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4. 13. 14:37

 

 

 


<딸린항에 도착한 핀란디아호> 


<딸린에서 만난 Stockmann백화점의 홍보단> 


<딸린에서 1박을 한 슈넬리 호텔>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기차 역> 


<St. Alexander Nevsky Cathedral>


<구시가지 들어가는 문> 


<성벽 밖에서 본 구시가의 건물들> 


<Cathdral of Saint Mary The Virgin> 


<딸린 항에서 바라본 St. Olaf's Church 원경> 


<성벽 위의 까페> 


<구 시가지 마켓 광장> 


<구시가의 한 건물> 


<해양박물관 소장품> 


<해양박물관 옥상의 등대> 


<St. Olaf's Church의 원경> 


<중세식 식당 Olde Hansa의 간판>


<Olde Hansa에서, 중세식으로 요리되었다는 돼지고기와 토끼고기>

 

 

발트해의 보석 에스또니아 딸린(1)

 

 

내 마음에 각인된 유럽의 추억 때문이었을까. 한동안 벽에 붙여놓은 유럽 전도를 보면서 화려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곳곳에 펼쳐진 옛 문화와 역사의 흔적들이 내 추억에 불을 붙이고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이었다. 고스란히 남아있는 옛 역사의 자취들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몇 걸음만 옮겨도 기원전 로마시절의 문화유적들이 즐비하고, 지금도 중세 때의 돌집에서 살아가는 그들. 단 하루만이라도 그런 역사의 잔존물로 이루어진 보금자리에 내 천박한 의식이나마 편안히 누이고 발효시킬 수만 있다면, 황무지 같은 지식사회의 일원으로 내던져져 진보에 대한 아무런 희망조차 없는 지금의 처지에서 무슨 호사를 더 바란단 말인가.

 

그런 꿈을 꾸어오는 동안에도 에스또니아는 내 안중에 아예 없었다. 북유럽과 일의대수(一衣帶水) 발트해로 연결된 에스또니아의 딸린에 다녀오라는 헬싱키 지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에스또니아나 딸린이 지닌 의미에 대하여 그리 진지하게 알아보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내 지적 천박성 때문이리라. 아침 일찍 헬싱키 항에 나가 수만 톤은 족히 될 정도의 거대한 여객선 ‘핀란디아(Finlandia)’에 오른 것도 그간의 내 편견에 대한 발 빠른 반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배 이름이 그랬던 만큼 배 앞머리에 새겨진 오선보 역시 시벨리우스의 악보에서 따온 소절일 것이다. 시벨리우스를 생각하며 쇄빙선이 그어놓은 뱃길을 따라 불과 80km 떨어진 딸린으로 건너가며 2시간 반이 넘는 동안 안개 자욱한 발트해를 느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

 

선상 공연 무대의 음악 소리와 관중들의 환호에 취한 채 두시간 반을 달리고 나서야 딸린 항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여객들 틈에 끼여 느릿느릿 밖으로 나오자 유럽의 여느 항구들과 마찬가지로 산덩이만한 크루즈선들이 정박하여 만남과 이별의 정취를 조금은 가볍게 날려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날카롭게 하늘을 찌를 듯 교회의 녹청색 첨탑이 솟아 있고, 그 밑으로 고색창연한 건물 지붕들이 나지막하게 열 지어 있는 모습이 눈 가득 들어왔다. 마음속에 갑자기 생겨난 묘한 기대와 함께 내 편견의 한쪽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첨탑이 바로 딸린의 전망대이자 랜드마크인 ‘성 올라프 교회[St. Olaf's Church]’였다. 그 첨탑을 통해 비로소 이곳에도 ‘알트슈타트(Altstadt)’[Old City 즉 ‘구시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8년 전 5개월 동안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매혹되어 있던 그 ‘알트슈타트'가 이곳에도 있어 이 나라의 역사성과 문화적 수준을 증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점심을 해결한 다음 즉시 알트슈타트의 탐사에 나섰다. 깨끗하게 보존된 중세 도시가 눈앞에서 약여(躍如)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성 밖의 신시가지와 행복한 조화를 이루며 펼쳐져 있는 것이 바로 딸린의 알트슈타트였다. 알트슈타트 안에서 방위마다 거의 정확하게 솟아 있는 거대한 교회들, 칼날 하나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 거미줄처럼 4통8달된 골목길들, 숨듯이 곳곳에 틀어박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공공기관, 각 급 학교, 박물관, 약국, 서점, 문방구, 커피 점, 제과점, 갤러리, 꽃 가게, 레스토랑, 선물가게, 패션가게, 이발소 및 미용실 등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삶의 충실한 현장이었다. 그 뿐인가. 사람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며 친교를 나누었음직한 작고 큰 광장들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교회의 경우 이르게는 12~3세기에 지어진 것들도, 늦게는 18~9세기에 건축된 것들도 있는데, 그 규모와 아름다움이 나그네의 정신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루터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 대충 헤아려도 50여에 달하는 이 거대한 교회들을 대체 누가 다 세웠으며, 그 공간을 누가 있어 다 채웠단 말인가.

 

***

 

4만 5천여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으로, 작지만 국토의 절반 이상이 숲으로 덮여 있고, 3500여㎢에 달하는 큰 호수[페이푸스(Peius)]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에스또니아. 라트비아 및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독립을 지키고 정체성을 지키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소련과 나치 독일 등 주변의 강국들에게 심한 박해를 받아온 나라다. 1920년 소련과의 평화협정서는 휴지조각이 되었고, 결국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에 의해 소련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을 완전히 상실한 채 소련의 한 부분으로 예속된 비운의 나라였다. 그 뿐인가. 스탈린에 의해 극동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듯이 에스또니아 사람들 역시 강제이주의 쓰라림을 맛보게 된 것. 1920년 이후 강제이주 시기까지 50여만 명의 인구가 학살을 당했으니, 그 사실이 현재 인구가 150만 명에 불과하다는 점의 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의 페레이스트로이카와 자신들의 노력에 힘입어 1991년 8월 결국 독립을 쟁취했고 UN에 가입했으며, 2004년에는 EU에 가입함으로써 이 지역 강소국의 하나가 되었으니, 시련과 고통만이 한 국가와 민족을 강하게 만든다는 역사의 원리를 보여준 사례라고나 할까. 그 적은 인구 150만도 에스또니아인․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 등으로 나뉘며, 수도 딸린의 인구 또한 44~5만 정도라 하는데, 나라 전체로 따져도 기껏 우리나라 대전광역시의 인구와 맞먹는 정도가 아닌가. 그 옛날엔 이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 많았을 리는 결코 없었을 것이니, 무슨 수로 이런 대규모의 교회들을 채웠던 말인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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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2. 5. 15:27
 

스페인 기행 4-1 : 종교 간의 불화가 빚어 만든 메스키타(Mezquita)의 조화와 부조화-꼬르도바(Cordoba)행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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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르도바 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오렌지 나무들>

25일 오후. 알함브라궁의 아름다움을 찬탄해 마지않은 우리는 역사 진행의 우여곡절이 빚어낸 빛과 그림자를 가슴에 담고 그라나다를 떠났다. 대략 두 시간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 유서 깊은 문화와 역사 도시 꼬르도바. 그라나다는 지중해와 인접한 도시였으나, 꼬르도바는 대서양으로부터도 지중해로부터도 비슷하게 떨어져 있었다. 알트슈타트(Alt Stadt)의 성문 앞에는 네로 황제의 은사이자 스토아 학파에 속한 철학자 세네카(L. A. Seneca)의 동상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곳 출신이었다. 꼬르도바가 범상치 않은 정신적 도시임을 보여주는 증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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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네카의 동상>

 도시를 관통하여 과달키비르(Guadalquivir)강이 흐르는 이곳은 안달루시아의 관문이었다. 도시 전체가 무어족, 유대족, 기독교파 등 세 문화권으로 나뉘어 공존하거나 각축을 벌이다가 1236년 페르디난드 3세의 기독교군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이슬람 왕조는 붕괴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교문화에 기독교 문화가 덧씌워지는 양상으로 이 도시의 문화적 색채는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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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2. 00:49
 

내 등짝에 죽비를 내려친 유럽

-그곳에 가서야 나는 내 키가 작음을 알았네-


                                                                                                                         조규익

5개월간 유럽을 돌면서 ‘내 키가 작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음도 비로소 알았다. 늘 ‘나’와 ‘우리’, 그 존재의 절대성에 매몰되어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던 우리였다. 유럽인들은 우리를 잘 몰랐고,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간 우리는 ‘나’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갇혀 있었다. 그러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란 없었다. 지금도 우리네 학교들은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외국사람 몇이 김치 맛을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우리의 언론들은 ‘한국의 먹거리가 세계 식탁의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했다’는 식으로 과장보도하기 일쑤다. 자긍심 아닌 헛된 자만에 빠져버린 영혼을 구제할 길은 없다.

 <터키 에페소의 원형극장>
대학 강단에서의 20년 세월. 그동안 젊은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 왔는가. 그들이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만한 언턱거리 하나라도 제공했단 말인가. 5척이 갓 넘는 단구(短軀)로 내 키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 인식의 무사려(無思慮)한 원시성. ‘5천년 역사를 그 누가 넘볼 수 있겠는가’라는 오만한 무지 속에 안주해온 그간의 세월은 일종 ‘어릿광대의 한 세월’ 쯤이나 아니었을까.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기원전 수백 년의 유물·유적들을 만져보며, 그것들의 온기를 느껴보며, 상상과 신화의 탈을 벗지 못한 우리 역사의 실체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쌓여 내린 정신사의 적층(積層)을 목격하며, 맹목으로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새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있어 ‘줏대 없는 언설(言說)’이라 꾸짖어도 좋다. 그러나 허구한 날 협소한 자아에 갇혀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만은 벗어나 보자. 이것이 귀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유럽을 다녀온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강단에 서서 이미 한 세월을 보냈고, 앞으로도 한 세월을 더 보내야 하는 내 입장이다. 그래서 ‘인식 상의 전환적 계기’가 절실했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선이라도 타고 달나라를 가든 화성을 가든 우리의 지구를 ‘객관적 위치’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그간 자라면서 배워온 서구세계.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적 세계인식의 근원이자 주범이라 할 유럽. 내 인식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의 정신적 질량을 현지에서 느껴보리라는 야심이 우리의 내면엔 그득 차 있었다.

우리가 주로 찾아다닌 곳은 크고 작은 도시들의 알트슈타트altstadt. 옛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공간들이었다. 그곳엔 그들이 가꾸어온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룩하고자 하는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은 알트슈타트의 껍질을 잘 유지하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 지혜와 통찰이었다.

 <프랑스 루아르강 가의 쉬농소 성>
빽빽한 돌집들 사이엔 햇볕 한 줄기 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남아있는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도처에 널려있는 큰 규모의 박물관과 유적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의 근거였다. 크고 작은 각종 공동체의 중심에는 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틀릭이든 개신교이든 굳이 가릴 필요 없었다. 그런 성소(聖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모든 예술이나 사상, 심지어 형이하학적 물질문명까지 종교나 신앙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토록 거대한 유럽문명, 아니 세계 문명권들이 근원적으로 신앙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착각할 정도였다.

            <로마의 콜로세움>
유럽의 제대로 된 나라들은 ‘관광 진흥’을 자신들의 국가적 어젠더agenda로 채택,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말로만 떠드는 관광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책들은 예외 없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철학적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역사와 문화의 산업 자원화’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대전제로 한다. 또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류는 크게 보아 ‘하나의 역사’만을 공유해 왔을 뿐, 서로 다른 독자적 문화를 내세우며 아집과 독선으로 치달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거대한 유럽 문화의 현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아집과 편견은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세계질서의 파행이나 질곡 역시 그런 독선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이 거대하게 전개되고, 그것이 지금 지배적인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타 문명이나 타 지역의 정신적 소산을 충실히 수용한 덕분이었다. 독선과 아집, 배타와 갈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대문명의 폐허들. 주로 로마문명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폐허는 말 그대로 멸망의 흔적이 아니었다. 탈피에 성공한 매미는 애벌레의 껍질을 남기지만, 그 껍질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탄생의 증거물이다. 계속되는 허물벗기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보인 유럽문명. 바로 그 근저에 로마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청산’ 혹은 ‘역사 바로 세우기’의 미명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적 증거물들을 때려 부수지 않았다. 그 덕에 역사의 자취들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일제의 문화유산이 부끄러운가. 일제에 부역한 조상들의 행적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그 자취나 흔적을 때려 부수기보다는 잘 보존하라. 그것도 소중한 역사다. 그 흔적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파행의 반복을 피해가는 것. 그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본질이어야 한다. 서울 한 복판에 선 일제의 건물유적이 부끄럽다고 쇠톱으로 싹둑 잘라 버리는 문화적 야만성. 과거의 독재자가 밉다고 그가 쓴 현판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수백 년 전의 임금 글씨로 바꾸려는, 그런 행위보다 더 한 ‘역사 파괴’는 없다.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 시가지 전경


우리가 유럽 역사의 현장에서 읽어낸 이면적 코드는 ‘지배와 굴종’이었다. 그리고 그런 코드가 구체화된 물증들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물론 어느 시기 지금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 식 만행’이 저질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역사의 증거물들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었다. 물건만 없앤다고 역사가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니다. 총독부 건물보다 더 좋은 관광자원과 교육 자료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글씨의 현판보다 더 생생한 역사적 증거물들이 어디에 있는가. 반복되는 것이 역사라지만, 역사의 파행을 막는 방법으로 잘못된 역사의 증거물을 보여주는 일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남들에 의해 인정받는 만큼이 진정한 내 모습일 수 있다. 이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나는 내 키가 이렇게 작은 줄을 몰랐다.’ 이것은 깨닫기 이전에 갖고 있던 내 인식의 본질적 한계였다. 그래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일이야말로 유럽과 유럽문명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던져 줄 삶의 지표 또한 이 점으로부터 모색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선생님보다 훨씬 위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던져 준 셈이다.

Posted by kicho