기> 전문-

우리는 흔히 ‘겨울나기’를 ‘월동(越冬)’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두 말의 내포가 사뭇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심상하게 일컫는 ‘월동’이란 겨울을 뛰어넘은 그곳에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봄’을 상정하거나 기대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시인의 ‘겨울나기’는 절망의 심연 그 자체다.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도 ‘어떻게 견디게 되겠지’라는 실오리만한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매서운 추위에 줄기와 가지는 얼어 죽어도, 뿌리는 남아 있기에 나무는 새로운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결국 ‘이 세상 한 줌 흙’이라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 희망은 믿음이다. 절망의 심연에 빠져 본 사람 만이 희망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백 시인은 지금 빠져 나오지 못할 줄 알았던 지난 시간대의 ‘모진 겨울’을 회감(回感)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 시인의 그 희망이 도타운 신앙의 심지가 되어 커다란 횃불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이 시는 내포하고 있다.
     ***
학창 시절의 백 시인은 과묵했다. 말을 걸어도, 빙긋 웃을 뿐 끝내 말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말은 시가 되어 나왔다. 누에고치에서 비단실 풀려나오듯 그의 시들은 늘 빛나고 단정했다. 교단생활을 거치며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시의 폭은 넓어졌고, 신을 발견하면서 신앙고백으로 상승했다. 자아성찰을 바탕으로 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안(詩眼)이 견고하다. 흡사 <사도신경>을 자신의 말로 풀어내려는 듯 그의 필치는 거침이 없다. 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그에게 기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만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고민과 고통 속에 허우적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백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막힌 가슴을 뚫어볼 일이다. <2011. 12. 17.>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4. 10. 18:11
하나. 인간과 삶, 그리고 죽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만큼 무섭고 신비한 현상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스한 햇볕 아래 오순도순 즐기다가 한 순간 숨이 끊어져 깜깜하고 차가운 땅 속에 묻히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죽음의 불가항력에 당황한다.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다 결국 추하게 탈진한 상태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무자비함에 몸을 떤다. 인간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살아있는 동안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종교를 성립시키는 것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의 공포는 얼마간 해소될 수 있다. 그 신의 위력을 빌어 이야기되는 종교적 담론의 핵심은 죽음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은 죽는 순간의 통증보다 죽음 이후의 시공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살과 뼈가 원소로 해체되어 스며들거나 흩어지면 그 뿐인가. 아니면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이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판이해진다.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 단계로 ‘사후 생명에 대한 희망’을 들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하여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네. 나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 것인가, 신밖에는 아무도 모른다네.’ 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 자신도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이 정신위생상 좋다는, 정신분석학자 융의 생각은 종교적 담론의 틀 안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현대인의 본능적 욕구를 적절히 지적한 경우다. 키엘케골은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고 그에 대한 희망을 갖는 일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니,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의 관념체계는 빛나는 인간 지혜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적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며, 조만간 직면해야 할 죽음으로부터 생겨하는 우울함이나 비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오랜 세월 인간이 만들어온 문화적 집적(集積)의 대표 항은 ‘삶과 죽음’이다. 시간의 물결에 떼밀려가는 생명체들. 그래서 생명체에게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외연으로는 상반되는 개념들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동의어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수한 담론들을 만들어 왔다. 죽음의 미덕을 찬양하는 경지가 바로 그런 담론들의 극단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효과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른바 자기방어(自己防禦)의 기제(機制)라 할 수 있다. 거추장스런 육신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상태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현세적 삶이 괴로운 민초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이승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이의 본능적 욕구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죽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본능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 욕구의 한 편에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표현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죽음은 문학이나 예술적 표현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제재들 중의 하나였다. <제망매가>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 가운데 꽤나 이른 시기의 노래다. 작자가 비교적 소상히 설명되어 있고, 표현기법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 사상적 배경 또한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노래를 둘러싼 정황이 신비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흥미를 끈다. 말하자면 가장 흔한 주제를 노래함으로써 보고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되, 그 정황이나 배경은 가장 신비스러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게 하는 점에 이 노래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누이동생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소재를 노래했으면서도 죽음 자체가 자아내는 미학이나 분위기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 특이하다.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지는 서정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불심(佛心)으로 윤색되거나 가공되었으며, 어떻게 지속되어 왔을까.

둘. <제망매가>에 내재된 두 얼굴의 사생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